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5:27:11

리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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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리용호
李容浩 | Ri Yong Ho
파일:리용호.jpg
<colbgcolor=#d6b534><colcolor=#FFF> 출생 1956년 7월 10일 ([age(1956-07-10)]세)
평양시
학력 남산고등학교 (졸업)
평양외국어대학 (학사)
소속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선거구 황해북도 운하선거구 (제371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주 영국 대사 시절2.3. 외무상 시절2.4. 해임 이후2.5. 숙청
3. 일화4. 기타5. 경력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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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2.1. 초기 이력

1956년 평양에서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지낸 리명제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평양외국어대학 졸업 이후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1979년 짐바브웨 주재 대사관 3등 서기관에 임명된 것이 확인되었으며, 1985년 스웨덴 주재 대사관 2등 서기관으로 옮겼다. 1988년, 외무성 국제기구국 2과 담당 지도원이 되었으며 1990년, 유엔에서 군축양성가 프로그램에 북한 외교관도 한명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국제기구국 산하 군축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가 자청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6개월간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이후 1994년 1차 북핵 위기가 터지자 NPT 탈퇴와 준전시 상태 선언을 통한 강경외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차 북핵위기가 무사히 넘어가면서 1995년 외무성 참사에 임명되었다. 2000년 8월, 백남순 외무상의 홍콩 방문에 동행했으며 2000년 10월, 조명록의 방미도 수행하였다.

2.2. 주 영국 대사 시절

2001년 5월 17일, 하노이에서 개최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북측 단장으로 참여했고, 2001년 9월,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북한과 영국의 수교 이후 2003년 8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초대 주 영국 북한 대사로 임명되었다. 태영호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이라크 전쟁으로 불안해진 김정일이 영국 측의 의사를 파악하여 미국이 북한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를 탐문하고, 1차 핵실험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004년 2월 27일에는 아일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봉정하면서 아일랜드 대사도 겸하였다. 영국 부임 후 2005년에 외교적 필요 때문에 대사관 직원들과 같이 골프를 배웠는데 하필이면 남한 골퍼에게 배운데다가 연합뉴스에서 그가 리명제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도한 것 때문에 김정일이 남조선 언론이 리용호가 리명제 아들인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노발대발해서 다신 안하겠다고 싹싹 빌었다고 한다. 2006년 1차 핵실험 이후 목적을 달성한 그는 2007년 2월, 자성남에게 영국 대사 및 아일랜드 대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했다.

2.3. 외무상 시절

이후 한동안 조용하다가 2010년 9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었고, 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2011년 7월과 9월, 제1,2차 남북비핵화 회담에 참석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각종 외교업무를 보다가 2016년 5월, 전임 외무상 리수용이 국제부장 및 정치국 위원으로 영전하면서 후임 외무상에 임명, 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6년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새로 설치된 국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2017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2018년 8월, 김영춘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어쩌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철만 장의위원회에서는 탈락했다. 2019년 3월에 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외무상 및 국무위원에 유임되면서 리수용과 더불어 북한외교의 투톱 중 한 사람으로 아주 잘 나가고 있었으며 2019년 6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추대 3주년 중앙보고대회에도 참가하면서 북한외교의 투톱 중 한 사람으로 아주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의 실패, 남북관계의 재경색 이후 결국 2019년 12월, 조선로동당 7기 5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에서 소환, 외무상에서 해임되었으며 조평통 위원장 리선권이 새 외무상에 임명되었다. 리선권은 외교관 경력이 전무한 군 출신 인물이라 굉장히 이례적인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2020년 4월, 최고인민회의 14기 3차 회의에서 리수용과 함께 국무위원에서 소환된 것이 북한 매체에서의 마지막 언급이었다.

2.4. 해임 이후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확실히 탈락하였으나, 아마도 2019년 12월, 7기 5중전회에서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에서도 소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때 김정은 외교의 상징으로 잘 나가던 때와 달리 2023년 현재까지도 두문불출하고 있다. 리수용이야 나이가 많아서 은퇴했다고 볼 수 있고, 2020년 10월에 공개석상에 나오기도 하였으나, 리용호는 상대적으로 훨씬 젊으니 김정은의 외교정책 변화로 인한 용도 폐기나 신임 상실로 인한 경질이 분명했었다.

2.5. 숙청

그러던 중 2023년 1월 3일,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 언론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그가 2022년 중에 4~5명의 다른 외무성 관계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고 보도했다. # 다만 정부 공식 정보기관발이 아닌 언론의 불분명한 소식통에 의한 정보인 만큼 처형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태영호 의원의 탈북이 같이 거론되고 있지만, 리용호가 영국 대사이긴 했으나 리용호는 태영호가 탈북하기 한참 전인 김정일 시대에 영국 대사를 지낸 인물이며, 태영호 탈북 시점에서는 외무상으로 계속 재임하면서 딱히 처벌받지 않았다.

물론 해임 후 하노이 회담을 주도했던 대미협상파였다는 미운털이 박힌데다가 과거의 여죄를 캐낸다는 구실로 책벌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어쨌거나 과거 리영길, 현송월, 황병서, 박태성 처형설, 김정은 위독설 모두 꽤 많은 언론과 탈북 소식통이 사실이라고 보도했지만 오보였으며 2020년대 들어서 체육상 김일국 숙청설 등 검증되지 않은 숙청설들이 돌아다녔지만 모두 루머로 파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실관계 확인에 들어갔으나 북한의 특성상 확실하게 알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태영호 의원은 이 소식에 대해 그가 정말로 처형되었다면 협상파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는 의미로 우리 대북외교 전략도 그에 맞게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분석하는 한편, 개인적으로 그와 인연[1]이 있는만큼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결국 2023년 1월 5일, 국정원은 리용호가 숙청된 것이 맞다고 발표했다. 처형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23년 9월 20일 북러정상회담 기록영화에 리용호의 모습이 짧지만 자료화면으로 스쳐지나갔다.그런 거에 나온 거 보면 그냥 옷만 벗긴 듯

2024년 류현우 전 쿠웨이트 북한 대사대리에 따르면, 리용호는 북미회담 실패를 이유로 숙청된 것이 아니라 조성길 대사대리와 자신이 탈북한 2019년 이후 소식이 끊겼기 때문에 북한 외교관들의 잇따른 탈북으로 외무성 수장인 리용호가 연대적 책임을 지고 숙청된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3. 일화

리용호의 아버지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지낸 리명제[2]이고 어머니는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리용호의 어머니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고 하는데, 그 일화가 충격적이다.
김정일의 처조카인 이한영의 수기 '김정일 로열패밀리'에 보다 자세한 사정이 서술돼 있다. 리명제는 김정일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로, 김정일이 자기 측근들에게 베푸는 술 파티에 부름을 받는 멤버 중에서 핵심으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리명제의 아내는 남편이 만취해서 집에 들어와 술 주정을 부리는 것을 들어보며 이 술 파티가 문란하고 난잡하게 열린다는 결론을 내리게 돼 김일성에게 이를 바로 잡아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발신자를 찾지 못 하게 하려고 일부러 편지는 왼손으로 썼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 당시에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보고란 보고는 모두 김정일을 거치고 간다는 걸 몰랐다.

당연히 이 편지는 김일성에게 올라가지 못한 채 김정일의 감시망에 걸렸고 이로 인하여 술 파티 멤버 전원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엄중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끝내 그녀는 꼬리가 잡히고 말았으며 1980년 북한 정치보위부 사격장에서 남편인 리명제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 리명제는 아내를 살해한 뒤 김정일에게 총을 넘겨주며 자기도 죽여달라고 했지만 김정일은 "이번 한 번만은 용서해 준다"며 넘어가 줬고 리명제는 더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리명제는 김정일의 배려로 중앙당에서 일하는 젊은 간호원과 재혼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위의 일화에 대해서 김정일의 과외교사였던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김현식은 약간 다른 결말의 얘기를 언급한 바가 있다. 김정일의 눈앞에서 리명제가 아내를 쏘아 죽인 것이 아니라 김정일이 리명제를 불러다가 너는 마누라 관리도 못 하냐며 질책한 뒤 앞으로는 자신의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며 잘라내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리명제가 매일 같이 아내를 구박하며 폭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아내가 정신병을 얻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 일시에 대해서는 앞선 이한영의 이야기보다 1년 이른 197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강명도의 책에도 위의 일화가 언급되는데, 김현식 교수의 증언과 비슷하다. 다만 여기선 리명제가 기쁨조와 같이 찍은 음란한 사진을 아내가 우연히 보면서 들켰으며, 아내가 이를 소문내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김정일이 리명제에게 집안 단속도 못 한다고 꾸짖었고, 리명제가 아내를 마구 구박하여 견디다 못한 아내가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한다. 이에 리용호와 그 여동생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집을 뛰쳐나가 외가에 가서 자랐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쪽이든 리용호의 어머니가 남편 때문에 삶을 비참하게 마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한영은 당 국제부 부부장이었던 최준덕에게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그는 리명제의 자녀들이 아버지가 자기 손으로 어머니를 죽였을 거란 사실은 모른 채 소위 반동분자로 밝혀져 처형됐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거라고 책에 썼지만, 어느 쪽이 사실이건 리용호도 훗날 어머니의 죽음과 관계된 내막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리용호는 리명제와 김정일에 대한 원한이 굉장히 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버지와는 평생 만나지 않았고 어차피 김정일 정권 시기만 해도 반동분자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에 내부 요직으로 잘 진출하지도 못 하는 처지라 그저 해외를 떠돌았다고 한다. 하지만 태영호의 책에 따르면 리용호가 미국 연수를 갈때 김정일이 그가 리명제의 아들이란 보고를 받자마자 흔쾌히 재가를 해주었다고 한다.

4. 기타

  • 치아 건강이 매우 안좋은 걸로 추정되는데, 이는 말할 때 보이는 치아 및 잇몸이 매우 어두운 색을 띄기 때문이다.
  • 2017년 9월 22일, 수소탄 실험을 언급하면서 '역대급'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냥 남한말이 아니고 2010년경에 등장한 남한 신조어라서 한국 TV프로그램을 주시하고 있다는 설이 나왔다. 이 때문에 한국 인터넷 상에서는 그가 숙청된 이유가 '남조선' 말투를 썼기 때문[3]이 아니냐는 드립도 있다.(...)

5.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주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
2003년 8월 30일 2007년 2월 초대 주영대사로 임명
자성남에게 이임
내각 외무성 부상
2010년 9월 23일 2016년 5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7차 당대회에서 외무상으로 승진
내각 외무상
2016년 5월 9일 2019년 12월 31일 7차 당대회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유임
7기 5중전회에서 해임
조선로동당 7기 정치국 후보위원
2016년 5월 9일 2017년 10월 7일 7차 당대회에서 선출
7기 2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3, 14기 국무위원회 위원
2016년 6월 29일 2020년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4기 3차 회의에서 소환
조선로동당 7기 정치국 위원
2017년 10월 7일 2019년 12월 31일 7기 2중전회에서 보선
7기 5중전회에서 소환

6. 참고문헌

  • 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서울: 기파랑, 2018).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1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1).


[1]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 런던에서 함께 근무했다.[2] 리명제, 리명재로 이름이 왔다갔다하는데 북한에서 밝힌 자료를 보면 리명제가 맞다.[3] 다만 평양문화어보호법 자체는 리용호 숙청 확인으로부터 약 2주일 후인 2023년 1월 18일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