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23:30:18

조성모(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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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북한정치인.

2. 생애

1905년 12월 8일, 함경남도 북청군 덕성면 서장내리의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덕신보통학교, 대성학술강습소를 거쳐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중퇴했다. 귀국 후 1932년 12월 적색북청농민조합 덕성지부재건협의회 나하태(羅荷台)집행부 조직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농민신문을 발간하다가 체포, 1935년 1월에 함흥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6년 1월에 출소한 이후 5월부터 북청농민운동 재건을 위해 나하태 혁명적 운동자 대표위원회에 참가하여 1938년 3월에는 위원장이 되었다. 장고봉 사건, 중일전쟁에 관련된 여러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고 하며 <친한 벗>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던 중 1940년에 2번째로 체포되어 함흥지법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도중 해방을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1955년 3월 2일, 장해우의 뒤를 이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고재판소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최용건, 검사총장 리송운과 함께 박헌영의 재판을 담당한 것이다. 정해진대로 박헌영에겐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 공 덕분인지 12월 16일, 사법제도를 강화한 공적 치하를 이유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50세 기념 로력훈장을 받는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56년 1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이 발표되면서 최고재판소장에서 해임, 당일에 역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리송운이 맡고 있던 검사총장으로 이임했다. 이후 1956년 4월의 제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검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7년 2기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열리자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7년 9월에 바로 사법성 당회의에서 검열이 이루어져 사법성 부상 박영숙, 최고재판소장 황세환, 검사부총장 김동학 등과 함께 반혁명혐의로 투옥된 가톨릭 사제들을 형기 만료 이전에 석방해준 혐의로 비판을 받고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검사총장에서 해임되고 박세창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농민은행 지배인으로 하방되었다.

그의 일처리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던 김일성은 1차 당대표자회가 끝난 다음날인 1958년 3월 7일에 개최된 1958년 3월 전원회의 중, 도, 시, 군당위원장들과 인민위원장들을 상대로 한 연설 <당사업을 개선할데 대하여>를 통하여 조성모에게 인신공격을 퍼부어댔다.
지난날에 혁명을 좀 했다거나 감옥생활을 좀 했다고 하면 무조건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어떤 사람들은 혁명을 했다는것은 오래전 일이고 오래동안 혁명사업에서 떨어져 장사도 하고 술집도 경영하였으며 혁명을 하는 동안에도 옳은 당적지도를 받지 못하여 무엇이 종파주의이고 무엇이 지방주의이고 무엇이 가족주의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몇십년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끼리 찾아다니면서 나쁜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잘 알아보지 않고 등용배치한 결과 당에 커다란 손해를 끼쳤습니다. 실례로 전 사법성 부상 박용숙이나 전 검사총장 조성모같은 자들은 확실히 잘못 등용하였습니다. 최고재판소 소장 황세환 같은자도 지난날 영흥농조에선가 무엇을 좀 했다고 하여 올려놓았는데 사법부문 사업에 많은 해독을 끼쳤습니다.

결국 조성모는 자강도 강계교화소에 투옥되었다. 사단 정치위원을 하다가 탈북한 려정의 증언에 따르면, 조성모는 자물쇠를 만드는 노역에 동원되었는데 그는 자물쇠에 바르는 독한 약물 때문에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일본놈들 감옥보다 더 하단 말이야! 너무 지독하단 말이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온갖 말이 다 밀고되는 감옥 안에서 아무도 그의 말을 밀고하지 않아 넘어갈 수 있었으나 1961년의 어느날 조성모가 간수를 붙들고 법에 따라서 가족면회를 하게 해달라고 하소연하면서 "일본 밑에서 두번이나 감옥살이를 할 때도 일본놈들이 자신의 처를 면회시켜주고 사식까지 넣게 해줬는데 사회주의 감옥에서 이러는 법이 어딨냐"고 죽기살기로 덤벼들었다고 한다.

당황한 감옥 측은 조성모에게 더 대꾸를 하지 않고 감방에 처넣었는데 한달 이후 어디론가 실어갔다고 한다. 총살해버린 것인지 이감된 것인지는 려정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를 살려내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3. 참고문헌

  • 강만길, 성대경,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서울: 창작과비평사, 1996)
  • 려정, 붉게 물든 대동강: 前 인민군 사단정치위원의 수기(서울: 동아일보사, 1991)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