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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 |||||
국가 | 폴란드 | ||||
시간대 | (UTC+1/+2) | ||||
주 | 돌노실롱스키에 | ||||
인문환경 | |||||
면적 | 292.81km² | ||||
인구 | 674,132명[1] | ||||
인구밀도 | 2,302.2명/km² |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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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도시로 돌노실롱스키에(dolnośląskie) 주의 주도. 오데르강 변에 있다. 2022년 현재 인구는 67만 명으로 폴란드 제4의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실레시아[2] 지방의 중심 도시였다. 대한민국의 LG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폴란드 최대 규모의 한인 사회가 있다.2. 언어별 표기
폴란드어 | Wrocław |
독일어 | Breslau(브레슬라우) |
체코어 | Vratislav(브라티슬라프) |
3. 인구 추이
브로츠와프 인구추이 [2000-2019년] | |
2000년 | 633,857명 |
2005년 | 635,932명 |
2010년 | 632,996명 |
2015년 | 635,759명 |
2019년 | 642,869명 |
4. 역사
바르샤바, 크라쿠프, 루블린, 포즈난, 그니에즈노, 우치 등 다른 폴란드의 주요 도시와 달리 브로츠와프는 폴란드의 대도시 가운데 역사적으로 폴란드인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짧은 도시다. 초기 약 300여 년을 제외하면 이 도시는 줄곧 체코인(중~근세)과 독일인(근세~근현대)의 도시였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약 600여 년 만에 폴란드에 다시 귀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 때문에 폴란드에서 그단스크와 더불어 매우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대도시이다.4.1. 초기, 보헤미아·폴란드·실롱스크 공국의 지배 (800s ~ 1335)
약 800년 경부터 서슬라브의 일파인 실레시아인이 이 지역에 마을을 만들어 살았다. 이 마을은 곧 서슬라브 대부분을 통합한 대 모라비아 공국의 지배를 받았고 907년 왕국이 동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자르족에 의해 기록도 제대로 못 남기고 멸망하자 보헤미아 공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915~921년 사이에 보헤미아 공국을 통치한 브라티슬라프 1세(Vratislav I 888~921)가 목조 요새를 건설하면서 이 마을은 도시가 되었다. 당시 브로츠와프는 그의 이름을 따 '브라티슬라프'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독일인, 폴란드인도 이 이름을 자국 언어에 맞추어 폴란드인은 브로츠와프로, 독일인들은 브레슬라우로 불렀다.960년,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들어섰고 최초의 폴란드 왕국 국왕 미에슈코 1세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990년 미에슈코 1세는 보헤미아로부터 실레시아와 마워폴스카를 정복하면서 이 도시도 손에 넣었다. 미에슈코 1세의 정복 이래 약 1290년대 실롱스크 공국이 보헤미아의 속국이 되어가던 시기까지 이 도시는 폴란드의 영향을 받았다. 1000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에 딸린 실레시아 최초의 교구를 이곳에 설치했다. 이때부터 주요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급격히 확장해 나갔다. 이 시기 브로츠와프의 인구는 벌써 1,000명에 달했다. 1034년 미에슈코 2세 사후 폴란드가 이교도 반란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 그간 폴란드에 많은 많은 땅을 빼앗겼던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Břetislav I)는 폴란드를 대규모로 침공해 수도 포즈난과 그니에즈노를 파괴하고 많은 가톨릭 유물들을 파괴했다. 군대가 돌아가면서 보헤미아는 실레시아와 대폴란드 일부를 빼앗았고 이 도시는 다시 보헤미아의 지배를 받았다. 재건자 카지미에시 1세의 통치 하에서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어느정도 회복한 폴란드는 1054년 브로츠와프를 재탈환했다. 1109년 도시 근방 프시에 폴레에서 볼레스와프 3세의 폴란드군과 하인리히 5세의 신성 로마 제국군이 전투를 벌여 폴란드군이 승리하였다. 1079년, 볼레스와프 2세는 귀족 반란으로 추방당했다. 따라서 뒤를 이은 브와디스와프 1세의 통치기엔 귀족들의 힘이 강했는데, 그 중 궁정백(Palatine) 시에치에흐(Sieciech)가 왕에게 지록위마하며 폴란드의 실권자로 행세했다. 그런 가운데, 브와디스와프 1세의 장자 즈비그니에프(Zbigniew)는 브와디스와프 1세가 보헤미아의 유디트(Judith)와 새로 결혼해 브와디스와프를 낳자 계승권이 약해졌다. 그는 곧 볼레스와프와 계승권을 놓고 다투지만 나중에 시에치에흐와 유디트가 왕을 쫓아내고 폴란드를 완전히 장악하려 하자 둘을 동맹을 맺고 시에치에흐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 궁정백을 몰아내고 부왕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했다. 즈비그니에프는 대폴란드 등 중북부, 볼레스와프는 소폴란드 등 남부를 가져갔는데, 두 아들들은 부왕이 이후에도 궁정백을 두둔하자 군대를 일으켜 남은 부왕의 땅마저 삼켜버렸다.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1102년 죽자, 둘이 폴란드를 여전히 나눠 지배했지만 즈비그니에프가 연장자로서 폴란드 공이 되었다. 그러나 두 형제는 곧 다퉜고 1107년 즈비그니에프는 패배하여 땅을 잃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 쫓겨나 볼레스와프 3세가 폴란드의 지배자가 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보헤미아에서 망명 온 귀족들을 받아주고 헝가리 왕국과 동맹을 맺자, 헝가리와 적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는 폴란드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즈비그니에프의 복위를 명분으로 1109년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3세는 그워구프(Głogów)와 프시에 폴레(Psie Pole) 모두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쳐부수고 침공을 격퇴했다.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사후 폴란드가 분열되자,[3] 브로츠와프는 볼레스와프 3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2세의 실롱스크 공국에 속하게 되었고, 1161년에는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201~1241년 실롱스크 공국의 헨리크 1세와 뒤를 이은 헨리크 2세 시기, 공국은 분열된 폴란드의 절반 가까이를 통합했고 폴란드 고공위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브로츠와프는 분열된 폴란드의 실질적인 중심으로 기능했다. 실롱스크 공들은 더 나아가 폴란드의 완전 통합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1241년 바투 칸과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폴란드로 쳐들어와 폴란드 공국들의 군대를 각지에서 연파하고 수도 크라쿠프를 불태웠다. 몽골군은 곧 당시 폴란드의 중심지인 실롱스크로 진격했고 4월 초 몽골군이 브로츠와프에 당도하기 직전 시민들은 몽골군의 파괴 행위를 전해듣고 공포에 질려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이때 몽골군이 더 빨리 철수하게 만들려고 헨리크 2세의 지시로 일부러 도시를 불태웠다. 며칠 뒤, 헨리크 2세는 4월 9일 브로츠와프에서 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레그니차[4]에서 폴란드 연합군으로 몽골군에 맞섰으나 군대는 전멸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몽골의 침공으로 실롱스크 공국을 중심으로 한 폴란드 통합은 저지되었고 브로츠와프는 폐허가 되었다. 침략 후 도시는 복구되었고 1262년 마그데부르크 법에 의거한 도시특권이 부여되었다. 도시는 교회와 성당이 건설되고 상공업이 촉진되는 등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1289년,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의 바츨라프 2세는 실롱스크 공작위를 얻었고 곧 폴란드 고공위까지 손에 넣었다. 그 이후로 실롱스크 공국은 점차 보헤미아의 속국이 되어갔다. 1306년, 브와디스와프 1세의 즉위로 폴란드와 보헤미아가 갈라서자 보헤미아는 이후 룩셈부르크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폴란드 왕위를 요구했는데[5], 브와디스와프 1세 사후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카지미에시 3세는 1335년 보헤미아의 얀 루쳄부르스키(Jan Lucemburský)[6]와 트렌첸 조약을 체결해 보헤미아 왕국은 폴란드 왕위를 영구히 포기하는 대가로 수십년간 실롱스크(슬레스코)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보헤미아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이 조약에 따라 실롱스크(슬레스코)는 보헤미아 왕관령으로 편입되었고 브로츠와프도 함께 보헤미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348년 카지미에시 대왕은 보헤미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남슬라우 조약을 체결해 1335년의 조약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4.2. 보헤미아, 합스부르크의 지배 (1335 ~ 1742)
브라티슬라프는 보헤미아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여전히 무역 중심지로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이 시기, 여러 벽돌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올라와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다. 브라티슬라프는 1387년 한자동맹에 가입했으나 내륙 무역 중심지였던 크라쿠프와 마찬가지로 동맹과 매우 느슨하게 연결되었으며 회원비를 내지도 않고 동맹 회의에도 참가하지 않다가 1474년 탈퇴했다. 1418년에는 장인길드가 시의회의 중과세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켜 다수의 시의원을 살해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2년의 법정 다툼 끝에 후임 왕 지크문트는 주동자 27명을 처형해 사건을 진압했다. 보헤미아가 한창 후스파의 물결에 휩쓸릴 때, 1458년 후스파였던 포뎨브라트 가문의 이르지가 보헤미아의 국왕이 되자 브라티슬라프는 후스파 왕에 반대해 이르지의 라이벌이자 가톨릭을 믿던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를 지지했다. 1466년, 교황 바오로 2세가 후스파 이르지를 파문하고 보헤미아 왕위에서 폐위되었다고 선언하자 그의 전 동맹이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마차시 1세는 1468년 보헤미아를 침공했는데, 브라티슬라프는 1469년 5월 마차시 1세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1490년 마차시 1세가 죽자 브라티슬라프는 다시 보헤미아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보헤미아 전쟁기 마차시 1세를 지지하면서까지 가톨릭을 고수하던 브라티슬라프도 1520년대 종교 개혁의 물결은 피해가지 못해 도시는 개신교화되었다. 도시에는 1475년부터 이미 활자 인쇄소가 들어섰고 1519년에는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성서가 인쇄되었다. 또한 1523년 시 의회는 도시의 종교 개혁을 결의했다. 모든 성직자는 개신교 교리에 따른 설교를 해야 했고 가톨릭 관습은 폐지되어 가면서 도시의 가톨릭 신자 수는 점점 줄어갔다.블라디슬라프[7]는 마차시 1세 사후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에서 국왕으로 선출되어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3국의 국왕이었는데 프라하가 아닌 부더에서 머물렀다. 블라디슬라프의 후계자 루드비크[8]가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루드비크의 처남이자 매부였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페르디난트 1세[9]를 왕으로 선출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시키는 것을 왕위 계승의 조건 중 하나로 걸었기에 처음 보헤미아는 큰 자치를 누렸다. 하지만 1540년대 이후 페르디난트 1세가 자신이 선출된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모두에서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1547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와 함께 보헤미아의 반란도 진압하면서 보헤미아 귀족과 도시들의 특권과 자유를 대폭 박탈했다. 브레슬라우도 보헤미아 왕국 전역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강한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의 손자 루돌프 2세는 오만가지 사건에 시달리다 체코인들을 달래기 위해 1609년, 보헤미아와 슐레지엔 전역에 칙서를 내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브레슬라우는 종교적으로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1617년 지독한 가톨릭 신자이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고 보헤미아에 가톨릭을 강제하려 하자 열받은 보헤미아 귀족들이 페르디난트 2세를 폐위하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선출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 유명한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브레슬라우도 1609년에 부여받은 자유를 잃을 것을 두려워해 반란을 지원했다. 하지만 초반이 지나고 나서 전쟁이 독일 주변의 모든 강국들이 들어와 각축을 벌이는 세력다툼으로 번지자 프로테스탄트가 다수인 가운데 소수 가톨릭이 공존하는 브레슬라우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는데 이 덕분에 한번 작센 선제후국과 스웨덴 연합군에 점령된 것을 제외하면 전쟁에 의한 큰 피해는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슐레지엔은 빠르게 재가톨릭화 되었지만 브레슬라우는 여전히 프로테스탄트가 강세였다. 또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 하에서 브레슬라우의 인구는 독일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폴란드인도 도시로 간간이 들어왔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독일화했다. 하지만 여전히 오데르강 건너편에 폴란드 마을이 존재해서 소수 폴란드인이 모여 살았다. 어쨌든 도시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브레슬라우는 인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은 독일 문화가 번성했고 특히 독일 바로크 문학의 중심지였다. 1701년에는 레오폴트 1세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딴 대학 '레오폴트 학당'이 세워지기도 했다. 도시의 인구는 30년 전쟁 직전 30,000명으로 중부유럽에서 손꼽히게 큰 도시 중 하나였다.
4.3.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지배(1742 ~ 1918)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1741년 슐레지엔 대부분이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가 되면서, 이후 브레슬라우는 독일 동부의 최대 도시이자 베를린 다음가는 프로이센 왕국 제2의 도시가 되었다. 20세기 들어 베스트팔렌, 라인란트 등 서부 지방의 산업화에 따라 쾰른, 에센에 밀리면서 프로이센 제4의 도시로 내려 앉았지만, 후에 독일이 상실하는 동방 영토 내의 도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도시였다.4.4. 전간기와 제2차 세계 대전(1918 ~ 1945)
1939년 당시의 인구는 629,565명으로 인구 면에서 독일 8위, 프로이센 자유주의 4대 도시였다.[10]1939년 브레슬라우를 담은 컬러영상
1945년 초부터 독일 국방군은 여기를 요새로 만들어 소련군에 대항했고, 5월 6일까지 브레슬라우 공방전이 이어졌다.
4.5. 폴란드의 영토 (1945 ~ )
이후 포츠담 선언에 따라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당초 미국, 영국은 오데르 강[11]과 글라처나이세 강[12]을 새로운 독일-폴란드 국경으로 하기를 바랐고, 그렇게 되었다면 브레슬라우는 독일 영토로 잔류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서쪽으로 더 떨어진 오데르-라우지처나이세 강[13]을 국경으로 삼자는 소련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데르-나이세 선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독일인들은 추방되었고, 폴란드인들이 대신 정착하였다. 정착한 폴란드인들은 소련령이 된 지역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75%였으며, 주로 빌노(현 리투아니아), 르부프(현 우크라이나 르비우) 지역 출신 실향민들이 많았다.[14] 르부프에 소재했던 유명 도서관 오솔리네움(Ossolineum)[15]도 브로츠와프로 옮겨왔고,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재건된 브로츠와프 대학교는 독일 본토로 쫓겨난 독일계 교수진을 대신해 르부프의 얀 카지미에시 대학교(Uniwersytet Jana Kazimierza, 현 르비우 대학교[16])에서 온 교수진이 정착해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1997년에는 홍수피해를 당했으며, 유로 2012의 경기가 개최되었다.
5. 출신 인물
5.1. 독일인
5.2. 폴란드인
- 모리츠 모슈코프스키 - 작곡가[17]
6. 기타
UEFA 유로 2012의 개최도시 중 하나였다.2017 브로츠와프 월드 게임이 열렸었다.
독일어 이름인 브레슬라우는 폴란드에 넘어오면서 다시 브로츠와프로 개명되어서 이제는 독일어권 출신 사람들만 사용하는 명칭이지만, 의외로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아직도 브레슬라우라고 불리는 읍 규모의 작은 마을이 있다. 19세기에 브레슬라우 출신 사람들이 이민와서 고향을 따라 지었다고 한다. 인구가 4천 명도 채 안되는 작은 곳이지만 독일인 입장에서는 북미 대륙에 아직도 자신들의 예전 도시 이름을 이어나가는 마을이 있다는 점이 반가울 듯. 그 외 미국 네브래스카 주와 텍사스 주에도 같은 이유로 브레슬라우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들이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로 약 600개가 넘는 난쟁이 동상들이 있는데 이는 1980년대 폴란드 인민 공화국 시절 브로츠와프에서 아나키즘 성향의 지하단체인 오렌지 대안 운동(Pomarańzowa Alternatywa)이 폴란드 공산당과 경찰의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 도심에 난쟁이 낙서를 그리는 장난스러운 반공 운동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1920년대 이 곳이 독일 브레슬라우이던 시절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이 처음으로 확인된 도시이기도 하다.[18]
브로츠와프 코페르니쿠스 국제공항이 있다. LOT 폴란드 항공이 2023년 11월 3일 브로츠와프-서울 노선을 취항했다. 기종은 보잉 787-8 드림라이너가 투입되며, 브로츠와프 공항 최초의 광동체 투입 노선이기도 하다. 브로츠와프에 LG에너지솔루션, 포스코 등 한국 기업이 대거 진출해있기 때문에 출장 수요를 잡기 위한 용도로 보인다.
[1] 2023년 6월 30일 기준.[2] 독일어 명칭은 슐레지엔, 체코어 명칭은 슬레스코, 폴란드어 명칭은 실롱스크.[3]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사후 왕의 유언에 따라 네 아들들, 미망인이 폴란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그 중 크라쿠프가 있는 마워폴스카(소폴란드), 비엘코폴스카(대폴란드) 동부, 그단스크가 있는 그단스크 포메른 등 핵심지역은 '연장자령(크라쿠프 공작령)'으로서 자식들 중 최연장자가 자신의 영지에 더해 추가로 이 지역을 통치하고 전체 폴란드를 대표하는 고공(wielki książę)이 되도록 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아들들이 땅을 가지고 싸우지 않도록 유언에 여러 장치를 마련해 두었으나, 이것들은 곧 무시되었고 아들들은 '연장자령'을 가지기 위해 싸워댔다. 아들들의 대가 지나고 나서도 각 공국들은 이 지역에 있는 수도 크라쿠프, 그리고 고공의 타이틀을 놓고 다퉜으며 각종 외교적, 군사적 이유로 고공들이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잦았다. 이때의 폴란드 고공 중에는 3번이나 물러났다가 다시 복위하여 재위가 4시기로 나뉘는 산도미에시 공작 레셰크 1세, 대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3세 같은 자들도 있었다. 이 와중에 기존의 공국이 쪼개져서 새로운 공국들이 형성되기도 했고, 고공위을 차지한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1226년 이 지역에 튜튼 기사단을 불러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혼란은 쿠야비야(Kujawia) 공 브와디스와프 1세가 크라쿠프와 폴란드 상당부분을 정복하고 1320년 폴란드 국왕으로 대관하면서 끝났다. 아들 카지미에시 3세(카지미에시 대왕)는 1351년 마조프셰 공국을 속국화하며 폴란드의 통합을 마무리했다.[4] 엄밀히는 레그니차에서 남쪽으로 5km떨어진 레그니츠키에 폴레(Legnickie Pole). 독일어 명칭은 발슈타트(Wahlstatt).[5]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의 분열을 수습하고 왕으로 대관함에 따라 폴란드는 왕국으로 바뀌었다.[6] 보헤미아 룩셈부르크 왕조의 초대 국왕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이자 카를 4세의 아버지.[7] 헝가리 국왕으로는 울라슬로 2세, 크로아티아 국왕으로는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로비치. 리투아니아 대공 겸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의 장남인데 아버지만큼이나 띨띨하고 예스맨 본능으로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 둘 다 말아먹었다. 애초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된 이유도 선대 울라슬로 1세의 조카이자 라슬로 5세의 외조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귀족들이 가지고 놀기 좋은 멍청이었기 때문이다.[8] 헝가리 국왕으로는 러요시 2세, 크로아티아 국왕으로는 루도비크 2세.[9]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동생.[10] 안슐루스로 독일 땅이 된 빈은 제외했다. 드레스덴(629,713명)과 규모가 비슷했고, 프랑크푸르트(548,220)보다 인구가 많았다. 프로이센 자유주 내에서는 베를린, 쾰른, 에센 다음가는 규모.[11] 폴란드어로 오드라 강.[12] 폴란드어로 니사 키워즈카 강.[13] 폴란드어로 오드라-니사 우시츠키예.[14] 특히 르부프 출신 실향민들이 브로츠와프에 많이 정착했는데 이를 주제로 한 씁쓸한 농담이 있다. A: 자네 말투가 왠지 낯설지가 않구만. 어디에서 왔나? B: 브로츠와프에 살아. A: 이런 우연이 있나! 나도 르부프 출신인데![15]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도서관에 이어 폴란드에서 두번째로 큰 도서관이다.[16] 통칭 기준. 정식 명칭은 이반 프란코 르비우 국립대학교(Львівський національний університет імені Івана Франка)[17] 다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독일의 브레슬라우였다.[18]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첫 환자가 이곳에서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은 전염에 의한 발병은 드물고 무작위 발병이나 가족력에 의한 발병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첫 번째 환자가 이 곳에서 확인되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