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18:30:53

김석형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역사학자, 정치인.

2. 생애

1915년 11월 7일, 대구에서 서울 태생의 변호사 김의균과 이의경의 아들로 태어나서 대구에서 성장했다. 김의균은 교회학교인 희도학교 교장으로 30년간 재직하였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으로부터 경상북도 도지사로 임명되는 등 상당한 거물이었고, 김석형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희도보통학교를 거쳐 대구고등보통학교를 1933년 3월에 졸업했다. 193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제11회, 문과갑류)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동년 4월 법문학부 사학과로 진학해 1940년 3월 법문학부 조선사학전공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양정중학교 교원으로 취익하였으나 사학과 동기 박시형과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5년 3월에 함경남도 고원경찰서에서 검거된다. 1945년 6월,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45년 8월, 여운형의 요구로 모든 정치범이 석방되면서 풀려나서 양정중학교 교원으로 복직했다가 경성사범대학 교수로 옮겼다. 그러다가 1945년 10월, 서중석의 보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 1946년 8월에 김광진의 설득으로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수 및 학부장이 되었다.

월북 후 박시형과 함께 교과서 조선력사를 집필했고 1949년 1월 13일, 조선역사 편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봉건사분과위원장이 된다. 또한 1948년에 설치된 역사편찬위원회 부임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52년 2월, 과학원이 설치되자 1956년 1월, 역사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어 연구활동을 계속했다. 1952년 <리조병제사>를 출간, 1956년 <조선통사> 상권에서 고려후기 부분을 집필하였으며, 1957년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 1960년,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 1961년, <량반론>, 1966년,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한 <초기조일관계연구> 등을 잇달아 출간하였다.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내세우기 시작하자 역사서술에서 주체적 입장을 강조하는 등 이에 부응했다. 1961년 5월, 조평통 중앙위원이 되었다.

김일성은 김석형을 상당히 이뻐했는지 1962년 교수 및 박사 칭호를 수여하였고,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김석형을 출마시켜주었으며 이후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까지 쭉 재선된다. 1967년,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예산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3년 2월, 김일성대학 부총장을 지냈으며 1973년 11월, 사회과학원 산하 역사연구소장에 임명된다. 1982년 2월, 조평통 상무위원에 임명, 1991년 1월 범민련 북측본부 중앙위원이 되는 등 대남 활동에도 나섰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93년 12월,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으로 보선된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을 지냈다. 말년까지 단군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사회과학원장 및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 재직 중이던 1996년 11월 26일에 사망했다. 북한은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 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민족적량심을 가지고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민족문화말살책동을 반대하여 적극 활동하였으며 (...) 후대교육사업과 사회과학연구사업에 자기의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쳤으며 주체사관에 기초하여 조선력사를 종합체계화하는 사업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동지는 공화국의 륭성번영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업하였으며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아주 좋게 말해주었다. 김정일도 직접 애도를 표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사회과학원 원장, 원사, 교수, 박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한 이후 사회과학원장 자리는 태형철이 물려받았다.

3. 참고문헌

  • 송호정(1997), 북한 역사학계의 거두 김석형과 한국사연구, 역사비평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