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03:25:41

윤공흠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독립운동2.3. 북한에서의 활동2.4. 8월 전원회의 사건과 중국 망명2.5. 말년
3. 경력4. 매체에서5. 참고문헌

1. 개요

연안계 독립운동가 출신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2.1. 초기 이력

1913년 5월 18일, 평안북도 박천군 서면에서 윤영화(尹永和)와 김영도(金永道)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를 할 정도였다. 1923년, 박천군 가산면의 가산보통학교에 진학, 1928년 3월에 졸업하였으며 1928년 4월,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1930년 겨울에 중퇴했다. 증언에 따르면,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키도 크고 잘생기고 목소리 좋은 윤공흠이 경성제1고보 학생운동의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자, 아버지 윤영화가 돈을 주고 겨우 석방시켜서 상하이로 망명시켰다고 하는데, 상하이 망명 부분에 대해서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이후 경력에 비추어도 의문점이 있다.

1931년 4월, 일본 도쿄의 다치카와(立川) 비행학교 정과(正科)에 입학하여 1931년 6월에 졸업했다. 일시적으로 귀국한 그는 1931년 8월에 다시 도일하여 1931년 9월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5월까지 연수를 받고 2등 비행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안창남처럼 고국 방문 비행을 하기 위해 준비하였으며, 아예 비행기를 하나 구입해서 일본에서 현해탄을 건너 귀국하는 파격적 금의환향을 하려고 했다.[1] 1932년 7월, 그는 고국 방문비행을 하였고, 전국적인 관심을 받아 송진우, 김성수, 이광수 등 유력인들이 환영회를 열어 그를 맞이하였다. 안창남처럼 비행 독립운동을 했다고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나중에 북한에서 김일성과 사이가 틀어진 이후에 일본놈들 밑에서 비행기나 타던 친일분자로 매도당하게 된다.

2.2. 독립운동

귀국 후 한달간 여관에서 지내다가 1932년 8월, 2번째 비행을 하기 위해서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33년 2월에 귀국, 생활비 문제를 겪다가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이광수와 이응준의 추천으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만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만주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1933년 7월, 상하이로 가서 다시 일자리를 물색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다가 의열단원 이관이란 사람의 소개로 1933년 8월,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에 2기생으로 입학, 1934년 4월에 졸업하였다.

1934년 6월, 난징으로 가 의열단 군관학교 난징분교 학원연구반에 소속되어 국내 잡임 공작을 배웠다. 윤공흠은 비행기를 입수하여 삐라 살포 및 폭탄 투하 공작을 하기 위해 장춘과 평양에서 일본군 관계자들과 접촉하였다. 처음에 거절을 당하다가 1934년 6월 22일, 마침내 비행사면허증을 재교부받게 되었으나, 1934년 6월 28일에 경성에서 체포된다. 이후 신의주 지법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나 위궤양이 악화되어 1936년 2월 20일에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후 1936년 4월 집으로 가서 치료를 받다가 용강온천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1937년 5월 5일에 아내 조영옥(趙英玉)과 함께 중국으로 도주하였다.

중국에서 민족혁명당에 가입, 1938년 3월 1일, 사천성 석보새에서 3.1운동 19주년 기념식에 등장하여 연설을 하였다. 1939년, 연안으로 넘어가 항일군정대학에서 배우게 되었다. 1941년 1월, 태항산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1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에 소속되어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43년 8월, 화북조선독립동맹 연안분맹 위원에 선출되었다.

2.3. 북한에서의 활동

해방 후 귀국, 평안남도 임시정치위원회 총무국장을 지냈으며 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성회의에서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했으며 조선신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1차 당대회 주석단에 포함,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평안북도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소련에서 들어온 고려인 간부들과의 알력에서 패배하여 평안북도 당위원장에서 해임되었고 후임 당위원장에는 허빈이 임명된다. 이후 내무상 박일우 휘하의 38선 경비대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한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총정치국이 설치되면서 총정치국 선전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무려 김정일보다도 먼저 김일성주의 운운하면서 김일성에게 대단히 아첨하는 선전활동을 벌였다. 1953년부터 남로당 숙청에 매우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비슷한 시기 처형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 슬란스키의 사례[2]를 가져오면서 종파분자들은 인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매우 적극적으로 김일성 우상숭배에 나섰기 때문에 나중에 고려인 김승화는 소련 이바노프 대사와의 대화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반탐오, 반낭비, 반관료주의 운동이 전개되던 1952년 중에 김덕환의 뒤를 이어 새로 평양시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 11월 18일, 최창익이 부수상으로 이동함에 따라 그의 뒤를 이어 재정상에 임명되었다. 1953년 4월, 김정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4년 3월 23일, 3월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재정상에서 해임, 상업상으로 이동하였다. 후임 재정상에는 부수상 최창익이 다시 겸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경공업파의 반란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김일성이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과 함께 공업 드라이브를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중용된 것으로 보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2.4. 8월 전원회의 사건과 중국 망명

하지만 1955년 12월부터 김일성이 고려인 간부들과 불화를 빚게 되면서 김일성은 박금철, 한상두 등에게 연안계를 움직여 고려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윤공흠 역시 호응하였으나 마찬가지로 호응했던 서휘, 고봉기 등은 고려인 제압이란 목표가 완수된 후에 음모가로 비판받고 좌천됐으며 그들의 자리는 갑산파나 김일성 직계들이 차지하였다. 이 때문에 연안계와 고려인들의 불만이 드높아졌고, 둘 간의 연합전선, 8월 그룹이 형성된다. 이들의 대표 서휘와 리상조는 김일성의 간부정책을 비판하면서 박정애, 김창만, 한상두, 박금철을 간신으로 지목하고 이들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를 묵살하고 이들은 대거 당 지도부로 진출한다. 그나마 김일성의 유화책으로 윤공흠은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하였고 그를 부수상으로 임명하는 것을 검토하였으나, 8월 그룹의 분노는 이 정도로 달래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56년 5월 7일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은 윤공흠과 정준택을 부수상으로 임명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정준택의 부수상 임명은 승인되었으나, 김광협이 반대하고 나섰고, 남일, 림해, 리효순, 김두봉 모두 윤공흠의 부수상 임명에 반대하면서 김일성이 추천한 부수상 임명이 기각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다.

한편 윤공흠은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제일 먼저 김일성 비판 발언을 하였으나 최용건을 비롯한 김일성 친위세력의 드잡이 속에서 제대로 발언을 하지도 못하였다. 최용건은 대놓고 윤공흠에게 개새끼 운운하며, 천황 폐하 만세나 외치던 놈이 얻다대구 망발이나고 주먹질을 하려 들었고, 거사가 실패했음을 직감한 그는 집의 전화선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서휘, 리필규, 김강과 함께 즉시 차를 타고 압록강변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어부들에게 큰 돈을 주어 낚시배와 물고기를 산 다음에 유람을 하러 가는 것이라고 둘러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당연히 8월 전원회의에서 그는 출당, 제명당했으며 1956년 9월 1일, 상업상에서도 해임되었다.

중국으로 넘어간 그는 단둥에서 중국군의 보호를 받았으며 베이징으로 보내졌다. 이들을 추격하던 내무성 부상 강상호는 중국에 소환을 요청하였으나 중국은 이 요청을 묵살했다. 9월 5일, 윤공흠은 같이 망명한 서휘, 리필규, 김강과 함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김일성을 축출해달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에서 일시적으로 당적이 회복되었으나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돌려받지 못했으며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평당원이므로 검열위원회에서 규률을 처분하겠다고 결정됨에 따라 이후 당적을 다시 박탈당했다. 그나마 중국에 망명한 상황이었으니 다른 동지들과 달리 물리적 처벌을 받진 않았다. 하지만 북한에 남아 있던 윤공흠의 가족들은 반동분자로 몰려서 식량배급도 끊겼다.

2.5. 말년

중국에 남은 윤공흠의 운명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58년 9월, 윤공흠은 하방되어 청두로 보내졌다. 그는 가명을 부여받고 지방 생산조합에 배치되었다. 북중관계가 개선되자 서휘는 극도의 불만을 드러냈으나 윤공흠은 의외로 이를 환영했다고 한다. 불만을 드러낸 다른 망명자들과 달리 중국 당국에 고분고분하였기 때문에 중국적십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공식적으로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으로 대우받았으나 여전히 중국 공안기관의 감시를 받았다. 윤공흠은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겼는지 북한 귀국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 기각되었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 통신병으로 근무한 김중생의 연구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산시성 린펀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다가 1974년에 의료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3.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내각 재정상
1952년 11월 18일 1954년 3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상업상으로 조동
내각 상업상
1954년 3월 23일 1956년 9월 1일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임명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숙청

4. 매체에서

5. 참고문헌

  • 김규범 (2019). 1956년 “8월전원회의 사건” 재론 : 김일성의 인사정책과 ‘이이제이’식 용인술. 현대북한연구, 22(3).
  • 김보미, 김일성과 중소분쟁 -북한 자주외교의 기원과 형성(1953~1966)(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9).
  • 김용진 (2021) 연안파 尹公欽의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숭실사학, 47.
  • 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서울: 명지출판사, 2000).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션즈화, 최후의 천조: 모택동 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서울: 도서출판선인, 2017).
  • 정병일, 북조선 체제성립과 연안파 역할(서울: 선인, 2012).
  • 조수룡, 전후 북한의 사회주의 이행과 '자력갱생' 경제의 형성,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18.8).
  • 북한관계사료집 73

[1] 안창남의 경우에는 비행기를 분해하여 인천으로 가져간 후에 서울에서 다시 조립하여 국내비행을 하였다.[2] 당연하지만 슬란스키도 간첩은 아니었고 유대인인 그를 스탈린이 혐오하여 당위원장 겸 대통령 클레멘트 고트발트에게 그를 처형하라고 강요한 것으로 후속 연구들이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