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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규갑
李奎甲[1]甲으로 오기되어 있다.]
파일:images(2).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원서(元瑞) / 운호(雲湖)
본관 덕수 이씨[2]
출생 1888년 11월 5일
충청도 아산현 신흥면 서강리
(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2리 서강마을)[3]
사망 1970년 3월 20일 (향년 81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
종교 개신교
학력 한성사범학교 (졸업)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 중퇴)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월선2리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 소개2. 생애3. 매체에서4. 선거 이력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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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종교인(목사). 꽃재교회 14대 담임목사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충무공 이순신의 10대손이며, 아내 이애라와 친형 이규풍(李奎豐) 또한 독립유공자이다.

2. 생애

1888년 11월 5일 충청도 아산현 신흥면 서강리(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2리 서강마을)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으로 화순군수를 지낸 아버지 이도희(李道熙, 1842. 4. 25 ~ 1902. 11. 29)와 어머니 밀양 박씨 박안라(1853. 10. 16 ~ 1922. 5. 27)[4]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수학하고 개신교 목사로 시무했다. 이후 일본에 잠깐 유학하면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다니기도 했다.

1911년에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지하단체인 신조선당을 조직했다. 1919년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10일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에는 국내에서 안재홍, 조병옥, 홍명희 등이 조직한 신간회 경동지회위원장으로 취임해 활동했다.

8.15 광복조선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을 지냈으며, 조선공산당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있던 김두한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당시 김두한은 왜 아무도 자신한테 얘기해주지 않았냐고 따졌었는데 그건 말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대한국민당에 입당해 감찰위원장을 지냈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홍순철 후보에게 밀려서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영준 후보에게 밀려서 낙선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민주공화당에 몸담았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70년 3월 20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3. 매체에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태영이 연기했고 1부 23화 말기에 종로 2가의 상인 역도 맡았다. 이 때는 김두한의 큰어머니와 친할머니가 이 상인의 집에서 음식 재료를 구입하려던 찰나 사람들이 시끄럽게 뭐하냐고 묻길래 김두한(야인시대) vs 구마적(야인시대) 알려준다.

이후 2부 53화에서 이규갑으로 배역이 바뀌었다. 극중에서는 해방정국 당시 백의사 소속인 박용직이 김두한을 찾아가서 대화했을 때 처음 언급되었으며[5], 김두한과 박용직 두 명 모두 이규갑이 있는 자리에서 서로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시점에서 조금 지난 53화 말미에서 어느 요정에 백의사 두령 염동진과 간부인 유진산과 함께 직접 등장한다. 이규갑은 김두한을 만나자마자 그가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묻고, 이에 김두한이 긍정하자 과거 김좌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칭찬한다. 이후 이규갑은 김좌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하는 동시에 과거 일본제국 경찰의 눈을 피해 만주로 갔던 시절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말했다. 이윽고 박용직은 김두한에게 이규갑은 노백린과 유동열 장군과 함께 김좌진과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말하자 이규갑은 즉시 긍정하면서도 자신은 항상 김좌진 장군을 존경해왔다며, 그는 자기와 같은 범인(凡人, 평범한 사람)과 다른 존귀한 분이라며 치켜세운다. 또한, 과거 김두한이 어렸을 때 아버지인 김좌진을 만난 이후 그는 자신의 아들을 만난 이야기를 늘 하고 지냈다고 말했으며, 이걸 어떻게 알았냐는 김두한의 질문에 노백린유동열을 통해 들었으며, 백야(김좌진의 호)가 살아있었다면 해방정국이 엉망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깊은 탄식을 한다.

그러자 김두한은 이규갑을 믿을 수 있는 자라고 판단했는지 자기 아버지인 김좌진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직설적으로 질문하자 이규갑은 작중 시점인 1945년으로부터 25년 전에 일어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소련의 붉은 군대와 공산당에게 대거 사살되자 김좌진은 공산주의자와의 손을 끊었고, 이로 인해 박상실이라는 사회주의자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울면서 말한다.[6] 이규갑의 발언이 끝난 직후 비극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하기 위해 김좌진이 괴한이 발사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이 나왔으며, 다시 현재 시점으로 장면이 전환된 이후에는 자리에 있던 염동진, 유진산, 박용직 모두 급속도로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이규갑의 눈치를 보며 잠시 동안 침묵했다.

이규갑의 발언이 끝난 직후 유진산은 박용직과 이규갑의 발언을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서 김좌진의 죽음에 관한 진상이 담긴 일본 측 기밀문서를 품속에서 꺼내 김두한에게 주었고, 이에 김두한은[7] 왜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냐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따지자 이규갑은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직후부터는 염동진이 본격적으로 좌익에게 잊을 수 없는 일을 당했던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을 시작으로, 유진산과 박용직이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성과 김좌진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계속 강조한 이후 염동진이 김좌진의 묘가 있는 홍성에 가라는 대사를 끝으로 관련 장면이 끝나버림에 따라 이규갑의 직접적인 등장과 대사도 동시에 끝나게 되었다. 비록 이규갑 본인은 짧은 출연 분량과 대사만 보여주고 퇴장하였지만, 그의 발언은 김두한이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하는 결정적인 계기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던 만큼 작중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낸 등장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아산군[8]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국민당
]]
8,001표 (16.74%) 당선 (1위) 초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3,142표 (6.24%) 낙선 (8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대문구 을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국민당
]]
1,087표 (2.91%) 낙선 (6위)

5. 둘러보기

파일:충청남도 휘장(~1998)_White.png 충청남도 제2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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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대덕 연기 공주 갑 공주 을
김종열 김종회 이범승
전임자: 이긍종
박충식 윤치영
전임자: 김명동
논산 갑
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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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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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정보에는[2] 충무공파 22세 규(奎) 항렬.[3] #[4] 박준호(朴準浩)의 딸이다.[5] 당시 박용직이 속한 백의사는 우익청년단을 이끌 재목으로 적합한 김두한을 포섭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하지만 우익과 대립하던 좌익은 정진영과의 친분과 일제 강점기 당시에 인연을 맺은 신불출이 듣기 좋은 내용을(예를 들면 김두한이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김두한에게 만주로 갔으면 독립군 대장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거나, 김두한을 인민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워주고 김좌진을 존경한다거나 선구자적인 사람이였다고 띄워주고 전위대장을 독립군 사령관, 좌익을 제 2의 독립군이라고 언급하는 식으로 자신들을 포장했다.) 김두한을 구슬리고 애원까지 하면서 먼저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우익 측의 백의사는 김두한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 문제는 그 방법이란 것이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며 다짜고짜 따라오라고 하질 않나, 그러면서도 보자고 한 사람 이름은 안 대고 김두한의 말은 몽땅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들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니 총까지 들이밀었다. 결국 자기쪽으로 먼저 오면 만나주기는 하겠다고 하던 김두한도 저렇게 선빵을 갈기자 결국 꼬붕 두 명을 때려눕히고 볼 일이 없다고 말한다. 비록 백의사가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 비밀결사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주 이해 못 할 것 까지는 아니었으나, 문제는 낮선 사람들이 초면부터 비호감 행동만 계속 하니까 김두한이 안 좋게 보는 걸 넘어 진짜 열받고 엄포까지 놓아버린 것. 이에 열받은 백의사의 두령인 염동진이 김두한에게 테러를 가해 죽이려 했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임을 알고 있던 박용직이 필사적으로 말린 후, 조선청년전위대 발족식에 참가해서 김좌진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소리를 지르면서까지 알리려 한 모습을 본 김두한이 삼수를 시켜 몰래 박용진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박용직은 김좌진 장군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이규갑에게 직접 들었다고 김두한에게 말하면서 처음 언급된 것.[6] 이때 이규갑은 자유시 참변을 사건의 다른 이름인 흑하사변이라고 칭한다. 참고로 흑하(黑河)는 아무르 강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작중 이규갑은 흑하가 아닌 흑해로 발음했다. 그리고 이규갑은 자유시 참변에 대해 "대한독립군단이 소련 적군에게 배신을 당해 몰살을 당했던 사건", "공산당 놈들은 독립군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난사했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자세한 건 자유시 참변 문서 참조. 그리고 김좌진이 박상실에게 살해당한 이유는 빈주 사건으로 대표되는 민간인 학살과 수탈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보고 있다. 이는 일본 제국의 내무 기밀 문서에 쓰여진 내용와 공산당 측의 주장이 일치하고 있는 데다 독립운동가, 그것도 김좌진의 측근으로 분류될 정도로 가까운 부하인 정회암조차 김좌진이 만주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등, 김좌진의 만행에 반대했던 민간인들이 사망한 빈주현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설은 신빙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7] 이때 김두한은 김좌진의 무덤이 있는 홍성으로 가기 위해 열차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나온 직후에 이규갑과 백의사 간부진들과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8] 제18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