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25 03:24:39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56년 9월 전원회의



1. 개요2. 배경
2.1. 8월 종파사건2.2. 중국과 소련의 불만
3. 전개
3.1.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
3.1.1. 초기 접촉3.1.2. 중소회담3.1.3. 북중회담
3.2. 9월 전원회의
3.2.1. 사전 협의3.2.2. 전원회의의 개최3.2.3. 김일성의 반항
4. 결과5. 참고문헌

1. 개요

1956년 9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3기 3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북한 역사상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외국의 개입이었으며 이것이 실패로 끝나면서 북한은 일반적인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벗어난 김일성의 완전한 독립왕국이 되기 시작한다.

2. 배경

2.1. 8월 종파사건

핵심적인 배경은 8월 전원회의였다. 하지만 1956년 9월 4일, 주북 소련 대사 이바노프와 주북 중국 대사 차오샤오광의 만남에서 두 나라는 모두 북한의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면서도 개입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를 북한 내부 문제로 간주하고 중소가 개입하게 될 여지를 차단하려 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윤공흠, 리필규, 서휘, 김강 4인은 베이징으로 보내져 저우언라이 총리와 공안부장 뤄루이칭과 면담하였고, 일본식 별장을 제공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중국 측은 이들에게 북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서면보고서 제출을 요청했고 4인은 20장 분량의 서한을 작성, 김일성의 숙청과 인사정책, 개인숭배, 비민주적 지도, 가혹한 민중 탄압을 격렬히 비판하고 박금철, 박정애, 김창만, 한상두 등 김일성의 측근들을 맹렬히 규탄했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김일성이 조선혁명의 장애이며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를 소련과 공유하면서도 일단 증거가 부족하다면서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사건의 흐름은 1956년 9월 5일 주 소련 대사 리상조는 소련 외교부 부부장 페도렌코에게 흐루쇼프에게 보내는 서한을 전달하여 김일성과 조선로동당 중앙에 압력을 넣어줄 것을 청하면서 바뀌었다. 리상조는 제명된 당원들을 비롯한 전언이 참석한 전원회의를 연다는 방법을 제시했으며 만약 이것이 실패하면 조선로동당 대표단과 제명된 정치인들을 소련으로 초청하는 2번째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것조차도 실패한다면 소련과 중국이 연명으로 조선로동당에 문제를 제기해달라고 하였다. 다만 리상조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한발 물러났으니, 김일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흐루쇼프에게 청하지는 않은 것이다.[1] 리상조는 9월 10일에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해외공산당관계국장 보리스 포노마레프를 만나 동일한 내용의 선달을 전달하였다.포노마레프는 원칙적으로 사회주의 형제당들이 북한에 조언과 충고를 할 순 있어도 조선로동당이 독립된 당임을 염두에 둘 것을 강조하며 내정간섭으로 보일 것을 우려했다.

1956년 9월 6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가 소집되어 조선로동당 문제를 논의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 1. 조선로동당 지도부 및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함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일어났던 일을 논의한다.
  • 2.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 소련공산당 대표단을 파견하여 조선로동당과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조선로동당 내부 상황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다.
  • 3.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수슬로프와 포노마레프는 조선 문제에 관해 중공 중앙에 보낼 성명 초안을 준비하여 5일 내로 제출하도록 한다.

이에 따라 소련공산당 대표단장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중국공산당과 협의할 전권이 부여되었다.

2.2. 중국과 소련의 불만

8월 전원회의 사건 자체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이와 별개로 중국과 소련의 불만도 상당했다. 소련은 흐루쇼프 집권 이후 북한이 자신들의 지원을 무리하게 공업에 쏟아붓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김일성이 자기 말을 듣지 않고 나대다가 1954~1955년에 대기근이 들어서 난리가 난 것을 보고 북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몰로토프와 수슬로프는 김일성의 1956년 4월 방문을 2월로 앞당겨 한소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일성은 바쁘다고 핑계대면서 개겼다. 1956년 4월 21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소련은 경제정책, 당내 민주주의 전반에 걸쳐 비판을 하였다. 귀국 후 김일성은 6월 15~20일 사이에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소련 측 권고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당내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1955년부터 자신과 관계가 틀어진 고려인들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하면서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했다.

중국의 불만은 더욱 컸다. 중국 역시 김일성에게 군대를 감축하고 민생을 돌보라고 조언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며 김일성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존재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들이 상당한 행패를 부리고 오만하게 군 것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중국은 애초에 6.25 전쟁을 일으킨 것은 김일성의 잘못이었으며, 중국군을 자기들이 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나온다고 못마땅해했다. 여기에 중국 어민들의 불법 어획 문제, 북한의 총영사관 설치 문제, 조선족 이주 문제 등에서 북중은 사사건건 충돌했으며 특히 김일성이 박헌영, 박일우, 방호산 등을 마구 숙청하는 것에 대해서 중국은 대단히 큰 불만이었다.

김일성에 대한 양국의 평가가 대단히 낮아진 상황에서 일어난 8월 전원회의 사건은 불난데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3. 전개

3.1.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

3.1.1. 초기 접촉

1956년 9월 15일부터 9월 27일 사이에 열린 중국공산당 8차 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소련공산당 대표단장 아나스타스 미코얀, 조선로동당 대표단장 최용건, 대표단원 림해, 리주연, 하앙천 등이 베이징으로 왔다.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이 직접 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김일성은 칭병하고 참석을 거부했다.

9월 14일에 베이징에 도착한 미코얀은 마오쩌둥을 의례방문하였다. 미코얀이 소련 중앙의 위임에 따라 북한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고 밝히자 몹시 흥분한 마오쩌둥은 윤공흠 등의 보고를 보니 북한 내부의 상황이 심각하며 윤공흠 등에게 귀국을 종용했으나 이들이 모두 완강하게 거절했는데 이것은 김일성이 박헌영을 죽인 것처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박해하고 탄압하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다. 미코얀도 김일성이 지난 7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소련이 김일성에게 레닌주의를 준수하라고 촉구했었다고 발언했다. 9월 15일, 소련공산당 중앙이 베이징의 대표단에 방침을 확정하고 하달했으나 문제의 방침은 아직까지 기밀해제가 되지 않아 전문 활용이 불가능하다.

9월 16일, 소련 측의 요청으로 미코얀과 최용건의 회담이 열렸다. 소련 측에서는 미코얀 외에 무히트디노프, 포노마례프, 카피타노프, 유딘, 사튜코프 등이 참석했으며 북한 측은 최용건, 림해, 리주연, 하앙천이 참석했다. 최용건은 김일성이 아파서 못왔다는 내용을 미코얀에게 전달했다. 미코얀은 김일성이 중국에 보낸 8월 전원회의 관련 통지에 윤공흠 등이 중국에 망명한 내용은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최용건은 곧 통보할 예정이며 중국과의 회담을 요청했지만 회신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창익과 중국으로 간 4명의 망명자들을 악당으로 비난하며 8월 전원회의 사건이 정당했음을 주장했다. 이에 미코얀은 애초에 악당들이 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는가, 윤공흠에게 발언 기회가 끝까지 주어졌는가, 반대하는 동지들과의 관계에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는 류사오치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등을 지적했다.

최용건은 조선로동당이 불충분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반대파들이 실책과 결함만에 집착하여 음모적 방법을 도모했다고 대답하자 미코얀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발언한 것은 가장 합법적 방법이라고 반박하며 이들의 발언권을 막은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미코얀은 김일성이나 다른 조선로동당 지도부가 베이징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북한으로 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지었다.

3.1.2. 중소회담

9월 18일, 중난하이의 이년당에서 18시부터 22시 사이에 미코얀과 마오쩌둥 간의 회담이 다시 열렸다. 중국 측에는 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덩샤오핑, 왕자샹이 참석했고, 소련 대표단 전원이 참석했다. 미코얀은 조선로동당에 불건전한 상황이 벌어졌으며, 레닌의 당내 생활 준칙을 위반했다고 지적했고.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약속한 것과 정반대로 행동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김일성이 오지 않은 것은 8월 전원회의 결과에 대해 추궁당할 것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라고 보았다. 마오쩌둥도 동조하면서 김일성이 체포한 박일우는 매우 우수한 공산당원이라고 했다. 미코얀이 공동 대표단을 구성해 북한에 압력을 넣자고 제의하자 마오쩌둥도 최용건과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중소 대표단을 평양에 보내 정치국 회의를 열어서 해결하는 것이 낫다고 동의하였다. 그리고 망명자들의 얘기만 듣고 일을 처리하면 김일성이 반대파의 의견만 듣는다고 반발할 수 있으니 공동대표단을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소련이 과거엔 유고슬라비아에 간섭하더니 이젠 자신에게 간섭할 것이라고 날뛸 것이며 중국까지 가세하는 것은 김일성이 더욱 난동을 부릴 이유가 될 것이라고 정확히 분석하였다. 마오쩌둥은 "우리는 김일성의 극단적 반응에 반드시 준비를 해야 한다. 김일성이 심지어 중국 인민지원군을 조선에서 철군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중국 군대는 당연히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다. 그러나 미국이 현재 남조선에서 자신의 힘을 부단히 강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며, 우리는 여전히 중국지원군이 조선에 주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마오쩌둥은 중소 대표단이 조선로동당과 문서로 합의하고 이를 공표해야 하며, 박헌영 문제도 제기하자고 제안했다. 소련은 이에 동의했으나 박헌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반대했다. 중국 측 기록에는 펑더화이방호산이 6.25 전쟁의 시기를 오판했다고 발언한 것 때문에 숙청당했다고 지적했고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스탈린주의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며 반대의견은 한마디도 수용하지 않고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인다고 비판했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과오를 시정하도록 설득하고 숙청된 자들에게 화해의 태도를 취할 것을 권고해야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헝가리와 북한이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소련이 마차시 라코시는 물러나게 할 수 있었지만 김일성을 물러나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가 소련에 주로 달려 있으며 북한은 중국이 하는 말은 전혀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미코얀은 김일성이 소련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우리의 말은 100% 듣지 않고, 소련의 말은 70% 정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코얀은 "김일성은 우리가 그들 당 내부 문제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 그들이 우리의 충고를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그들의 문제이고, 우리는 반드시 이를 해야 한다."라고 강경하게 결론내렸다. 최종적으로 양국은 중국과 소련이 차례로 최용건과 회담을 가진 후 최용건, 펑더화이, 미코얀 3인이 동시에 평양으로 출발하자고 결정했다.

중국 측 대표단은 마오쩌둥의 제의에 따라 북한 사정에 정통한 펑더화이, 녜룽전, 리커눙, 주북 중국대사 차오샤오광으로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에 소련 역시 이바노프를 비롯하여 4인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구성했다. 마오쩌둥이 만약 김일성이 평양에 없거나 칭병하여 중소 대표단의 방문을 거절할 시에는 어떡할 것인지 묻자 미코얀은 병이 있어도 상관 없으며, 별장에서 와병하고 있으며 별장까지 찾아가면 그만이라고 대답했다.

일각에서는 이날 회의를 통해 중소 양국이 김일성 축출을 결정하거나 논의했다고 하였으나 공개된 중국과 소련 문서에서는 모두 관련 내용이 전혀 없으며 김일성을 도우려 한다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3.1.3. 북중회담

소련 대표단이 물러나자 마오쩌둥은 바로 이년당으로 최용건을 불러들여, 22시부터 24시까지 마오쩌둥과 최용건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중국 측에서 마오쩌둥,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녜룽전, 차오샤오광이 참석했고, 북한 측은 최용건, 림해, 리주연, 하앙천이 참석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잘못을 크게 비판하였다.
우리는 당신들의 간부정책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박헌영을 죽였다. 그는 남조선 인민의 지도자로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간부였다. 당신들은 그가 미국의 간첩이라고 말하였는데, 미국은 아직 그가 미국의 간첩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당신들은 박창옥과 최창익 두 부수상을 제명하고 박일우, 방호산 등의 당적을 박탈했으며, 박일우를 반당분자의 죄목으로 체포하였다. 이것은 엄중한 잘못이다. 당신들은 오늘 이사람들을 내일은 저 사람들을 숙청하여 자신들을 고립시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최후에는 자신도 숙청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다. 과거의 황제, 비교적 개명한 황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발언, 이종석(2010)에서 재인용.

9월 19일 오전 7시에 중소 공동대표단이 북한으로 갈 것이니 최용건이 동행해야 한다고 명령하듯이 외쳤다. 마오쩌둥은 "우리는 당신들의 문제 해결을 돕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당신들을 타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당신들의 행위에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처럼 비판한 일은 없었다. 조선전쟁에 관해서도 나는 김일성에게 이 전쟁은 하면 안된다고 경고하였다."라고 6.25 전쟁까지 들먹이면서 비판하였고, 펑더화이와 리커눙이 거들면서 "조선전쟁은 도대체 누가 일으킨 것이냐? 미 제국주의가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당신들이 일으킨 것이냐?"라고 네놈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냐는 어조로 따져 물었다. 대단히 놀란 리주연이 "왜 이 문제를 제기하는지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리자 마오쩌둥은 "전쟁은 조선인민들에게 엄청난 재앙과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이는 매우 쓰라린 교훈이다."라고 지적하며 "조선 국내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중국과 소련에도 영향이 미치기 때문에, 당신들의 이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간섭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결론내렸다.

최용건과 리주연이 해명을 하였고 리주연은 윤공흠이 경제건설을 방해했다고 주장했으나 마오쩌둥은 "인민생활을 개선하자는 동기가 무엇이 나쁘냐"고 핀잔만 주었다. 최용건은 8월 그룹이 남조선 간첩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자 마오쩌둥은 "당신들은 이렇게 당내 문제와 반혁명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동지들에게 반혁명과 반역자의 죄명을 씌우고 체포하고 죽인다. 이는 중대한 잘못이다. 당신들은 남조선에서 온 간부들을 숙청하였고 중국에서 간 간부들도 숙청하였으며 심지어 소련에서 나온 간부들도 숙청하였다. 이렇게 계속해서 숙청하면, 최후에는 자신도 숙청될 것이다."라고 비판했고 펑더화이가 노선상의 과오라고 보충하였다. 마오쩌둥은 "조선로동당은 공포 분위기로 가득 차 있으며, 반대 의견을 가진 동지들과 반드시 화해하고, 그들의 당적과 직책을 회복시켜야 한다."라고 압력을 넣었다. 최용건은 마지 못해서 "말한 것 모두가 맞는 말이며, 우리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9월 19일에 새벽에 소련 대표단과 북한 대표단 간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미코얀은 자신과 펑더화이가 김일성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3.2. 9월 전원회의

3.2.1. 사전 협의

9월 19일, 펑더화이, 미코얀, 최용건이 평양에 도착했다. 김일성은 마중 나오길 거부했다. 중소 양국 대표단은 김일성이 상상 이상으로 당을 확고히 장악한 것에 대해서 놀랐다. 9월 19일, 4시간에 걸친 첫번째 회동에서 김일성, 펑더화이, 미코얀 3인이 만났다. 러시아어 통역은 남일이, 중국어 통역은 마오쩌둥의 중국어 통역 스저가 담당했다. 미코얀과 펑더화이는 자신들의 방문 족적이 김일성 타도가 아니라 더욱 공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중소 지도부는 김일성에 대해 매우 깊이 이해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었지만, 지도 방식에 동의할 수 없으며, 일부 정책에서 견해가 다른 중앙위원들에게 억압 대신 민주적으로 대함으로써, 당의 영도에 있어서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고 지도부 내의 일치단결을 이루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북한 측의 동의 하에 전원회의를 소집하여 지난 전원회의의 과오를 시정하고, 잘못된 출당 결정을 취소하며 조선로동당의 잘못된 지도방식을 비판하라고 건의, 촉구했다.

김일성과 남일은 원칙적으로 동의를 표하면서도 다른 중앙위원들에게 전원회의 결정 취소에 대해 동의를 구할 것인지 여부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4인은 당적은 회복시킬 수 있지만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돌려줄 수 없다고 하였고, 여기에는 미코얀과 펑더화이도 동의했다. 김일성이 박창옥과 최창익의 부수상 직무 회복 역시 불가능하며 최창익은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돌려줄 수 있지만 상무위원 직위는 돌려줄 수 없다고 하자 미코얀과 펑더화이는 그렇게 할 경우의 손익을 계산하여 다시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은 전원회의 소집을 위해 중앙상무위원회 토론을 제안하였고, 9월 20일 저녁에 중앙상무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미코얀은 조선로동당에서 중소 대표단 없이 몰래 별도의 회의를 연 증거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9월 20일 18시, 상무위원회 회의가 중국과 소련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북한 측에서는 김일성, 김일, 박정애, 박금철, 최용건, 김칭만, 박의완 등 사실상 상무위원 전원이 참석하였으나 김두봉과 중국에 가 있는 림해는 빠졌다. 김일성은 중소 대표단의 방북 이유를 설명하면서 일시적 분노에 좌우되어 일 처리가 과도하게 격앙되었다고 일부 자아비판을 하며 당의 대오를 단결시키자고 하였다. 김일성은 다른 상무위원들에게 발언을 요청했으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미코얀이 남일을 직접 지명하며 발언을 요구하자 남일은 김일성의 의견에 동조한다고만 하였다. 김일성은 출당된 자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관용을 보일 수 있다고 확인했다. 이어 발언한 최용건, 남일, 김창만 등 상무위원들은 양국 대표단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과오를 인정한다면서도 최창익 등이 반당분자, 종파분자이며 이들의 발언이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격분시켰다면서 8월 전원회의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그리고 고위직 복귀는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따라서 8월 전원회의는 반당분자들에 대한 정당한 처벌을 내린 것이나 당의 통일성을 위해 관용을 베푸는 것이라는 시혜적 입장을 고수하려 했다. 유일하게 박의완만 출당자들이 과오가 있을지언정 반당분자로 규정되어서는 안되며, 성급하고 경솔하게 채택된 8월 전원회의 결정이 아예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한 대가로 박의완은 훗날 숙청된다.

미코얀은 자신들이 국제주의적 의무 때문에 방북했고 사회주의의 전초기지인 조선로동당이 스스로 당 상황을 정돈, 결정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싶다면서 당내 민주주의, 당내 언론자유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8월 그룹을 헝가리, 불가리아 상황에 빗댄 김창만의 발언에 대해서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표명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을 반당과 종파주의로 보는 상황은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다. (...) 당신들은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반대자들을 출당, 체포,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지만, 전원회의에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는 것은 모든 당원의 신성한 권리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중소는 김일성을 믿고 지지하지만 김일성의 영도 방식이 바뀌어야 하며 가까운 시일 내에 전원회의를 열고 과오를 시정하며 새로운 결의를 신문에 발표할 것을 주장했다. 펑더화이는 미코얀과 박의완의 발언에 동의하며 중국은 과거에 잘못을 범한 동지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설명하고 "9월 전원회의 결의의 과오는 단순히 지나치게 경솔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로동당 중앙이 비판을 두려워하여 의견이 다른 동지들을 당헌을 위반해가면서 처벌한 것이다. (...) 중공 중앙은 지금까지 김일성 동지를 대신할 사람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대신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해당 회의에서는 김일성, 미코얀, 펑더화이 3자 회담 결정을 지지하고 9월 22일 저녁, 혹은 9월 23일 아침에 전원회의를 소집한며 그 결과는 신문에 보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9월 22일에 열린 3번째 회담에서는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김창만, 남일, 미코얀, 이바노프 대사, 펑더화이만 참석하였다. 이들은 9월 전원회의 결정문을 검토하였다. 미코얀과 펑더화이는 결의문 초안에 기본적으로 만족을 표했지만, 과오를 범한 동지들을 구제한다는 표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반드시 당내 민주를 실행하고 비판과 자아비판을 전개하며, 과오를 범한 동지들에 대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라는 내용을 보충할 것을 제안했다. 펑더화이는 박일우 등 8월 전원회의 이전에 숙청된 간부들의 문제도 재심사할 것을 요구했다. 김두봉과 김일성은 일부 중앙위원들이 새 결의에 의의가 있기 때문에 더욱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고, 전원회의는 9월 23일 오전에 열기로 하였다. 미코얀은 회의가 순조롭게 끝나면 자신은 당일로 베이징에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사실상 중소 대표단은 8월 그룹을 과오를 범한 반당분자로 보는 북한 시각을 묵인하고 만 것이다.

9월 22일 밤,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미코얀, 무히트디노프, 포노마례프, 김일성, 남일 사이의 단독 회담이 9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 열려 최종 결의안을 검토했다. 미코얀은 중소 대표단의 지적이 만족스럽게 보완되었다고 평가했다. 미코얀이 실책 교정의 의지를 9월 전원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밝힐 것을 요구하자 김일성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충고를 모두 받아들인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의 모든 충고를 지도에 항상 구현할 것이다. 나에게 소련공산당은 의심할 바 없는 권위이다. 조선로동당의 최근 실책을 더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실무사업에서 다양한 실책이 나올 수 있지만, 8월 전원회의 때와 같은 실책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미코얀은 마지막으로 박일우 석방을 요구하였고, 김일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김일성이 자신이 중국보다는 소련을 신뢰한다는 제스처를 보인 것으로 덕분에 미코얀의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 있엇다.

3.2.2. 전원회의의 개최

9월 23일 오전, 결정한 바와 같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김일성은 9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등에게 내려진 처분이 과하고 성급했다면서 중국으로 망명한 4인의 간부들도 적을 위해 복무한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따라서 최창익, 박창옥의 중앙위원회 위원 자격 회복과 윤공흠, 서휘, 리필규의 당적 회복 및 이들의 북한 귀국을 희망한다는 입장을 표명, 전 당의 단결을 호소하고 민주집중제의 실현과 과오를 범한 동지들에 대한 더욱 신중하고 인내의 태도의 교양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일성의 멋들어진 말과 달리 조직부장 한상두, 함경남도 당위원장 현정민, 평안북도 인민위원장 한태전, 과학원 원사 리청원, 함경남도 인민위원장 리유민, 평양시 당위원장 리송운, 개성시 당위원장 리창옥 등은 일제히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리필규, 서휘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고 이들을 반당분자, 분열부자, 종파주의자, 이승만 추종자, 부패한 강간마, 탐관오리로 마구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의 당적 회복에는 동의했다. 김일성과 박정애는 짐짓 점잖은 척 이들에게 본론으로 돌아가라고 주문하면서도 이들의 발언을 막지는 않았다. 오로지 농업부장 박훈일만이 8월 전원회의를 크게 비판하며 박금철, 김창만, 한상두를 거론하며 질책하고 김일성에게도 과오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을 열거하며 8월 전원회의 이후 당의 분위기가 매우 긴장되었으며, 일부 당원과 간부들이 취조, 통제, 고발 당했다고 호소하고 나섰다. 이 발언에 대해 김일성은 즉시 제지하며 흥분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박훈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금철, 김창만, 한상두 해임을 건의하였다.

박훈일의 발언에 박정애가 토론 중단을 제의하였고 이에 따라 예정된 토론들이 취소되었다. 참가자들은 박훈일의 발언에 반발하며 그를 종파주의자로 규정해야 한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이어 김일성은 박훈일 문제는 다음에 토론하자고 한 후 폐회사를 통해 채택될 결정이 8월 전원회의 결정의 전면적 취소가 아니라 처벌의 감경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탄압을 해선 안되고, 교양을 꾸준히 해야 하며, 숙청된 이들에게 적당한 사업을 맡겨 스스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최창익·윤공흠·서휘·리필규·박창옥 동무들에 대한 규율 문제를 개정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박창옥, 최창익은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를 돌려받았으며, 서휘, 윤공흠, 리필규의 당직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앞서 밝힌대로 이들의 원래 직위는 회복되지 않았다.

9월 23일, 베이징에 돌아온 중소 대표단은 마오쩌둥과 회담을 가지고 결과를 보도했다. 미코얀은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으나 김일성을 열렬히 변호하며 숙청된 자들은 김일성의 경질을 주장했던 자들이라고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마오쩌둥은 조선로동당에 대한 비판이 부족하고, 정치 분야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6.25 전쟁을 일으켰던 내용도 없지 않느냐고 지적했으나, 미코얀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북한이 듣지 않을 것이라고 변명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큰 잘못이며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라고 불평했다. 미코얀은 스탈린도 책임이 있으며 김일성은 젊고 경험이 없었다고 변호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은 소련이 심은 한 그루의 작은 나무 같은 것이며, 당신들이 이 나무를 심었고, 미국인이 이를 뽑앗지만, 우리가 다시 원래 자리에 다시 심어 놓았는데, 조선은 지금 매우 우쭐대고 있다."라고 신랄하게 평가했다. 그리고 계획이 완성되었다는 미코얀에게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었다."라고 정확하게 평가했다.

9월 25일, 미코얀이 소련으로 귀국하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단은 소련대표단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사태가 끝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중국 측은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펑더화이는 "조선은 지금까지 9월 전원회의 결의문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결의문 발표는 이전에 중소 대표단의 평양 방문시 조선로동당과 합의한 사항이다. 만일 내일도 신문에 발표하지 않는다면, 중소 대표단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조선을 재차 방문할 필요가 있으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재차 소집하든지 심지어 대표자회를 개최하는 것도 못할 게 없다."라고 소련공산당 국제부장 포노마레프에게 말했다. 그리고 통역사 스저도 김일성이 부하들에게 "두명의 큰 형이 조선에 온 것은 조선로동당의 내부 일에 간섭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 정보가 있다고 거들었다.

3.2.3. 김일성의 반항

이후 전개는 정확히 마오쩌둥이 예측한대로 흘러갔다.

1956년 9월 27일, 소련대사관 참사관 페리센코는 박금철을 만나 삼자 합의에 따라 전원회의 결의를 공표하라고 압력을 넣었으나 박금철은 해당 합의를 알고 있다면서도 이를 보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있다면서 발뺌을 하였다. 결국 9월 29일자 로동신문 1면에는 9월 전원회의 개최 소식이 보도되었으나, 간단한 개요만을 게재하였다. 10월 5일, 소련 외교부 부부장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김일성에게 결의 전문을 게재하라고 요구할 것을 이바노프 대사에게 지시했다. 10월 8일, 이바노프 대사가 김일성에게 이를 요구했으나, 김일성은 관련해서 미코얀, 펑더화이와 특별한 합의가 없었다면서 거절했다. 그리고 추가적인 발표가 당원들에게 형제 공산당이 조선로동당의 내정에 간섭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며, 중소 대표단의 비공식 방문을 널리 알리고 싶지도 않으며, 결의문 전문이 적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와중에 북한은 중국 측에 어떠한 정보 제공도 거절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소련 측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김일성은 9월 전원회의 결정에 대한 토론을 지방에서 실시하도록 하였으나, 숙청된 이들을 변호하고 김일성을 비판한 간부들은 모조리 출당되었다. 김일성은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조선로동당의 실수와 결점을 발견하기 위해 평양에 왔으나 역으로 설득만 당했다는 거짓 정보를 유포하였고, 8월 그룹에 대한 복권은 커녕, 이와 관련된 인물들이 닥치는대로 체포, 숙청되었고 박일우와 방호산의 석방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국으로 망명한 윤공흠 등은 귀국을 거부하였으며 리상조도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박창옥은 마동시멘트 공장 총지배인으로, 최창익은 문물 문화 및 역사 문물보호국 국장에 임명되었으나 그나마도 거절하여 과학원 원사로 배치되었다. 박훈일은 조사를 받기 시작했으며 망명한 4인방의 가족들은 식량 배급도 중단되고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헝가리 사태 이후 김일성의 태도는 강경해져서 약속되었던 대부분의 조치들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었다.

김일성은 1957년 5월 30일,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반혁명 분자들과의 투쟁을 강화할 데 대하여>를 채택함으로 오히려 9월 전원회의 때 불만을 드러낸 인물들도 모조리 숙청하였다. 이후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김두봉, 박의완, 오기섭, 류축운, 장평산 등이 숙청되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일부 간부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말단 간부를 합치면 무려 1천명이 중국으로 도주했다. 고위급 인물로는 평양시 당위원회 부위원장 홍순관, 최창익의 대본영으로 지목된 김일성대학 당위원장 홍광, 인민군종합병원 당위원장 김정룡, 주소 북한 대사관 당위원장 리희상, 직총 당위원장 김지홍, 평양시 당위원회 조직부장 김충식 등이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중 홍순관과 김충식 등은 탈냉전 시기까지 생존하여 당시 북한 상황에 대한 매우 귀중한 증언자료를 제공하였다.

김일성의 패싱을 당한 중국의 분노는 극심했고 이는 1956년 11월, 북한의 원조 요청 기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956년 폴란드, 헝가리 사태가 연이어 터지고 중국과 소련 관계도 차차 악화되면서 더 이상 두 나라는 북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졌고 김일성은 신나게 내부 청소를 할 수 있었다.

4. 결과

김일성은 이날의 굴욕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는지 1957년 12월 4일,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지난해 야밤에 남의 집에 잠입하듯이 우리에게 왔다. 압력 속에서 9월 전원회의 결정이 채택되었다."라고 분노를 표했다. 헝가리 사태 이후 중국의 태도가 누그러지면서 북중관계도 개선되었고 마오쩌둥은 1956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만나 "우리는 이 같은 일을 다시는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라고 하였다. 김일성은 "우리의 일부 동지들은 중국이 조선에 온 것을 간섭이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를 형제당 간의 우호적인 연구와 토론이라고 본다. 형제공산당 사이에 정상적이고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첫번째 임무이다. (...) 우리는 중공과 소련의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라고 유들유들하게 대답하면서도 귀국해서 개최된 1956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사과를 받았다고 정신승리하였다. 하지만 정작 소련과 중국에서 작성된 대담록에서는 해당 내용이 없어서 결국 김일성의 흔한 허풍 중 하나로 보인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가 개인적 사과를 했을지도 모르며 이는 잘한 것이지만 절대 중공 중앙의 의견으로 봐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어쨌거나 북한은 이 승리를 만끽하였으며 1963년 6월, 북한을 방문한 최용건은 북한에서 1956년은 제2의 해방이라고 불린다고 마오쩌둥에게 말하였다. 오늘날 북한 문헌에선 다음과 같이 정신승리한다.
그해(1956년) 9월 팽덕회와 미꼬얀이 우리 나라에 갑자기 날아들었다. 그들은 우리 당이 무슨 리유로 쏘련계,중국계의 인물들을 당대렬에서 제명했는가를 알아보고 필요한 수습책을 세울데 대한 과업을 받고 파견된 흐루쑈브와 모택동의 특사들이였다. 남의 나라 당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거기에 머리를 들이민다는것자체가 국제적인 관례에도 없는 란폭한 내정간섭이였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우방국의 손님으로 대범하게 받아들이시고 우리 당지도기관 성원들의 말을 들을수 있는 기회까지 마련해주시였다. 미꼬얀과 팽덕회는 우리 일군들이 모두 수령님의 로선과 정치를 절대적으로 지지 하고 수령님의 두리에 철통같이 단결되여있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가버리였다. 종파분자들의 편역을 들어주려고 왔던 그들이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자 자기네 행차가 싱겁고 무엄한 처사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후날 모택동과 흐루쑈브는 수령님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네가 1956년에 조선당의 내정에 간섭한데 대하여 여러차례에 걸쳐 심심히 사죄하였다.

5. 참고문헌

  • 김동길, 한상준(2014), 제2의 해방: 북한자주화와 1956-57년의 중국-북한관계. 국가전략 20(2).
  • 김보미, 김일성과 중소분쟁 -북한 자주외교의 기원과 형성(1953~1966)(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9).
  • 박종철 (2009). 북한의 종파사건과 중국. 민주주의와 인권, 9(3).
  • 션즈화, 최후의 천조: 모택동 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서울: 도서출판선인, 2017).
  • 이종석(2010), 중·소의 북한 내정간섭 사례연구: 8월 종파사건. 세종정책연구 6(2).
  • 이재훈(2017). 1956년 8월전원회의 직후 중소의 개입과 북한 지도부의 대응. 역사비평
  •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서울: 경인문화사, 2006).
  • 조수룡 (2017). 전후 북한에서의 소련계 숙청과 국적 문제(1954~1958). 동북아역사논총 (56).
  • 조수룡 (2021). 북한의 제1차 5개년계획(1957~61) 초안과 탈소련화의 개시. 역사학보, 249
  • 한상준(2018), 중공의 북한과 동유럽 사건 개입에 대한 고찰. 현대중국연구 19(4).
  • Bala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 James F. Person (2018): North Korea in 1956: reconsidering the August Plenum and the Sino-Soviet joint intervention, Cold War History, DOI:10.1080/14682745.2018.1509849
  • Andrei Lankov & Igor Selivanov (2018): A peculiar case of a runaway ambassador: Yi Sang-Cho’s defection and the 1956 crisis in North Korea, Cold War History, DOI:10.1080/14682745.2018.1507022

[1] 8월 전원회의 사건을 반 김일성 궁중음모, 쿠데타로 많이 부르지만 사실 8월 그룹은 자신들이 전원회의에서 일을 벌일 것이라는 것을 숨긴 적도 없고 심지어 김일성과 직접 면담까지 하면서 요구사항을 전달했던 공개적 그룹이었다. 이것이 쿠데타, 폭동음모라는 것은 북한의 주장이고 근래의 연구들은 8월 전원회의 사건을 정상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정치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다. 8월 그룹 안에서도 리필규같은 강경파를 제외하면 김일성을 축출한다는 극단적 결론은 없었다. 리상조 스스로도 자신이 개인숭배만 포기하면 김일성을 지지할 것이라고 발언했다고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