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한 인물로 자세한 이력은 배일 속에 쌓여 있다. 1980년대에 당 경리부장, 즉 39호실장에 임명되어 김정일의 금고지기로 불리며 대단한 신임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1984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0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 1987년 4월 5일, 김일성 75세 생일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강명도의 주장에 따르면 1988년 12월, 리근모 내각에 자금 공급을 거부함으로 노한 김일성에게 리근모가 숙청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1]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1년 12월, 김정일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추대기념사진을 보면 최봉만도 포함되어 있었다. 1992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이중장부를 만든 것이 드러나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요리사>가 한국에 정발된 기념으로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를 보면 체포조가 들이닥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서 4층에서 뛰어내렸지만 죽지 않고 체포되었다고 한다. 후임 실장으로는 김정일 측근 중에서도 구두쇠로 유명했던 림상종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처형은 겨우 면하고 지방으로 쫓겨나서 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복권되었는지 2002년에 나온 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 17권에 최봉만이 1985년에 쓴 글이 수록되었으며, 30년 가까이 지난 2021년 9월, 최봉만의 시신이 애국렬사릉에 전격적으로 안치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면서 우리 당의 강화발전에 이바지한 최봉만동지도 영생의 삶을 받아안았다."라고 그런대로 그를 좋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같이 안장된 강성산과 달리 그의 묘비는 따로 공개하지 않았다.
3. 참고문헌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1] 강명도는 최봉만의 이름을 최복만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