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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治衡
1896년[1] 5월 30일 ~ 1970년 10월 2일 (향년 74세)
1. 개요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의사, 정치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2] 조선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 생애
1896년 9월 1일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태어났다. 독립소학교와 명명중학(明明中學)을 거쳐,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우등 성적으로 졸업했다.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에 선발, 규슈제국대학 제2외과에 입학하여 연구하면서 '간의 부분적 절제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1920년 함경북도 성진군 가나다선교사가 경영하는 여수교병원 외과부장으로 취임하여 임상 연구를 하였다. 1921년 4월에는 경기도 경성부로 돌아와 인사동에 외과의원을 개업해 일반인을 진료하면서 창상의 원발성 봉합법을 발명하였다.
1922년 독일 브레슬라우 대학(현재는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대학)에서 추트낼 교수의 해부학교실에서 유선암종 근치 수술법을, 내과학교실과 병리학교실에서 폐결핵 수술법을 연구했다. 1924년 1월 일본 규슈로 돌아와 외과에 근무하면서 '혈청단백의 정성 및 정량법', '위와 장의 원발성 육종'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1924년 6월 '건강폐와 결핵폐에 미치는 기흉의 작용'이라는 논문으로 규슈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의학박사가 되었고[3], 같은 달 모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직에 취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에 내정되어 자리를 옮겼다.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직을 사퇴하고 경기도 경성부 관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 개인병원을 개업했으며, 별도로 이화학연구소(理化學硏究所)를 개설하여 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연구를 계속하여 결핵약 '테비찐', 광견병 특효약 '넬츠운진' 등을 발명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삼산약초원(三山藥草園)을 경영하고 윤치형결핵연구소(尹治衡結核硏究所)를 설립하고 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정계에도 진출하려고 했었는데, 1946년 6월 이극로·권동진·윤세복·이경석(李景錫) 등과 함께 조선건민회(朝鮮健民會)를 결성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 및 민족문화 향상을 꾀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기도 파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동환 후보에 밀려 11위로 낙선하였다. 1963년 1월 이규갑·손학익·염우량 등과 함께 재건 자유당 창당 발기준비위원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2월에는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70년 10월 2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76세.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파주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660표 (4.41%) | 낙선 (11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