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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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1] (1916년 4월 22일 ~ 1999년 3월 12일)은 미국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이다.2. 생애
뉴욕에서 유대인 랍비 가문에서 태어나 4세 때였던 1920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루이스 퍼싱어에게서 교육을 받고, 7세 때였던 1923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1925년 파리에서 제오르제 에네스쿠, 스위스에서 아돌프 부슈에게 배운 후, 파리에서 라무르 관현악단과 함께 연주하였다. 귀국 후 12세였던 1928년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독주자로서 베토벤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천재 소년으로 명성을 얻고, 세계 각국을 순회 공연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10대 부터 에드워드 엘가나 브루노 발터 같은 거장과 협연했는데 1930년대에 들어 오이스트라흐나 야샤 하이페츠 등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메뉴인은 기교적인 부분보다 깊은 감성과 몰입감 있는 해석으로 자신만의 차별화된 색채와 음악성을 구축해 나가며 명성을 얻었다.
랍비 가문 출신의 정통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어려움에 처한 독일로 가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당시 소련 군정이 베를린 필의 공연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미국 출신의 유대인이 그가 나서 해결하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베를린 필의 임시 지휘자였던 세르주 첼리비다케, 그리고 1947년 복귀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여러 공연을 하였으며 음반을 남겼다.
1950년 시가코 심포니가 푸르트벵글러를 영입하려 하자 미국의 유대인 음악가들이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푸르트벵글러는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단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그를 옹호했다. 또다른 유대인 거장인 브루노 발터 역시 개인적으로 푸르트벵글러와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푸르트벵글러를 반대하는 것은 미국 유대인 음악가들이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벌리는 치졸한 짓이라고 비판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한 후 그는 영국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59년에 지휘자로 데뷔했다. 오이스트라흐 부자[2]와 협연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이스트라흐가 지휘하는 협주곡에 바이올린주자로 섰다가 역으로 오이스트라흐 부자의 연주의 지휘를 맡아주기도 했다.
70년대에 들어서서는 지휘자로 주로 활동했다. 자선사업을 하며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해냈고 그들을 데리고 병원이나 복지센터등을 찾아가 무료로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때 바흐의 샤콘느를 성당에서 연주하면 세상의 악이 다 사라질거라 믿었다는데 거기에서 기인했는지 평생 헌신하는 삶을 살다가 떠났다. 그의 비전은 정의실현에 있었다고 하니 말 다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