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1-10 12:47:43

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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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花莊 / Ihwajang

1. 개요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문화재이자 사적 장소. 1945년 해방 후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면서 그의 개인 사저(舍邸)로 사용되었다가 그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경무대(現 청와대)로 이사함에 따라 '이승만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백범 김구경교장(京橋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건국 활동 3대 명소로 불리고 있지만 이승만이 정부 수립 문제로 백범 김구, 김규식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사실상 경교장, 삼청장과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1982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6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2.1. 조선시대

이 건물이 자리잡은 이화동 일대는 원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일제 때 없어졌다.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庭前只有李花樹 不見當時歌舞人)"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장생전은 이승만이 이곳에서 조각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19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2.2.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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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저택이었던 이 곳이 정계의 무대가 된 것은 해방 이후 이승만의 사저가 되면서부터이다. 1945년 10월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나 마땅히 국내에서 지낼 거처지를 찾지 못한다. 조선호텔에서 며칠을 머물렀으나 경비과중으로 곧 돈암장으로 옮기는데, 이 곳은 조선타이어 사장이었던 장진영에게 빌린 집으로서 3채 중 1채를 장진영이, 2채를 이승만과 비서진이 나눠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46년 신탁통치 논쟁의 혼란 속에서 이승만은 장진영에게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고, 곧 하지 중장의 주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가 쓰던 마포장을 얻어 이사하였다. 그러나 이 곳은 햇볕이 들지 않고 비가 오고 축축한 곳이라 하여 이승만은 불만이었다 한다.

그 후 실업가 권영일 등 30여 명의 독지가가 나서서 이승만돕기 운동을 전개했고, 이 모금에 따라 구입한 것이 이화장이다. 1947년 말에 이승만이 공식 기거함에 따라 그의 소유지가 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함에 따라 경무대로 이사하게 되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이승만이 가끔 들르기도 함에 따라 대통령의 개인 사저로 잘 알려졌다.

정부수립 문제 등으로 이승만이 백범 김구, 김규식과 대립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들의 경교장, 삼청장에 맞서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지지파와 보수 진영이 집결했던 장소로 부상하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다시 기거하였다. 하지만 그 해 그가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고 1965년에 90세로 사망하면서 그의 시신이 국내로 운구됨에 따라 이승만의 시신이 잠시 봉안되기도 하였다. 호상기간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안장된다. 그 후 영부인 프란체스카가 1970년 귀국 후 1992년 별세할 때까지 거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