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8:20:05

김진계


1. 개요2. 생애3. 수기 '조국'

1. 개요

김진계(1918~1991) 1970년 남파 되었다가 붙잡힌 남파공작원이다.

2. 생애

김진계는 1918년 5월 강원도 명주군 사펀면 판교리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대 시절이던 1933년 김진계는 김유경이라는 인물과 친했는데, 김유경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였고, 그와는 9촌 아저씨뻘 되었다고 한다. 어린시절 김진계는 1918년 5월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판교리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대 시절이던 1933년 김진계는 김유경이라는 인물과 친했는데, 김유경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였고 그와는 9촌 아저씨뻘 됐다고 한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난 이후 김진계는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로 2년 동안 징용을 가게 됐고, 남중국해의 어느 섬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군 생활을 지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1]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을 만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혐오감에 빠지기도 했고, 미군 B-29의 폭격을 경험하기도 했다. 1944년 귀가 명령을 받고 부산항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으며 1945년 강릉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한반도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소련군을 처음 본 김진계는 소련군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소련군의 만행적인 모습과는 달리 소련군이 신사적이었다고 기록했다.[2]

해방 이후 김진계는 한반도 이남에서 생계를 위해 잠시나마 경찰 생활을 했다. 기본적으로 김진계는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서 활동했으나, 당의 명령을 받고 경찰생활을 했었다. 물론 당시 경찰은 미군정 휘하에서 창설된 친일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3], 대구 10.1 항쟁이 일어나는 1946년 10월부터는 고향 강원도에서 농사일을 지으며 살았다. 물론 남로당이 주도하는 파업이나 집회에도 간혹 참석하기는 했지만, 가정과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남로당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모된 고문을 받은 뒤, 석방되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경찰들을 피해 숨어살다가 벌목생활로 생계를 이어나가던 중 1950년 6.25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6.25 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진계는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온 것을 확인했으며, 인민군 치하에서 그 지역 보안사업을 맡는 간부가 됐다. 즉 인민위원회에서 일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초기 미군 폭격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지역 간부로써 제법 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후퇴하게 됨에 따라, 그 또한 북쪽을 향해 일정한 목적지 없이 북진했다. 그러던 중 10월 24일 후퇴하는 인민군과 합류했고, 인민군에 입대했다. 아래의 인용문은 인민군에 입대와 전쟁 중 치른 첫 전투에 대한 김진계의 주장이다.
첫 전투에 참여한 나로서는 이겼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울해졌다. 결국 죽는 사람은 같은 동족일 뿐이었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민족의 비극이었다. 첫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우리는 두산리 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인가에 배치되어 3일간을 비교적 한가하게 지내면서 장비를 점검했다.
김진계 구술, 김응교 정리,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 현장문학사, 1990, 152쪽.

1950년 10월 24일 인민군에 입대한 이후 김진계는 인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을 보게 되었고, 이들을 돕고 훈련시키기 위해 중국 만주 지역에 배치되어 트럭 운전연습을 지도했다. 1951년 1.4 후퇴 이후 김진계 또한 인민군으로써 중국 국경선을 넘어 전진을 시작했고, 자동차교도중대에서 포병연대로 배치 받았다. 1951년 1월 10일 첫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했다.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전방에 배치되어 전투를 치렀으며, 한국군과 유엔군의 1952년 말 공세까지 경험했다.[4] 1953년 봄 공식적으로 인민군에서 전역했으며, 그해 5월 27일 안주군에 도착하여 북한에서의 본격적인 생활을 하게 됐다.

전쟁 이후 북한에서는 이른바 전후복구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김진계 또한 북조선의 시민으로써, 이 전후복구 작업에 참가하게 됐다. 1950년대 북한에서 민주전선실상을 지내기도 했으며, 북한에서 진행한 통일전선사업에도 참여했다. 해방 후 남로당에 있었던 전력이 있기에 북한 사회에서 전개됐던 박헌영과 이승엽 숙청 당시에는 김진계 또한 자아비판 했던 것으로 보이며[5], 1956년 8월경부터 천리마 운동이 시작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진계는 이 시기를 회고하며, 천리마 운동은 전쟁으로 파괴된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생긴 북한 나름의 독특한 창조물이고, 인민경제복구건설 3개년 계획이 끝나가는 시점의 북한 실정과 연관된 대중운동이었다고 평가를 남겼다. 1958년부터는 북한에서 남파활동을 하는 간첩으로 선발되어, 12년간 북한과 남한을 왔다 갔다 하며, 여러 공작활동을 전개했다. 이승만과 이기붕의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소식을 남한에서 듣기도 했으며, 1961년 5.16 쿠데타로 탄생한 박정희 시대 때도 이러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남한에 처음으로 침투했던 것은 1959년 이승만 정부 말기였으며, 12년간 남과 북을 왔다갔다하며 삶을 살았다.

물론 김진계가 12년간 남파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전쟁 이후 북한에서 가정도 꾸렸고, 북한 여자와 결혼하여 5남매를 꾸린 가장이기도 했으며, 1961년 청산리 운동 및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등도 북한에서 살면서 경험했다. 1968년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도 북한에서 직접 들었다. 공작원 생활 막바지인 1970년 8월 3일 남한에서의 활동을 제대로 인정을 받게 되어, 북한의 수상 김일성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영예인 혁명가 가족 증명서까지 받았다. 그러나 1970년 경남 거제도에 침투했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됐고 18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김진계는 1970년대 중반에 전향을 했지만,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약없는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대구 및 대전 교도소에서 수감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감옥에서 박정희 사망 소식과 12.12 쿠데타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했으며,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제6공화국이 탄생하게 됨에 따라 88올림픽 이후인 12월에 되어서야 출옥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71세였다. 출옥한 이후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명주군에서 살았다. 자신의 삶을 기록한 수기를 남기는 데 헌신을 다했으며, 1990년에 자신의 수기를 한국에서 출간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출간한지 1년 뒤인 1991년에 별세했다.

3. 수기 '조국'

앞서 언급했듯이, 김진계는 출소 이후 자신의 삶을 기록한 수기를 남겼다. 책은 일제 강점기부터 88올림픽 이후 출소까지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북한에서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를 상세히 남겼는데, 그의 수기는 이전에 나온 전향한 남파 공작원들의 수기와는 상당히 다른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제법 큰 의의가 있다. 예를 들어 북한 사회가 그 당시 제법 역동적으로 흘렀으며, 비록 지상낙원은 아니었어도, 소위 남한에서 얘기하는 주민들의 얼굴이 강제노동에 시달려서, 강압적이고 통제일변의 체제에 지쳐 절망감 속에 불만만 가득찬 사회, 강제수용소는 더더욱 아니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북한 또한 남한과 같이 괴물이 아닌 사람이 사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언급만 봐서는 김진계가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처럼 다소 오해를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은 김진계 스스로도 북한의 우상화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1990년 김진계는 한겨레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김일성 수상이라고 표현하면 될 걸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천재적 전략가이시며 온 인류의 태양이시며 등의 수식어가 이어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생각은 수기 '하'편에서도 김정일화의 방송 내용은 내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우상숭배의 한 예였다. 백두산 밀영에서 나무에 새겨진 김정일 탄생을 알리는 글귀를 찾아냈고 또 그것을 찾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는 보도는 고구려 주몽의 탄생설화처럼 신화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일 수 있으나 과학의 시대에는 걸맞지 않는 시도일 뿐이다. 그것은 지나친 정도를 넘어서서 내게 거부감만 일으켰다.는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다.

물론 수기다 보니 모든 사실을 다 담고 있다고는 할 수는 없으며, 그러한 점에서의 개인의 경험과 소문 및 소식에 의존한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물의 일생을 통해 한국의 20세기 근현대사를 총괄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과 그 시기 한국사회에서 꺼내지 못했던 주제들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전후재건기 그가 북한에서 평률리 농촌에서의 민주선전실장을 보낸 경험이나, 신불출, 이태준 그 외의 북한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회고를 남긴 것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음에도 분명 참고할만한 부분이다. 그리고 한국전쟁기 그가 남긴 미군 폭격에 대한 경험 등도 그 당시 폭격을 받은 사람의 생생한 경험기록이다 보니 제법 가치가 있는 기록이다. 즉, 일부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화 이후 북한 바로 알기 운동 속에서 나온 책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그가 남긴 수기에서는 위안부라는 표현 대신 정신대라고 표현하며, 이들이 유곽에서 일본군의 성욕 해소를 위한 용도로 이용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인 여자들의 울음소리, 야자수 가지에 목을 맨 처녀의 시체, 무덤도 없는 이름 없는 정액받이들 그리고 참을 수 없었다. 비열한 속임수를 써서 조선 처녀들을 농락한 일본놈들에게 한없는 분노가 치밀었다."고 한다.[2] 책에서는 "나는 소련군이 38선 이북에만 주둔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고 소련군이 복장이나 규율은 제멋대로이지만 참으로 신사적이고 겸손하다는 사실은 겪어 보았기에 잘 알게 되었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 뒤에 듣자하니, 남한에서는 소련군이 행패를 부리고 물건을 빼앗는 등 무식하기 짝이 없는 못된 짓을 다했다고 교과서에 써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른 지방에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 경험으로는 전혀 그와 반대였다."고 언급했다.[3] 반면에 김진계는 소련군에 대한 묘사와는 달리 미군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김진계에 따르면, "좌익 진영에 속해 있던 나는 단순하게 미군 또한 소련과 함께 우리 민족을 해방시킨 해방군으로 좋게만 여겼다. 그러나 포고문에서 그들은 한국인을 깔보는 위협적인 용어를 쓰고 있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와 거의 차이가 없는 ‘점령군’으로 군림하려는 자세가 은연 중 거부감을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강릉에 들어온 미군들은 술집에서 권총을 들어 공포를 쏘고, “깟뎀”, “깟뎀” 소리를 질러대며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여자들을 희롱하고 심지어는 강간까지 하는 사고를 자주 저질렀다."고 한다.[4] 이 공세는 맥아더 해임 이후 임명된 매슈 리지웨이의 이름을 딴 리지웨이 공세로 미국 대선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당선되기 전에 실행됐다.[5] 김진계의 자아비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해방 후 박헌영이 우리 공산당의 지도자로서 일제때 감옥살이두 하구 로동계급의 해방을 위해서리 일한다는 소문을 듣구 위대한 인물이구나 하구서리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습네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레 가졌던 거 기피 기피 반성하갔습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