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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의 기념물 제5호 | |
용암산성 龍岩山城 | |
<colbgcolor=#008837><colcolor=#fff>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산35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수량 / 면적 | 59,207㎡ |
지정연도 | 1988년 5월 30일 |
건축시기 | 삼국시대 |
<colbgcolor=#008837> 용암산성 |
[clearfix]
1. 개요
용암산성은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산35에 위치한 산성이다.1988년 5월 30일 대구광역시의 기념물로 지정됐다.
2. 내용
용암산성은 삼국시대 때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고 해발 380m 높이의 산꼭대기에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쌓았다. 지형상 중요한 군사적인 대비를 할 수 있는 산성이다.성벽의 둘레는 1km 가량이며, 산성의 서쪽과 남쪽의 산기슭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인공으로 절벽을 조성하여 적군의 침입을 대비했다. 성의 동북쪽에는 우물터가 있었고 성 안에서는 신라 토기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 때 쌓은 것으로 추측한다.
임진왜란 당시 여기에서도 전투가 있었는데,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출처]
3. 기타
등반로는 조성되어 있지만, 주차시설이 마땅치 않고 시작 지점의 경사가 가파르다. 또한 바로 옆으로 경부고속도로와 대구포항고속도로를 잇는 도동JC가 위치하여 경치가 좋지 않고 소음이 심하다.산성의 위로 올라가면 팔각정을 지어놨는데, 여기서 대구국제공항을 내려다 볼 수 있다.
4. 대구광역시의 기념물 제5호
대구광역시의 기념물 제5호 |
용암산성은 해발 380m의 산꼭대기에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안심과 하양으로 이어지는 통로상에 있어, 지형상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벽의 둘레는 약 1㎞이며, 성의 서쪽과 남쪽의 산기슭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인공적으로 절벽을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절벽 앞에는 문터로 보이는 입구가 있으며, 성 안의 동북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들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대구지방의 의병들이 이 성에 모여 활동했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그 후대까지 계속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