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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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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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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북한 최고지도자의 금고지기인 39호실장으로 장기간 재임했다.

2. 생애

영국 재무부 정보에 따르면 1941년 8월 24일에 출생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회령시에서 유선탄광 로동자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랐다. 1958년 11월, 아버지가 은퇴하게 되면서 평양에서 일하는 맏형이 아버지를 모시고 살게되자 온 가족이 평양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 평양 제7고급증학교로 불리던 남산고증 고급반 2학년 2반으로 전학하게 되었다. 이때 같은 학년 1반에서 재학 중이던 김정일과 만나 그의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1960년 남산고증 졸업과 함께 김정일과 헤어져 오랫동안 재회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을 봐서는 이후로는 접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경제일군으로 1981년 정무원 대외경제사업부 부부장, 1993년 대외경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95년,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98년부터 39호실로 이동, 39호실 부실장으로 사업하였다.

2009년 3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2010년 2월, 김동운의 후임으로 39호실장에 임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이때 국가개발은행 이사장을 겸하였다. 이 때문에 2010년 12월부터 유럽연합으로부터 비자발급 금지 및 자산동결 제재 조치를 당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을 지냈다. 헌데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에 선거되지도,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회에 위촉되지도 못했다. 그리고 2012년 5월에는 경질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 하지만 불과 며칠 후에 전일춘이 다시 등장하여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위원,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5년 12월, 김양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다. 38호실이 39호실로 통합됨에 따라 제1부부장 대우였던 39호실장이 당 부장 자격으로 승격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실제로 후임 39호실장 신룡만은 당 부장으로 보도되었다. #[1] 2017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39호실 부실장 신룡만에게 39호실장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한 것으로 보이나, 사위인 류현우의 증언에 따르면 완전한 은퇴는 아니고 2019년 2월에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받던 시점까지는 현직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2017년에는 다른 은퇴한 노간부들과 함께 김정일에 대한 썰을 푸는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완연히 노간부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2019년 2월에 완전히 은퇴한 이후 고위 간부 아파트인 은덕촌에서도 쫓겨나 도태촌[2]으로 이사가게 되었는데 그와 더불어 중앙당 고위간부 전용 배급도 끊겨 살림살이가 그야말로 처참해졌다. 평생을 김씨일가에 충성한 아버지가 6개월치 배급으로 고작 감자 4kg을 받은 것[3]이 류현우의 아내가 탈북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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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2021년 2월 조선중앙텔레비죤에 출연한 전일춘
사위 류현우와 외동딸이 탈북을 했는데 김정일의 동창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김정일, 김정은을 모신 노간부라서 그런지 2021년 2월, 방송에 출연함으로 숙청되지 않고 생존했음을 알렸다. # 39호실장으로 오래 재임하면서 뇌물이나 부정축재 등 비리를 전혀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은퇴 후 궁핍하게 사는 아버지를 보며, 딸이 어머니에게 정말 달러 한푼도 꿍쳐놓은게 없냐고 묻자 어머니는 '만약 아버지가 그런 짓을 했다면 이렇게 살아서 은퇴할 수 있었겠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전임 39호실장 최봉만이 이중장부 혐의로 체포돼서 지방으로 쫓겨난 전적이 있으며 외무상 리용호는 뇌물 받아먹다 걸려서 온 가족이 수용소로 끌려갔다. 어쨌거나 사위와 딸이 탈북한 죄로 은퇴한 다른 원로급 당 부장들과 달리 각종 주요 행사에 초대받지 못하는 등 대접이 썩 좋진 못한 편이다.

3. 여담

  • 전일춘은 한국에서 '김정일의 금고지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별명은 한국에서 생겨난 것으로 사위인 류현우가 "남조선에서는 장인어른을 김정일의 금고지기로 부른다."고 알려주자 본인은 웃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1] 근데 이후 또 재조정이 이뤄졌는지 8차 당대회에서 당부장 임명 명단에 없었으며, 각종 장의위원회에서 제1부부장 서열을 기록하고 있다.[2] 은퇴 간부용 아파트[3] 이것도 배우자의 배급을 합친 양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당 2kg이라는 것.[4] 박남기가 화폐개혁 실패로 숙청, 처형되었을 때 그의 남은 가족들이 오밤중에 정치범수용소로 비참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5] 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