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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 <colbgcolor=#fff,#191919>오세훈 / 제33·34·38·39대 (민선 4·5·7·8기) |
취임일 | 2021년 4월 8일 |
정당 | |
관사 | 서울특별시장 공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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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장은 서울특별시를 대표하고, 그 사무를 총괄하는 광역자치단체장이다. 임기는 4년이며, 최대 3선까지 연임할 수 있다.[1] 중임에는 제한이 없으므로, 중간에 낙선하거나 중도 퇴임한 기록이 있으면 연속 재임 기록이 중단되고, 이후 다시 출마할 수 있다.[2]2. 특징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라는 상징성과 많은 인구 규모만큼이나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권한[3]과 대한민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며, 정치적 비중도 크다.[4]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들이 차관급의 대우를 받지만, 서울특별시장은 유일하게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5] 서울특별시는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 에 의거해서 행정안전부장관의 지휘를 받지 않고 국무총리가 직할하도록 되어 있다.[6] 따라서 선술했듯이 장관급이라는 매우 큰 대우를 받으며, 의결권은 없지만 국무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발언이 가능하다. 이는 옛날 조선 때도 비슷했는데, 관찰사(지금의 도지사) 등은 참판(차관)급(종2품) 대우에 그쳤지만, 한성부판윤(지금의 서울특별시장)은 판서(장관)급(정2품)이라는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7]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가 된 특성상 경성부윤이라고 불렸다.한국 정계에서는 경기도지사와 함께 대통령으로 가는 중간단계로도 여겨지고 있다.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들보다 월등히 높은 위상 때문에 서울시장을 거치고 나면 차기 대권의 유력 후보에 포함되고 거론된다. 그러나 실제 서울특별시장 출신 중 대통령이 된 사례는 이명박과 윤보선이고, 조순, 박원순, 고건 등 서울 시장 출신으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던 이들 모두 끝내 대통령 당선에는 이르지 못했다. 서울특별시장 경력이 대권 도전에 도움은 되지만 꼭 그 지지도와 위상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경기도의 인구가 서울특별시를 추월하고 갈수록 격차를 벌리고 있지만, 서울특별시장의 특별 대우는 여전하다. 서울특별시장은 '수도의 시장'으로서 정치적 영향력 외에도 지방자치법에서 특례를 인정받아 지방자치법과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을 통해 일부 특례를 적용받지만, 경기도지사는 다른 도지사들처럼 지방자치법만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다른 광역자치단체들의 경우 지방채 발행이나 자치사무의 감사를 행안부장관이 하지만 서울특별시는 행안부장관이 국무총리에게 손수 보고해야 한다. 또한 국가공무원의 임용 및 징계 등은 해당 주무부처 장관에게 있으나 대통령령에서 정하는 범위 내에서는 서울특별시장이 행사할 수 있다.[8]
다만 장관급의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명목상 서열까지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보다 높은 건 아니다. 전국시도지사협의회에서 서울특별시장이라고 특별히 권한이 더 크지도 않으며, 발언권도 똑같이 공평하게 받는다.
서울특별시가 설립하고 운영 중인 서울시립대학교의 운영위원장도 당연직으로 맡고 있다. 이 운영위원장을 이사장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이는데, 서울시립대학교는 아직 법인화가 되지 않았으므로 이사장은 잘못된 표기이다.
실제로 역대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도전한 주요 정치인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성공적인 경력(국회의원, 국무위원 등)을 이어가고 있던 도중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한 사례보다는[9], 일시적 정치 활동 중단이나 낙선 등으로 인해 기존 경력이 중단된 상태에서 다시 정치 무대에 복귀하기 위한 토대로써 지방선거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역대 서울특별시장 중 가장 성공적인 정치적 경력인 대통령을 거친 이명박의 경우를 보더라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의 불법 선거 운동으로 의원직을 상실당할 위기에 쳐하자 자진사퇴한 후 결국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가 사면 복권된 뒤 서울시장 도전으로 정계 복귀를 시도하여 성공한 케이스다. 제16대 국회 당시 정치에 갓 입문한 초선 국회의원에 불과하였던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 선언을 하고 정계와 잠시 거리를 두고 있다가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한 뒤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케이스다.
3. 법적 권한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
제4조(일반행정 운영상의 특례)
⑤ 서울특별시 소속 국가공무원의 임용 등에 관한 「국가공무원법」 제32조제1항부터 제3항까지, 제78조제1항ㆍ제4항 및 제82조에 따른 소속 장관 또는 중앙행정기관의 장의 권한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은 서울특별시장이 행사하며[10], 이와 관련된 행정소송의 피고는 같은 법 제16조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장이 된다. <개정 2011.5.30.>
⑦ 서울특별시 소속 공무원 등에 대한 서훈(敍勳)의 추천은 「상훈법」 제5조제1항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장이 한다. <개정 2011.5.30.>
제4조(일반행정 운영상의 특례)
⑤ 서울특별시 소속 국가공무원의 임용 등에 관한 「국가공무원법」 제32조제1항부터 제3항까지, 제78조제1항ㆍ제4항 및 제82조에 따른 소속 장관 또는 중앙행정기관의 장의 권한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은 서울특별시장이 행사하며[10], 이와 관련된 행정소송의 피고는 같은 법 제16조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장이 된다. <개정 2011.5.30.>
⑦ 서울특별시 소속 공무원 등에 대한 서훈(敍勳)의 추천은 「상훈법」 제5조제1항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장이 한다. <개정 2011.5.30.>
국무회의 규정
제7조(대리 출석) ① 국무위원이 국무회의에 출석하지 못할 때에는 각 부의 차관(행정안전부의 재난안전관리사무에 관하여는 이를 담당하는 본부장을 포함한다)이 대리하여 출석한다.
② 대리 출석한 차관은 관계 의안에 관하여 발언할 수 있으나 표결에는 참가할 수 없다.
제8조(배석 등) ① 국무회의에는 대통령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국무조정실장, 국가보훈처장, 인사혁신처장, 법제처장, 식품의약품안전처장,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금융위원회위원장, 과학기술혁신본부장, 통상교섭본부장 및 서울특별시장이 배석한다. 다만,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중요 직위에 있는 공무원을 배석하게 할 수 있다.
②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중앙행정기관인 청(廳)의 장으로 하여금 소관 사무와 관련하여 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발언하게 하거나 관계 전문가를 참석하게 하여 의견을 들을 수 있다.
서울특별시장은 국무회의에 배석할 권리 혹은 의무(과거)가 있다. 이는 대한민국 출범 후 참여정부 시기를 제외하고 서울시장에게 주어진 의무 혹은 권리였다. 단 참여정부는 서울특별시장(당시 32대 한나라당 이명박, 33대 한나라당 오세훈)에게 보장된 국무회의 배석 및 발언권을 박탈했다.[11]제7조(대리 출석) ① 국무위원이 국무회의에 출석하지 못할 때에는 각 부의 차관(행정안전부의 재난안전관리사무에 관하여는 이를 담당하는 본부장을 포함한다)이 대리하여 출석한다.
② 대리 출석한 차관은 관계 의안에 관하여 발언할 수 있으나 표결에는 참가할 수 없다.
제8조(배석 등) ① 국무회의에는 대통령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국무조정실장, 국가보훈처장, 인사혁신처장, 법제처장, 식품의약품안전처장,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금융위원회위원장, 과학기술혁신본부장, 통상교섭본부장 및 서울특별시장이 배석한다. 다만,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중요 직위에 있는 공무원을 배석하게 할 수 있다.
②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중앙행정기관인 청(廳)의 장으로 하여금 소관 사무와 관련하여 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발언하게 하거나 관계 전문가를 참석하게 하여 의견을 들을 수 있다.
4. 상세
임명직 시장 시절부터 현행 선출직 시장까지 국무회의에도 참석이 가능하며, 발언권은 있지만 의결권은 없다. 실제로 박원순 전 시장도 의결권이 없다는 것을 발언한 적이 있다. 관련 기사 국무회의에서 발언권과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무위원들은 모두 국무회의 부의장의 제청에 따라 국무회의 의장이 임명한 자들[12]이고 그 외의 다른 배석 인원들은 모두 국무회의 의장이 직접 임명한 자들이다. 또한 모든 국무회의 안건들은 의장이나 부의장, 그리고 국무위원들에 의해서 제의되기 때문에 국무회의를 이끄는 주류에 반대 입장을 내는 참석자는 십중팔구 야당 소속 서울특별시장 밖에 없다.[13] 그래서 가끔씩 반대 의견이 나오면 이런 이유에서다.장면 내각 시절에는 민선 서울특별시장도 각의(현재의 국무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했다. 이때 민선 서울특별시장이 김상돈 한 명뿐이고 임기도 몇 달 못 갔다는게 함정이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지방자치제도가 폐지되고 난 관선제 시절에는 당연히 서울특별시장도 국무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했고, 1995년에 다시 민선 서울특별시장이 들어오면서 권리로 약화된 것이다. 그래도 민선 1기 조순 전 시장과 민선 2기 고건 전 시장은 다른 일정이 없는 한 화요일 정례 국무회의에 매주 참석했다. 2002년에는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장이 되면서 정무부시장을 대타로 보내는 등 조금씩 출석율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참여정부 시기(2003~2008)에는 서울특별시장의 국무회의 참석을 금지시켰다가 2008년에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국무회의에 배석되어 당시 오세훈 시장(2006~2011)은 국무회의에 꽤 자주 참석했다. 3개월에 1회는 정례적으로 참석하고[14], 보통은 정무부시장을 배석시켰다. 그러나 박원순 전 시장 때는 정무부시장도 보내지 않아 국무회의 참석율이 10% 아래로 떨어지기에 이른다. 지금은 정말로 예산시즌 아니면 아예 서울시장이 국무회의에 찾아가질 않지만 정권이 교체되었고, 오세훈 시장은 이전부터 국무회의에 잘 참석했으므로 추이는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규정은 서울특별시장이 배석한다이지 배석할 수 있다가 아니다. 즉 현재까지도 규정상 서울특별시장은 의무적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존재이며,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서울특별시장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대통령은 서울특별시장을 국무회의에서 기수열외시켜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도 읽어, 야당 서울특별시장의 국무회의에서의 발언권을 보장하는 규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서울특별시장한테 출석 의무를 달아놓은 규정은 2008년 2월 29일에 생겼으며, 이렇게 대통령령 개정으로 서울특별시장에게 국무회의 출석 의무를 부여한 인물은 바로 서울특별시장 출신 이명박 대통령이다.
여하간 정치적 위치와 상징성 때문에 서울특별시장은 사실상 차기 대권주자로 보내기에 딱 좋은 위치이어서 뭇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다. 정치에 관심 많은 전국의 시민들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것도 다음 차기 대통령 선거 후보를 점칠 수 있는 지표 중 하나라서 그런 것이다. 이 테크가 아니어도 전·현직 시장이 가지는 정치적 가치는 어마어마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전·현직 서울특별시장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정치계에선 당연한 일로 자리를 잡았다. 아래 주요 서울특별시장만 봐도 대한민국 정치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윤보선,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뒤에 대통령이 되었고, 허정과 고건은 국무총리로 지내다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특이한 점으로 서울시장 출신 총리는 허정, 고건 둘밖에 없어서 서울특별시장 출신 총리 =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전임 시장(이원종)의 경질 이후, 후임 시장에 취임했던 우명규는 취임하자마자 첫 임무를 무겁게 시작했다. 그러나 성수대교 건설 당시 서울특별시청 건설본부장으로서 실무 총책임자였다는 게 밝혀져 11일 만에 자진 사퇴[15]하고 최병렬이 시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최병렬 전 시장도 퇴임 전날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 조순 전 시장은 취임식하자마자 바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서 상황을 살피고 첫 임무를 무겁게 시작했다.
역대 최연소 서울특별시장은 경성부윤 취임 당시 39세였던 김형민 전 시장이며, 그 다음은 40세였던 김현옥 전 시장이다. 민선 기준으로는 초선 취임 당시 45세였던 오세훈 시장이 있다.
시장에게는 재임 기간 동안 거처할 수 있는 공관이 제공된다. 위치는 삼청동 공관촌에서 한남동 공관촌으로 이전하였다.[16] 그 이전의 혜화동 공관은 서울 한양도성 전시안내센터로 리모델링되었다.
참고로 민선 구청장 및 시의원 출신은 아직 없는게 특징이다. 구청장 출신은 시장은 물론 시장 후보로조차 선출된 적이 없는데[17], 구청장의 권한이 동급인 자치시장보다 확연히 적고 반대로 서울특별시장은 동격인 광역시장이나 도지사에 비해서도 위상이 높다 보니 구청장 정도로는 서울특별시장을 노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울특별시내의 구청장만 해도 25명이나 되다 보니 서울특별시 전체에서 단 1명 뿐인 서울특별시장을 노리기에는 정치적 관심도나 언론 노출 빈도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시의원은 시정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지만, 권수정 10대 서울특별시의원이 유일하게 출마하였다.[18][19]
호남 출향민 비중이 높은 서울로 비록 초대 서울특별시장이 호남 출신이지만 민선 서울시장 중 호남 출신은 아직까지는 고건[20] 한 명뿐이다. 다만 호남 출향민들을 의식해서인지 박원순 전 시장은 임기 중 서울특별시 부시장 3인을 호남 출신으로 기용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21] 또한 역대 민선 서울특별시장 중 위의 고건의 경우를 제외하면, 순수 서울특별시 출신은 아주 엄격하게 따지면 없다.[22]
역대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적중률 100%의 승패 판독기 역할을 한 자치구는 중구, 양천구, 영등포구, 강동구다. # 이 4개의 자치구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각 선거의 서울특별시장 당선인들이 모두 승리한 지역이다. 다시 말해 해당 지역에서 승리한 후보들은 모두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었다는 의미다. 이 중에서 특히 양천구와 영등포구는 각 후보의 해당 지역에서의 득표율과 서울특별시 전체 득표율이 비슷하게 나온 적이 많아 서울특별시장 선거 때 특히 주목을 받는다. #
그 외에도 송파구가 서울특별시장 선거의 판독기 역할을 했는데, 이는 송파구의 인구가 많은 것도 있지만[23] 다른 지역에서 인구가 많이 유입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접전 끝에 패배한 한명숙은 25개 지역구 가운데 17곳에서 승리하고도 오세훈에 패배했는데 오세훈이 승리한 지역 8곳 중 하나가 송파구였다. # 하지만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당시에는 박원순이 아닌 나경원이 송파구에서 1위를 기록하면서, 적중률 100%의 족집게 지역에서 탈락했다. 그래도 재보궐선거를 제외한 정식 선거에서의 승자는 모두 맞혔기 때문에, 위의 4개 자치구와 함께 족집게 지역으로 종종 거론된다.
5. 주요 인물
- 김형민: 초대 시장. 시작은 경성부윤이었다가 서울특별자유시장으로 직함명이 바뀌었다. 후임자가 대통령까지 돼서 워낙 유명해지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묻혔으나 우남시가 될 뻔한 현 서울특별시 지명을 지켜내었고 그 외 다수의 일제 잔재 지명을 바꾸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다.
- 이기붕: 제3·4대 시장. 재임 중에 서울특별시의 정식 명칭이 현재의 서울특별시로 확정되면서 4대 임기부터 서울특별시장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이후 대한민국 부통령 선거에 나갔으나 그 선거가 3.15 부정선거였던 탓에 당선이 무효화되고, 4.19 혁명 후 아들에게 살해된다.
- 허정: 제8대 시장. 재임 중에 미국 필라델피아 시장의 초청을 받아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시찰하고 오기도했다. 훗날 4.19 혁명 직후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으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과도내각의 수반이 되었다.
- 김현옥: 제14대 시장.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제12대 경상남도 부산광역시장에 임명되었으며 부산광역시를 직할시로 승격시키고자 부산광역시와 중앙을 새벽 열차로 왕래하면서 직할시 승격 필요성을 역설한 끝에 중앙의 승인을 받아 부산직할시 승격에 성공하고[24] 초대 부산직할시장(대수로는 13대)이 되었다가 몇 년 뒤 이 자리로 이임하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특별시장 재임 시절 가졌던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의 원조가 되는 인물로, 파리의 오스만 시장에 버금가도록 서울과 부산에 대개조 사업을 벌였다. 1960년대 말 서울특별시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판잣집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를 짓는 개발 정책을 주도했고, 서울전차 폐선[25]과 서울 지하철 기본 계획 수립도 이 사람이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아파트 문화를 연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너무 개발 정책에만 목을 맨 나머지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를 일으키고 사퇴하였다. 나중에 내무부장관으로 영전한다.
- 양택식: 제15대 시장. 두더지 시장이란 별명으로 유명하다. 이 사람 임기에 그 악명 높은 광주대단지 사건이 터졌다. 앞의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 지하철 1호선의 공사를 총지휘했던 시장인데 하필이면 1호선 완공 당일 육영수 여사가 비명횡사하여 얼마 후에 사퇴하였다.
- 구자춘: 제16대 시장. 전임자가 만든 서울 지하철 계획을 자기 입맛에 맞게 적절하게 변형하여 지금의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의 서울특별시 시내 구간을 만들어냈다. 특히 2호선 계획 당시 지도에 줄 그어서 30분 만에 순환선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나름 유명.[26] 이러한 서울특별시 지하철 계획 변경으로 인해 강남 개발이 가속화 되었다. 별명은 황야의 무법자였다. 구 시장도 훗날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 박영수: 제18대 시장. 임기 중에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기도 하였으나 1982년 4월 서울 지하철 3호선 무악재 구간 공사장에서 붕괴 사고가 일어나 경질되었다.
- 염보현: 제20대 시장.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 출신이다. 재임 기간 서울특별시 지하철 2, 3, 4호선을 완공했고, 한강종합개발을 추진했으며,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개장, 목동신시가지 건설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희궁, 보라매공원, 종묘공원, 석촌호수 공원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기도 하였다. 1986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은 실질적으로 염보현의 공적이라 보는 사람이 많다. 부임 중에 이규동 대한노인회장 등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인척과 연루됐던 비리로 인해 1988년 구속되었다.
- 최병렬: 제29대 시장. 마지막 관선 시장이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직후부터 퇴임 전날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즉 '사고에서 시작하여 사고로 끝난' 비운의 서울시장이다. '최틀러'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사고 현장에서 너무 기가 막혀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민선제가 도입된 이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서 새정치국민회의 고건 후보에 맞섰지만 패배하였다. 훗날 한나라당 대표가 되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 조순: 제30대 시장. 최초이자 5공 이전의 유일한 민선 서울시장이었던 제11대 김상돈 전 시장(2공)의 뒤를 잇는 민선 서울시장인 동시에 6공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이다. 안타깝게도 시장에 당선된지 2일 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취임식도 대폭 축소하여 간소하게 치르고 바로 사고 현장부터 가서 상황을 살핌으로써 첫 임무를 무겁게 시작하였다. 임기 중 통합민주당 후보로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시장직에서 사퇴하였으나 지지율이 정체되며 대통령 선거 후보직에서 사퇴하였다. 직후에는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며 초대 총재가 된다.
- 고건: 제22·31대 시장. 관선과 민선으로 2번 시장을 한 특이한 사례.[27] 임기 초부터 제일 중요한 시정 현안은 교통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교통관련 정책을 많이 펼쳤다. 2기 지하철과 동부간선도로를 개통시키고, 서울특별시 시내버스에 천연가스버스를 도입해 당시 심각했던 서울특별시의 대기오염을 대폭 감소시키는데 기여했다. 뒷날 국무총리 재임 중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 이명박: 제32대 시장. 재임기간 동안 청계천 복원, 서울광장 개장, 2004년 서울 시내버스 개편 등으로 김현옥에 이어 제2의 불도저 시장으로 불리며 성과가 크게 부각되어 이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 오세훈: 제33·34·38·39대 시장.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민선 시장이다. 뚜렷한 행정 성과, 반듯한 이미지와 외모로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됐고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재선되었지만, 서울시의원 선거에서 소속 한나라당이 패배하며 팔다리가 잘리고 야당인 민주당의 견제로 시정 운영에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결국 민주당과의 첨예한 대립 끝에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서울시장직을 걸었지만, 야당의 투표 불참운동 속에서 투표율 미달로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못했고, 오세훈은 서울시장직을 자진 사퇴했다. 그러나 중도 사퇴 후 10년 간의 공백기를 보낸 뒤 2021년 재보궐선거로 서울특별시장에 다시 당선되어 박원순에 이은 헌정 사상 두 번째 3선 서울특별시장이 되었고, 2021년 4월 8일 제38대 서울특별시장으로 취임하여 현재까지 시정을 이끌고 있다. 2022년 6월 2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헌정 사상 최초의 민선 4선 광역자치단체장, 최초의 4선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올랐다.
- 박원순: 제35-37대 시장. 위의 오세훈 시장의 자진 사퇴로 열린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첫 출마 당시 5% 정도의 인기 없는 후보였으나, 당시 지지율 1위였던 안철수 후보의 양보 및 적극적인 지원으로 인하여 극적으로 당선되었다.[28] 2011년 10월 27일에 취임하여 2014년 재선에 성공하였고 재선 임기 3년차에 들어서면서 조선 건국 이래 최장 기간을 재임하는 서울의 책임자(한성판윤과 경성부윤 포함)였으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연속 3선에 성공한 서울특별시장이다. 그러나 재임 중 여비서를 성추행한 사건으로 피고소된 후 2020년 7월 10일 0시 1분 북악산 부근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6. 역대 시장 목록
역대 시장의 사진과 주요 업적에 대해서는 서울시 홈페이지의 이 문서를 참고. 서울시 측에서는 초대 시장을 김형민으로 삼고 있다.조선시대의 판한성부사 -> 한성부 판윤을 거쳐간 인물 2016명의 명단 중 일부는 이 곳에서 볼 수 있다.[29] 다른 자료로 서울특별시 조직변천사I(1987)의 부록[30] 있는데, 이 자료에서는 총 인원이 현재 시장인 39대 오세훈 시장까지 포함해도 1430명 밖에 되지 않는다.
6.1. 한성판윤
- 판한성부사 (1395~1466)
조선 태조 시대인 1395년부터 세조 시대의 1466년까지 86명이 판한성부사를 거쳐갔다. - 한성 부윤 (1466~1567)
세조 시대의 1466년부터 명종 시대의 1567년까지의 142명이 한성 부윤을 거쳐갔다. - 한성부 판윤 (1567~1910)
명종 시대의 1567년부터 대한제국 순종 시대의 1910년까지 1716명이 한성부 판윤을 거쳐갔다.
6.2. 경성부윤
<rowcolor=white> 대수 | 이름 | 재임 기간 | 정부 | 비고 |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윤[31] | ||||
초대 | 오바 간이치 (大庭寛一) | 1910년 10월 1일 ~ 1912년 3월 31일 | 조선총독부 | [32] |
2대 | 가나야 미쓰루 (金谷充) | 1912년 4월 1일 ~ 1919년 12월 3일 | [33] | |
3대 | 사이토 레이조 (斎藤礼三) | 1919년 12월 4일 ~ 1921년 8월 4일 | [34] | |
4대 | 요시마쓰 노리오 (吉松憲郎) | 1921년 8월 5일 ~ 1923년 2월 23일 | [35] | |
5대 | 다니 다키마 (谷多喜磨) | 1923년 2월 24일 ~ 1925년 6월 14일 | [36] | |
6대 | 마노 세이이치 (馬野精一) | 1925년 6월 15일 ~ 1929년 1월 20일 | [37] | |
7대 | 마쓰이 후사지로 (松井房治郎) | 1929년 1월 21일 ~ 1929년 12월 10일 | [38] | |
8대 | 세키미즈 다케시 (関水武) | 1929년 12월 11일 ~ 1930년 12월 11일 | [39] | |
9대 | 안도 게사이치 (安藤袈裟一) | 1930년 12월 12일 ~ 1931년 9월 22일 | [40] | |
10대 | 이노우에 기요시 (井上清) | 1931년 9월 23일 ~ 1933년 12월 4일 | [41] | |
11대 | 다테 요쓰오 (伊達四雄) | 1933년 12월 5일 ~ 1936년 5월 20일 | [42] | |
12대 | 간자 요시쿠니 (甘蔗義邦) | 1936년 5월 21일 ~ 1937년 7월 2일 | [43] | |
13대 | 사에키 아키라 (佐伯顕) | 1937년 7월 3일 ~ 1938년 11월 8일 | [44] | |
14대 | 다카하시 사토시 (高橋敏) | 1938년 11월 9일 ~ 1941년 1월 23일 | [45] | |
15대 | 야노 모모로 (矢野桃郎) | 1941년 1월 24일 ~ 1942년 5월 21일 | [46] | |
16대 | 후루이치 스스무 (古市進) | 1942년 5월 22일 ~ 1945년 5월 1일 | [47] | |
17대 | 이쿠타 세이자부로 (生田清三郎) | 1945년 5월 2일 ~ 1945년 6월 15일 | [48] | |
18대 | 쓰지 게이고 (辻桂五) | 1945년 6월 16일 ~ 1945년 8월 15일[49] | [50] | |
미군정 조선 경기도 경성부 군정부윤[51] | ||||
초대 | 제임스 킬러프 (James S. Killough) | 1945년 9월 9일 ~ 1945년 11월 16일 | 미군정 | [52] |
2대 | 제임스 윌슨 (James Willson) | 1945년 11월 17일 ~ 1946년 9월 27일 | [53] | |
미군정 조선 경기도 경성부 민정부윤[54] | ||||
초대 | 이범승 (李範昇) | 1945년 10월 25일[55] ~ 1946년 5월 9일[56] | 미군정 | [57] |
권한대행 | 김성환 (金聖煥) | 1946년 5월 10일 ~ 1946년 6월 29일 | [58] | |
2대 | 김형민 (金炯敏) | 1946년 6월 30일[59] ~ 1946년 9월 27일 | [60] |
6.3. 역대 서울특별자유시장
<rowcolor=white> 관선 서울특별자유시장 | |||||
<rowcolor=white> 대수 | 사진 | 이름 | 재임 기간 | 정부 | 비고 |
초대 | 김형민 (金炯敏) | 1946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14일 | 미군정 | [61] | |
2대 | 윤보선 (尹潽善) | 1948년 12월 15일 ~ 1949년 6월 5일 | 이승만 정부 | [62] | |
3대 | 이기붕 (李起鵬) | 1949년 6월 6일 ~ 1949년 8월 14일 | [63] |
6.4. 역대 서울특별시장
6.4.1. 관선 1차
<rowcolor=white> 관선 서울특별시장 | |||||
<rowcolor=white> 대수 | 사진 | 이름 | 재임 기간 | 정부 | 비고 |
4대 | 이기붕 (李起鵬) | 1949년 8월 15일 ~ 1951년 5월 8일 | 이승만 정부 | [64][65] | |
5대 | 김태선 (金泰善) | 1951년 6월 27일 ~ 1952년 7월 23일 | [66] | ||
6대 | 1952년 8월 29일 ~ 1956년 7월 5일 | [67][68] | |||
7대 | 고재봉 (高在鳳) | 1956년 7월 6일 ~ 1957년 12월 13일 | [69] | ||
8대 | 허정 (許政) | 1957년 12월 14일 ~ 1959년 6월 11일 | [70] | ||
9대 | 임흥순 (任興淳) | 1959년 6월 12일 ~ 1960년 4월 30일 | [71] | ||
10대 | 장기영 (張基永) | 1960년 5월 2일 ~ 1960년 12월 30일 | 허정 내각 | [72] |
6.4.2. 민선 1차
<rowcolor=white> 민선 서울특별시장[73][74] | |||||
<rowcolor=white> 대수 | 사진 | 이름 | 재임 기간 | 당적[75] | 비고 |
11대 | 김상돈 (金相敦) | 1960년 12월 30일 ~ 1961년 5월 16일 | | [76] |
6.4.3. 관선 2차
<rowcolor=white> 관선 서울특별시장 | |||||
<rowcolor=white> 대수 | 사진 | 이름 | 재임 기간 | 정부 | 비고 |
12대 | 윤태일 (尹泰日) | 1961년 5월 20일 ~ 1963년 12월 16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 [77] | |
13대 | 윤치영 (尹致暎) | 1963년 12월 17일 ~ 1966년 3월 30일 | 박정희 정부 | [78] | |
14대 | 김현옥 (金玄玉) | 1966년 3월 31일 ~ 1970년 4월 15일 | [79] | ||
15대 | 양택식 (梁鐸植) | 1970년 4월 16일 ~ 1974년 9월 1일 | [80] | ||
16대 | 구자춘 (具滋春) | 1974년 9월 2일 ~ 1978년 12월 21일 | [81] | ||
17대 | 정상천 (鄭相千) | 1978년 12월 22일 ~ 1980년 9월 1일 | [82] | ||
18대 | 박영수 (朴英秀) | 1980년 9월 2일 ~ 1982년 4월 27일 | 전두환 정부 | [83] | |
19대 | 김성배 (金聖培) | 1982년 4월 28일 ~ 1983년 10월 14일 | [84] | ||
20대 | 염보현 (廉普鉉) | 1983년 10월 15일 ~ 1987년 12월 29일 | [85] | ||
21대 | 김용래 (金庸來) | 1987년 12월 30일 ~ 1988년 12월 4일 | [86] | ||
22대 | 고건 (高建) | 1988년 12월 5일 ~ 1990년 12월 26일 | 노태우 정부 | [87] | |
23대 | 박세직 (朴世直) | 1990년 12월 27일 ~ 1991년 2월 18일 | [88] | ||
24대 | 이해원 (李海元) | 1991년 2월 19일 ~ 1992년 6월 25일 | [89] | ||
25대 | 이상배 (李相培) | 1992년 6월 26일 ~ 1993년 2월 25일 | [90] | ||
26대 | 김상철 (金尙哲) | 1993년 2월 26일 ~ 1993년 3월 4일 | 김영삼 정부 | [91] | |
27대 | 이원종 (李元鐘) | 1993년 3월 8일 ~ 1994년 10월 21일 | [92] | ||
28대 | 우명규 (禹命奎) | 1994년 10월 22일 ~ 1994년 11월 2일 | [93] | ||
29대 | 최병렬 (崔炳烈) | 1994년 11월 3일 ~ 1995년 6월 30일 | [94] |
6.4.4. 민선 2차
<rowcolor=white> 민선 서울특별시장 | ||||||
<rowcolor=white> 대수 | 사진 | 이름 | 재임 기간 | 당적[95] | 출신지 | 비고 |
30대 | 조순 (趙淳) | 1995년 7월 1일 ~ 1997년 9월 9일 | | 강원 강릉 | [96][97] | |
[[권한대행| 권한대행 ]] | 강덕기 (姜德基) | 1997년 9월 10일 ~ 1998년 6월 30일 | 행정1부시장 | 경남 진주 | [98] | |
31대 | 고건 (高建) |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 [[새정치국민회의|]] | 서울 종로 | [99][100] | |
32대 | 이명박 (李明博) |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 | 일본 오사카[101] | [102][103] | |
33대 | 오세훈 (吳世勳) |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 | 서울 성동 | [104][105] | |
34대 | 2010년 7월 1일 ~ 2011년 8월 26일 | [106][107] | ||||
[[권한대행| 권한대행 ]] | 권영규 (權寧奎) | 2011년 8월 27일 ~ 2011년 10월 26일 | 행정1부시장 | 경북 안동 | [108] | |
35대 | 박원순 (朴元淳) | 2011년 10월 27일 ~ 2014년 6월 30일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경남 창녕 | [109][110][111] | |
36대 | 2014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 [[새정치민주연합|]] | [112][113] | |||
37대 | 2018년 7월 1일 ~ 2020년 7월 9일 | | [114][115] | |||
[[권한대행| 권한대행 ]] | 서정협 (徐正協) | 2020년 7월 10일 ~ 2021년 4월 7일 | 행정1부시장 | 울산 | [116][117] | |
38대 | 오세훈 (吳世勳) | 2021년 4월 8일 ~ 2022년 6월 30일 | | 서울 성동 | [118][119] | |
39대 | 2022년 7월 1일 ~ 현재 | [120] |
7. 역대 선거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장/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8. 생존 중인 전직 민선 서울특별시장
- 고건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재임, 민선 2기, 1938년 1월 2일 출생, [age(1938-01-02)]세)
- 이명박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재임, 민선 3기, 1941년 12월 19일 출생, [age(1941-12-19)]세)
9. 시정 구호
시장 | <colcolor=#000,#fff> 시정 구호 |
조순 (민선 1기) | - |
고건 (민선 2기) | - |
이명박 (민선 3기) | - |
오세훈 (민선 4·5기) | 맑고 매력있는 세계도시 서울 |
시민이 행복한 서울 세계가 사랑하는 서울 | |
박원순 (민선 5-7기) | 희망서울 - 함께 만드는 서울, 함께 누리는 서울 |
함께 서울: 시민과 함께, 세계와 함께 | |
내 삶을 바꾸는 서울 10년 혁명 | |
오세훈 (민선 7·8기) | 다시 뛰는 공정도시 서울 |
동행·매력 특별시 서울 |
10. 창작물에서의 서울특별시장
- 영화 <특별시민>: 변종구 (최민식 분)
- 60일, 지정생존자 - 강상구
- 서울시장 키우기: 정확히는 2021년 재보궐선거를 패러디한 게임이다.
-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 한승문
- 재벌집 막내아들 - 최창제
- 퀸메이커 - 오경숙 (문소리 분)
- 7인의 부활 - 양진모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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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장 | 국무총리 | |||
<colbgcolor=#003865> 국무위원 | ||||
최상목 | <colbgcolor=#003865> | 이주호 | ||
유상임 | 조태열 | |||
김영호 | 박성재 | |||
공석 | 공석 | |||
강정애 | 유인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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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홍 | 김완섭 | |||
김문수 | 공석 | |||
박상우 | 강도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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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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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식 | 정진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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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환 | 한기정 | |||
고학수 | 최원호 | |||
서울특별시 | ||||
오세훈 | ||||
기타 기관* | ||||
천대엽 | 김정원 | |||
안창호 | 이창용 | |||
오동운 | ||||
기타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배석시키는, 중요 직위에 있는 공무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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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장 | 시장 | ||||
읍면동급 | 읍 | 면 | 동 | ||
읍장 | 면장 | 동장 | |||
통리급 | 통 | 리 | |||
통장 | 이장 | ||||
반급 | 반 | ||||
반장 | }}}}}}}}} |
[1] 3선 연임 단체장이 나온 다른 몇몇 광역자치단체장과 달리 서울특별시장은 12년 연속으로 재임한 사람이 없다. 사상 최초로 3선 서울특별시장이 된 박원순도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로 당선되어 초선 임기를 시작했고, 3선 임기 중 성범죄 피소 직전 자살했기 때문이다.[2] 현직 시장인 오세훈이 예시. 민선 4·5기 서울시장직을 수행하다가 민선 5기 출범 1년이 약간 지난 후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투표율이 33.3% 밑으로 뜨자 시장직을 사퇴했었다. 이후 10년 만에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선 7기 시장으로 돌아왔고,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헌정 사상 첫 4선 민선 광역자치단체장이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3] 상하수도를 비롯한 시군에서 다루는 업무 상당수를 손수 다루는 데다, 적지 않은 사무에 있어 행정안전부장관을 패싱할 권한까지도 별도 법률로 보장받는다. 다른 광역시들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서울시만의 특례다.[4] 선출직 공무원으로 보면 경기도지사와 함께 대통령 바로 다음의 위상으로 정치권의 별칭이 소통령(小統領)일 정도. 경기도지사가 급증한 인구를 기반으로 갈수록 서울과 인구격차를 벌리면서 위상에 도전하고 있으나, 도지사와 시장의 권한 차이 문제로 인해 서울시장에는 아직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하고 있다.[5] 일단 선출직이고, 광역자치단체장들 중 유일하게 장관급 예우를 받는 만큼 위상에 있어 정치적 권력이나 실권 측면은 장관을 아득히 넘어선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다만 어찌 됐든 지방직이라 국가직 위주의 국가의전서열 목록에는 없다. 본래는 (서울특별시장도) 국가의전서열에 있었지만, 2005년 참여정부 때부터 명단에서 빠졌다. 참고로 장관급 인사 중에서 제일 마지막 순번이었다.[6] 지방채 발행 등은 행정안전부장관이 승인하지만, 이 경우에도 국무총리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나아가 행안부가 서울시청 자치사무에 대해 감사를 하고자 할 때에도 총리의 조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행정안전부장관을 패싱하여 서울특별시청 소속 공무원에 대한 상훈 추천을 시장이 국무회의에 직접 상신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 제4조)[7] 한성판윤 또는 그냥 판윤으로도 불렸으며, 조선 초에는 한성부윤이 정식 명칭이었으므로 한성부윤 혹은 부윤으로도 불렸다.[8] 이로 인해 서울특별시의 행정부시장 2인과 기조실장의 경우 서울특별시장이 국무총리를 경유하여 대통령에게 임명안을 상신하여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받게 되며, 행정안전부에서 국가직을 파견보내는 타 시도와는 달리 시장이 지명한 서울특별시청 내부 인사가 국가직으로 옷만 갈아입고(사실상의 내부 승진) 부시장 또는 기조실장이 된다. 더불어 서울시 소속 공무원의 상훈 수여도 타 시·도에서는 행정안전부장관을 경유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서울특별시장은 대통령에게 바로 상신할 수 있다.[9] 지방자치단체장은 국회의원 및 국무위원과 겸임을 할 수가 없으므로 시장 선거에 도전하려면 먼저 의원직 혹은 장관직부터 사퇴해야 한다. 즉, 국회의원이나 장관에 재직 중이라면 일단 그 경력부터 포기해야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도전할 수 있다. 반면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은 서로 겸임이 가능하므로 장관+국회의원 경력을 유지한다면 그 위상은 서울특별시장에 비해 좀 떨어진다 해도 일단 탄탄한 중앙 정계 경력을 지속하고 있는 셈이 된다. 물론 2002년 김민석, 2011년 나경원, 2014년 정몽준, 2022년 송영길처럼 의원직을 포기하거나 2021년의 박영선처럼 장관직을 포기하고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의 경우 제각기 특수성이 있는데, 일단 2011년 나경원/2021년 박영선의 사례는 개인의 정치적 커리어 이전에 소속 정당의 서울시장(각각 오세훈/박원순)이 자폭하여 열린 재보궐선거라는 특수성이 있다. 즉, 개인의 경력을 위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소속 정당의 입장에서 서울특별시장이라는 핵심 요직을 상대 당에게 빼앗기는 상황, 특히 처참한 격차로 패배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일단 그 상황에서 경쟁력 있는 정치인에게 '당이 위험하니 부디 험지로 나가달라'라고 요청한 성격이 강하다. 즉, 해당 정당 차원에서는 커리어상 적절한 정치인을 찾아 공천할 만한 여유도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어설픈 카드를 냅다 내밀었다가는 처참한 패배로 정당 자체가 큰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두 정치인이 자신들의 희생 가능성을 감수하고 구원투수로 등판한 격이다. 또한 2014년 정몽준의 사례는 2002년의 전성기를 놓친 이후 장기간의 침체기에 빠져 있던 정몽준이 상황 타개를 위해 던진 승부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정몽준이 성공적인 정치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기에는 단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을 이어가고 있을 뿐 여야를 불문하고 한손에 꼽히는 주요 대권 주자 중 하나이자 사실상 무소속이나 다름없는 일인 정당으로 거대 정당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전성기의 위세에 비하면 퇴조가 명확했다.[10] 이 조항에 따라서 서울특별시청에 들어가는 국가직공무원인 행정부시장 2인과 기획조정실장에 대한 인사권 역시 서울특별시장이 사실상 행사하며, 실제로는 시장의 임명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따라서 대통령실 인사검증에서 탈락한 경우, 시장의 임명제청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도 있다. 2021년 4월 오세훈 시장이 임명제청한 황보연 기조실장 후보자가 청와대 인사검증에 막혀 정식 임명을 거부당한 것이 그 예시.[11] 현안 관련 공무원을 국무회의에 참석시킬 수 있는 규정을 통해 청계천 복원사업 질의와 관련하여 이명박 전 시장을 국무회의에 출석시킨 적은 있다.[12] 예외로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및 법원행정처장은 각각 헌법재판소장과 대법원장이 임명하기에 국무회의 의장이 그 인사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13] 가끔씩 전임 국무회의 의장이 지명한 배석자의 임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자리를 지켰다면 소수의견을 낼 수도 있다.[14] 보통 예산 문제다.[15] 문민정부 출범 초기 7일 만에 경질된 김상철 전 시장에 이어 두 번째로 단명한 서울특별시장으로 남았다.[16] #[17] 주요 정당은 물론 군소정당이나 심지어 무소속으로도 후보가 나온 적 없다.[18] 민영삼 제4대 서울특별시의원은 전라남도지사에 출마했었다.[19] 서울시의원 출신들은 주로 구청장에 많이 도전하며, 구청장 출신들은 국회의원에 주로 도전한다. 구의원-시의원-구청장-국회의원-서울시장 순의 테크를 보통 타며, 더불어민주당 김성환 의원의 커리어가 이 테크를 아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20] 그나마도 본적이 호남이어서 호남 출신으로 분류된 케이스이며, 고건 본인은 서울특별시 출신이다. 윤석열이 충청남도 출신인 부친의 영향으로, 충청 출신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것과 비슷한 케이스.[21] 단, 박원순의 마지막 부시장들이었던 서정협(행정1부시장), 김학진(행정2부시장), 김우영(정무부시장)은 모두 비호남 출신이었다. 서정협은 울산광역시, 김학진은 경상북도 경주시, 김우영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출신.[22] 오세훈 시장이 그나마 제일 가깝다. 서울특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본적이 경기도 용인시인 탓에 '성골' 토박이는 아니다.[23] 인구가 춘천시, 강릉시, 속초시, 동해시를 합한 것과 비슷하고 중구의 5배 이상이라 총선에서도 개표 속도가 가장 늦다.[24] 당시에는 정식으로 '부산직할시'의 이름은 얻지 못하고 '경상남도'만 빠져서 시장 직함명 역시 1981년 부산직할시 정식 개칭 전까지는 그냥 '부산시장'이었다. 다만 비공식적으로는 이때부터 이미 부산직할시라는 명칭이 통용되고 있었어서 지금은 소급 적용되었다.[25] 부산전차도 이때 동시에 폐선되었는데, 부산전차 폐선 계획을 최초로 수립한 사람 역시 김현옥 전 시장이었다. 다만 임기 내에는 실행하지 않고 후임 김대만 시장이 실행한 것.[26] 더 엄청난 것은 2호선 계획에서 영등포역 예정지 공사가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해서 신도림으로 위치가 바뀐 것을 빼면 난공사라 할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구 시장은 포병장교 출신답게 지도 읽는 눈썰미가 상당히 뛰어났다.[27] 비슷한 사례로 서울시장은 아니지만 관선 1번 + 민선 3번으로 4번 도지사를 지냈던 심대평 전 충청남도지사의 사례, 제25대 부산직할시장(관선)과 제31·32대 부산광역시장(민선)을 지낸 안상영 전 부산광역시장이 있다.[28] 이 때 박원순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깨고 올라간 상대가 다름아닌 나경원이었다.[29] 왜 이렇게 많냐면, 조선 시대의 한성부윤은 임기가 반년도 채 안 됐다.[30] 571p.~606p.[31] 주임관 3~5등으로 보했다. 이는 현재의 2~5급 공무원과 비슷한 지위이며 당시 일본군의 영관급 장교에 맞먹었다. 즉, 일반 시장, 군수와 같거나 위고 도지사보다는 아래인 셈.[32] 1년 183일. 에히메 현 현지사 등을 역임했다. #[33] 7년 247일. 판한성부사부터 서울시장까지 통틀어 최장 기간 역임자였으나 2019년 박원순이 이 기록을 깼다. 마산부윤 등을 역임했다.[34] 1년 244일. 함경북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35] 1년 203일. 인천부윤 등을 역임했다. #[36] 2년 112일. 평안북도지사, 경상남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37] 3년 220일. 함경남도지사, 전라남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38] 325일. 함경남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39] 1년. 함경남도지사, 경상남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40] 285일. 함경북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41] 2년 72일. 총독부 체신국장 등을 역임했다. #[42] 2년 167일. 경상북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43] 1년 43일. 직속상관인 경기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44] 1년 129일. 경기도 경찰부장, 내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45] 2년 76일. 경상북도지사 등을 역임했다.[46] 1년 118일. 평앙부윤, 부산부윤 등을 역임했다. #[47] 2년 344일. 대구부윤 등을 역임했다. #[48] 44일. 마지막 일제강점기 경기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49] 공식적으로 미군정에 사표를 제출한 날짜는 1945년 9월 15일이다.[50] 60일. 주로 총독부 본청에서 근무했으며 8.15 광복과 동시에 직무에서 이탈했다.[51] 미군정부윤(military mayor)과 한국인 민정부윤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제임스 킬러프(James S. Killough) 소령이 군정부윤으로 시정을 맡았고 1945년 11월 17일 제40 군정중대가 경성부의 행정권을 인수하면서 제임스 윌슨(James E. Wilson) 중령이 맡았다.[52] 69일. 미 육군 소령.[53] 315일. 미 육군 중령.[54] 광복 당시 경성부윤이었던 일본인 쓰지 게이고(辻桂五)가 업무를 놓으면서 김창영(金昌永)이 추대되어 사무를 인계받아 경성부 행정을 담당했다. 김창영은 이후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경성부 부부윤(부시장) 겸 기획실장으로 임명되어 실무를 담당했다. 김창영을 초대 부윤으로 언급하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부윤으로 임명되거나 권한이 위임된 것은 아니다. 일본인 경성부윤과 부서장들은 미군정이 들어오고 나서 1945년 9월 15일에 사표를 제출했다.[55] 서울특별시史의 기록이다. 미군정 문서에는 10월 26일 임명되어 10월 27일부터 업무를 맡았으며 첫 번째 공식 행사는 10월 27일 대회의실에 집결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연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6] 신병을 사유로 1946년 5월 9일 사표를 제출하여 수리됨.[57] 197일.[58] 51일. 경성부 총무부장. 이후에는 심계원 차장을 역임했다.[59] 서울특별시史 해방후 시정편의 기록이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 기사에서는 7월 1일 오후 2시에 취임식을 거행했다고 나온다.[60] 90일. 임기 중 경성부가 서울시로 개칭되면서 초대 서울특별자유시장이 된다.[61] 2년 78일. 해방 이후 초대 서울시장. 서울(특별자유시)이라는 명칭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경성부윤이었으나 곧 '서울시장'으로 개칭되었다. 여담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의 워싱턴 D.C.처럼 서울시를 우남시로 만들고 싶어했다.[62] 172일.[63] 69일.[64] 1년 266일.[65] 후임 김태선 취임까지 전예용 전 부시장이 권한대행.[66] 1년 26일.[67] 3년 337일.[68] 김태선 전 시장이 내무부장관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복귀할 때까지 이익흥 전 부시장이 권한대행.[69] 1년 160일.[70] 1년 179일.[71] 323일.[72] 242일.[73]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선거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다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서울시장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통령 임명직으로 회귀했다.[74] 이 당시의 지방선거는 시장, 도지사, 군수, 읍장, 면장, 시/도의원, 시/읍/면의원을 선출하였다. 현재의 전국동시지방선거와는 조금 다르다.[75] 선거 당시 당적.[76] 137일. 4.19 혁명으로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선거를 통해 최초의 민선 시장이 되었다. 날짜를 보면 예상되지만, 1961년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임기를 반 년도 못 채우고 자진사퇴한다.[77] 2년 210일.[78] 2년 104일.[79] 4년 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자 최측근으로 서울시장에 임명되어 불도저라는 별명답게 서울 대개조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80] 4년 139일. 임명직 시장 중 최장기간 재임. 그러나 육영수 저격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81] 4년 111일.[82] 1년 254일.[83] 1년 237일.[84] 1년 169일.[85] 4년 76일.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성공의 주역. 재임기간 지하철 2, 3, 4호선을 완공하였다.[86] 340일.[87] 2년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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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소속.[88] 53일.[89] 1년 127일.[90] 244일. 새 대통령 취임일에 맞춰 퇴임했다.[91] 7일. 당시 매우 유명했던 인권 변호사 출신에 40대라는 젊은 나이로 참신한 이미지까지 갖추고 있어, 당시 최초의 민주 세력 정부였던 김영삼 정부의 주요 인사로 내세울 만했다. 하지만 시장 취임 후 곧바로 서울 근교에 위치한 수려한 본인 소유의 전원 주택이 그린 벨트를 무단 훼손해서 건축된 사실이 언론 보도로 드러남으로써 1주일 만에 자진 사퇴하였다. 여담으로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는 보수 세력으로 변신하였다. 역대 최단 기간 재임.[92] 1년 227일.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난 그날 오후 7시에 문책성으로 경질되었다. 후에 민선 충청북도지사를 지냈다.[93] 11일. 경상북도지사를 하던 중에 이원종 전 시장의 경질로 급히 신임 시장에 임명되었지만 11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94] 239일. 마지막 관선 시장.
[[민주자유당|]] 소속.[95] 선거 당시 당적.[96] 2년 71일.[97] 1997.9.9.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시장직 사퇴.[98] 293일.[99] 4년.[100] 2000.1.20. 으로 당명 변경.[101] 외국 태생. 실질적 고향은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포항.[102] 4년.[103] 임기 만료로 퇴임 직후 바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어 당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민선 서울특별시장 출신 첫 대통령. 임명직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으로는 2대 시장인 윤보선이 있다.[104] 4년.[105] 민선 기준 최초의 재선 서울특별시장.[106] 1년 56일.[107]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당시 투표율이 33.3%에 못 미치자 사퇴했다.[108] 60일.[109] 2년 247일.[110]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나 사실상 야권의 단일 후보였다. 재보궐선거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었고, 시장 취임 후 에 입당한다.[111] 2012.2.23. 입당.[112] 4년.[113] 2015.12.28.
으로 당명 변경.[114] 2년 9일.[115] 최초의 3선 서울특별시장. 역대 최장 기간 재임(8년 256일). 재임 중 사망.[116] 272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으로 인한 서울특별시장 권한대행.[117] 직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 사실이 10일 0시(9일 자정)를 넘겨 확인되었기 때문에 실종 당일인 9일에는 임시로 직무 대리를 맡았던 것. 주된 차이가 시장으로서 현직이 누구냐 정도이다. 결재권자가 현직 시장인데 임시로 현상 유지의 범위 내에서 대결하는 자리가 직무 대리이고 권한대행자가 바로 최종 결재권자가 되는 것이 권한대행이다.[118] 1년 84일.[119] 두번째 3선 서울특별시장이고 임기 이후 재출마하여 당선된 세 번째 광역자치단체장이다. 이전에는 염홍철 전 대전시장과 우근민 전 제주지사가 임기 이후 재당선된 사례가 있다. 오세훈 다음에는 홍준표 전 경남지사와 유정복 전 인천시장이 각각 대구시장과 인천시장에 재당선되었다.[120] 최초의 4선 서울특별시장.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칠 경우 역대 최장 기간 재임 기록을 가져오게 된다. (통산 10년 13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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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소속.[88] 53일.[89] 1년 127일.[90] 244일. 새 대통령 취임일에 맞춰 퇴임했다.[91] 7일. 당시 매우 유명했던 인권 변호사 출신에 40대라는 젊은 나이로 참신한 이미지까지 갖추고 있어, 당시 최초의 민주 세력 정부였던 김영삼 정부의 주요 인사로 내세울 만했다. 하지만 시장 취임 후 곧바로 서울 근교에 위치한 수려한 본인 소유의 전원 주택이 그린 벨트를 무단 훼손해서 건축된 사실이 언론 보도로 드러남으로써 1주일 만에 자진 사퇴하였다. 여담으로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는 보수 세력으로 변신하였다. 역대 최단 기간 재임.[92] 1년 227일.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난 그날 오후 7시에 문책성으로 경질되었다. 후에 민선 충청북도지사를 지냈다.[93] 11일. 경상북도지사를 하던 중에 이원종 전 시장의 경질로 급히 신임 시장에 임명되었지만 11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94] 239일. 마지막 관선 시장.
[[민주자유당|]] 소속.[95] 선거 당시 당적.[96] 2년 71일.[97] 1997.9.9.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시장직 사퇴.[98] 293일.[99] 4년.[100] 2000.1.20. 으로 당명 변경.[101] 외국 태생. 실질적 고향은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포항.[102] 4년.[103] 임기 만료로 퇴임 직후 바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어 당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민선 서울특별시장 출신 첫 대통령. 임명직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으로는 2대 시장인 윤보선이 있다.[104] 4년.[105] 민선 기준 최초의 재선 서울특별시장.[106] 1년 56일.[107]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당시 투표율이 33.3%에 못 미치자 사퇴했다.[108] 60일.[109] 2년 247일.[110]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나 사실상 야권의 단일 후보였다. 재보궐선거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었고, 시장 취임 후 에 입당한다.[111] 2012.2.23. 입당.[112] 4년.[113] 2015.12.28.
으로 당명 변경.[114] 2년 9일.[115] 최초의 3선 서울특별시장. 역대 최장 기간 재임(8년 256일). 재임 중 사망.[116] 272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으로 인한 서울특별시장 권한대행.[117] 직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 사실이 10일 0시(9일 자정)를 넘겨 확인되었기 때문에 실종 당일인 9일에는 임시로 직무 대리를 맡았던 것. 주된 차이가 시장으로서 현직이 누구냐 정도이다. 결재권자가 현직 시장인데 임시로 현상 유지의 범위 내에서 대결하는 자리가 직무 대리이고 권한대행자가 바로 최종 결재권자가 되는 것이 권한대행이다.[118] 1년 84일.[119] 두번째 3선 서울특별시장이고 임기 이후 재출마하여 당선된 세 번째 광역자치단체장이다. 이전에는 염홍철 전 대전시장과 우근민 전 제주지사가 임기 이후 재당선된 사례가 있다. 오세훈 다음에는 홍준표 전 경남지사와 유정복 전 인천시장이 각각 대구시장과 인천시장에 재당선되었다.[120] 최초의 4선 서울특별시장.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칠 경우 역대 최장 기간 재임 기록을 가져오게 된다. (통산 10년 13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