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09:36:29

영락 17년 전투

영락 17년 전투
永樂 十七年 戰鬪
시기 407년
장소 사료 부족으로 인한 장소 불명
원인 사료 부족으로 인한 원인 불명
교전국 고구려 교전국 불명
지휘관 지휘관 불명 지휘관 불명
병력 50,000 명 10,000 명 이상
피해 피해 규모 불명 10,000 명 이상
결과 고구려군의 대승

1. 개요2. 기록
2.1. 교전 상대
2.1.1. 백제 또는 왜 또는 가야 아니면 백제 + 가야 + 왜와 싸웠다는 설2.1.2. 후연과 맞섰다는 설
2.2. 비슷한 시기 고구려, 백제, 후연의 기록
2.2.1. 고구려2.2.2. 백제
2.3. 사구성(沙溝城) 에 대해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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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락 17년 (407년) 고구려광개토대왕이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어떤 적을 섬멸하고 전리품을 획득함과 동시에 성 몇개를 점령한 전투. 영락 17년 전투라는 명칭은 당연히 공식 명칭이 아니다. 애당초 여수전쟁도 일정한 명칭이 없는 판국이다. 전투 목록/한국사의 전투들도 통용되는 명칭 없이 적당히 제목을 붙힌게 상당히 많다. 특히 고대로 갈수록.

2. 기록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광개토왕비문』출처

상세한 묘사는 아니나, 5만의 대군이 합전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대규모 회전을 벌인듯 하다. 더구나 획득한 적군의 갑옷이 만여 벌 이었다니 적군도 최소 수 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참전국이 대군을 동원하여 정면으로 충돌하는 회전은 명운을 걸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전투에서 깨진 모 세력의 명운은.......

2.1. 교전 상대

위에 나와있는 광개토왕비문 인용문이 이 전투에 관한 사료의 전부이다. 하필이면 그마저도 딱 교전 상대 부분만 파손되어 있어 누구를 격파했는지 알 수 없다.

교전 상대에 대한 학설은 크게 백제설,왜설,백제+왜설,후연설로 나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2.1.1. 백제 또는 왜 또는 가야 아니면 백제 + 가야 + 왜와 싸웠다는 설

  • 비문에 보이는 사구성이 수년 뒤 백제 전지왕 대 기록에 등장한다. 하지만 한자가 다르고[1], 전지왕대의 기사에는 사구성을 쌓았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 광개토왕비문의 문맥에서 파악했을때 407년 기록 바로 앞의 400년, 404년 기록 모두 백제 + 가야 + 왜를 상대한 기록이라 407년 기록도 그 흐름을 잇는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항상 큰 전투가 있으면 그 명분을 적어 뒀는데, 유독 이 전투에는 적어 두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앞서 백제가 왜와 동맹을 맺었다는 점이 이미 명분으로 작용했기에 따로 또 적지 않았다는 추측도 있다. 이 경우, 교전국은 백제 또는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된다.[2]
  • 자치통감에 의하면, 후연의 숙군성 점령은 영락 11년의 일이다.[3]

2.1.2. 후연과 맞섰다는 설

  • 광개토왕비문의 주제에서 파악했을때, 광개토왕비문은 숙신에 군사를 파견해 순찰한 일 같은 잡다한 사건까지 일일이 기재할정도로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가 상대한 세력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기재했는데, 왜 죽어라 싸운 후연은 없겠냐는 의견이 존재한다. 이를 근거로 했을때 영락 17년 기록이 후연이 아니라면 광개토왕비문에서 후연은 없는게 된다. 다른 전투는 모두 누굴 상대했는지 명확하게 나와있다.
  • 또한 삼국사기에도 407년 당시 백제와의 전투 기록이 남아있지가 않다.
  • 406년 12월까지 후연과 싸우고 있었다는 점과 407년에 후연이 멸망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후연으로 추정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407년의 전투가 후연의 멸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
  • 획득한 전리품(개갑 등)으로 볼때, 무장 수준이 떨어지는 왜나 백제에게는 힘든 수준의 무장이었고, 후연 관련 기록에 갑옷으로 중무장한 후연군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것도 한가지 근거이다. 특히 북위와 후연의 전투에서 북위군이 후연군의 개갑 여러벌을 획득했다는 매우 유사한 기록이 보이거나 406년 12월 목저성 전투에서 후연군이 갑옷을 드랍하는 장면이 결정적.
  • 음상사의 관점에서 볼때 사구성과 숙군성이 발음이 비슷하여 동일한 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 동원 병력을 바탕으로 후연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당시 백제는 396년 이후로 백성들이 징병을 피해 도망가는 바람에 수만 대군은 커녕 병력 동원 자체를 못하고 있었다.
  • 릉비에서는 전쟁이나 전투에 관한 기사는 분명히 명분이나 전치문을 사용해서 고구려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합리화를 했는데, 이 기사에서는 어떤 연유에서 전쟁을 치른건지 기록 되어있지 않다. 분명히 고구려가 전쟁을 한 명분은 자국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거나, 상대국가가 먼저 침공 해왔거나, 조공을 바치지 않아서 전쟁했다는 등의 이유가 있다. 391년의 전치문은 396년 백제 정벌의 이유를 설명하고, 399년의 전치문은 400년의 신라 구원의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전치문이나 명분을 기록하지 않은 이 17년 전투는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맥락에서 기록된 상대 (백제 왜 숙신 거란 etc)와는 다른 세력이다. 요약하자면 릉비에서 전쟁의 명분을 기록한 문장이나 전치문은 복수의 기사나 사건를 수식하는 경우가 없으므로, 상술된 백제와 왜 세력이라는 추정의 근거와 배치된다. (391년:396년/399년:400년)

2.2. 비슷한 시기 고구려, 백제, 후연의 기록

2.2.1. 고구려

15년(서기 406) 가을 7월, 메뚜기떼가 출현하고 가뭄이 발생하였다.
겨울 12월, 연나라의 왕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형북(陘北)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들을 데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병사와 말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병사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十五年 秋七月 蝗 旱 冬十二月 燕王熙襲契丹 至陘北 畏契丹之衆 欲還 遂棄輜重 輕兵襲我 燕軍行三千餘里 士馬疲凍 死者屬路 攻我木底城 不克而還

16년(서기 407) 봄 2월, 궁궐을 늘려 짓고 수리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增修宮闕

17년(서기 408) 봄 3월, 북연(北燕)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의 왕 모용운(慕容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모용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방계 혈족인데,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었을 때 모용운이 무예가 뛰어나서 태자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모용보가 모용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叙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 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6 광개토왕##

407년 기록에는 궁궐 수리 기록밖에 안보이지만 그 전후 기록이 의미심장하다. 406년에는 후연의 침략을 격퇴하고, (407년에는 후연에게 반격을 가한 뒤) 408년에는 후연이 망하고 고구려의 방계 왕족이 왕으로 등극....

2.2.2. 백제

3년(서기 407) 봄 2월, 이복동생인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으로 삼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으로 삼으니 모두 임금의 친척이었다.
三年 春二月 拜庶弟餘信爲內臣佐平 解須爲內法佐平 解丘爲兵官佐平 皆王戚也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3 전지왕##

407년에 백제에서 대대적인 내각교체를 실시한것을 두고, 407년 전투에서 백제가 고구려한테 갈려서 당시 지휘관이었던 진씨로 대표되는 반고구려 성향 귀족들이 세력을 잃고 경쟁 세력이 득세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해씨는 친고구려 성향의 귀족이기도 하니 뭔가 의미심장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407년의 기록은 이게 끝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 백제는 405년 9월에 아신왕이 죽었고(살해), 부여설례가 진씨 집안의 지원을 받아 전지왕한테 돌아갈 왕위를 찬탈한 시점이었다. 전지왕은 아신왕이 죽을 때 일본에 있었는데, 전지왕은 왕의 승하 소식을 듣고 귀국하던 중 해씨 귀족으로부터 설례가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외딴 섬에 있었다. 그리고 해씨 귀족이 설례와 진씨 귀족을 죽이고 나서야 간신히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즉위식도 406년에 간신히 했고, 407년에 있었던 해씨 위주의 전지왕 내각 교체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아니라는 설이 대세이다. 전지왕이 406년 내내 자신의 즉위를 막고 설례를 지원했던 진씨 귀족들을 숙청하면서, 자신의 즉위를 도운 해씨 집안을 위주로 내각을 교체한 게 407년 시점이기 때문이다.

2.3. 사구성(沙溝城) 에 대해

사구성은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407년 광개토대왕에 의하여 공파(攻破)되었다. 모래 사, 도랑(참호) 구 자로 이뤄진 명칭으로 보아 한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모래와 참호가 있었던 성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명은 중국에 다수 존재한다. 산동성, 칭하이, 장쑤성, 티벳 등에 沙沟镇, 沙沟乡 등 다양한 곳에 있음으로 보아 고유명칭보다 일반명칭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해당 한자를 사용한 지명 (沙郷)을 찾을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17년에 동북 2부(部)의 백성을 동원하여 쌓았다는 사구성(沙口城)과 같은 성으로 보는 설이 있다. 즉 광개토왕릉비의 영락 17년 전투를 대백제전으로 보는 것이다.

3. 기타

  • 광개토왕비문 탁본이랍시고 떠도는 위조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부분 교전대상이 지워진 부분에 왜를 채워넣고 있다.
  • KBS의 팩츄얼 드라마, 한국사기에서는 후연을 공격한 것으로 묘사했다.

[1] 광개토대앙비의 사구성은 沙溝城이고 삼국사기 전지왕 본기에 나오는 사구성은 沙口城이다. 다만 고대 금석문이나 역사서에는 한국어를 음차했을 경우 표기가 다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이사부의 본명은 김잇부이나 표기로는 이사부(異斯夫), 이종(伊宗), 이질부례(伊叱夫禮)등으로 표기된 것을 알수가 있다. 따라서 한자가 다르다고 다른 장소라는 것을 속단하기엔 이르다.[2] 그러나 신묘년의 전치문을 이용한 ‘대전치문설’은 398년 숙신 정벌 기사에 의해 이미 효력이 상실한 상태이다. 398년 숙신 정벌 기사는 391년 신묘년 전치문 이래로 등장하는 왜 가야 백제와의 교전 내용이 아니고 아예 방위 마저 상이한 북쪽과 동쪽이다. 398년 기사와 그 후의 기사들은 문맥상 신묘년 전치문과 관련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교전 세력이 백제일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상기된 대전치문설을 근거에 둔, 백제 원정 추측은 틀렸을 공산이 크다.[3] 하지만 종합적인 공적을 정리해서 기록해놓은 능비의 특성상, 편의를 위해 영락 17년 편입되었을 수도 있다. 같은 맥락으로 관미성 함락 기사도 병신년 영락 6년의 훈적으로 편입 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변명할 수 있다. 애초에 곧이곧대로 능비에 쓰여져 있는 연도를 맹신할 수는 없다. 같은 연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의 재분배를 하여 다른 연도에 편입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