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03:27:22

오토 클렘페러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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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1f2023>파일:D8FE539D-CCB2-44DA-9D5B-B6EEC0E8759F.png그라모폰 명예의 전당은 예술적 탁월함, 혁신, 혹은 상상력을 통해 클래식 음악 녹음에 기여한 예술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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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오토 클렘페러
Otto Klemperer
파일:48AD0F87-4BBE-43D3-AFF3-1B2F3EC20F8B.jpg
<colcolor=#fff> 출생 1885년 5월 14일

[[프로이센 왕국|]][[틀:국기|]][[틀:국기|]] 브레슬라우[1]
사망 1973년 7월 6일 (향년 88세)

[[스위스|]][[틀:국기|]][[틀:국기|]] 취리히
신장 195.6cm(6피트 5인치)
국적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2]

[[독일|]][[틀:국기|]][[틀:국기|]] |
[[이스라엘|]][[틀:국기|]][[틀:국기|]]
직업 지휘자, 작곡가
가족 슬하 1남 1녀
종교 유대교천주교유대교
레이블 주로 EMI(현 워너 클래식)
1. 개요2. 생애
2.1. 독일 시절2.2. 미국 시절2.3. 유럽 복귀2.4. 말년
3. 지휘 스타일과 평가4. 가족 관계5. 기타6.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1961년 11월 & 1962년 3월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합창단,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3], 힐데 로셀 마이단[4]과 함께한 구스타프 말러교향곡 2번 녹음.
느릿한 발걸음으로 거대한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5].

독일의 지휘자, 작곡가.

엄격하고도 냉철한 지휘 스타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으로도 유명하다.[6]

2. 생애

2.1. 독일 시절

1885년 5월 14일 독일 제국 슐레지엔 주의 브레슬라우(오늘날의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에 함부르크로 이사를 갔고 5세 때 피아노 레슨을 하던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된 오토는 아버지 역시 아마추어 성악가였던 음악적인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전문 음악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이후 함부르크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오토는 1901년에 프랑크푸르트 고등 음악학교에 들어갔다가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오늘날의 베를린 예술대학교)로 가게 된다.

1905년에 클렘페러는 베를린에서 당대 최고의 명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를 만났고, 동년 11월 8일에는 말러가 참석한 가운데 베를린에서 오스카 프리트[7]가 지휘하는 말러의 교향곡 2번 연주회에서 무대 밖 밴드를 지휘했다.

1906년 5월에는 베를린에서 전설적인 명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1873~1943)가 연출한 지옥의 오르페에서 프리트의 바통을 이어받아 지휘자로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1907년에는 을 방문했을 때 말러의 교향곡 2번을 피아노로 편곡했으며, 말러가 이를 보고 감탄하며 클렘페러를 추천하는 추천서를 써준다. 같은 해에 클렘페러는 프라하의 도이치 가극장의 합창단 지휘자 겸 부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당대 최고의 지휘자의 인정을 받고 출세하게 된 클렘페러는 말러의 추천서를 평생 간직하게 되었다.

1910년부터는 함부르크 시립 가극장의 부지휘자를 맡았고, 그의 지휘 하에서 20세기 초반의 유명 소프라노들인 로테 레만(Lotte Lehmann, 1888~1976)과 엘리자베트 슈만[8]가 데뷔 무대를 가지게 되었다. 1912년부터는 바렌에서 처음으로 수석 지휘자를 맡게 되고, 1914년부터 1916년까지는 슈테른 음악원에서 클렘페러의 은사였던 한스 피츠너[9]의 대리로 알자스에 있는 슈트라스부르크 극장 감독을 겸했고, 1917년부터 1924년까지는 쾰른 가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일하게 되었다.

1924년에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안톤 브루크너교향곡 8번 3악장만을 어쿠스틱으로 녹음하며 생애 첫 녹음을 했고, 같은 해에는 비스바덴 오페라 하우스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1927년까지 그곳에서 일했고, 1926년에는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가 되어 미국 데뷔를 하며 말러의 교향곡 9번레오시 야나체크신포니에타를 미국 초연했다. 그리고 1927년부터는 새로운 작품과 혁신적인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 베를린 당국의 뜻에 따라 크롤 오페라 하우스의 초대 국장으로 10년 계약을 맺었다. 이곳에서 클렘페러는 아놀드 쇤베르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파울 힌데미트 등 많은 현대 작곡가들의 최신 오페라들을 연주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연주할 시에 소위 '신바이로이트 양식'이라고 불리는 연출을 택하며 보수적인 바그네리안들의 항의도 받았다. 1929년에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의 런던 초연을 가지며 영국에서의 첫 연주회를 가졌는데, 비록 브루크너 8번의 런던 초연 당시 곡 자체의 반응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엇갈렸으나, 클렘페러의 지휘는 'BBC가 런던에 클렘페러를 장기간 동안 임명해야 한다'는 평까지 들었을 정도로 대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크롤 오페라는 1931년 7월 3일에 극장의 보수적인 경영진들이 클렘페러의 '전체적인 정치적, 예술적 방향'을 탐탁지 않아한다는 이유로 해체되었고, 이후 클렘페러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이직하여 활동했고, 1933년에는 독일 문화에 공헌한 공로로 베를린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부터 괴테 메달을 수여받았으나, 같은 해에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스위스로 이주했다. 이주 직전에 클렘페러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하다가 지휘대에서 추락하여 머리를 크게 다쳤는데, 이때부터 오토 클렘페러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2. 미국 시절

이후 클렘페러는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기는 했으나 지휘 작업이 많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마침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직을 제의받아 1935년 미국으로 떠났다. LA에서 그는 브루크너, 말러, 쇤베르크[10], 스트라빈스키 등 당시의 보수적인 청중들에게는 생소했던 곡들을 지휘했다. 1936년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뒤를 이어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바로 전 해인 1935년 클렘페러가 뉴욕 필을 객원지휘했을 때 경영진이 비용이 많이 든다고 만류했던 말러의 교향곡 2번을 지휘했다가 5천 달러[11]의 적자를 본 적이 있었고 이 여파로 결국 뉴욕 필의 후임 지휘자는 존 바비롤리로 결정되었다. 클렘페러는 부활 교향곡 적자 사건 때문에 자신이 상임지휘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젊은 지휘자 바비롤리가 뉴욕 필의 차기 지휘자로 선임되자 화를 냈다. 1938년 초에는 재창단을 준비하던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초빙되어 단원 선발 등 악단 재건을 위한 작업에 참여했고, 연주회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피츠버그 심포니 측에서는 클렘페러에게 상임지휘자직을 제의했는데, LA필과 겸직을 진지하게 고려하던 클렘페러는 LA와 피츠버그를 계속 왕래하며 일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요청을 거절했다[12].

클렘페러 LA를 중심으로 샌디에고, 산타바바라 등 캘리포니아 서부 지역에서 활동했고, 피에르 몽퇴가 이끌던 샌프란시코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서로 객원지휘하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39년에 클렘페러는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뇌종양을 진단받고는[13] 보스턴에 가서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오른쪽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었으며, 발을 절게 되었다. 원래부터 앓고 있던 조울증이 수술 후 극도로 심해져 3년 가까이 이어졌다. 수술 후유증으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상임에서 퇴출되게 되었다. 특히 수술 후 첫 3년 동안은 심각한 조증 단계를 겪었는데, 실제로 1941년에는 친구들이 색정광을 연상시킬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던 클렘페러를 겨우겨우 뉴욕에 있는 정신요양원에 데리고 갔으나 얼마 안 가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정신요양원에 입원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사건도 사건이었으나 이 사건을 다룬 뉴욕 타임스 기사가 '클렘페러 도망, 성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는 등으로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았기 때문에 미국에서 클렘페러의 평판은 완전히 추락해버렸다. 그 후에는 장기간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클렘페러는 공식적인 녹음을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14].

2.3. 유럽 복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클렘페러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여 1946년에 스톡홀름에서 전후 첫 콘서트를 열었고, 1947년 빈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도 지휘했다. 그리고 1947년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국립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다. 하지만 공산 정권의 정치적 간섭에 실망하여 1950년에 사임했다. 1948년 3월에는 런던으로 가서 나중에 상임이 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처음으로 지휘했다. 1950년대에 클렘페러는 그 어떠한 오케스트라에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지휘자로 일해왔다. 그러나 헝가리 국립 오페라단을 사임한 후 당분간 고정적 포스트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물론 남미, 호주, 캐나다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객원 지휘 활동을 했다. 그는 특히 까다롭기로 유명한 런던 평단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이 와중에 1951년 후반에는 몬트리올 공항에서 얼음 위에서 미끄러져 넘어져 다리와 허리뼈가 부러져 8개월 동안 입원해야 했다.[15]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여권법이 바뀌며 1940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으며 소유하게 된 미국 여권의 갱신도 거부당하며 사실상의 무국적자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클렘페러와 가족들은 1년간 미국에서 출국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버렸다. 다행히 숙련된 변호사의 도움으로 클렘페러는 1954년에 임시 여권을 얻고는 아내와 딸과 함께 스위스 취리히에 이주, 정착하여 독일 시민권 및 여권, 그리고 스위스 영주권을 얻게 되었다.

이 무렵에 월터 레그[16]는 자신이 설립한 오케스트라이기도 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주축이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이 되면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서 일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클렘페러와의 관계를 구축하며 본격적인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첫 녹음은 1954년 10월에 이루어졌는데,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에서 연주회를 취소하고 은퇴한지 한달 뒤였다. 1957년에는 필하모니아 합창단을 창단해 클렘페러가 지휘한 루드비히 반 베토벤교향곡 9번 연주회에서 데뷔 무대를 가지게 했다. 그러나 1958년 9월에 클렘페러는 기관지염이 있던 와중에도 침대에서 담배를 문 채로 잠에 들었다가 이불에 담뱃불이 번지며 심한 화상을 입었고[17], 치료를 받느라 1959년 8월까지 거의 1년 동안 지휘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겨우 건강을 회복한 클렘페러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로 돌아오자 레그는 클렘페러를 필하모니아의 첫 수석 지휘자이자 '종신 음악 감독'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후 클렘페러는 1961년에 코벤트 가든에서 피델리오를 지휘하며 다시 오페라 연주회를 가졌는데, 크롤 시대에 비해서는 혁신적인 면이 많이 준 '전통적인' 무대와 연주를 보여줬다고 전해진다.

2.4. 말년

1960년대 초부터 프로그래밍의 자유가 EMI의 경영진들에게 방해를 받아왔던 데다가 클렘페러가 나이가 들면서 지휘력이 약해지며[18] '오케스트라 규율과 표준이 떨어진다'고 여긴 레그는 참다못해 1964년 3월에 사전 경고 없이 '현재 약속을 이행한 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활동이 무기한 중단될 것'이라는 내용의 언론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에 클렘페러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반발하며 수석 클라리넷 주자였던 베르나르드 월튼(Bernard Walton, 1917~1972)의 주도로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New Philharmonia Orchestra)라는 자체적인 새 오케스트라를 형성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는 당시 다수의 유대계 독일인처럼 유대인에 대한 정체성을 중요시하지 않고 개종하고 평범한 세속적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으나, 만년에 다시 유대교 신앙으로 돌아가 1967년 유대교로 다시 개종했고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1970년에는 친여동생이 사는 이스라엘을 방문했고, 이때 독일 시민권과 스위스 영주권을 유지한 상태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수여한 이스라엘 시민권도 수락했다.

이후 1971년 9월 26일에 클렘페러는 페스티벌 홀에서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의 슈테판왕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4번,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을 지휘하며 생전 마지막 연주회를 가졌다[19]. 이후 1972년 1월에 클렘페러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을 지휘하기 위해 취리히에서 런던으로 갔으나, 공연 예정일로부터 바로 전날에 '더 이상 대중 공연의 긴장을 감당할 수 없다'고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지휘자에서 은퇴했고, 이와 함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자리에서도 물러나며 66년의 지휘 인생을 끝마친다.

이후 클렘페러는 취리히의 자택에서 살다가 1973년 7월 6일에 취리히의 자택에서 잠자던 중 향년 8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클렘페러의 장례식은 그로부터 4일 뒤인 1973년 7월 10일에 치러졌고, 클렘페러는 취리히 프리젠베르크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도 월터 레그의 사망 약 반년 후이자 리카르도 무티가 상임으로 재직하던 1977년 9월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게 된다.

3. 지휘 스타일과 평가

그의 대표 명연 중 하나인 브람스 독일 레퀴엠(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61, EMI)
20세기를 대표하던 전설적인 지휘자로서, 특히 독일 음악을 지휘하는데 탁월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베토벤부터 브람스와 브루크너에 이르는 작품에서는 특히 고평가 받고 있다.

지휘스타일 자체는 소위 말하는 '독일답다'는 차가우면서도 엄중하고 무뚝뚝한 지휘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만, 투명하면서도 직관적이기에 멜로디와 주제의 흐름만이 아닌 그 안에서의 곡의 구조를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다.

그렇다고 살짝은 매정해보일 순 있는 차가움이지만 엄중하면서도 사운드가 매우 깊어 카라얀같이 부드러운 풍부함은 아니지만 차가운 풍부함을 느낄 수 있어 냉철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할 나위가 없는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베토벤의 장엄미사피델리오 피날레 부분을 들어보면 그 특유의 사운드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말년의 몇몇 연주에서는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를 취하기도 했는데, 그 일례로 1968년에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말러의 교향곡 7번은 러닝타임이 무려 약 101분에 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20].

4. 가족 관계

클렘페러는 1919년에 결혼하며 아들 1명과 딸 1명을 뒀다.

아내 요한나 가이슬러(Johanna Geisler, 1888~1956)는 미혼 재봉사의 딸로 태어났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신문 광고에 낸 아이 입양 광고를 본 가이슬러 부부가 요한나를 입양했다. 어릴 때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음악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한동안 오페라 합창단에서 제2알토를 부르다가 노력 끝에 마술피리밤의 여왕까지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연기에도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917년 초에 쾰른에서 피델리오를 지휘하던 클렘페러가 마르첼리네 역할을 맡은 그녀를 알게 되며 둘은 사랑에 빠졌고, 1919년에 드디어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 가이슬러는 18세 때 장교와의 관계에서 낳은 혼외자 카를라(Carla)도 데리고 왔으며, 클렘페러는 아내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녀는 유명 지휘자인 남편의 후광 하에 남편이 지휘하는 많은 공연에서 노래를 불렀으나, 이후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소프라노로서의 커리어를 마치게 되었다. 현재 그녀의 노래가 전해지는 녹음은 1932년 12월에 에리히 클라이버의 지휘로 녹음된 율리우스 비트너[21]의 오페라 '금의 지옥'의 불완전한 라디오 녹음 단 하나밖에 없다. 1956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아들인 베르너 클렘페러(Werner Klemperer, 1920~2000)는 2차 대전 동안 미군에서 복무하다가 1947년브로드웨이에서 데뷔한 후 미국에서 유명한 코미디언으로 일했는데, 특히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포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여 1965년부터 1971년까지 CBS에서 방영한 시트콤 '호간의 영웅(Hogan's Heroes)'에서 베르너는 포로 수용소 사령관인 빌헬름 클링크 대령 역을 맡으며 프라임타임 에미상 코미디 시리즈 부문 남우조연상을 2번(1968년, 1969년) 수상받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후에는 바리톤 가수로도 활동하며 오페라와 뮤지컬 양쪽에 모두 출연했고, 클래식 작품에서 내레이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참고로 베르너는 3번이나 결혼하여 1남 1녀[22]를 낳았고, 2000년 12월 6일에 뉴욕 맨해튼에서 향년 80세를 일기로 암으로 사망했다.

딸인 로테 클렘페러(Lotte Klemperer, 1923~2003)는 거의 평생 아버지와 함께 했다. 10대 후반 아버지가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릴 때 이를 변호하기 위한 어머니의 인터뷰를 영어로 통역하는 일을 하면서 대중 앞에 처음 서게 되었다. 그리고 클렘페러가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활동을 하지 못할 때 로테가 공장에서 일을 하여 집안이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1940년대에는 한때 뉴욕과 파리에서 독립된 삶을 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또 병마에 시달리던 아버지와 함께 하게 되었다. 특히 1956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녀는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간호사, 매니저이자 비서로서 아버지와 관련된 계약, 행정, 협상 등의 일을 도맡아 했으며, 건강 문제를 달고 살던 아버지의 복약 등 건강 문제를 관리했다. 클렘페러가 50년대 후반 재기에 성공하고 거장 지휘자로서 명성을 되찾은 것은 외동딸 로테의 헌신 덕분이라는 평이 있다. 그녀는 이것을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위대한 음악가인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했으며 아버지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소 괴팍한 성격으로 알려진 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정중하고 겸손했으며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쾌활했다고 한다. 그녀는 말주변이 서툰 아버지가 협연자, 오케스트라 경영진들과의 관계를 보다 원만히 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사후에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았고, 아버지 사후 들어오는 음반 저작권료가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취리히의 작은 아파트에서 검소하게 생활하며 아버지의 음악적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고 때때로 아버지를 기념하는 행사를 주관하며 공개석상에 얼굴을 내비추었다. 또한 어머니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여 1983년에 어머니의 전기를 출판했다. 2003년 7월 1일에 취리히에서 향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출처

5. 기타

1961년 인터뷰
  • 그는 말러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브루노 발터와 함께 말러를 활발히 연주하며 그의 작품을 알린 선구자 중 한 명이었지만, 말러의 모든 작품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교향곡 1번은 '4악장이 어리석게 질주한다'는 등의 이유로 평생 1번만 지휘했으며, 교향곡 3번은 매우 싫어했고, 교향곡 5번은 1악장만 좋아했으며[23] 교향곡 6번은 말년에도 이해를 하지 못했고, 교향곡 7번도 공개적으로는 1922년에 단 1번만 지휘했다. 그래서 EMI에 남긴 전곡녹음도 4개의 교향곡(2, 4, 7, 9)과 대지의 노래 뿐이다. 오히려 그는 1960년 후반 갑작스런 말러 열풍이 불면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말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말러를 듣고 좋아하는 척 한다며 세태에 대해 다소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는 비록 말러의 모든 작품이 뛰어나다고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말러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비용이 무척 많이 드는 부활 교향곡의 공연을 고집하다가 적자를 보고 이 때문에 뉴욕 필에 더 이상 초청받지 못하는 등 커리어에서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 1960년에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기처럼 말러와의 인연이 있는 당대의 명지휘자이자 브루노 발터에 대해 '그는 로맨티시스트였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모랄리스트가 아니지만 그는 확실한 모랄리스트였죠.'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 클렘페러의 사촌인 빅터 클렘페러(Victor Klemperer, 1881~1960)는 언어학자로 일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독일에 머물렀음에도 아내인 에바(Eva)가 순수 '아리안' 독일인이었던 덕분에[24] 나치의 감시를 받는 등의 고초를 겪긴 했어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빅터 클렘페러는 동독에서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대학 교수로 활동하며 1947년에 나치의 선전 언어에 대해 다룬 '제3제국의 언어: 문헌학자의 노트(LTI - Lingua Tertii Imperii: Notizbuch eines Philologen)'를 출판했으며, 1995년에는 나치 시대 내내 제3제국 하에서의 생활을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쓴 빅터 클렘페러의 일기가 출판되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6. 참고 자료


[1]폴란드 브로츠와프[2] 정치성향 등의 문제로 미국인으로서의 활동은 길지 못했다.[3] Elisabeth Schwarzkopf, 1915~2006, 독일의 명리릭 소프라노. 1942년에 나치당에 입당하는 등 나치에 협조한 과오가 있어 2차 대전 종전 후 1년간 활동을 금지당하기도 했다.[4] Hilde Rossel-Majdan, 1921~2010. 오스트리아의 콘트랄토.[5] 1:15:27부터 들을 것을 추천한다.[6] 숱한 고생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음에도 오랫동안 지휘대를 놓지 않았으며 88세의 연령으로 세상을 떠난 점 때문에 한국에서는 불리는 별명 중 하나가 불사신이다.[7] Oskar Fried, 1871~1941, 독일의 지휘자 겸 작곡가. 참고로 프리트는 1921년에 말러 교향곡 2번 전곡을 녹음함으로서 세계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지휘자라는 기록을 세웠다.[8] Elisabeth Schumann, 1888~1952. 참고로 클렘페러는 그녀와 바람을 피우다가 이에 분노한 그녀의 남편이 공연 중에 클렘페러를 폭행하려고 하자 클렘페러는 연단에서 뛰어내려 맨주먹으로 그 남편을 공격했고, 이 소식은 해외에 보도되며 클렘페러느 단숨에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9] Hans Pfitzner, 1869~1949, 독일의 작곡자 겸 지휘자. 말년에는 나치 독일에 모호한 입장을 취하다가 나치에 협조한 것으로 간주되어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나치당원이 아니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10] 이 무렵에 클렘페러에게 작곡 수업을 제공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클렘페러는 쇤베르크를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작곡 교사'라고 극찬하기도 했다.[11] 2023년 기준으로는 무려 10.9만 달러(약 1.3억 원)나 되는 거액이다.[12] 이후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은 헝가리 출신의 명지휘자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 1888~1963)가 맡게 되었다.[13] 이는 1933년에 있던 전술한 추락 사고가 원인이었다.[14] 물론 당시에 지휘한 라디오 방송 실황 같은 경우에는 진작에 방송용 녹음이 남겨져 후에 음반으로 발매되었다.[15] 이 후유증으로 클렘페러는 이후 지휘를 앉아서 하게 된다.[16] Walter Legge, 1906~1979, EMI 소속의 영국의 전설적인 레코딩 프로듀서. 아내가 상술한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였다.[17] 이때 클렘페러가 불을 끄려고 옆에 있던 물병을 부었는데 그 병에 든 물이 알고 보니까 장뇌였기 때문에 불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18] 실제로 클렘페러는 말년에 청력이 다소 악화되었다고 한다.[19] 참고로 이 연주회 실황은 녹음되어 음반으로 발매되었다.[20] 참고로 말러 교향곡 7번의 평균 연주시간은 대략 75~80분 정도다.[21] Julius Bittner, 1874~1939,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다소 특이하게도 1920년대 초반까지는 판사로 재직하는 등 법률 쪽에서 일하면서 작곡 활동을 했으며, 구스타프 말러의 사후에 그의 재산 평가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22] 모두 첫번째 처 소생이었다.[23] 덤으로 클렘페러는 3악장(스케르초)은 너무 길며 4악장(아다지에토)은 살롱음악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말러 5번의 3악장은 교향곡 역사상 가장 긴 스케르초 중 하나로도 유명하다.[24] 참고로 나치는 정말 의외로 유대인과 비유대인간의 강제 이혼은 효과적으로 강요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덕분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