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17:00:39

림춘추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여담5. 참고문헌

1. 개요

林春秋
독립운동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동료 출신으로 여러 관직에 임명됐으며, 신임을 받아 부주석까지 승진하였다.

2. 생애

1912년 3월 8일, 중국 길림성 연길현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5.30 운동 등 반일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석방 이후 지하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항일 유격대에 참여했다.

자기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해방 이후, 1945년 12월, 박헌영 추종자들 및 조만식을 찍어내기 위한 김일성의 술수 중 하나로 북조선공산당 평안남도 위원회 제2비서에 임명되었으며 1949년 6월, 조선로동당 강원도당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의 공격에 인민들을 버리고 비겁하게 달아났다고 김일성으로부터 혹독한 책임추궁을 받고 1950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차례 숙청당하며 조선로동당에서 제명까지 당하게 된다. 그러나, 빨치산 중에서는 그나마 고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글재주가 좋아서 김일성을 칭송하는 많은 저작을 발표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김일성을 숭상하기 위해 쓴 글들이라서 그의 빨치산 회상기들은 정작 중국에 남았던 조선족들의 회상기와는 차이가 많이 난다.[1] 어쨌거나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다시 정권 상층부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이후 복권되어 1954년, 당중앙위원회 연락부 부부장을 지냈고 1957년 5월 9일, 박세창의 뒤를 이어 알바니아 대사에 임명되었다. 1958년 12월 2일, 김학인의 뒤를 이어 불가리아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김학인은 폴란드 대사로 이임하였다. 림춘추의 후임으로는 김려중이 알바니아 대사로 부임하였다. 1958년 12월 30일, 신임장을 봉정하고 임기를 시작하였다. 1959년 5월, 최용건의 불가리아 방문을 수행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검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7월 28일, 불가리아에 유학하던 북한 유학생들을 소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에 반발한 4명의 유학생이 불가리아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림춘추는 이들이 불가리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씹어버리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유학생들을 대사관 직원들을 동원해 백주대낮에 구타해서 대사관으로 납치하는 외교적 만행을 저질렀고 이중 2명은 필사적으로 대사관에서 탈출, 나머지 2명도 소피아 공항에서 북한 여권을 찢어버리고 불가리아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시 탈출했다. 이 때문에 빡친 불가리아 공산당 정치국은 9월 5일, 림춘추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언하고 내쫓아버렸다. 참고로 북한도 맞불로 불가리아 대사를 추방해버렸다.(...) 귀국 후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종파사대주의자'들이 외교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림춘추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김일성이 림춘추는 현대수정주의자들과 잘 싸워 본때를 보여준 것이라고 옹호하여 오히려 승진한 것이라고 한다.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대남총국 부총국장 재임 시절, 총국장 리효순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소설쓰기에나 전념했다는 이유로 극심한 비판을 받고 당력사연구소장으로 좌천, 1967년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탈락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는 정치위원회에서 탈락하여 중앙위원회 위원에 그쳤으나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74년 2월, 조선로동당 5기 7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2] 1975년 9월에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4년 9월, 김경인 장의위원,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6년 2월, 비서국 비서에서 소환되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재선되었으며 대의원 자격심사위원장에도 선출되었다.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3월 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공화국영웅 칭호, 국기훈장 1급, 금별메달을 받았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대의원 자격심사위원장에 재선되었으며 1983년 4월, 최고인민회의 7기 2차 회의에서 서기장 자리를 리용익에게 내주고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부주석, 중앙인민위원, 대의원 자격심사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8년 4월 27일 17시 40분에 오랜 병환 끝에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림춘추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충실한 혁명전사이며 우리 당과 인민의 우수한 아들이다. 림춘추동지는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혁명투쟁에 한생을 바쳐 싸워온 공산주의혁명투사이며 미일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전쟁과 당과 국가 건설, 새 사회 건설에서 커다란 공적을 쌓은 우리 당과 국가의 충직한 활동가이다. (...) 림춘추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혁명적 수령관과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워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주체의 혁명위업을 완성해나가기 위하여 견결히 투쟁하였다. 림춘추동지는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엇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 복무로 하여, 불굴의 투쟁정신과 고결하고 소박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림춘추동지의 전생애는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한 견결한 공산주의자의 한생이였으며 그의 혁명정신과 혁명가적 풍모는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모범으로 되여왔다. 지금 전체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당과 인민의 충직한 아들을 잃은 커다란 슬픔에 잠겨있다. 림춘추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가슴아픈 손실로 된다."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퍼부었다.

당연히 국장이 거행된 후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고 반신상이 제작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 조선인민군 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남파공작원이 된 김진계는 국군의 반격으로 강원도당에 합류하기 위해 원산까지 퇴각했다가 이미 텅비어버린 원산을 보고 배신감에 치를 떨으며 림춘추를 저주했다고 한다. 이후 1950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림춘추가 처벌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백번지당하다고 좋아했다고.
  • 개성시 책임비서를 지낸 림수만이 그의 아들로 알려져있으나 북한 선전에 따르면 림수만이 항일 빨치산의 아들인건 맞으나 그의 아버지는 진작에 죽었으며 림춘추의 유일한 아들은 림영일로 카자흐스탄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외에 딸이 한명 있는데 이 딸은 김정은 시대에 외무성 미국담당 부상을 지낸 한성렬과 결혼했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김일성, 김정일의 이탈리아어 통역인 국제부 유럽담당 과장 리응길의 아들과 결혼했다. 하지만 리응길이 장성택과 친한 관계로 장성택 숙청 이후 전 일가가 수용소로 끌려갔고 림춘추의 외손녀만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 림춘추 또한 1960년에 항일무장투쟁을 회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라는 책을 썼다. 회고록에서 림춘추는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 침략 군대를 격멸하기 위하여 선전 포고를 했고, 소련 군대는 자바이칼 전선, 제1원동전선, 제2원동전선의 3개 전선에서 진공을 개시하였고 소련 태평양 함대의 군함들과 부대들이 동원되었으며, 소련군대가 각 전선에서 일본 침략군대를 분쇄하면서 영웅적으로 진격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북한의 항일무장투쟁 서술이 이른바 조선인민혁명군을 강조하는 서술인 데에 반해, 그의 책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를 짧게 언급하면서 소련군의 역할을 보다 더 강조했다. 이 점에서 이후에 나온 북한 서적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5.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김진계, 조국: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하권(서울: 현장문학사, 1990).
  • 김진계 구술, 김응교 편, 조국: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권(서울: 현장문학사. 1990)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서울: 청계연구소, 1989)

[1] 예를 들어 그의 회상기를 보면 보천보 전투 이후 치른 간삼봉 전투에 대해 1,500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는 내용과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연변 측 학계나 조선족들의 회상기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2]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림춘추의 략력과 조선대백과사전의 기술. 근데 1970년대 림춘추의 주석단 서열을 보면 정치위원회 위원치고는 너무 낮다. 북한에서 약력을 발표할 때 대충 뭉뚱그려서 발표하는 일이 많은데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다시 선출되었다가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한 것을 그냥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고 발표한 것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