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8 14:10:21

백골단

1. 제1공화국 시대 자유당정치깡패 집단2. 1980~90년대 경찰 시위 진압 부대의 별칭
2.1. 개요2.2. 역사2.3. 활동2.4. 만행2.5. 기타2.6. 관련 도서2.7. 관련 자료

1. 제1공화국 시대 자유당정치깡패 집단

제1공화국 시절 자유당에 의해 원외에서 조직된 정치깡패 집단.

제 2대 국회 총선에서 전체 의원 중 3분의 2인 126명이 무소속일 정도로 신진 정치세력 중심으로 물갈이가 이뤄지자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반대하는 관제데모를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동원한 정치깡패 집단 중 하나가 백골단이었다. 당시 이 깡패집단들은 백골단 말고도 '땃벌떼' 나 '민중자결단'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백골단을 비롯한 폭력단체들이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국회를 포위하기도 하는 등 폭력이 난무하자 이를 빌미로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일부 국회의원들이 강제로 의사당에 연행되는 등의 황당한 일이 일어난 끝에 1952년 7월 4일 심야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의결되었다(이른바 발췌 개헌안).

그러나 백골단 등의 명칭은 제1공화국 이후 더 이상 쓰이지 않아 지금은 보통 2의 의미로 많이 기억한다.

2. 1980~90년대 경찰 시위 진압 부대의 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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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서울특별시 경찰국(약칭 서울시경, 현재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5150제대. 이 사진은 소드마스터 시리즈에서도 쓴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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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방(타지)과 사제 편곤으로 무장한 사진. 사진 속 중대는 전남특수기동3중대로 의경들로 이루어진 중대였다. 인터넷에 흘러다니는 백골단 사진들은 대부분 전의경 중대들로 그 중에서도 서울, 전남 쪽 중대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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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위에 참여한 인원이 많아지면 백골단이고 나발이고 어쩔 수 없다. 사진은 1991년 '백골단 해체의 날' 시위 때 시위대에게 둘러싸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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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튜브 대한뉴스) 백골단의 출동 장면, 여기 사용된 버스는 기아 콤비(아시아자동차)

2.1. 개요

청카바와 청바지를 입고 흰색 하이바를 쓴 전의경, 직원 기동대원을 통틀어서 일컫는 별칭.

이들은 일반 전의경, 사업장 구사대와 함께 권위의 상징이자 시민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존재''다.

다만, 이 백골단의 이미지는 상당부분 시위대의 망상에서 온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백골단과 같은 조직은 있었던 적이 없다. 이 문서에서 묘사하는 체포조도 백골단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지만 시위대가 생각하던 백골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시위대가 믿던 백골단은 경찰의 무법적 특수진압 부대인데, 이 문서에서 백골단으로 설명된 체포조는 똑같은 전의경, 경찰이 경무장한 것이다. 백골단에 대한 전설은 실제의 경찰 부대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진압부대에 대한 풍문이 퍼지면서 과장된 것이다.

백골단의 이름은 청와대 경비 부대인 101단에서 와전됐을 가능성이 높다.

2.2. 역사

1985년 8월 1일 서울시장 명의로 모집된 사복체포조는 대부분 무술 유단자 및 특전사해병대 출신들이 특채되어 주류를 이루었으며,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이 흰색 헬멧에 일반 전투경찰들과 구분되는 청색자켓 복장 때문에 백골단이란 별칭이 붙게 되었다. 일부 중대에선 녹색 헬멧을 써서 '녹골단'이라고도 했다.

당시 전투경찰들은 열을 맞춰 중대 단위로 시위를 진압 하는데 반해 이들은 작은 방패에 단봉을 들고 시위대 속으로 뛰어 들어가 시위대 대오를 흐트려 놓았다. 이들 사복체포조가 시위진압에 투입되면서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도 각목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더욱 과격화 되었다는 견해도 많다. 반대로 진압측에서는 시위가 폭력적이 되었기 때문에 백골단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기동성을 위해 하얀색 또는 약간 누런색 오토바이 헬멧(백골단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과 청바지(화염병과 유리조각 등으로부터 보호가능), 작은 방패 깨방, 단봉 그리고 운동화 복장을 했으며 일반 전의경이 주로 방어위주(방패)인 반면 백골단은 데모 진압시 아주 공격적으로 주모자 체포 및 시위대 해체를 주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특정건물 등을 목표로 100m 간격을 두고 시위대를 붙잡고 밀어붙이는 무지막지한 진압을 시도하고 붙잡혔을 시 시위대를 반 죽음으로 만들 정도로 공포의 부대였다.

이렇게 실상은 무섭도록 무지막지할지는 몰라도 이들의 정식명칭은 "체포전담부대(중대)"이다. 왜 이런 명칭인고 하니 과거 전의경을 비롯한 경찰들이 착용한 진압복이 꽤나 불편해서 시위대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1] 그래서 일반 청바지와 티셔츠, 운동화를 착용해서 기동성을 높여 시위진압에 투입된 것이다.초창기에는 헬멧이 싸이카 헬멧이었으나 1990년경부터 플라스틱 바이저를 단 은색 하이바로 바뀌었다.

백골단이 사실상 경찰관들보다는 전의경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경찰 인원은 지금과 비교해 소수였으며 다른 관내에서 벌어진 시위에는 사실상 참여가 불가능했던 시절이라 오히려 전의경부대 내 사복체포조가 백골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

서울지역한정으로는 사복체포조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90단위로 시작하는 전경사복중대와 80단위로 시작하는 직업경찰관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밖에 일반진압중대 내에서도 따로 고참들이나 한개 소대 정도가 청바지 청자켓 등을 입고 사복체포조 역할을 하거나 일부 경찰서에서는 순수 의경들로 이루어진 경찰서 직속의 사복제대를 운영하기도했다.[2]

그러다 1991년 강경대 치사사건 이후 90단위 전경사복중대들이 점진적으로 해체되면서[3] 이후 1994년 말까지는 직업경찰들로 이루어진 80단위 사복중대만 운영하였다.
그러다 1994년 11월 경에 다시 전의경 진압중대에서 기동대당 2,3개 정도의 중대를 사복중대로 전환시켜서 운영하였다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부터 진압복이 개선되고 1997년에는 특수기동대가 생기면서 각 기동대에서 사복체포중대가 차출되어 이동된 후 그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1999년 최루탄이 사라지면서 백골단의 악명은 단셋에 넘겨졌다.[4] 2006년에 단셋이 해체되고 난 뒤 2008년 촛불시위 직후엔 경찰관 기동대가 생겼다. 자원자인 직업경찰 1700여명 규모로 창설, 시위진압을 전담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직원중대들은 의경중대보다 시위진압능력이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2009년 촛불 1주기 시위 당시 경찰관 기동대가 투입되었는데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바로 옆에서 전의경 대원들이 시위대에게 고립되어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뉴스를 찾아보면 전의경중대 중대장들이 직원중대 대원들에게 "좀 도와주라고요 좀!!!" 이라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해당영상
사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명령과 지휘계통이 다르면 통제할 권리가 없어서다. 아무리 그래도 불법시위대가 전의경을 포위하고 시민들의 통행로인 거리가 점거된 치안부재 상태에 경감급 중간간부가 다급하게 도와달라고 명령도 아닌 부탁을 하는데 순경에서 경위급에 해당하는 기동대원들이 개무시하는건 조금...... 기동대원 : 아몰랑... 공공의 안녕과 질서고 나발이고 내 관할 아니고 내 책임도 아니야...하지만 무턱대고 이들 탓을 할 수는 없는게 타 지휘관이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줬다가 일이 꼬였을때 직속상관에게 깨지는건 본인들이다. 애초부터 해당 지휘관이 사전에 미리 계획과 명령을 잘 짜놨어야 했는데 대충 보내버렸으니 부하들 입장에서도 방도가 없는것.

일단 문화개선 이전의 전의경 중대는 내무생활도 내무생활이지만 훈련량도 어마어마 했다. 직업 경찰관들을 실신할 때까지 굴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당시엔 경험치 면에서 의경 대원쪽이 앞설수 밖에 없었다.[5] 현재는 직원중대 1선 우선배치 정책으로 간극이 많이 줄어든 상태.

2.3. 활동

시사저널 1991년 5월 16일자 기사에 언급된 백골단의 일상.

당시 일반 전경부대가 1선에 시위대와 대치하고있다가 상황이 고조되면 명령에 의해서 양 옆쪽에서 백골단이 체포 or 추격을 시도했고(이것은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기병대'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는 도망가거나 혹은 다시 뭉쳐서 공격대형을 이루었는데 백골단이 시위대 중 앞에서 지휘하던 주동자들을 뛰어가 붙잡고 무자비한 구타를 시도하니 다들 주춤거리게 되고 더이상 다가서지 못했다할 정도. 이렇게 되면 시위대들은 공포감에 몰입되어 패닉상태에 빠졌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간 기자를 날아차기해서 떨어뜨리기 퍼슛 캅?, 집안에 도망간 학생을 문 부수고 들어가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출발하려는 지하철을 유리창을 깨고 난입해서 모조리 체포하기(기관사도 두들겨팼다.) 학교 안에 들어가서 도서관에서 멀쩡히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 등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폭력성을 보였다. 물론 군사정권 시기 정부와 언론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진압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로 상황시 방독면을 쓰고[6] 서울역에서 명동까지 구보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허세가 조금 있기는 하겠지만 목격담이 있고 출신대원들의 주장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 것. 2000년대 초반까지만하더라도 수도권 진압 선봉중대, 지방 선봉중대의 경우 방독면 구보라고 하여 훈련명목 또는 체벌로써 정화통까지 끼운 상태에서 방독면 구보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떡실신. 서울역에서 명동역까지는 거리는 네이버 지도 기준으로 2.4㎞정도라고 한다. 대략 도보 30분 정도 거리. 그런데 1998년 만도기계(현 대유위니아) 파업 이후 시위진압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게 됨에 따라 막바지 백골단들은 방독면 착용을 하지 않았다.

사실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 장비는 무전기 하나만 쥐어줬으며 한 번 출동을 나가면 3, 4일은 기본으로 길에서 노숙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숙자라고 생각해 먹을 것도 줬다고... 장비도 부족하여 죽도, 쇠파이프, 돌 같은 것을 스스로 구했다고 하나 실상은 시위현장에서 시위대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쓰는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바뀌면서 장비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고 상기 서술한 무기들은 불법진압도구라고 하여 쓰지는 않게 되었다.

전의경 기동대는 다르게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식 특성으로 자율성있는 진압은 없었다고 한다. 직원 기동대 구성원은 지원자를 모았는데 대부분 장신, 유단자 위주로 경쟁률이 높았고 군필자가 대다수였다. 특히 특전사해병대 출신들이 많이 특채됐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 시절엔 전의경 신병들을 체력테스트해서 성적 좋은 대원들을 모두 사복중대로 보냈다고 하니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셈.

또한 백골단의 진압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이건 사업장이건 마구잡이 연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이런 폭력적 강경 진압에 대항해 큰 역할을 하던 것은 녹두대나 오월대 같은 대항조직이다.[7] 이전에도 60~70년대 캠퍼스 내에 사복경찰이 학내 지도부를 검거하는 시대에서 자구적으로 형성되었던 사수대가 있었다. 하지만 80~90년 이후, 유신정권과 신군부와의 투쟁에서 더욱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검거하려는 백골단과 시위자를 지키려는 사수대의 규모는 경쟁적으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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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단(사진 속 중대는 전남82중대)에 맞서는 녹두대의 패기. 뒤에 일반 시위대가 보인다. 장소는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정문 앞.

2.4. 만행

백골단은 여러모로 악명을 떨쳤는데 시위진압 중 1991년 4월 당시 명지대생이던 강경대를 이들이 진압하면서 철근이 든 죽도와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악명을 떨쳤다. 강경대는 연락조로 가장 늦게 학교담을 넘어서 도주하던 중(사실상 시위대 본대에서 낙오된 상황이었다) 백골단 5~7명에게 끌어내려져 철근이 들어간 죽도와 쇠파이프로 두부를 집중가격당하고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곧 사망하였다. 강경대를 살해한 백골단 대원들은 공판에서 반성하는 모습은 커녕 오히려 죽은 강경대에게 있지도 않은 화염병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이에 분노한 사람들이 공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사건까지 있었다. (‘강경대 치사사건’ 첫 공판서 유가협 울분 폭발, 자식을 가슴에 품은... 강경대 열사 아버지)

강경대 사망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와중에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 또한 경찰에게 집단구타당해 사망한다. 그래서 성균관대 명륜캠퍼스엔 "김귀정 생활도서관"이라는 동아리가 지금까지 내려온다.

그 외에도 1996년 3월 연세대 노수석도 일명 토끼몰이 진압와중에 사망했다는 시위대 측의 주장이 있다.[8]


백골단에 의해서 사람이 죽는 일도 존재하기에 중경상을 입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1980~90년대 현 법외노조인 전교조 주동하에 소위 '참교육 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 활동[9]을 했던 고등학교 시위대도 있었는데 백골단에 의해서 진압된 고등학생 시위자의 어지간한 뼈마디가 모두 골절된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언론에는 안 나왔다고 한다.

1991년 5월 7일에 백골단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10]빈소로 쳐들어가 영안실 벽을 깨부수고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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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안양병원 영안실로 난입한 백골단들. 이들은 영안실 벽을 뚫어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요새는 안 그런다... 그랬다간 대통령 탄핵 시위라도 일어날 시대니...

2.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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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10월 10일 공개된 서태지 버전의 소격동 뮤직비디오에도 이 백골단이 등장했다.
  • 영화 1987에서도 등장한다.

2.6. 관련 도서

  • <실록 백골단> - 유인철 저. 영재출판사. 1991. 백골단 1기였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저술한 수기이다.

2.7. 관련 자료



[1] 실제 이 진압복엔 대나무도 들어가있다.[2] 위에 나오는 5150제대가 대표적인 의경사복제대로 동대문경찰서 직속부대였다[3] 뿐만 아니라 강경대 치사사건 쯤부터 기동중대들이 대부분 전경에서 의경으로 바뀌게 된다[4] 최루탄이 사라지고 단셋이 뜬 이후에도 사복중대라는 개념은 진사복중대, 화염병전담타격대등으로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남아있던 걸로 보이나 2000년대 후반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5] 창설 초기에는 진압검열때 직원중대가 자꾸 삽질을 하자 옆에서 구경하던 전의경중대가 대놓고 놀려대서 시비가 붙은 일화도 있다.[6] 정화통을 빼고 달린 것이 아니다. 최루가스가 만개해 정화통을 끼고 뛰었던 것이다.[7] 비슷한 사례로, 노조 역시 구사대에 대항키 위해 '파업자위대'를 두었다.[8] 그러나 노수석의 경우는 부검결과 선천성 심장이상이 그 사인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유족이 노수석의 머리에 부상의 흔적이 있다고 과잉진압에 의한 사망임을 주장했지만 1999년의 민·형사소송에서도 경찰의 과잉진압과 노수석의 사망간에는 인과관계가 없으므로 유족 측이 패소하였다.[9]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 2006년 제 10호, 2016년 7월 시사in 기사도 참고할 것.[10] 1981년부터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하여 줄곧 한진중공업에서 일하다가 1987년부터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3년간 노조 내 회계감사로 일하다가 1990년에 노조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이듬해에 부산노련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처우 개선이라는 명분 하에 1991년 2월 대우조선 투쟁지원 연대회의에 참석하다 경찰에 의해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그해 4월에 있었던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벌이다 의문의 부상을 당해 안양병원에 입원하였다가 5월 6일에 안양병원 마당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사인은 단순 비관자살로 판명났으나 유족들은 반발했었고, 13년 뒤인 2004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를 하여 안기부가 개입했다는 설이 있으나 자료 및 증거불충분으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론나게 되었다. 그나마 당국의 노조탄압 속에 의문사를 당한 점을 인정하여 2014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