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0 22:49:50

류현우

파일:류현우.jpg

1. 개요2. 생애
2.1. 탈북2.2. 이후
3. 언론 보도4. 방송 출연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북한의 전 외교관, 북한이탈주민. 탈북 이전까지 '주 쿠웨이트 북한대사관 대사대리'를 지냈다.

2. 생애

1973년 평양에서 태어나 1995년 평양외국어대학 아랍어과를 졸업했다. 조선인민군 공군에서 군복무를 한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중동국에 들어갔다. 김씨 일가의 금고지기라고 불렸던 조선로동당 39호실 전일춘의 외동딸과 결혼하며 북한의 엘리트층과 혼맥으로 엮이게 되었다. 장인의 집에서 17년간 처가살이를 했는데, 그곳은 박남기, 오극렬, 김양건, 강석주, 김계관, 현철해 등 중앙당과 군부 초고위층들이 거주하는 대동강구역의 '은덕촌'이라는 60평짜리 아파트 단지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류현우는 외무성 배치 7년 만인 2010년 시리아로 해외발령을 나가게 되었다. 시리아는 UN 가입국 중 한국과 유일한 미수교국이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파견한 안전대표(보위원)가 없던 상황이었다. 그는 인터넷 사용[1]부터 한국 드라마 시청[2]까지 자유를 만끽했다고 한다. 시리아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김정일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것이었다고 한다.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던 김정일이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2016년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2017년부터 쿠웨이트 대사대리를 맡았다.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에 일시적인 훈풍이 불면서, 평양에서 공식 전보로 남측과 쌀쌀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이 왔다고 한다. 이에 남한 외교관과 소통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1. 탈북

탈북하게 된 계기는 고작 그림 한 장 때문이었다. 대북제재로 인해 쿠웨이트에서 외화벌이가 어렵게 되자 대사관 운영비를 아끼기 위해 작은 건물로 대사관을 이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김일성, 김정일이 그려진 선전화를 잃어버렸다. 류현우는 처음에는 솔직하게 평양에 보고하기 위해 대사관의 세포비서였던 일등서기관과 이를 의논하였으나 세포비서는 그냥 덮어버리자고 했고 류현우도 그에 동의하여 2년 간 보고를 하지 않고 잊어버리게 되었다. 문제는 그 세포비서가 임기를 마치고 2019년 북한으로 돌아가면서 커지기 시작했다. 조직지도부 당생활지도과에서 귀국한 외교관들을 재교육하기 위해 철저한 조사와 생활총화를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세포비서는 선전선동부가 쿠웨이트 북한대사관이 보유한 모든 선전 물품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용히 묻힐 줄 알았던 선전화 분실 문제는 물론이고 의도적으로 은폐한 것까지 발각되어 가중처벌될까 두려워한 세포비서는 이를 먼저 이실직고했고 모든 것을 류현우에게 뒤집어씌워버렸다고 한다.

류현우는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2019년 아내가 아버지인 전일춘의 은퇴와 심근경색 수술로 평양의 친정을 방문하면서 지인들로부터 이 소식을 알게 되고 쿠웨이트로 돌아와 류현우에게 알렸다. 얼마 뒤 평양으로부터 류현우가 직접 대사관 로비에 있는 유화 작품[3]을 가지고 평양에 들어오라는 지시가 전보로 날아왔다. 그 이유로는 유화에 그려진 김일성, 김정일의 인민복을 양복으로 새로 그린 그림을 줄테니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사실 숨겨진 의도는 잃어버린 선전화를 가져오라고 하면 눈치채고 도망갈 수 있으니 유화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를 내린 것. 류현우는 아내에게 들은 정보로 이것이 함정임을 간파하였고 마침내 탈북을 결심하였다. 만약 순진하게 평양으로 들어갔다면 즉시 보위부에 체포된 후, 최고지도자의 우상화를 소홀히 한 것도 모자라 은폐까지 한 정치범으로 몰려 최소 정치범수용소 내지는 사형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류현우는 탈북을 계획하면서 아내를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이었는데 아내 역시 이미 탈북을 결심한 상태였다. 아버지를 보러 귀국했을 때, 평생을 김씨 일가에 충성하고 김정은의 최측근이었던 아버지 전일춘도 은퇴를 하니 은덕촌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고 이사를 간 곳이 평양 외곽의 허름한 아파트였다. 중앙당 고위층이 받는 배급 또한 끊겨 6개월치 식량으로 고작 감자 4kg을 배급받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어 북한 체제에 배신감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으로 아내는 북한에서의 삶에 더 이상 희망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탈북을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대사관을 다시 한 번 이사하게 되어 이삿짐을 싸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탈북을 준비하였고 평소 일정대로 딸의 등교를 이유로 자동차로 대사관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직행하여 2019년 9월 아내와 딸과 함께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2.2. 이후

본인이 밝히기로 한국에 입국하여 조사를 마치고 2020년부터 대한민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됐는데, 자신과 같은 고위급 탈북 인사의 경우 하나원에서 정착교육도 받지 못하고 바로 사회로 배출되어 관례적으로 국정원 산하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연구원으로 취직하여 한국 정착을 시작하는게 대부분인데 당시 문재인 정부의 대북평화기조로 인해 그런 제의가 오지 않아 3년간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2020년부터 2022년 여름까지 2년 반 동안 월 110만원을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부 연구소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수급자 신세를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방송에도 출연하고 언론과 인터뷰도 하는 등 공개활동을 시작하였다.

3. 언론 보도

4. 방송 출연

5. 관련 문서


[1] 북한은 세계 유일 인터넷 금지 국가다.[2] 참고로 당시는 북한의 한류 검열이 지금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3] 잃어버린 출판 선전화와는 다른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