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13:28:16

디누 리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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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뮤직 매거진 선정
역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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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BBC 뮤직 매거진이 전세계 저명한 현역 피아노 연주자 100명에게 레코딩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2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목록이다. 출처
<rowcolor=#000> 순위 피아니스트
<colcolor=#000><colbgcolor=#fff> 1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2위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3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4위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5위 알프레드 코르토
6위 디누 리파티
7위 아르투르 슈나벨
8위 에밀 길렐스
9위 마르타 아르헤리치
10위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11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12위 이그나츠 프리드만
13위 라두 루푸
14위 에드빈 피셔
15위 빌헬름 켐프
16위 머리 페라이어
17위 글렌 굴드
18위 발터 기제킹
19위 요제프 호프만
20위 클라우디오 아라우
○: 생존 피아니스트
†: 목록 선정 당시 생존하였으나 나중에 사망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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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레퍼토리4. 연주

1. 개요

이름 콘스탄틴 디누 리파티
Constantin "Dinu" Lipatti
출생 1917년 3월 19일
루마니아 왕국 부쿠레슈티
사망 1950년 12월 2일
스위스 제네바 (향년 33세)
활동 영역 연주, 작곡
사용 악기 피아노
장르 클래식 음악
레이블 EMI

루마니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솔리스트 활동은 5년여에 불과했지만 간결하고 아름다운 연주와 빼어난 곡 해석 능력으로 천재 뮤지션으로 칭송받았다.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져 몇 명의 작품만을 연주했으며, 특히 쇼팽의 연주로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백혈병으로 요절하여 커리어가 길지 못했다.

2. 생애

1917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유명한 음악가 제오르제 에네스쿠 였다.

아버지인 테오도르 리파티는 외교관이긴 했지만 칼 플레쉬(Carl Flesch, 1873-1944)와 동문수학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 제자로서 음악은 좀 하던 편이었으며 어머니 안나 라코비셰뉴 역시 피아니스트였으며 리파티 역시 한 살이 되기 전에 음악에 맞추어 손뼉을 쳤고 부모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던 그는 네 살 때 치러진 자신의 세례식에서는 모차르트의 <미뉴에트>를 연주할 정도였다. 이러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리파티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것은 열 한 살이 지나서였다. 그의 부모는 한 번 들은 곡들을 그대로 쳐내는가 하면, 즉흥적으로 피아노 소품들을 지어내기도 하는 아들의 천부적인 재능이 정규교육에 시들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1934년 빈 국제 콩쿨에서 2위를 하였는데, 억울하게 2위를 했다. 빌헬름 박하우스(Wilhelm Backhaus, 1884-1969), 에밀 폰 자우어(Emil Von Sauer, 1862-1942), 펠릭스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 1863-1942),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 1893-1954) 등 심사위원들은 그의 걸출한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열 여섯은 국제 콩쿠르에 우승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라고 판단하여 1등상을 출전 제한 연령을 꽉 채워 출전한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콘(Bolesław Kon, 1906-1936)에게 주었던 거였다. 콘도 나름 인정받던 피아니스트지만, 운좋게 1위를 해버렸고 이로 인하여 억울하게 비난도 받았고 거기에 유태인이라서 당시 폴란드에서 여러 모로 마음고생하던 끝에 겨우 2년 뒤인 1936년 만 29살로 음독자살했다.

당시 심사위원이던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1877-1962)는 리파티에게 1등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예술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격노하면서 심사위원직을 사퇴해버렸다. 그리고 코르토는 자신이 교수로 있는 파리 고등음악원으로 리파티를 초청했기에 그해, 파리로 이주하여 그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2차 대전이 격화되며 1943년 조국을 떠난 리파티는 1944년부터는 연주여행을 계기로 스위스에 정착했고 에드빈 피셔의 권유로 제네바 음악원의 교수 제의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스위스에 막 정착했을 무렵 병마가 그를 덥쳤다. 처음에는 의사들도 병명을 찾아내지 못했고, 1947년에 최종적으로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리파티는 병마와 싸우며 연주회 활동을 지속했다.

1946년 EMI와 녹음 계약을 맺었고, 건강으로 인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EMI에서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프로듀스로 많지 않지만 음반들을 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다.

1946~7년 그는 실험적으로 코르티손 치료를 받았고, 병세가 상당히 호전되었다. 리파티는 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도 했다. 이 시기 리파티는 여러 연주회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8년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한지 한달 후 무렵부터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방사능 치료 부작용까지 겹쳤다. 1948년에 건강이 악화되는 속에서 마들렌과 결혼을 했다.

1950년 미국에서 개발된 코르티손 신약 덕분에 일시적으로 병세가 호전되었고, 덕분에 7월 월터 레그와 함께 레코딩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콘서트도 다시 재개하여 1950년 8월 23일 루체른 페스티벌에 출연하였으나 이것은 그의 마지막 오케스트라 협연이 되었다. 이날 연주한 곡은 그의 대표적인 레코딩 중 하나가 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연주회 당일 오전 카덴차 없이 오케스트라와 한번 맞춰보고 무대에 올랐다. 이 연주는 라디오 방송 중계가 되었으나 '스위스 음악가 노동조합(Swiss Musicians Union)'의 규칙에 의해 녹음 음원은 방송된지 3주 이내에 폐기처분되어야만 했다. 몇개월 후 리파티가 사망했고, 이후 리파티의 아내와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가 당시 방송 송출된 음원을 청취자들이 녹음한 음원이 있을까 하여 8년간 전유럽을 수소문한 끝에 두 가지 녹음본을 찾아내었고 마침내 음반으로 세상에 출시될 수 있었다.

루체른 페스티벌에 이어 1950년 9월 16일 프랑스 브장송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마지막 콘서트가 되었다. 그는 14곡의 쇼팽 왈츠 레퍼토리 중 마지막 왈츠 2번을 마치지 못하고 기력이 다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리파티는 앵콜곡으로 바흐의 BWV147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을 연주하며[1] 그의 마지막 연주를 마쳤다. 이 브장송의 마지막 콘서트 실황은 음반으로 남아 있는데, 마지막 바흐의 곡만은 현장에 있던 레코딩 엔지니어들이 리파티가 다시 연주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해 녹음되지 못했다.

세 달이 못 되어 리파티는 제네바 교외에서 33세 젊은 나이로 온가족이 보는 앞에서 조용하게 타계하였다.

3. 레퍼토리

그는 같은 레파토리를 집중적으로 연주했는데, 특히 쇼팽 왈츠 전곡,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바흐 파르티타 1번, 슈만 피아노 협주곡 등이 유명하다. 카라얀과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공연하였고,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레코딩하기도 하였다. 카라얀과의 슈만 협주곡 녹음은 연주 속도가 빠른 편인데 이는 카라얀의 주장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피아노를 위한 작곡도 하였다.

레퍼토리가 편중된 것은 그의 완벽주의 성향 탓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은 그의 건강 탓도 크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체력 소모가 큰 곡들을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

4. 연주

Chopin, Piano Sonata Op.58Chopin, Nocturne Op.27 No.2
Chopin, Waltz Op.42Chopin, Barcarolle Op.60

[1] 평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리파티가 좋아하던 곡으로, 성인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서 최초로 연주했던 곡도 이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