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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개정 헌법 | |
국회 | 제2대 국회 |
공포일 | 1952년 7월 7일 |
개헌유형 | 일부개정 |
국회표결 | 출석 166 찬성 163 기권 3 |
국민투표 | 해당 없음 |
주요 내용 | |
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사실상 단원제), 국무원불신임제[1] | |
논란점 | |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을 철폐하기 위한 포석[2], 자유토론 억압, 헌법의 체계정당성 무시, 계엄 및 위협분위기 속 강제통과, 헌법에 정하는 바 공고절차 및 독회 절차 생략 | |
전문 | |
헌법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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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부는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으나 1952년 1월 18일 부결되었고, 국회에서는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다.제출 이후로도 몇 차례 임시 회의안이 표류되고, 위기를 느낀 정부는 5월 26일 국회의원이 탄 출근버스를 견인하여 국제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감금하는 등 강수를 두어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 50명을 헌병대에 연행했으며, 6월 15일 7명의 야당 의원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비공개 재판을 강행했다.# 이후 국회 내에서 친여당인 신라회(新羅會)를 통해 대내외적인 찬성표 증가를 노렸지만 개헌안 통과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7월 7일 정부제출안과 국회제출안을 발췌하여 양원제,[3]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 국무의원 불신임을 골자로 하는 야당의 의견을 일부 반영한 개정안을 내놓기에 이른다. 이때 국회의사당은 군인과 경찰에게 포위되어 있었고, 투표는 기립 투표로 진행되어 국회의 표결권을 침해하였다. 개헌 과정 자체도 위헌이었다. (개헌 공고의 절차 생략)
1차 개헌에 얽힌 일련의 과정을 부산정치파동이라 하며, 개헌 목적부터가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의 연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유일한 의미이다. 투표 방법[4] 뿐 아니라 자유토론 없이 계엄령 속의 위협적 분위기에서 통과되었으며, 수많은 헌법 제정 절차를 무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이 과정에서 김성수 부통령은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라며 이승만 정권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어, 5월 29일 국회에 사퇴서를 제출하고 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1952년 7월 2일 임시수도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번째의 헌법 개정이자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번째 친위 쿠데타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의 안과 의원내각제와 국회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의 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 개헌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여당과 야당의 각 안 중에서 좋은 것들만을 발췌하여 절충한 개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상은 발췌는커녕 취사선택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정도의 내용을 담은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자 헌법을 위반한 개헌이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대통령 간선제가 직선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 민주적인 것 같지만 그 의도는 이승만 본인의 재선에 있었다. 기존의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면 야당이 과반이 넘으므로 대통령이 교체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52년은 6.25전쟁 중이었고 직선제로 투표한다면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어느 나라의 국민들이나 지도자가 웬만한 삽질을 하지 않고서는 전쟁 중에 교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대통령 재임을 위해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투영된 사건이다.
2. 배경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60% 이상이 무소속으로 채워지고 이승만의 지지 세력이 대거 탈락하자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당시의 국회 간선제에서는 대통령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게다가 1951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다수 발생하면서 국민들과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정부를 믿지 않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하고[5] 대통령 직선제를 향한 헌법 개정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지만 1952년 1월 18일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표결은 찬성 19, 반대 143, 기권 1표로 부결되었고 이승만은 국회 내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이 미약함을 깨닫게 되었다.야당 국회의원들은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맞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였고 반 이승만 성향의 의원들이 다수였던 국회 의석 구조로 인해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될 확률이 높았다. 결국 이승만은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국회 해산에 대한 여론을 부추겼고 이로 인해 정부에 의해 동원된 민족자결단, 백골단 등의 폭력 조직 등 어용 시위대가 연일 부산 거리를 누비면서 국회의장 신익희의 집이 포위되기도 하였고 심지어 빨치산 남도부 부대가 부산 금정산 일대에 잠입했다며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전라남도·전라북도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3. 경과
헌병대가 국회의원을 버스에 태워 연행하고 있다. |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승만은 1952년 5월 26일에 개헌에 반대하던 무소속을 포함한 야당 국회의원 47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6]를 동원하여 강제 연행하는 압제를 저질렀으며 10명의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구속하였다.[7] 제헌헌법에는 현행 헌법처럼 회기 중 국회의원에 대한 불체포특권이 명시되어 있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현행범을 제외한다는 구절을 이용하여 이들이 현행범이라 체포하였다고 우겼다.[8]
이에 국회에서 구속 의원 석방과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이승만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부통령이었던 김성수가 사표를 냈으며 UN 한국위원단이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고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국가인 미국, 영국의 언론들이 한국의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내와 국외에서의 비판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6월 20일에 이시영, 김성수, 김창숙 등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려고 했으나 정치깡패들의 난입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6월 21일 국무총리였던 장택상의 주도 아래 이른바 “발췌개헌”이 추진되었고 장택상은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가 해산[9][10]될 수도 있다”며 의원들을 협박했다. 6월 25일에는 김시현이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압박 속에서 결국 야당은 굴복하고 발췌개헌안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이승만 정권은 억류중이던 10명의 의원을 석방하고[11] 피신 중이던 의원들에 대해서도 신변을 보장할 테니 국회에 등원하라고 호소하거나 군경을 이용해 국회로 연행했다.
7월 4일 밤 국회는 군경의 포위 속에서 기립(혹은 거수)표결[12]로 찬성 163,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빨치산을 계엄의 명분으로 들었던 것과 달리 개헌이 끝나자마자 7월 말에 계엄이 바로 해제되었고 결국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13]
사실 이승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부산에 배치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이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병력 배치를 거부했고 더 나아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육군본부 훈령 217호#'를 전 육군에 하달했다. 헌병대를 동원한 것도 이종찬이 거부하자 원용덕 헌병사령관에게 따로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이종찬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졌고, 결국 이종찬이 총장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종찬을 사형 시키려고 했지만 당시 육군참모차장인 유재흥의 설득으로 철회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이때 이승만의 이종찬에 대한 극대노는 나중에 뒤끝 작렬 일화로 제대로 보여준다. 이종찬이 해임되기 얼마 전 신임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부임해 이승만이 장군들을 소개하며 인사시키는 자리에서 이승만은 이종찬을 소개하며 대놓고 면전에서 그의 조부 이하영을 들먹이며 이 사람의 할아버지는 한일합방 때 도장 찍어 나라 팔아먹은 양반이라고 이종찬의 면전에서 심한 모욕을 준 것이다. # 이 일화는 이승만의 인성 관련 평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내로남불의 예제인데, 이종찬 외에도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친일로 몰아가면서도 친일파 출신들을 본인의 수하로 내각에 등용하여 잘 써먹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친일몰이의 원조격.[14]
다년간의 전쟁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혼란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아집에 사로잡힌 이승만은 발췌 개헌을 통한 친위 쿠테타로 권력욕을 택하면서 자기가 심은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밟아 버렸고, 이는 나중에 발생하는 사사오입 개헌에 대해서 묵인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15]
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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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간략히 다뤘다.
5. 기타
- 이범석 당시 내무부장관은 자신이 부산정치파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유와 동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물론 아래 내용을 절대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범석은 이승만의 첫 번째 개헌 시도 실패 이후 자신의 휘하 세력이었던 족청계, 이들이 주축이 된 (원외)자유당의 관제 시위를 주도하여 국회를 공격했고 부산정치파동 발발 직전 내무부장관에 기용된 후 정치파동 당시 국회 압박과 공안사건 조작을 주도했다. 즉 이범석은 이 사건의 피해자나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승만의 행동대장에 가까웠던 사람이다. 아래 회고에는 야당 세력에 대한 편향된 시선과 사실관계의 왜곡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감안하고 읽을 것.내가 이 시기에 내무부장관이 되는 것이 내 정치 생명을 단축시키고 내 개인적으로 해를 입게 되리라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다. 내 자신에게 올 해를 알면서도 내무부 장관직에 올랐음은 화를 자초한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내무부 장관을 수락한 데에는 내 소신이 있다. 조금이라도 국가 안정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신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공산군은 낙동강 도하를 기도했고 남쪽에서는 마산, 김해 방면으로 공격하는 적의 세력도 완강해져서 이 나라의 젊은 청년들과 외국의 군인들이 수없이 피를 흘리며 공산군에 맞서 싸우고 있을 때, 국회는 정권 탈취에 여념이 없었다. 국민의 선량[16]이라는 국회의원들 중에는 국민의 진의는 아랑곳 없이 이권 다툼과 정권을 쥐려는 일념으로 구국을 돌아보는 아량을 잃고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양식을 잃었다.
이때 정부에서는 전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어 전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재래의 국회의원에 의한 대통령 간접 선거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하려 했다. 그래서 1952년 1월 8일, 대통령 중심제를 강화하고 양원제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재석 163명의 투표결과 143대 19표 기권 1표로 이 개헌안은 부결되었다. 강력한 행정부의 통솔하에 대공 전쟁을 유감없이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중심제가 요구되었으며, 국민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할 기회를 직접 갖게 되는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 원칙에 어긋남이 없을 뿐 아니라 당연히 요구되고 있음에도 이것이 부결된 것은 국회내의 다수를 빙자해 정권을 쥐려는 뜻으로 밖에 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 개헌안을 부결시킨 국회라는 곳에서 전시에는 합당치 않은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외국의 예를 보자면 전시에는 새로이 전시내각을 조직하여 행정권을 강화하는 마당에, 행정권이 약화될 우려가 있는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려 함은 결코 옳은 길이 아니었다.
4월에 접어들면서 국회측의 개헌안 준비는 단계를 발아 계속되어 가결 정원수인 123명의 서명을 받아 정부에 통고하였으며, 5월 14일 정부는 다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게 되어, 이는 국회가 내놓은 개헌안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다가 4월 25일, 지방의회 의원 선거 감시로 국회는 일단 휴회하고 지방으로 내려갔으나, 개헌안에 서명한 국회의원의 소환을 요구하는 규탄 대회에 당혹하게 되었다.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대표라고 하지만, 이 규탄대회는 그들이 국민의 의사와 어긋났음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야당 의원들이나 혹간의 사람들은 이 규탄대회를 관제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민심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관제 데모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 진의를 무참히 깎아내리는 야비한 언사인 것이다.
한편 4월 25일 시·면·읍 의원 선거와 5월 10일 도의회 의원의 선거 결과 압도적으로 여당이 승리하여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되었으며, 이 지방의원들은 정부의 개헌안을 지지하고 나왔다. 이때 부산 근교의 금정산에서 공비가 출현하여 미군 캠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7] 이로 인해 2명의 미군이 살해되었다. 밖으로는 공산군과의 대치, 안으로는 공비의 출현으로 임시 수도 부산은 위태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일촉즉발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전 민족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밖과 안의 적을 맞아 싸워야 할 국가의 운명을 건 중대한 시각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사회상은 혼란 바로 그것이었고 국회는 파벌, 종파에 의한 정권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한심스런 추태를 연출하기에 바빴다. 게다가 모 국회의원이 현직 대위[18]까지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니, 이 위험한 시국에 치안을 유지하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경남과 전라남북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게 됐다.
내가 지금도 뼈가 아프게 통분히 느끼는 것은 종파나 파벌의 싸움이면 싸움이지 민족적 양심이나 소위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그 인격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언사를 내뱉고 다닌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소위 재야 세력의 중진이라는 사람이 미 대사관에 가서 '금정산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가 가상 공비를 시켜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고 조작한 짓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민족의 반역이 아니며 허위 날조와 정국의 교란을 넘어서 당시 전시국가 상황에서 교란시키는 태도가 아닐 수 있겠는가. 과거에는 나와 가까운 사이에 있던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고 나는 오늘도 그에 대하여 인간 대접을 안하고 있다.
이러한 환란과 위태로운 시기에 미력이나마 국정 안정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나는 내무부 장관을 수락했던 것이다. 나라를 생각하는 이 때에 무엇을 가리겠는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한편 국회는 대통령 선출을 동년 6월 2일, 국회에서 실시할 것에 합의를 보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위해 다수의 횡포를 행사하고 있었다. 5월 19일부터 <땃벌떼>,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 정체불명의 단체들의 삐라가 부산 거리를 휩쓸고 연일 경상남도청내에 있는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여 국민의 이름으로 국회의원의 소환과 반민족적 국회를 즉시 해산하라는 시위가 있었다. 이것을 마치 내가 시킨 것처럼 항간에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나 남이 얘기한 것은 아무 분별없이 그대로 듣고 '이범석이가 했다.'하고 이것을 믿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마치 내가 <백골단>을 사주한 것처럼 조작하는 자들에게 그 근거를 제시하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내놓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모 청년단 계통에서 <백골단>, <땃벌레> 따위를 꾸민 것이며, <민족자결단>은 모 정객 계통에서 꾸민 것이다. 내무장관인 내가 그토록 할 일이 없었겠는가. 나는 이와는 관계가 없다. 단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 중에 누가 해를 직접 입었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프랑스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간접 선거였다.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도 간접 선거에서 직접 선거제로 헌법을 개정했다.
사실 당시의 우리 국회가 한없이 부패했었다. 국회의원이 군인을 쏘아죽이는 형편이었고, 잡혀들어와도 정치적 복선에 의한 것이거나 혹은 국민 앞에 애국 운동하다가 체포된 듯이 여론이 번지는 형편이었다. 정부와 국회의 대립이라는 위태로운 시국 속에서 역사는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7월 4일, 개헌안을 발췌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소위 발췌개헌안이 통과된 것은 그 진통이었다. 이것을 혹자는 한국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독재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지만 사실과 다르다. 나는 이것이 민주주의 발전의 역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계엄령하에서는 국회의원이라도 군의 검문을 응당 받아야지 이에 불응하면 그 후에 발생할 불상사의 책임은 어차피 그가 지게 되는 것이다. 또 행정부는 재량껏 얼마든지 계엄령을 발동할 권한이 헌법적으로 보장되어있다.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불행한 일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시비가 혼돈되어 야당측에서 이 박사의 정권을 노리던 사람은 모두 정당하며 민주주의의 수호자이고, 이와 입장을 달리했던 여측의 사람들은 민족반역자 혹은 민주반역자라고 치부할 문제처럼 간단했던 것은 아니다. 제8대 내무 책임자로서 나는 이것을 확증지울 수 있다. 여하튼 대한민국 부통령에 출마하기 위하여 나는 그해 7월에 장관직을 물러나기까지 만 2달동안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는데 수난을 당했던 것만은 사실이다.[a]
- 제2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보면 정치 파동이 일어난 부산에서 멀어질수록 이승만의 득표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경남 지역에서는 이승만의 득표율이 간신히 50%를 넘었고 계엄령이 선포되었거나(전북, 전남) 경남과 인접한(경북) 지역에서는 65~75% 정도였다. 부산에서 먼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제주에서는 압승(82~92%)을 거뒀다. 당시엔 부산이 임시수도였으니 여촌야도가 부산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범석은 개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였다.저 어른 대통령된 것은 좋은데 너무도 미움과 나무람을 받아가며 비위를 거슬려가면서 그 어른에게 충고를 드린다던지 혹은 다투어가며 일깨워 드릴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파면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부통령 이하로는 누구든지 도장 맡지 않고 파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리떠나 가지고는 발언권이 설 보장이 없으려니와 효과를 내지도 못했다. 그런데 부통령 선출이 직선제로 고쳐진다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그 비중은 꼭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단지 맡는 일이 다를 뿐이었다. 국민이 직선하는 사람이니 국민의 지지를 배경으로 힘있게 그 어른을 일깨워 드리고 그 어른 측에 대해 국민의 종합된 의사로 대신해 거역할 수도, 저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난 그 어른을 도와드리고자 했다. 그것은 함태영이나 이기붕이 도와드리는 것과는 좀 성질이 달랐다.[20]
-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제거 작전인 일명 에버레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 헌정사상 첫 개헌이라는 큰 사건이지만 사사오입 개헌, 5.16 군사정변나 10월 유신, 12.12 군사반란, 6월 항쟁과 같은 굵직한 정치적 대격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공부하거나 한국 현대 정치사에 깊은 관심이 있지 않으면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2022학년도 9월 모의고사 한국사에서 등장하여 오답률 80%라는 기록을 자랑했다.
- 이 시기에 우장춘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농림부장관직을 직접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우장춘 박사를 각별하게 아꼈던 이승만 입장에서 아예 곁에 두고 견제를 막으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형법 91조(국헌문란의 정의) 2항의 조칙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2024년 12.3 내란 사태가 발발하자 해당 조항이 70여 년만에 발동되었다.
[1] 이것은 야당의 개헌안에 포함된 것. 여당과 야당의 개헌안을 적당히 짜깁기해서 통과시켰기에 발췌개헌이라고도 한다. 당시에는 내각을 국무원이라고 불렀다.[2] 이승만은 종래의 간선제로는 장기집권이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3] 그러나 사실상 단원제이었으며 제대로된 양원제는 2공화국 때.[4] 기립 투표를 시행했다.[5] 이전까지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었다.[6] 現 군사경찰.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국군의 통제권이 모두 미국에 넘어간 상황에서 이승만이 직접 동원할 수 있는 얼마 없는 군사력이었다.[7] 이를 부산 정치파동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와 국회 소장파를 겨냥한 국회 프락치 사건과 일맥상통한다.[8] 50여년 뒤인 2024년 12월 윤석열 정권이 똑같이 계엄을 선포하고 의원들을 체포하려 국회 진입을 시도했다. 박정희, 전두환도 국회에 군인들을 투입하진 않았다.[9] 그런데 제헌헌법상 정부에는 국회해산권이 부여돼 있지 않았다. 즉 헌법에도 없는 초헌법적 발언을 한 것이다.[10] 물론 아무런 근거 없이 공갈을 한 건 아니고 당시 야당이 장악한 국회와 달리 여당이 장악했던 지방의회로 하여금 국회 해산 결의를 정부에 올리게 하거나 정치깡패들을 이용하여 의원들은 자진해서 국회를 해산하라는 식의 관제데모를 지시하여 야당 의원들을 압박하였다.[11] 개헌을 하려면 재적의원의 2/3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은 야당의원의 찬성을 얻어야 했다.[12]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의회에서의 표결제도는 일반적으로 기립 표결 아니면 거수 표결, 가끔 점호 표결을 한다. 전자투표가 도입된 후 기립표결을 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의회에서 표결은 익명으로 진행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자세한 건 당시 국회법#을 참고하자. 기본적으로 거수/기립 표결이 원칙이며, 비밀투표는 의원들의 결의가 있은 후에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13] 경과 문단 초반부터 읽어 보면 헌정 사상의 최초의 친위 쿠데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친위 쿠데타의 설명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권력을 쥐고 있는 측이 반대파를 숙청하고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다."인데 당시 상황에 맞게 대입하면 '이승만이 헌병대를 동원하여 야당 국회의원을 강제 연행하고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성공하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발췌 개헌을 통과시켰다.'이다. 즉 친위 쿠데타의 설명과 비교해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14] 정작 이종찬 본인은 해방 뒤에는 "친일 부역자로 민족 반역자인 내가 무슨 염치로 사람들 앞에 나서겠는가"라며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 반민특위도 그에게 더 책임을 묻지 않았다.[15] 제1공화국의 3대 전남지사(1951년 12월 17일~1953년 11월 22일)로 이승만과 김구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이을식은 2005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피란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 연임을 위한 직선제 개헌을 시도, 강행했을 때, 이승만을 찾아가 "초대 대통령만 하시고 (물러나서) 조지 워싱턴처럼 국부 노릇만 하시라"고 진언했으나 이승만은 오히려 이을식에게 화를 냈고,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할 때까지 그와 만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16] 선량이라는 말의 뜻은 1. 뛰어난 인물을 뽑는 것. 또는 선출된 인물. 2. `국회의원'의 별칭.[17] 금정산 공비 사건. 왜 '부산 금정산'이 아니라 부산 '근교' 금정산이냐면 이 시기에는 금정산 영역 대부분이 부산시 바깥 동래군 관할이라 행정구역상 부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금정산 대부분이 부산 관할로 들어온 건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 이후의 일이다.[18] 서창선 대위[a] [20] 李範奭, 《鐵驥 李範奭自傳 : 우둥불 後編》, 1991, 외길사, p. 31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