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47:49

의정부(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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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 의정부 국왕 직속

삼군부 오위 비변사 오군영 속오군
<rowcolor=#f0ad73> 고려 중앙정치기구 · 대한제국 중앙정치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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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기능4. 직제5. 대한민국 행정조직 및 국무회의와의 비교6. 관련 기록물7. 이후 역사
7.1. 개화기 ~ 8.15 해방7.2. 정부수립~발굴7.3. 공원화
8. 관련 문서

1. 개요

의정부()는 조선 시대의 행정관청으로 정승을 비롯한 재상들로 구성된 최고 의결 또는 심의 기관이다. 수장은 수상인 정1품 영의정이다.

백관(百官, 모든 관료)을 총괄하고 서정(庶政, 국가 일반 행정)을 담당하던 최고위 대신급 기관으로 묘당(廟堂), 도당(都堂), 정부(政府), 괴부(槐府), 낭묘(廊廟), 성부(省府), 암랑(巖廊), 황각(黃閣)이라고도 한다.

2. 역사

1400년(정종 2) 4월 고려에서 이어진 의결기관 도평의사사가 의정부로 바뀌어 설치되었다. 1401년(태종 1) 문하부가 없어지고 언론을 담당하던 낭사(郎舍)가 사간원으로 독립하면서 재신(宰臣)이 의정부에 소속되었다.

태종 연간(1401 ~ 1418)인 1414년(태종 14)에는 육조직계제가 도입되면서 외교 문서, 사형수 판결을 검토하는 정도로 권한이 줄어들고 조직이 대폭 축소되었다. 이 시기에는 명나라중서성승상 폐지를 계기로 의정부 폐지도 검토되었지만 나이 든 공신을 둘 자리와 사대 외교에 국왕 대신 내세울 상징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유지되었다.

세종 연간(1418 ~ 1450)인 1436년(세종 18)에는 의정부서사제가 도입되어 관원 수가 소폭 늘어나고 인사, 군령, 사형수 판결을 제외한 나머지 정무가 다시 의정부의 서명을 거쳐 품달 및 하달되면서 권한이 강화되었다.

1455년(세조 1) 육조직계제가 다시 시행되었다가 1516년(중종 11)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바뀌었다.

임진왜란(1592 ~ 1598) 이후에는 임시 국방기관이었던 비변사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유명무실해졌다가 흥선대원군 집권으로 1865년(고종 2) 비변사가 폐지되면서 위상이 회복되었다.

이후 1894년(고종 31) 6월 갑오개혁과 친일계 개화파의 집권으로 1895년(고종 32) 내각으로 바뀌었다가 1896년(건양 1) 아관파천 이후 명칭이 다시 의정부로 환원되어 건양(1896~1897), 광무(1897~1907) 연간 동안 이 명칭으로 존속하였다. 1907년(광무 11) 의정부 관제가 폐지되면서 다시 내각으로 바뀌었다.

3. 기능

파일:의정부서사제 6조직계제.jpg
6조직계제 시기와 의정부서사제 시기의 조직도.

재상들은 의정부에 모여 다른 관청들의 보고를 취합한 후 국왕에게 보고하여 의결하였고, 의결 내용을 양식에 따라 문서로 만들고 거기에 서명하여 최종적으로 법령 또는 명령의 효력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서명 과정을 서사(署事)라고 한다. 육조는 정책에 대해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에서 서명한 결정 사항을 받아 행정을 집행했다. 그러므로 명목상으로는 의정부가 육조보다 상급 기관이다.

고려의 도평의사사는 군무(軍務)를 처결할 수 있었지만 의정부는 군무에 관여할 수 없다는 차이가 있다. 의정부 설치 당시 군무는 중추원 또는 승추부(承樞府) 혹은 삼군부가 관장하였다가 나중에는 병조가 홀로 담당하였다.

태종과 세조 같은 임금이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비서 육조직계제를 실시하면 명목상의 의결기관이나 단순 자문기관이 되기도 했다. 더구나 명종 때 상설화된 비변사가 임진왜란 이후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고 군무까지 처리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조선 후기에는 삼정승이 의정부에 출근하지 않게 되었고, 찬성과 참찬은 병을 고치는 자리이며 사인과 검상은 기생 놀이를 하는 자리라는 말까지 나돌다가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위상을 회복하였다.

4. 직제

  • 재상
    • 정1품 영의정, 좌·우의정 각 1인
      통칭 삼정승, 삼의정(三議政). 정승 항목 참고.
    • 종1품 좌·우찬성 각 1인
      통칭 이상(貳相). 좌우 정승을 보좌하는 자리로 정2품인 판서를 하고나서 순서대로 찬성을 거치고 정승에 제수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임진왜란 후 비변사 대에는 실권이 약해졌다. 고종 때 의정부를 다시 세우고 갑오경장 때 좌·우찬성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다음해 내각제 개편 때 사라졌다. 현재의 국무조정실장.
    • 정2품 좌·우참찬 각 1인
      통칭 삼·사재(三四宰). 조선 초기에 의정부가 계획되며 좌참찬과 우참찬이 만들어졌는데, 태종 대에 좌참찬이 찬성으로 승격되고 우참찬이 참찬으로 바뀌었다가, 세종 대에 각각 자리별로 한 명씩 더 늘려서 유지되었다가, 임진왜란 후 비변사 대에는 실권이 약해졌다. 고종 대 의정부를 다시 세우면서 참찬 하나로 통합되고, 갑오개혁 때 사라졌다. 현재의 국무 차장.
  • 실무관
    • 정4품 사인(舍人) 2인
    • 정5품 검상(檢詳) 1인
    • 정8품 사록(司錄) 2인 → 1인

5. 대한민국 행정조직 및 국무회의와의 비교

대한민국의 국가행정조직 중에서는 국무총리 및 그 직속 기관, 부총리급 행정각부 장관을 아울러 의정부 및 그 관원과 비교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재상들은 고려 시대와 비교하면 육조와 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으므로 현대의 국무회의를 의정부와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는 어렵지만, 국왕 및 의정부와 육조 그리고 기타 기관이 참여하던 조선시대의 조정(朝廷)은 행정부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정무장관에 해당하는 재상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만 제외하면 국무회의와도 비교할 수 있다. 이때 구도는 왕 = 대통령, 의정부 재상 = 국무총리, 육조 판서 = 행정각부 장관 정도로 이해하면 비슷하다.

대통령이 실권을 가지고 직접 국무회의와 장관들을 통제하는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총리는 잘해야 대통령을 보좌하고 자문을 담당하는 별 실권 없는 꼭두각시의 입장을 벗어나기 힘들지만, 대통령이 상징적 국가원수내각책임제에서는 실질적으로 국가 정무를 총괄하며, 총리의 권한을 확대하는 책임총리제는 곧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에게 분산하는 제도로 여겨지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정치제도에서도 왕이 실권을 쥐고 실무 기관에서 직접 보고를 받으면 의정부는 자문 대응이나 심의 정도로 실권이 축소되는 데 비해, 왕권이 약해지거나 재상 정치의 이념에 따라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할 경우 왕은 여전히 국가의 상징이지만 그 실권은 축소되고 재상이 실권을 쥐게 되는 것.

대한민국의 국무회의는 대통령과 국무위원, 곧 국무총리와 행정부 장관, 정무장관이 모인 국가 심의기구이다.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의장이 되어 국무회의를 주재해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하지 않고 대신 국무총리에게 대부분 회의를 주재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총리가 회의를 주도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의정부 재상이 조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것과 비슷하다. 국무총리는 행정부의 2인자이면서도 실권이 없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영의정과 유사하다. 좌·우의정은 실권이 강하다는 점에서 국가 의결권자들의 대표인 국회의장과 재판소의 대표인 대법원장의 위상과도 비교할 수 있다. 또한 지금의 국무회의는 막후에서 협의된 정책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에 유명무실해진 의정부의 위상과도 유사하다.

6. 관련 기록물

의정부에서 만든 기록물로는 의정부등록, 의정부일기, 왜사일기, 정청등록, 의주부장계등록, 소차등록 등이 전해진다.

7. 이후 역사

7.1. 개화기 ~ 8.15 해방

구한말 지금의 세종대로를 다시 조성하면서 주변에 있던 육조 건물들과 같이 헐리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 내부 청사로 계획된 2층짜리 서양식 붉은색 벽돌 건물이 지어졌다. 그러나 완공 전에 경술국치가 일어나는 바람에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경기도청으로 쓰였다.

7.2. 정부수립~발굴

1967년 경기도가 경기도청 소재지를 수원시로 옮기면서 이 건물은 치안본부 본청과 서울지방경찰청 별관으로 쓰이다 1990년 헐렸다.[1] 근래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본이 지은 줄 알고 다짜고짜 허물었다는 정보가 돌아다니는데 당시에도 대한제국에서 지은 것은 알고 있었다. 가령 1989년 10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철거확정된 옛京畿道廳건물 "文化財로 보존하자"높은소리">는 구 경기도청 건물이 1907년 대한제국 시절 내무부청사로 지어졌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철거 사유도 민족정기니 과거사청산이니 하는 정치적 이유보다는 정부종합청사가 너무 협소하고 주차공간도 부족하며 너무 오래된 건물이라서 수령이 다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많은 건축학 관계자들이 철거에 반대했으나 결국 철거는 강행됐고 헐린 자리는 1996년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으로 공원처럼 조성되었다가 2016년 8월부터 의정부 청사 복원을 위한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발굴조사 완료는 2017년 10월. 여기서 의정부 터 유구에다가 구 경기도청으로 사용되었던 내부청사의 본관과 별관 벽돌 기초부까지 발굴 되어졌다. 고층 빌딩이 있는 육조 터와 달리 광장이었기 때문에 복원이 가능하다고 하나 실제 사업 가능성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발굴조사 검토를 거쳐 2020년 9월에 문화재청에서 의정부 터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558호로 지정했다.

7.3. 공원화

이후 서울시가 유구보존 및 역사문화 공간으로 만들어 또 다시 공원화를 진행하였으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가 문화재 보존관리 저해 등을 우려해 유구 보호시설 설치를 부결함에 따라 사업은 중단됐다. 서울시가 유구보호시설 설치 등을 위해 약 145억원을 예산으로 잡았는데 이는 건물 자체를 복원하는 예산과도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서울시 측 전시 공간 마련 계획을 부결하면서 장기 계획을 다시 세워 의정부 건물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다. 결국 유구 보호시설 국제 설계공모를 해 당선작 선정까지 했으나 진행하려던 설계작업도 백지화됐고 복토하여 공원화 계획은 훗날 건물 복원 시 이중으로 세금이 들어간다는 세금 낭비 지적에 현재로선 건물 복원의 가능성이 높다. 경복궁 월대 복원과 더불어 역사문화 공간으로 재 탄생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나 이 예산문제를 해결했는지 청사 복원은 이루어지지는 않고, 서울시가 기획했던 역사 유적 광장으로 조성하고, 그리고 6월 18일때 공개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여러번 발굴 현장을 시민들에게 공개했고 그중 마지막이 2023년이었다. 현장 모습 이후 발굴현장을 최종 정리하고 공원으로 만들어 2024년 6월 18일 임시 개방했다. 시민 피드백을 받고 7월 중순에 정식 개방 예정이다. 공원 풍경

대중들의 반응은 그리 썩 좋지 않는걸로 보이며, 반응이 "차라리 복원을 하지 왜 굳이 그렇게 만드냐"의 반응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마침내 9월 12일 정식으로 개장했다.

8. 관련 문서


[1] 후에 발굴후에는 본관 벽돌기초부와 별관 기초부가 유구와함께 같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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