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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 주석 김일성을 장남이자 후계자인 김정일이 암살 혹은 사망하도록 방치했다는 가설. 오늘날 사실확인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지만, 여전히 북한 내외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음모론이다.2. 배경
김일성 사망 직전인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 즉 남북 간 정상회담이 최초로 성사될 뻔 했는데[1] 겨우 보름을 앞두고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성사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급작스러운 사망은 아직까지도 떠도는 김정일에 의한 김일성 암살설의 배경이 된다. 이미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원치 않아, 아버지 김일성을 죽게 만들거나 혹은 죽게 내버려뒀다는 것이다.암살설 자체는 1994년 7월 9일 재일 반북운동단체인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상임이사장 박갑동이 독살설을 제기한 게 시초이며, 홍콩 북한관측통들도 12일에 쇼크사 유도설을 언급했다.
그러나 사망 당시 김일성은 82세였으므로 당시 남북한 모두의 평균수명을 약 10년 가량 초과할 정도로 나이 먹은 노인이었고[2], 여러 지병을 앓았기 때문에 언제 사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남북 고위급 회담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김일성의 건강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었다. 특히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김일성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하거나 방귀도 조절하지 못하는 등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노인이었으며, 그해 5월에도 눈 수술을 받아 휴식이 필요했는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서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황 비서는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남측 주민들이 항일영웅을 만세로 맞이할 것이고, 김일성이 통일의 주도자가 될 것인 양 아첨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크게 들뜬 김일성이 무리하게 정상회담을 진두 지휘하다 과로가 겹쳐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한 바 있다.
참고로 한국에 한해서는 지미 카터와 만나는 독재자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죽거나 권좌에서 쫒겨나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데[3], 그 중에서도 특히 김일성은 진지하게 카터에게 원인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한 사람이 카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일성 암살설이 나도는 배경에는, 소련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김일성 시절에는 어느 정도 사회복지가 보장되어 집이나 의료, 교육은 공짜였고, 기초 생필품 및 식료품도 배급되어서 어느 정도 수준있는 삶을 살 수 있었는데, 소련 등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김정일 시대 들어서는 이러한 배급이 끊기고 주택과 의료, 교육은 사실상 유상화가 진행되었으며 물가 또한 폭등하여 하루 벌어 하루 살기 힘든 수준으로 삶의 질이 급속히 퇴보하다 보니 김일성 시절을 낙원 시절로 여기는 심리가 생겼고,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것을 김정일 탓으로 생각하여, 김정일에 대한 분노가 음모론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이게 정황증거만 놓고 보면 사실로 여기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물증도 없으니 그냥 떡밥일 뿐이다. 아마 이 사건의 진실은 통일 이후에도 밝히기 어려울지 모른다.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을 김정일도 이미 죽었으니 진실은 저 너머에.
3. 상세
암살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원체 떠받들고 당시 악화되는 현실을 왜곡해서 보고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북한의 경제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어가고 있었음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김정일이 전권을 휘둘러 편 정책들이 죄다 실패로 돌아가고 그 여파가 커져 진상을 보고받은 김일성이 진노해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지시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1994년 7월 3일, 김일성은 묘향산 특각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을 진행하기로 했고, 도착하자마자 쉬지도 않고 시설을 점검하는 등 정상회담 준비에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서울을 방문하면 읽을 연설문을 검토할 정도로 남북관계 개선에 거는 기대가 대단했다고.그러던 중 7월 6일, 경제부문 책임자 협의회에서 김일성이 이왕이면 김 대통령이 묘향산까지 기차를 타고 올 수 있도록 경의선 철도 보수 작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냐고 묻자 철도상이 대답을 못 하고 쭈뼛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에 김일성이 담뱃갑으로 책상을 툭툭 치면서 "아니, 배짱 좋던 사람이 와 그러네? 김영삼이가 오는 게 마음에 안 들어?"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철도상의 "그때까지 레루(레일)을 깔 수 없을 것 같습니다"는 발언에 갑자기 분위기가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수령의 지시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말에 의아해하는 김일성에게 철도상이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폭탄 선언을 하였고, 김일성이 "아니, 자금이나 물자가 부족한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네?"라고 반문하자, 철도상은 마침내 "배급이 중단된 지 3개월이 지나 동원이 불가능하다"고 진실을 실토하고 만다. 사실 누가 됐든 간에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다. 자금 및 물자를 조달하는 건 사정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건 정말로 사람이 없는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김일성은 격분하여 "배급이 안 되는 게 언제부터야?"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 다음날인 7일 이어진 회의에서 김일성은 "조직비서가 군량미를 풀겠다고 약속했으니 반드시 기한 내에 레루 공사를 마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국의 주석이라는 사람이 이 시점에서 이미 제대로 된 보고도 못 받고, 아들의 허락 없이는 군량미를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4] 심지어 이 날의 회의에서는, 김복신 부총리의 "최근 방문한 강원도 평강에서 군인들이 헝겊으로 둘둘 만 신발을 신고 나뭇가지를 줍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는 말에 "내가 빨치산 할 적에도 그런 걸 신지는 않았어!"라며 격노했다고. 아들 김정일에게 "그 따위로 일할 거면 당장 최고사령관이고 당 조직비서고 싹 그만두라!"라고 소리 지른 것이 이 무렵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한편 위의 사건 이후에 앞으로 있을 김영삼과의 회담에 대한 예비설명회 격의 행사를 북한 최고위층을 모아서 열었는데, 여기서 김일성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따른 것은 그저 시대적인 우연이었지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거기(공산주의)에 집착하지 않는 게 좋다는 등, 상당히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고 한다.
3.1. 김일성 사망
자세한 내용은 김일성/사망 문서 참고하십시오.김일성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유가 철도상 때문임을 파악한 김정일은 철도상을 호출하여 마구 혼을 냈고, 후술할 "통일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 반동"이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 직후의 행동이 의미심장한데, 이미 묘향산 초대소에 있던 김일성에게 "의료진들이 매우 과로하여 쉬게 해야겠다"고 진언하여 승낙을 받아 의료진이 잠시 철수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 후 김일성은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북한 당국은 사후 34시간 동안 사망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가, 이후 관영매체를 통해 김일성은 심근경색 및 심장 쇼크가 겹쳐 7월 8일 새벽 2시 무렵 심장이 완전히 멈췄다고 전했다.
3.2. 한편 남한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은 이 일을 두고 "내 기에 눌려 죽은 것(....)"이라고 농을 쳤고, 대외적으로 "남북정상회담 합의 원칙은 유효하다"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으로 보아 김일성 사망 전후 남북 간 분위기가 꽤 부드러웠던 것은 사실이다.게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어떠한 조의 표현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간주해 엄중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음에도 당시 남총련 산하 전남대 총학이 김일성 분향소를 차렸다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여기에 PD계열들이 대자보를 통해서 김일성 분향소를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하면서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도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 외에도 PC통신 하이텔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5] 게시판에서 한 회원이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는 게시글을 올리자 연행된 사례도 있었다. 1994년 주사파 파동도 논란이 커지는 데 한몫했다.
4. 분석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모습이다. 김정일 뒤에 보이는 자는 허담. |
이에 대해 당시 김정일은 "통일, 통일하는 것들은 다 노망난 것들이야!"라는 망언을 하는가 하면,[6] 김일성이 주재한 회의에서 김달현이 "더 이상 공산주의로는 안 됩니다. 경제개방을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김정일이 화를 내며 제지하다가 김일성이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고 말한 일화까지 있었다. 게다가 김일성이 공교롭게도 김정일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이던 남북정상회담 바로 직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더욱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이후 김정일은 후계자를 논하는 것 자체를 반역이라 간주하고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자신을 너무 일찍 후계자로 내세우는 바람에 권력을 모두 빼앗기다시피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전철을 밟기 싫었다는 분석이다. 때문에 김정은의 후계체계는 빠르고 급작스럽게[7] 진행되었고, 이것 역시 김정일이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에 김일성이 사망한 장소인 특각을 철거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일성이 잠시 앉았다는 벤치를 사적지라고 보존하는데 그가 있었던 별장을 치워버렸다는 것은 암살설에 힘을 더해주고 있다. 당장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도 보존되어 있는 판국에 김일성의 특각이 철거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월간 신동아에서는 탈북자들의 증언 등을 조합하여 김정일의 고의적 의료진 철수와 김일성 방치로 결론을 내리고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실제로 김일성 사망 이후 김일성 경호를 담당하던 호위총국 제 1국의 요원이 김정일을 향해 총질을 했다는 괴담, 호위총국이 숙청 재개편된 데에는 김일성 암살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 김정일이 주역할을 했다는 괴담도 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열등감과 히스테리가 심한 김정일의 성격과 말년의 김일성의 꼰대질이 작용하여 부자간이 원만치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 아들에게 노망난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 김일성의 상실감과, 자신의 정치외교적 노선과 반대로 행동하며 행보에 딴죽을 걸고 자꾸만 권위를 훼손시키는 아버지와 비교되는 김정일 자신의 정책 실패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불가피했다. 권력에 티끌도 용납하지 않는 김정일의 스타일로 볼 때,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상왕 김일성이 너무 오래 살아서 문제가 된 것이다. 거기에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으면서도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패륜적인 짓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충분히 가정 할 수 있을만큼 김정일은 그동안 막장짓을 서슴없이 저질러 왔기도 하다.
5. 의문점
김일성 암살설의 가장 큰 허점은 김정일이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암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상술했다시피 이미 북한의 권력 대부분은 김정일이 다 틀어쥐고 있었고, 김일성은 그동안의 북한 내 신망과 일부 심복들을 제외하면 힘이 없었다. 즉 후계자는 이미 김정일로 굳어졌고, 한때 경쟁자였던 삼촌 김영주와 이복동생 김평일은 완벽히 거세되어 사실상 유배 생활 중[8]이었고, 평양의 권력층 내부에는 이들에 대한 동조세력이 전혀 없었다. 또한 김일성의 건강은 당시 매우 좋지 않았으며, 김정일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권력을 정당하게 이어받을 수 있었기에 암살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쓸 이유도 없었다.[반론1]김일성이 통일, 개방을 추진하려고 하자 이걸 막기 위해 죽이려고 했다는 것도 신빙성이 부족하다. 이미 김일성은 모든 북한 내 실권을 빼앗긴 상태였고, 진짜 힘은 김정일이 쥐고 있는 상태였기에 김일성이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몇 번 한다고 해서 통일이 이뤄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빼앗긴 것조차 아니고 자발적으로 모든 권력을 김정일에게 물려주고 김일성 본인은 회고록이나 쓰면서 탱자탱자 상왕으로 놀고 있었다. 김정일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한데, 김일성을 죽여서까지 정상회담을 막으려고 했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는 것.[반론2]
게다가 김일성이 통일, 개방을 추진하려 했다는 것도 대단히 무리수인 것이, 김일성 중심의 유일사상체계를 주도적으로 건설한 것이 김정일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모든 재가와 승인이 이루어졌다. 김일성 본인이 중국과 소련에게 간섭받기 싫어 국제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탈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는 독자적 사상체계까지 만들어버리는 것을 승인한 판국이었다. 이 작업을 주도한 것이 김정일이었는데, 김일성은 그 와중에 김정일이야말로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서 굉장히 좋아했다. 김일성이 국제적 고립과 이로 인한 경제 폐색 등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김정일이 후계자로 굳어지기 훨씬 전부터 지적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기껏 자기 권력이 정점에 있을 때는 그 작업을 묵인해놓고 놀고먹을 때쯤에 와서야 개혁, 개방, 평화통일에 마음이 기울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관련 증언이 지나치게 자세하다. 관련자 인터뷰나 증언들을 보면 김일성과 김정일이 여러 번 다투었다는 말도 있는데, 과연 저 둘이 다투는 모습을 보고, 대화까지 상세히 들을 정도라면 얼마나 측근이고, 북한 고위직이어야할까? 이는 북한관련 증언의 문제점 중 하나로 듣는 대한민국 입장에선 그걸 검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 그런데 공교롭게도 탈북자들은 과장을 매우 많이 섞는 것으로 유명하다.
6. 여담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모 인터뷰에서 효심 깊은 장군(김정일)이 그랬을 리 없다며 이 음모론을 부정했다.김정일의 후계자가 자기 고모부인 장성택과 이복형 김정남 등을 정말로, 그것도 아예 대놓고 살해하는 패륜을 보여주면서,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가설에 신빙성을 보태주기도(...) 했다. 강철환은 김정일 사망 당시 김정일은 급사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24시간 응급처치가 풀가동되는 시스템하에서 후속 조치가 늦었다는 게 의심스럽다며 김정은이 김정일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11] #
2016년에 노진환 전 서울신문 사장이 쓴 회고록 <시대의 격랑 속에서>에 따르면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이 무렵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김일성과 그 측근들의 망명을 도와주러 입북했다가 김일성 사망 며칠 전, 급하게 다시 북한을 빠져나왔다는 일화가 있는데, 정작 김우중 본인은 <월간중앙> 2017년 1월호 인터뷰에서 "여러 번 북한을 들락날락하던 터라 일화는 많지만 잊어버렸다"고 했다.
[1] 잊힌 얘기지만, 5공 시절인 1984~1985년에 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논의되었으나 무산되었다.[2] 1993년 기준으로 남한 평균수명은 73세, 북한은 72세 정도였다. 즉, 살만큼 살만한 나이를 넘겼다는 얘기다. 거기다 북한은 이후에 고난의 행군으로 오히려 수명이 더 줄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더더욱.[3] 사실 이는 억지로 끼워맞춘 거에 가깝다.[4] 그러니까, 말년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관계는 문자 그대로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처럼 변한 것이다.[5] 약칭 전대기련[6] 하지만 정작 본인은 훗날 북한 정권 수립 이래 처음으로 한국 대통령들과 정상회담을 그것도 두 번이나 가지고, 게다가 당시는 아니었지만 훗날 한국 대통령이 되는 또 다른 사람과도 회담을 했다. 츤데레? 이후 본인의 아들인 김정은도 정상회담을 하기는 했지만 최초로 정상회담을 한 것은 김정일이다.[7] 즉 김정일이 뇌졸중을 겪은 후인 2008년 경부터. 김정일은 그 후 3년만에 사망했다.[8] 김영주는 건강 문제 때문에 진작에 일선에서 물러나 조카 김정일의 뒤를 봐주면서 편을 바꿔탔고, 김평일은 귀국을 금지당한 채 동유럽 대사 자리를 떠돌고 있었다.[반론1] 반대로 말하면 김정일이 권력의 불안요소로 전락한 김일성을 살려둬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도 된다. 의료진을 철수시키는 것만으로도 간접적으로 죽일 수 있으니까.[반론2] 암살설에서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인 이유는 개방보다는 김일성이 김정일로 부터 권력을 회수하려 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김정일이 실권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김일성이 건네줬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인 김일성이 권력을 다시 찾고자 했다면 사람들 모아놓고 말 한마디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김정일로써는 그 전에 암살하는 수 밖에 없다.[11] 물론 당시 김정일의 건강상태로 보면 제대로 치료를 받았어도 얼마 못 버텼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말 그대로 허무맹랑한 뇌피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