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08:30:00

훙치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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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4. 일본군은 얼마나 전사했는가?5. 이후6. 참고 문헌7. 관련 문서

1. 개요

간체자:
정자:
한어병음: Hóngqí hé zhàn dòu

훙치허 전투(혹은 홍기하 전투)는 1940년 3월 25일김일성이 이끄는 유격대가 중국 지린성 허룽시 훙치허(紅旗河)에서 마에다 경찰 토벌대[1]와 싸운 전투다.

한동안 김일성이 지휘했다는 증거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으나 만주국 시절 세워진 마에다 추모비[2] 등 실증자료가 발견되고 연구 자료가 축적되면서 학계에서는 이 전투가 김일성의 항일 업적으로 합의되었다.

2. 배경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은 파죽지세로 중국 전선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일본의 남경 점령 이후 중국 전선이 조금은 교착되기도 했지만 1938년까지만 해도 전황상으로는 일본군에게 유리해 보였다. 이와 더불어 1938년 일본군동북항일연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일본군은 2만 명에서 3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토벌 부대를 동원하여 동북항일연군 조직을 와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1939년 10월부터 일본 관동군은 동남부 치안숙청공작이라는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겨울에 눈 속에서 비행기를 띄워 수색하여 유격대를 막다른 지경으로 몰아넣는 작전이었고 당시 일본 관동군은 김일성을 포함한 독립군 지휘자 5명 각각에게 1만 엔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다. 이 상황에서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흩어져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서야 했다.

3. 전개

이 전투는 피델 카스트로가 몬카다 병영을 공격한 전설적인 전투보다 규모면에서나, 그 비중에서나 훨씬 의미가 큰 승리였다.
김정일 코드 p.42
위의 인용문은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내린 평가다.

일본은 1939년 8월 관동군 6개 연대와 만주군과 경찰병력 2만 명을 동원하여 김일성과 최현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를 주요 목표로 6개월간의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당시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를 토벌하고자 했던 마에다 다케시는 조선인이 다수 포함된 다른 특별 경찰대를 이끌고 1940년 초 몇 달 동안 김일성의 유격대를 추격했다. “김일성의 목은 내가 밴다”고 외치고 다녔던 마에다는 “김일성 부대가 허룽현 훙치허의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여 쌀을 탈취해갔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 및 군부대를 출동시켰다. 김일성 부대는 매복해 있다가 반격하기로 결정하고 마에다 부대가 접근해오자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일성의 유격대가 마에다 부대와의 교전이 있었던 것은 1940년 3월 13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마에다 부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마에다 부대는 첫 교전 이후부터 거의 2주 동안 김일성을 뒤쫓았다. 그러던 1940년 3월 25일 김일성 부대가 만든 덫에 빠졌다. 여기서 김일성은 250명의 유격대로 150(혹은 200)명의 일본군 부대와 싸워 승리했다.

당시 훙치허에서 치른 전투에서 김일성의 뻥이 섞인 주장대로라면 유격대는 일본군 70~140명을 사살했고 약 30명 정도의 일본군을 포로로 붙잡았다.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 토벌대측의 경기관총 5정, 소총 100여 정, 탄알 1만여 발, 무전기 1대를 노획했다. 다만 유격대쪽의 사상자가 얼마나 나왔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든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참이던 기간에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김일성을 연구한 서대숙 교수는 동북항일연군과 그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김일성의 부대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의 작전에서 가장 많을 때에 중국인과 한인을 합쳐 거의 300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어떤 때에는 50명 이하의 인원으로 작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작전의 요체는 수많은 작은 단과지대로 부대를 나누고, 깊은 산림과 접근이 곤란한 지역을 통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데에 있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p.35

4. 일본군은 얼마나 전사했는가?

훙치허 전투의 결과는 관동군 헌병대 자료에도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토벌대의 사상자 규모에 대해서는 숫자가 조금 적기는 하지만 대체로 인정했고 현지 주민의 동요 조짐을 보인다고 전했다. 당시 관동군 현병대 측에서 보고한 자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비 주력 150명은 안투 현을 유동중이던 3월 11일 훙치허 삼림경찰대 본부를 습격했다. 현금 1만 1000여 원 및 의복, 식량 다수를 약탈하고 화약고를 폭파하고 주민 145명을 납치해 도주했다. 이 비를 추적 중인 마에다 경찰토벌대는 3월 25일 안투 현 다마루거우 서북방 지구에서 조우, 교전을 두 시간여 하고 이것을 궤주시켰으나, 이 전투에 의해 아빙 전사는 대장 마에다 경정 이하 55명, 부상 26명을 내는 등 그 여세를 경시하기 어렵고 더욱더 경계를 요하는 현상이다. 비습지 부근 주민은 약간 불안 동요의 조짐 있어 헌병은 유언 단속, 민심 선무에 노력하고 있다.
1940년 3월 사상대책월보
일본 경찰 자료에 따르면 최소 50명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했으며 사상자까지 합치면 최소 7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간도 경찰대 본부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격대 측의 전사자는 31명인데 반해 토벌대측의 전사자는 59명, 행방불명 9명, 전상자 27명이다.[3]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50명이 무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 당시 김일성이 이끌던 동북항일연군의 대원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던 유옥천[4]은 마에다 부대의 140명 중에서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았고 소총 100자루와 기관총 6자루를 획득하였다고 회고했다. 또 동북항일연군측 손실로는 정치부 주임 여백기 등이 부상당했다고도 말했다. 이런 자료를 토대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포함하여 많은 북한측 자료들은 140명의 일본 경찰이 전사했다고 주장한다. 세기와 더불어와 비슷한 북한 측 자료인 림춘추의 회고록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에서도 여기서 잡은 포로 30명을 추가하여 적군 170여 명을 살상 및 포로하였다고 추정했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연구한 일본의 역사학자 와다 하루끼는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서 당시 일본군 관계자의 말로는 마에다 부대에서 살아남은 자는 대략 20명 정도라고 하며 일본 측 문헌에 나온 50명 정도 생존은 생존해 있던 이들의 증언과 어긋난다며 대략 120명 이상의 일본군이 전사한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일부 국내 독립운동 관련 서적들은 앞서 언급한 포로 30명을 추가하여 일본군은 대략 150명 정도의 사상자가 속출했다고 보기도 한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훙치허 전투에서의 일본 경찰의 전사자 추정치는 대체로 수치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5. 이후

1940년 3월 일본군 마에다 부대와 싸워 이긴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계속 도주해야 했다. 일본군의 토벌작전은 독소전쟁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941년 3월 말까지 약 1년 8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훙치허 전투 이후인 1940년 7월 김일성 부대는 340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1940년 9월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게릴라 부대에 대처하기 위해 훨씬 큰 규모의 게릴라 진압부대를 조직했다. 이 시기에 이후 북한 정권의 지도부가 될 최용건, 김책 등이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다.[5] 1940년 10월 김일성 부대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고 김일성은 훈춘을 떠나 10월 23일 소련으로 갔다.

1941년 2월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 정착했다.[6] 미드웨이 해전 이후인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소련의 붉은 군대인 제88특별여단으로 편성됐고 1945년 8월 소련에서 해방을 맞이했다.[7][8]

북한에서는 교육은 하지만 보천보 전투만큼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보천보 전투와는 달리 실질적인 군사적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한반도에 처음으로 진입했다는 상징성이 없고 상대도 일본군이 아닌 경찰이었던 데다 중국 땅에서 벌어졌던 전투였기 때문인 듯하다.

6. 참고 문헌

  • 와다 하루끼의 북한현대사, 와다 하루끼, 창비(2014)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현실문화(2017)
  • 간도특설대, 김효순, 서해문집(2014)
  • 김정일 코드, 브루스 커밍스, 따뜻한손(2005)
  •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와다 하루끼, 창비(1992)
  •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대숙, 청계연구소(1988)
  •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연구 II, 박경순, 굿플러스북(2019)
  •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2014)
  • 연변인민항일투쟁사, 최성춘, 민족출판사(1999)

7. 관련 문서


[1] 북한에서도 군병력과 싸운 것이 아니고 일제의 '경찰토벌대'와 싸웠다고 주장한다.[2] 비석의 실물은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3] 서대숙 교수는 이 일본군 자료를 토대로 이만큼의 사상자가 나왔고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250명이 마에다 부대 150명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다.[4] 이후에도 중국에서 거주했다고 하며 1990년대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5] 즉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을 비롯한 약 200명의 주요 게릴라 지휘자들은 만주벌판을 셀 수도 없는 한국인의 피로 물들인 무자비한 진압작전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다.[6] 하루끼에 따르면 하바롭스크 야영은 A야영과 B야영으로 나뉜다.[7] 북한에서는 당시 김일성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북한으로 진입한 군대는 소련의 붉은 군대였다. 다만 소련의 붉은 군대 소속으로 대일전에 참가하여 공로를 세운 조선인들은 적잖게 있다.[8]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몇몇 한인 집단이 소련군의 진주를 도와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소련군 제25군에 한인부대가 있었다고 한다.(한국전쟁의 기원 p.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