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쇤베르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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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1970><colcolor=#ffff00> 아르놀트 쇤베르크 Arnold Schönberg | |
본명 | 아르놀트 프란츠 발터 쇤베르크[1] Arnold Franz Walter Schönberg |
출생 | 1874년 9월 1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
사망 | 1951년 7월 13일 (향년 76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작곡가, 화가, 작가 |
종교 | 유대교 → 개신교(루터회) → 유대교[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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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혁명적이 되기를 강요당한 보수주의자이다."
― 쇤베르크가 항상 자신을 정의한 말이다.[3]
― 쇤베르크가 항상 자신을 정의한 말이다.[3]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의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더불어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최고 거장으로 꼽힌다.
2. 생애
쇤베르크는 1874년 음악의 도시인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유대인 부모인 자무엘 쇤베르크(1838~1889)와 파울리네 나크호트(1849~1921) 내외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규 음악교육은 많이 받지 못해 8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고, 16살 때부터 아마추어 실내악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면서 지휘자 쳄린스키에게 3개월간 대위법을 배운 것이 전부이고, 나머지는 모두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이후 편곡 등의 일을 하면서 직접 작곡을 시작하는데, 주로 말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아 후기 낭만주의의 색깔이 짙은 곡들을 작곡하게 된다. 특히 말러를 거의 숭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때 현악 6중주 '정화된 밤',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등을 작곡한다.[4] 그러나 빈에서는 보수파들의 공격을 받아 '정화된 밤'이 연주를 거부를 당하는 등의 일을 당하게 된다. 이 때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등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이후에도 친분을 유지하며 2차 빈 악파[5]를 구성하게 된다.
후기낭만주의적 작풍으로서의 그의 작품 중 정점은 1910년에 완성된 '구레의 노래'였다. 이 곡은 5명의 독창자, 8부 혼성 합창, 3부 남성 합창, 해설자, 140여명의 관현악단을 동원한 말러의 8번 교향곡에 필적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중의 어마어마한 호응을 이끌어내며 찬사를 받았지만, 쇤베르크가 '대중의 입맛에 맞춰' 작곡한 것은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계속하여 수많은 혹평과 비난을 받아가면서 현악 사중주 1, 2번, 실내 교향곡 1번 등을 통해 조성을 점차로 허물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조성을 포기하고 노골적인 무조음악으로 기울어갔다. 이 때에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연가곡 '달에 홀린 피에로'등을 썼고, 본격적으로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표현주의 음악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어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한동안 작곡을 중단하게 된다.
전후 다시 작곡을 하면서, 그는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12음 기법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 기법에 대해 '향후 100년간 독일 음악을 최고봉에 올릴 발견'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기법을 사용해 그는 피아노 모음곡, 관현악 변주곡, 현악 4중주 3번등을 작곡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작품도 인정을 받게 되어, 1925년 베를린 예술학교의 교수에 임용되지만, 얼마 안가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고, 유대인이었던 그는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에서 작곡을 가르치던 중 나치의 명령으로 학교에서 해임되고 뉴욕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는 유럽에 오지 않았다.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체계화되고 노골화되기 이전에 미국으로 서둘러 망명을 간 것은 당시 지식인으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다소 오버스러운 대응이었다. 그러나 이후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심화되면서 쇤베르크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된다. 당시 나치가 유럽 거의 전역의 유대인을 모두 수용소에 가두고 절멸하리라고 제대로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업가로서 감이 좋았던 오토 프랑크 가족도 네덜란드면 괜찮겠지하고 이주했다가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여 망했다.
1936년,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그는 UCLA의 교수로 부임하고, 한동안 중단했던 작곡활동을 현을 위한 모음곡으로 재개하게 된다. 한편 그는 '야곱의 사다리', 오페라 모세와 아론을 완성하기 위해 구겐하임 재단에 기금을 신청했으나, 탈락하게 된다. 아마 기금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면 이 작품들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무렵 영화 대지 음악을 의뢰받아 맡으려다가 그만둔 바 있다.[6]
한편 나치의 만행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그도 음악을 통해 나치와 히틀러를 비판하게 된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바르샤바의 생존자, 나폴레옹에 대한 송가 등을 발표하여, 사회 참여적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음악의 정치성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그로서는 굉장히 전향적인 행보.
그리고 1951년 7월, 그는 종교음악 '시편', 오페라 '모세와 아론'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영면하였다. 유언은 "하모니(Harmony)..."
3. 평가
그의 작품들과 12음 기법은 생전에 많은 반대자들을 낳았으며, 대중적 인기로 따지면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의 시기가 '쇤베르크를 따르는 자 vs 쇤베르크에 반대하는 자'의 시기였다고 설명되기는 하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신고전주의를 따르는 작곡가들이 훨씬 수적으로 압도적인 것이 실상이었으며 '쇤베르크 파'인 작곡가들은 특이한 소수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 들어, 전후의 젊은 작곡가들이 그의 무조 음악과 12음 기법에 기초한 음렬주의에 관심을 갖고, 그것에 바탕한 곡을 쓰면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12음 기법을 음정뿐만 아니라, 길이, 강약, 음색에까지 사용하는 총렬주의로 나아가면서 이 방식은 음악계의 새로운 트렌드로서 한동안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고, 쇤베르크는 선구자적 인물로 추앙받게 되었다.오늘날의 쇤베르크에 대한 평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형성되었던 숭배 풍조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연스러운 미적 감각을 거슬러 작곡가의 통제만으로 구성된 음악을 고집한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쇤베르크 진영은 '베토벤의 작품들도 당시에는 이해되지 못한 '현대음악'이었지만 결국 위대한 고전으로 인정받았듯이, 12음 음악 역시 그러할 것이다'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하였지만,[7] 21세기에 들어서도 이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단 한 번도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 음악학자 스티븐 월시는 "쇤베르크는 탄생 후 150여년이 흘렀음에도 그 음악이 레퍼토리에 진입하지 못한 최초의 '위대한' 작곡가일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8]
음악학자이자 작곡가인 디터 델라 모트는 쇤베르크의 초기 표현주의 무조음악과 언뜻 거리가 멀어 보이는 스크랴빈의 후기 신비화음 무조음악을 '작곡가의 의도와 별개로' 비교 분석했을 때 화성적으로 거의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델라 모트의 저서 '화성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단위화성의 구성음 증가와 조성적 진행 회피라는 목적이 겹쳐져 일어난 필연적 일치로 치부할 수 있다 해도, 어쨌든 '뭐든지 극에 달하면 통한다'는 진리가 적용되는 재미있는 사례.[9]
4. 주요 작품
크게 4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후기 낭만의 영향
- 중기: 본격적인 무조음악의 시대
- 후기: 12음 기법의 사용
- 말기: 무조음악과 조성음악의 절충
4.1. 관현악
-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Op.5 [10]
- 실내 교향곡 1번 E장조 Op.9
-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 관현악 변주곡 Op.31
-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G장조
- 실내 교향곡 2번 E플랫 단조 Op.38
-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 Op.43b
4.2. 협주곡
- 바이올린 협주곡 Op.36
- 피아노 협주곡 Op.42
-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하프를 위한 녹턴
4.3. 실내악
- 현악 4중주 D장조
- 현악 4중주 1번 D단조 Op.7
- 현악 4중주 2번 F샤프 단조 Op.10
- 현악 4중주 3번 Op.30
- 현악 4중주 4번 Op.37
- 현악 6중주 정화된 밤 Op.4 [11]
- 7명의 연주자를 위한 세레나데 Op.24
- 피아노 5중주를 위한 '철교'
- 목관 5중주 Op.26
- 현악 3중주 Op.45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Op.47
4.4. 피아노
- 3개의 소품
- 네 손을 위한 6개의 소품
- 3개의 소품 Op.11
- 6개의 작은 소품 Op.19
- 모음곡 Op.25
4.5. 합창
4.6. 가곡
- 연가곡 '달에 홀린 피에로'
- 가공(架空)의 정원의 책 Op. 15
- 4개의 시 Op.2
- 6개의 시 Op.3
- 3개의 시 Op.48
4.7. 오페라
5. 작곡 기법
5.1. 무조적 표현주의
음렬주의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5.2. 음렬 작법
음렬 작법은 2차 빈 악파로 불리는 쇤베르크와 그의 두 제자에 의해서 정립된 작곡 기법이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현대음악'으로 연상하는 음악이 보통 이 사조에 포함된다. 이후 시도된 다른 현대음악들이 일반적이지는 않아도 컨셉이 확실해서 듣는 재미가 있거나 일단 이해는 할 수 있는 데 반해 음악만 들어서는 구성 논리가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음렬주의 음악은 낭만주의 때 까지 이어져 온 3화음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 중에 하나였으며, 기본적으로 한 옥타브 내 들어 있는 12개의 음계를 작곡가가 임의로 배열하여, 그 것을 소재로 삼아 작곡하는 기법이다. 설명만으로는 인위성이 상당히 강해 보이는 기법이므로[14] 이 방법이 음악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는데, 쇤베르크의 과거 무조적 표현주의 음악에서부터 음렬주의 음악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사를 보다 보면 이것이 아주 갑툭튀한 기법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하나의 12음렬 설정이 아닌 '음정'의 상징화 및 변용을 통한 음악 전개가 무조주의의 시작이었고, 이것의 포화 상태가 12음 기법이라는 결과를 만든 것.
일단 비(非) 조성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법인 만큼, 장음계, 단음계나 6음 음계(온음 음계), 선법같은 기존의 스케일들을 피하기 위해 음계 배치에 세심한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각 음계를 조성적으로 3도씩 간격을 벌려 스케일을 짜는 경우도 빈번했다.
실제로 조성적이면서 비조성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조성의 성향을 가진 음렬을 쓴 작곡가들도 많았다. 예를 들자면 알반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사용된 음렬은 단3화음과 장3화음의 교대, 그리고 바흐의 'Es ist genug' 인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 : 비 조성적인 음렬, 아래 : 조성적인 음렬.)
그렇다고 12개의 음을 모두 사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10개의 음계를 사용해도 되고, 5개를 사용해도 되고, 극단적으로 말해서 2개의 음계만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도 된다. 가까운 예로, 피에르 불레즈의 '노타시옹' (Notation) 은 B 음을 제외한 나머지 11개의 음계만 가지고 음렬을 구성한 작품이다.
('Notation' 의 음렬 구조. 총 11개의 음계가 임의대로 위치해 있다. 참고로 악보에 오류가 있는데 4번째 음은 E가 아닌 D이다.)
이렇게 만들어 진 음렬을 가지고 역행, 전위, 전위-역행 시켜 사용한다.
역행은 말 그대로 기존 음렬을 역행(Retrograde) 시키는 것 이다.
전위(Inversion) 는 기존 음렬의 음정 간격과 방향에 따라 배열을 바꾸는 것 이다.
전위-역행은 전위된 음렬을 다시 역행시키는 것 이다.
(위 부터 시작해서 기존의 음렬, 역행, 전위, 전위-역행)
마지막으로, 이 단계까지 형성된 음렬은 아래와 같은 도표에 의해 정리될 수 있다.
(David Cope 의 저서 '현대 음악 작곡법' 에 수록되어 있는 음렬도표)
이후 음렬 작법은 슈톡하우젠, 불레즈 등의 총렬주의자들에 의해 발달하게 되고, 새로운 형태를 띄게 된다.
6. 여담
-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바실리 칸딘스키,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 당대의 화가들과도 교류가 많았다. 개인전을 열기도 할 만큼 실력이 좋았지만,
자뻑 기질이 심해서인지주로 자화상에 집중되어 있는 편.
- '오스트리아의 반고흐'라고 불렸던 리하르트 게를스틀과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독선적인 성격이었던 게를스틀은 그래도 음악가들과는 종종 어올리곤 했는데 그러다 존경하던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만나게 된다. 그와 그 가족들의 초상화도 그려주면서 종종 가족들과도 만날 정도로 친해졌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작. 1908년 여름, 그는 여섯 살 연상이던 쇤베르크의 아내 마틸데와 사랑에 빠져 함께 빈으로 떠났으나 쇤베르크의 애원과 협박에 못 이겨 마틸데는 두 달만에 다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 버린다. 정신적 스승과 사랑을 동시에 잃고 상심한 게를스틀은 목을 매고 확실히 죽기 위해 자신을 칼로 찔러 자살했다. 이 때 상당수의 그림과 편지등을 불에 태웠는데 남은 그림 중 '웃는 자화상'이라는 그림이 유명하다. 웃는것 같기도 하고 우는것 같기도 한, 공허한 눈이 인상적인 그림이다. 쇤베르크도 이 사건으로 충격이 컸는지 이를 주제로 한 '행복한 손'을 작곡했다.
- 13 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13일에 태어난 것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면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때문에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원 명칭인 'Moses und Aaron'도 13자라고 해서 12자인 'Moses und Aron'으로 바꾸었다고. 게다가 13일에 태어나 13일에 사망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자신의 13의 배수인 78세의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 대비하고 있었는데, 점쟁이가 '7+6=13이니 76세에도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76세의 나이에 죽었다. 심지어 14일이 되기 13분 전인 23시 47분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떠돈다.[15]
- 1차 대전 중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한 그에게 상관이 "정말로 그다지도 불협화음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을 만드는 쇤베르크라는 작곡가냐?"고 물었을 때 쇤베르크는 "아무도 그런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결혼해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들 이름들을 전부 자기 이름인 'Arnold'의 알파벳을 뒤바꿔 지었다. 첫째는 'Ronald'로 하였고, 둘째는 'Roland'로 하려고 했으나 점성학으로 좋지 않은 이름이라는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나마 비슷한 이름인 'Lawrence'로 했다고.
-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올훼스의 창에서는 이자크 바이스하이트를 가르치는 지도교수로 등장한다. 이자크는 그가 혼외정사로 낳은 딸 아마리에 센베르크[17]와 잠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 재즈 기타리스트 짐 홀의 스승이다.
- 실험 영화 감독인 스트로브-위예가 좋아했으며, 그의 작품을 각색해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 탁월한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다. 저서 <Fundamentals of Musical Composition>에서 센텐스의 개념을 처음 제시한 바 있다.
- 클래식에 익숙하던 사람들이 가장 적응을 못하는게 쇤베르크 음악이지만, 오히려 현대음악 전공자 사이에선 가장 쉽고 고전적인 작곡가로 뽑힌다. 쇤베르크는 현대음악 중에서도 비교적 초창기 작곡자라 그 급진성이 덜한 편이기 때문. 현대음악 레퍼토리를 전문으로 했던 피에르 불레즈도 쇤베르크를 '쉬운 작품'으로 간주했다.
[1] 본래 Schönberg의 발음은 'ᄉᆈᆫ베어크'에 가깝고 80년대까지 'ᄉᆈᆫ베르크'로 표기되었으나, ㆉ 표기가 맞춤법 통일안에 어긋나는 탓에(즉 현대 우리말로 잘 안 쓰이는 탓에) 90년대 들어 원어 발음과 동떨어진 '쇤베르크'로 표기하게 되었다. # 독일어의 한글 표기에서 ö는 'ㅚ'로 표기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데, 문제는 인도유럽어 계열에서의 Sch 발음이 한글 표기상으로 그냥 ㅅ도 아니고 ㅅ 뒤에 i나 j계 이중모음이 따를 때에만 유도되는 후지경마찰음이라, 언어의 차이이니 별 수 없다. 억지로 음절을 나누어 적으면 '시왼베르크'. 간혹 '쉔베르크'로 표기된 곳도 있는데, 잘못된 표기이다.[2] 1898년 유대교에서 루터교로 개종하였으나 1933년 파리에서 다시 유대교로 개종하였다[3] 그는 자신을 독일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전통의 계승자라고 생각했다.[4] 그래서 이 때의 곡들은 비교적 덜 생경해 들을 만한 편이다.[5] 고전파 시대 빈의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을 부르던 빈 악파에 빗대 부른 말이다. 제2 빈악파 라고도 한다.[6] 12음 기법으로 쓰려고 했다고 한다. 현실화되었을 가능성은 제로이지만 진짜 통과되었다면 여러 의미에서 영화는 레전설 혹은 괴작이 되었을 듯.[7] 쇤베르크는 미래에는 식료품점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12음 음악을 흥얼거릴 것이라며 자신했다.(...)[8] 다만 월시가 저명한 스트라빈스키 연구자인 만큼 반대급부로 쇤베르크를 까는 것일 수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9] 델라 모트가 예로 든 스크랴빈의 전주곡 Op.74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고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무조적 느낌이 강하며, 특히 첫 번째 곡은 신비화음 특유의 색채조차도 (노골적으로 강조되는 두어 지점을 제외하면) 쉽게 느끼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가 신비화음을 매개 삼아 변화해 간 종착지가 쇤베르크의 초기 무조음악과 유사하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10] 같은 이름의 드뷔시의 오페라, 포레와 시벨리우스의 부수음악이 있다.[11] 실내악으로 만들어진 교향시로 보기도 한다. 참고[12] 절친이었던 화가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죽음을 다룬 작품이다. 다만 친형제같았던 사이임에도 게르스틀이 쇤베르크의 아내인 마틸드와 바람을 피웠고, 결과적으로 20대의 젊은 나이에 자살하게 된다.[13] 독일어 원제는 'Erwartung'이고 소프라노의 1막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연주시간은 30분 남짓이다.[14] 따지고 보면 조성적 질서 자체도 자연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음악적 의지를 따르면서 자연스레 갖춰지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여기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인위성을 높이는 것이 맞다.[15] 비슷한 사례로 제자인 베르크는 23이란 숫자에 집착했다. 스승처럼 자신이 두려워 한 숫자의 날짜에 죽지는 않았지만, 24일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죽었다.[16] 피아니스트 항목 3번인 영화.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한 거 말고 미카엘 하네케가 감독한 작품.[17] 번역상의 문제인지 국내판에서는 센베르크나 션베르크로 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