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0:41:39

방학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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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중앙재판소 소장
방학세
方學世 / 方鶴世
파일:방학세.png
<colbgcolor=#602D09><colcolor=#FFF> 이명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방
출생 1914년 3월 26일
러시아 제국 프리모리예 지방
사망 1992년 7월 18일 (향년 78세)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여담5. 매체에서6.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方學世 / 方鶴世

소련북한의 정치인. 고려인 출신으로 김일성 시대 초반에 김일성의 독재권력 수립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초대 사회안전상, 2, 3대 내무상, 중앙재판소장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1914년 3월 26일, 러시아 제국 연해주에서 출생하였다. 북한은 원래는 그가 소련 태생임을 인정하였으나 2000년대 이후 함경남도 단천시 출신이라고 그의 출신지를 조작하였다.[1] 원래 이름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방으로 1931년 이르츠쿠츠에서 9년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초기 이력에 대해서는 자료들이 엇갈리는데, 그와 같이 북한에서 근무한 장학봉, 강상호 등은 그가 이르츠쿠츠 법대를 졸업했다고 증언했으나 소련의 자료에는 스베르들롭스크 법대를 졸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적이 아주 좋았던 모양인지 1937년에 고려인 강제 이주 이후에도 카자흐스탄 키질오르다에서 검찰청 예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악명높은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방학세는 검찰의 일원으로 대숙청 집행에 가담했다.

1940년 방학세는 전연방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역시 증언이 엇갈리는데 장학봉이 남긴 고려인 프로필에 따르면 1940년 부검사로 진급한 후 1942년 탈드구르간 주 책임검사, 1944년 키질오르다 주 책임검사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소련 자료에 따르면 탈드구르간 주 검사 보좌관이 그의 최종 직책이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방학세가 검찰소 예심원, 상급 예심원, 부장으로 근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래도 소련 기록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고려인들이 자기 친지 직책들을 좀 더 높게 회고하는 경향이 있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방학세는 숙청 집행에 능숙한 경험이 있는 젊고 유능한 인재였다.

일본이 패망한 후 방학세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36그루빠의 일원이 되어 1945년 12월에는 허가이, 박의완, 김열, 김찬, 강상호, 기석복, 김승화 등과 함께 당과 행정업무를 보기 위해 북한에 파견되었다. 소군정 산하에서 방학세는 로마넨코 장군의 소련 민간관리부에 배치되어 사회단체 통제 및 검열을 담당했으며 통역도 맡았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 이후 내무국 정보처장을 맡았음으로 치안 분야에 종사하게 되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방학세는 내무성 정치보위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소련에서의 경험을 살려 김일성의 정적들을 철저히 숙청했으며 그 공으로 사회안전성이 설치되자 초대 사회안전상에 임명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김일성은 연안계의 막강한 군인인 내무상 박일우를 견제하기 위해 1952년 10월 9일, 사회안전성을 내무성에 통합하여 내무성 사회안전국으로 삼고, 방학세는 내무상으로 승진하였다.[2] 내무상의 자리에서 방학세는 1953년 박헌영과 남로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공을 세운다. 그리고 정전 협정 이후 과거 유엔군과 남한에 협력한 부역자 및 남한과 미국의 첩보원들을 대대적으로 사냥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5년 12월, 박헌영 재판이 열리자 부수상 최용건을 재판장으로 하여 최고재판소장 조성모, 국가검열상 김익선, 당 검열위원장 림해 등이 재판부를 구성했는데, 방학세도 내무상 자격으로 재판에 참여했다. 그의 진가는 1956년에 다시 한번 빛을 발휘했다.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토사구팽에 위기감을 느낀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서휘, 리필규 등 소련계와 연안계의 인물들이 1956년 8월 3기 2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들의 공개적인 활동에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던 김일성은 전원회의에서 8월 그룹의 반항을 철저하게 짓뭉갠 다음 소련에 파견나가 있던 방학세를 급히 귀국시켜 이들을 숙청하게 했다. 방학세는 소련에 무려 10만명의 반당종자들이 숙청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방학세는 김일성을 떠받든 1등공신 중 한명이었고 1958년 2월 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국기훈장 제1급을 수훈받기도 했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에 맞서 각을 세우면서 소련 출신인 그의 효용가치는 떨어지게 되었고 1960년 11월 11일, 방학세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빨치산 파벌인 석산에게 내무상 자리를 내주고 퇴임했다.

이후 방학세는 잠시 좌천된 것이 분명한데 1961년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서 탈락한 것이다. 김일의 보좌관을 지냈다는 오기완은 방학세가 반당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3] 강상호는 방학세가 대남부서의 지도원으로 강등당했다고 증언했다. 이신철 교수는 방학세가 최고재판소 부소장으로 이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북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1963년 4월, 정치위원회 결정에 따라 1961년 11월에 해체되었던 대남총국이 다시 설치되고 대외조사부도 새로 설치되면서 방학세가 부장에 배치되었다는 유영구 기자의 서술이 있다. 이를 절충하자면 조사부에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방학세는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도 다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중앙재판소장으로 선거되었다. 이후 방학세는 죽을 때까지 중앙재판소장을 역임하였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1910)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으며 1984년 3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렇게 말년을 편하게 보내다가 1992년 7월 18일 23시에 78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했다. 북한 측은 이를 보도하며 부주석 박성철을 장의위원장으로 하는 장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 그의 형제들인 누이 이리나와 바실리 방은 소련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에 잔류하여 연금생활을 하였다.
  • 빨치산 계열이 아닌 소련파에 속했는데도 8월 종파사건을 무사히 넘기고 이후까지도 승승장구하며 천수를 누렸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김창만, 남일, 허정숙, 박정애, 박문규 등이 있는데 그나마도 이 중에 김창만은 1966년에, 박정애도 1960년대 후반에 숙청당했다 복권되었다.

5. 매체에서

드라마 제1공화국(드라마)에서는 이기영이 방학세로 분했다.

6. 참고문헌

  • 오기완, 북한 첩보기관의 전모 제5화(話) : 소련통 방학세 제거, 통일한국 24(1985.11)
  • 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남의 조직사건과 북의 대남사업(서울: 도서출판글, 1993)
  •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북한 보위성의 아버지, 방학세, 북한 (2018.1)
  • Bala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1]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이것이 방학세 일가의 성분을 높여주기 위한 작업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외국 출신자들은 성분제에서 점수가 짜게 나올수밖에 없으니까. 남일도 연해주 출신이지만 함경북도 출신으로 출신지가 조작되었다.[2] 박일우는 체신상으로 좌천되었다가 이후 숙청된다.[3] 하지만 오기완의 증언은 내무상이었던 방학세를 사회안전상으로 얘기하는 등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