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역사학자.2. 생애
1917년 2월 23일에 평안북도 정주군 읍부면 서주동[1]에서 태어났다. 온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후 유학을 가 신문배달을 하며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1941년 4월, 평안북도 선천군 중학교 교원으로 일하였으며 해방 이후 정주에서 학교건립사업을 하는 등 북한 교육체계 수립에 참여했다.1946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부학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6,25 전쟁 중 남한에 파견되어 북한 정권 선전사업을 했다. 1950년 10월, 문화선전성 선전원간부학교 교원으로 배치, 1952년 4월에 백송리에서 김일성을 만나 김일성종합대학 사업에 대한 교시를 받았다 카더라. 이후 1954년 12월, 당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 과장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11월, 당력사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되어 이후 소장으로 승진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67년, 1972년에 각각 4기와 5기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72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으나 당력사연구소장 재임 중이던 1974년 9월 12일 3시 45분에 숙환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실로 김경인동지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수령님의 가르치심 따라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당중앙위원회 당역사연구소 소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