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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2484><colcolor=#fff> 문성근 文盛瑾 | Moon Sung-keun | |
출생 | 1953년 5월 28일[1] ([age(1953-05-28)]세) |
일본 도쿄도[2] | |
본관 | 남평 문씨 |
가족 | 할아버지 문재린 아버지 문익환 어머니 박용길 큰형 문호근[3] 누나 문영금 작은형 문의근 숙부 문동환 |
병역 | 병역면제 (좌측주관절 굴곡변형)[4] |
학력 | 서울우이국민학교 (졸업) 보성중학교 (졸업) 보성고등학교 (졸업 / 62회) 서강대학교 경상대학[5] (무역학 / 학사) |
데뷔 | 1985년 연극《한씨 연대기》 |
신체 | 175cm, A형 |
소속 정당 | [6] |
경력 | SBS 그것이 알고싶다 진행자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이사장(2019~)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 개혁국민정당 창당발기인 개혁국민정당 실행위원장 개혁국민정당 국민참여운동본부장 대통령비서실 대북 특사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국민참여운동본부장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민주통합당 수석최고위원 민주통합당 북구·강서구 을 지역위원장 민주통합당 당대표 권한대행 민주정책연구원 이사장 국민의 명령 상임고문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조국혁신당 후원회장 |
종교 | 무종교[7] |
링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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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성근은 한국영화에서 먹물냄새 풍기는 지식인이자, 부조리한 현실에 놓인 노동자였다. 극과 극에 서 있는 인물들은 모든 현대인의 초상이다. 그는 묵묵히 존재감을 보여주는 한국영화계의 배우이다."
필름 2.0
필름 2.0
"문성근만큼 배우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배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을 보여주는 생각하는 배우"
이창동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정당인. 이창동
충무로의 개성과 작품성이 가장 뜨겁게 발화하던 1990년대에 예술영화의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연기자이다.
빼어난 마스크를 지니고 정석적인 틀 위에서 연기하던 기존 정통 연기파의 흐름을 처음으로 깨고 연극판의 중심에 있다가 영화계로 진출하여 이전에 없던 연기 스타일을 펼쳐나간 기념비적인 시초격 인물이다. 말하자면 '최초의 연기파 배우'로, 당대의 매체연기판에 큰 충격을 줬던 이러한 특징은 훗날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김윤석 등의 계보로 이어지며 충무로의 주류가 된다.[8]
박광수, 장선우, 강우석, 이창동, 홍상수 등의 유명한 감독들과 함께 두루 호흡을 맞춰 경지에 오른 예술적 성취를 거둔 배우로 꼽힌다.
2. 연기 활동
목사이자 사회운동가인 문익환의 아들[9]로 태어나 서강대학교 무역학과에[10] 입학했고, 연극반에서 처음 연기를 시작했다. 졸업 후 현대양행[11]에 입사하였으나, '양행'이라는 회사 이름만 보고 무역회사인줄 알아 막상 들어가봤더니 중공업 계열 회사라 자기와 다소 맞지 않는다 생각해 계열사인 한라건설로 옮겨 직장을 다녔다. 그러다 '망하더라도 내 결정대로 살자'는 생각에 급작스럽게 직장을 그만두고 연극배우의 길을 택해 무대 한가운데에 데뷔하였다.[12]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기 인생을 시작한 그는 마법처럼 잘 풀리게 된다. 본인도 분명 배고픈 연극 선후배들의 삶을 알았기에 어느 정도 각오를 했는데, 첫 작품을 시작하자마자 너무 잘 돼서 배고픈 적이 없어 놀랐다고 한다. 데뷔작은 <한씨연대기>로 걸출한 완성도를 인정받았으며 해당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의 신인남우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배우 강신일과 함께 한 <칠수와 만수>는 연극계의 판도를 뒤흔들어놓은 전설적인 작품[13]으로, 당시 5만 명이라는 역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은 걸작이자 문성근의 연기력을 입증지은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방송으로 처음 데뷔한 것은 천사의 선택(1989)이다. 주 무대인 영화에 데뷔한 것은 1990년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로, 곧바로 주연을 맡았다. 해당 작품은 제43회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어지는 등 대외적으로 많은 인정을 받았다. 연극계의 중심에 있다 영화계로 넘어와 전에없던 영화연기를 발명해낸 소위 '연기파 배우'의 첫 계보에 해당하며, 이를 이어 두각을 나타낸 후발주자들이 송강호와 설경구 등으로 대표되는 충무로 전성기의 핵심인물들이 얼굴이 주 평가기준이 되었던 이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미남형이 아님에도 큰 활약을 떨쳤으며 이 때문에 충무로 '얼굴의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농담도 존재한다.
문성근은 처음엔 본인이 매체 연기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 첫 대본을 받았을 때 거절했으나, 독립영화계의 자유로운 분위기[14] 덕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박중훈과 함께 출연한 박광수 감독[15]의 <그들도 우리처럼>에도 기영 역을 맡아 출연했는데, 배우 문성근의 원형적인 모습이 담겨있으며 당대의 사회상이 반영된 어두운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그 다음 해에도 박광수 감독과 곧바로 연속으로 작업을 하게 되는데 <베를린 리포트>가 그것이다. 안성기와 함께 출연했으며 영철 역을 맡았다. 칠수와 만수의 인연으로 만났던 안성기와 함께 영화 연기까지 하며 절친한 형동생이 되었다.
MBC에서 방영한 우리들의 천국 시즌 1에도 출연했다. 최진실, 한석규, 염정아, 감우성, 배종옥 등이 조연으로 출연한다.[16]
1991년에는 투캅스, 공공의 적 등으로 유명한 강우석의 <스무살 까지만 살고 싶어요> 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감동 코드가 들어있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같은 해 강수연과 출연한 당대 최고의 문제작 "경마장 가는 길"을 통해 본격적으로 충무로 개성파 배우의 정점으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 그동안의 영화에서 선보인 적 없던 신선한 캐릭터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해당 작품으로 청룡영화상에서 최초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원작은 하일지의 동명 소설인데, 이 때문인지 하일지는 이 영화의 개봉 거의 직후에 출간된 자신의 소설 경마장의 오리나무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인공이 영화배우 문성근을 닮았다고 직접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17]
1992년 SBS의 개국 초기에 시작된 그것이 알고싶다의 전설적인 첫 진행자이다.[18] 그것이 알고싶다의 진행은 1992년 3월 31일 ~ 1993년 12월 26일까지 맡았고, 복귀 후 1997년 10월 26일 ~ 2002년 5월 11일까지 또 맡았다. 그가 떠난 이후 여러 진행자가 맡았지만, 현재도 그것이 알고싶다를 상징하는 최고의 진행자로 손꼽히고 있다.[19] 처음 하차한 이유는 영화배우 손숙이 자신이 출연한 영화 101번째 프로포즈를 보고 쓴 칼럼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의 깔끔한 이미지와 영화에서의 어리버리한 모습이 괴리가 느껴져서 적응이 안 되고 영화에 몰입하는데 30분이 걸렸다"고 한 평을 듣고 동종업계 사람도 이런데 관객들은 또 어떻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뤄졌다고 하며, 이후로 그런 이미지를 벗어나려고 일부러 센 역할만 골라 출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2002년 당시에 하차한 것은 정치적 이유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2003년부터 2004년까지 KBS1에서 <인물현대사>의 진행을 맡은 바 있다.[20] 2004년 2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하게 되면서 MC를 그만뒀는데, 이 후 인물현대사는 종영까지 MC를 두지 않고 나레이션과 촬영 영상만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92년 김의석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물 <결혼 이야기>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하였고, 90년대 TV 미니시리즈계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에 조윤석 역으로 출연했다. 사회 초년생을 다룬 MBC 드라마 <매혹>에도 김서환 역을 맡았다.
1993년에는 김희애와 함께 로맨스 영화 <101번째 프러포즈>에 구영섭 역으로 출연했다. 같은해 사회적 부조리를 다룬 <비상구가 없다>에서 오렌지족을 살해하는 청소원 동오 역을 연기했다. 1995년에야 개봉한 창고 영화로, 지존파 사건 때문에 개봉이 연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한국 영화계 리얼리즘 영역에 방점을 찍은 걸작으로 평가받는 문학영화 <그 섬에 가고싶다>에 문재구/문덕배 역으로 출연, 걸출한 연기를 선보였고 박광수와 세 번째, 안성기와 두 번째로 합을 맞췄다.
1994년에는 장선우와 두 번째로 합작한 장정일 원작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 도색 소설가인 나 역으로 출연했다. 해당 작품은 사회 계층의 황폐한 이면을 조롱하고 에로틱이라는 금단의 영역을 다뤄낸 파격적 작품으로, 장선우의 최고작이라는 평가까지 존재하는 수작이다.[21] 해당 작품으로 두 번째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22]
같은 해, 직전작에 함께 출연했던 여균동의 범죄 코미디 감독작 <세상 밖으로>에 이경영과 함께 주연했다. 고래사냥을 잇는 충무로 고전 로드무비로 폭소와 야유가 흥건히 번져있는 순수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95년 지금까지도 널리 기억되는 박광수 감독의 역작이자 일대기의 전설적 작품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출연, 극찬을 받으며 연기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플래시백의 기법을 잘 살려서 만든 영화라는 평을 맡으며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는 '김영수'역으로 나온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조영래 변호사가 모티브가 된 인물. 이후 이명세 감독의 <남자는 괴로워>에 특별출연하기도 하였으며 여균동 감독과의 두 번째 합작 <맨?>에도 조연으로 출연했다.
채시라와 함께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라는 로맨스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같은 해 4편의 영화에 출연한 다작 배우가 되었다.
1996년 장선우 감독이 연출하고 이정현의 신들린 연기가 화제였던 영화 <꽃잎>은 그의 최고작 중 하나로 손꼽히며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현하는 '소녀'를 학대하는 장 역을 맞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으로 세 번째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3관왕의 쾌거를 달성했다.
1997년에는 이창동 감독의 전설적인 데뷔작 <초록물고기>에 출연, 꼬붕인 한석규를 살인교사하고, 다시 희생시켜 법망을 피해나가는 음험한 조직폭력배 두목 배태곤 역을 맡아 새로운 이미지의 명연기를 선보였다. 이후 여균동 감독의 <죽이는 이야기>라는 코미디 영화에도 주연하며 시대를 앞서간 연기를 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1998년, 8년만에 강우석 감독과 합작한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도 추형도 역을 맡아 코미디 연기를 펼치며 열연했다. '남자가 바로서야 국가가 바로선다'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두 남녀가 파안대소를 하고있는 포스터가 유명하다.
2000년에는 홍상수 감독과 역사적인 첫 작업을 하게 되는데, 흑백영화 <오! 수정>에 케이블방송 PD 권영수 역할로 출연해 현실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이후 2003년, 단 두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박찬옥 감독의 첫 번째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 문제의 유부남 한윤식 역을 맡아 기묘하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연륜있게 연기했다. 주인공 박해일의 질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남자로, 열등감을 맛보여준다.
2005년에는 방은진의 장편 데뷔작인 범죄 스릴러 <오로라 공주>에 오성호 역으로 엄정화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다.
2006년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에서 정 대표 역으로 두 번째로 호흡을 맞췄고, 역대급 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한반도>에 총리인 권용환 역을 맡아 연기했다. 본인의 성향과는 정반대인 캐릭터를 연기한 점이 흥미롭다. 같은 해 <두뇌유희 프로젝트, 퍼즐>에도 주연으로 출연했다.
2007년 범죄 액션영화 <수>에서 구양원 역으로 출연하기도 하였으며 2008년에는 청소년 문제를 다룬 옴니버스 인권영화 <시선 1318>의 단편 <릴레이>에서 교감 역으로 출연했다.
같은 해 <강철중: 공공의 적 1-1>에 이원술(정재영 분)이 경영하는 '거성기업'의 경쟁업체 '태산'의 백 회장 역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대치하는 장면이 굉장히 잘 뽑혀서 현재까지 유튜브 동영상으로 돌아다니며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중이다. 또한 16년만에 드라마에 복귀하여 <신의 저울>에 출연, 김혁재 역을 맡아 열연했다.
2009년에는 <실종>에 출연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밝혔듯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살인마 연기를 하게 된다. 노모를 모시는 판곤이라는 범죄자 역할로 나와 소름돋는 연기를 펼친다.[23] <자명고>의 대무신왕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24]
같은 해 김새론 주연의 독립영화 <여행자>의 의사 역으로, 한국전쟁을 다룬 <작은 연못>의 문씨 역으로 연이어 출연하며 다작했다. 또한 홍상수, 가와세 나오미, 라브 디아즈의 단편을 엮은 <어떤 방문 - 디지털 3인 3색>의 <첩첩산중>에도 상옥 역으로 출연했다.
2010년에는 홍상수 감독의 전환점이자 최고작으로 불리기도 하는 걸작 <옥희의 영화>에 주연인 송교수/송감독 역할로 출연, 명연기를 보여주며 대 호평을 들었다. 이어 <체 게바라 : 뉴맨>의 한국어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2012년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에서 신재열 판사 역으로 등장.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본인과 정반대 성향인 캐릭터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였다. 또한 홍상수 감독의 다른나라에서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안느가 기다리는 연인 문수 역을 맡아 경이로운 연기를 펼쳤다. 또 연말에는 정지영 감독과 연달아 작업하여 <남영동1985>의 윤사장 역으로 등장했다. 원래 문성근이 연기한 역할을 안성기에게 먼저 제안했는데, 당시 문성근은 정치 때문에 바빴지만 오히려 안성기가 시간이 안 되고 문성근이 시간이 났다고 한다.
2013년에는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 재개발 업체 사장 역으로 짧지만 강렬하게 등장하며, 다음해인 2014년에는 기대작이었던 심성보 감독의 스릴러 영화 <해무>의 기관장 완호 역할을 맡아 주연했다. 악역을 많이 맡아오다 이번 영화에선 양심있는 선역으로 출연. 호평을 받은 독립영화 <도희야>에 특별출연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협녀, 칼의 기억>에서 무신집권기 가상의 집권자 이의명 역을 맡아 특별출연하였고, 2016년 <동주>의 정지용 역으로 특별출연했다.
2017년 홍상수 감독과 여섯 번째로 함께 작업한 영화이자 또 다른 전환기로 평가받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김민희와 함께 출연했다. 영희 역과 사랑을 나눴던 유부남 교수 상원 역할을 맞아 명실상부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후 고전 미스테리 형식을 따르는 스릴러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에서도 주연을 맡았고, 장준환 감독의 <1987>에서 안기부장 역으로 등장차기도 했다. 영화에서 이 캐릭터의 이름이 언급되진 않는데 이때 안기부장이 누구냐면 바로 전두환의 심복 중 심복이었던 장세동. 문익환의 아들이다보니 아버지인 문익환 역할을 맡는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이 무색하게 또 다시 대척점에 선 인물을 연기했다. 참고로 스텝롤이 올라갈 때 문익환 목사가 직접 등장한다.[25] 장항준 감독의 <기억의 밤>에서도 강하늘의 아버지 역할을 연기했으며, SBS 드라마 <조작>에서 구태원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2018년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서 주인공 종수의 아버지 용석의 변호사 역할로 등장했다.
같은해 드라마 <라이프>에서 상국대학교 병원의 부원장이자 정형외과장 김태상 역으로 출연했으며, 초반의 호평이 무너지는 중반부터 조승우와 함께 연기력으로 시청자를 사로 잡으면서 극을 살려냈다. 또한 <남자친구> 에서 송혜교가 맡은 여주인공 수현의 아버지이자 거물 정치인인 차종현 역을 맡았다.
2019년에는 <배가본드>에서 대한민국 국무총리 홍순조 역을 맡았고, 다큐멘터리 <북간도의 십자가>의 내레이션을 도맡기도 했다.
2020년에는 <아무도 모른다>의 아동청소년계 계장 황인범 역과 <화양연화 - 삶이 꽃이 되는 순간>의 악역인 형성그룹 회장 장산 역을 맡아 연기했다. 다음해 <우수무당 가두심>에선 명문학교로 이끈 송영고등학교 교장 경필 역으로 등장한다.
Apple TV+에서 방영 예정인 이선균 주연의 김지운 감독 연출작 <닥터 브레인>에 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2022년작 <무빙>에 전 안기부 2차장 민용준 역으로 출연했다. 해당 드라마에서 훌륭하고 무게감 있는 악역 연기를 소화해내며 다시 한번 대중들에게 악역 전문 배우인 것을 각인시켰다.
3. 정치 활동
1985년 문재린의 장례식에 조문한 김대중.[26] |
문재린의 장례식에 조문한 김영삼.[27] |
1994년 문익환의 장례식장에서 문성근의 손을 잡고 오열하는 김대중. |
대표적인 친노 인사로 유명하며,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를 공개 지지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노사모 운영과 선거운동 전반의 과정 큰 역할을 했다. 이 인연으로 훗날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에 출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안장식 때도 사회를 맡아서 진행하기도 했다.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이라는 인터넷 시민 운동[31]을 주도한 적이 있다. 이후에는 '온라인 광장 시민의 날개'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민주/진보 성향의 사람들을 모두 모아 함께 의견을 나누고 친목을 다지는 온라인 공간으로, 10억 원을 목표로 후원회원을 모집했다.
문재인과도 아주 가까워서 그와 함께 정치를 한 것은 물론이고 선거 과정에 있어서도 큰 도움을 준 사이이다. 총선때는 문성근이 희생적 출마로 부산에서 고생을 한 것에 있어 문재인이 부채감을 느껴 자서전에서 따로 언급할 정도이다. 유시민과도 친하고 매우 호의적이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벽보 |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의 창당 멤버들 중 한 사람이며 초대 당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때 후보자들 중에는 박영선, 김부겸, 박지원 등등 쟁쟁한 정치가들이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제치고 득표율 2위를 기록하는 위엄을 보였다. 득표율 1위가 당대표를 맡도록 되어 있어 수석최고위원에 머물렀지만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하자 한명숙 당대표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잠시 당대표 권한 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김한길 의원을 필두로 하는 비주류 진영이 민주통합당이 도입했던 시민 참여 제도를 폐지하자 이에 반발하여 2013년 5월 3일 당을 떠났다. 하지만 이후 더불어민주당에 다시 복당해서 당대표 대행 및 최고위원 역임 자격으로 현재 민주당 상임고문을 역임중이다.
20대 총선 국면에서도 백방으로 민주당을 지원했으며, 당시 야권을 분열시켰던 안철수에 대해서 강도높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진보 쪽 활동을 해왔기에 한국논단이 허구헌 날 자주 까는 연예인 중 하나이다. 본인은 이런 비난에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면서 그렇게 비난하는 그런 자들은 일제강점기에 대체 뭐했냐고 응수한다고 한다.
위와 같은 방송, 정치 활동 이력으로 인해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반정부인사로 낙인찍혀서, 해당 정권 기간 동안 TV와 영화에서 크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강한 의혹만 있었을 뿐 물적 증거는 없었으나,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과 2017년 9월, 국정원 적폐청산 TF에 의해 문서화된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공개되면서 명백한 사실임이 밝혀졌다.[33]
3.1.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피해자
이미 1970~80년대부터 온가족이 반체제인물로 찍혀있었는데다가, 이명박 정부 국정원이 2008년 당시 정부 비판 성향의 유명인사들을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관리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는 문성근을 비롯해 김여진, 김구라, 김명곤, 김가연, 김미화, 김장훈, 김제동, 박미선, 봉준호, 배칠수, 신해철, 안치환, 양희은, 이외수, 이하늘 등 82명의 이름이 담겨있었다. 보수 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작품에 캐스팅하지 말라는 정권의 압력 때문에 배우 이력과 경제적 측면에서 모두 큰 타격을 입었고 주장해왔다.문성근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8년 전부터 방송 출연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며 “제 통장에 돈을 보낸 사람들은 세무조사를 하더라”며 자신과 주변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캐스팅이 됐다가 갑자기 사정(정권의 외압)이 생겼다는 이유로 캐스팅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출연한 케이블 방송 드라마 감독이 중도에 교체되고, 부친인 문익환 목사의 뜻을 교육철학으로 삼아 설립한 대안학교 ‘늦봄문익환학교’가 국정원 사찰을 받았다는 등의 의혹도 제기했다. #
그 후 주연급 배우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단역에 가까운 조연으로만 캐스팅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려 집까지 팔아야 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경향신문 등 진보 성향 언론 매체들도 앞다투어 문성근을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자 배우로 언급하며 그가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퇴출 압박을 받는 등 피해를 받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박근혜 탄핵 이후 그는 적극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이를 통한 자신의 피해를 알리며 규탄해왔고, 정권 교체 후인 2017년 9월에는 이에 대한 민형사상 소송을 추진했다. # 소송과 관련, 9월 18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참고인 조사를 위해 출석했다. 조사를 위해 출석하여 포토라인에 선 문성근은 이명박을 직접 소환 조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며 강도 높게 전 정권들을 작심 비판했다. #
판결 이후 문성근은 페이스북에 이들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며 위자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연 25%씩 이자가 붙는다며 자신의 계좌번호를 올려 신속히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자라는 주장은 반박이 있다. 그는 블랙 리스트 등재 후에도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보수 정권 하에서 정권의 압력 때문에 주연급 거물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단역, 조연으로만 캐스팅되어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상황은 다르다.
그는 1990년 데뷔 이후 노태우, 김영삼 정권 8년 동안 그는 1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하지만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영화 출연이 8편으로 이전 정권의 1/3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 그러다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영화 출연은 19편으로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그가 출연한 영화는 고작 3편에 불과했고 그중 마지막 작품인 사일런스는 제작이 계속 지연되고 있는 모양이다.
TV 출연으로 보면 그는 노태우, 김영삼 정권 10년 동안 7편의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그의 TV 출연은 고작 1편에 불과했다.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TV 출연은 2편인데, 어쨌거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보다는 TV 출연 빈도가 2배로 늘었다.
이러한 그의 작품 활동 경력은 그가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큰 입었다는 주장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보수 정권의 외압으로 출연이 줄었다고 주장했으나, 영화 출연은 정반대였다. 그는 노태우, 김영삼 정권 시절과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도합 3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시절 그의 영화 출연 편수는 10편에 불과했다. TV의 경우에도 그는 노태우, 김영삼 정권 동안 7개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1개 프로그램 출연에 그쳤다. 다만 문재인 정권 이후 TV 출연이 대폭 늘어났다.
이후 2023년 법원은 블랙리스트 가해자들에게 문성근 등 피해자에게 금전적 손해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린 것은 물론,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배상받을 수는 없으나 국가배상책임까지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 기존 서술은 정권교체에 편승해 소송전을 벌였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이 사건을 기소한 것은 윤석열 지검장의 서울중앙지검장이었고 1심 판결부터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나 나왔다.
위와 같이 정권 성향에 따라 출연 편수를 단순 비교하는 반박은 블랙리스트 사건의 쟁점을 호도하는 왜곡에 가깝다. 단순 개수로 수가 줄지 않았다 하더라도 블랙리스트 때문에 캐스팅된 작품에서 하차했거나 출연할 수 있었던 작품에 출연하지 못했다면 블랙리스트 피해자다.
블랙리스트 피해는 아무 물증 없이 막연히 보수정권 때 작품에 출연하지 못했다는 일방적 음모론이 아니다.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재판에서 블랙리스트에 문성근이 올라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고, 귀신 보는 형사, 처용 등의 사례 등에서 블랙리스트로 인해 촬영하던 작품에서 하차하거나 출연할 수 있었던 작품에 출연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재산적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 증명된 사안이다.
이 에 대해서 80,90년대 보수정권 때보다 민주당 정부 시절 출연작이 더 적어졌다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 출연작의 단순 개수는 줄지 않았다는 것은 어떠한 반박도 되지 못한다. 노태우 김영삼 정부는 해당 블랙리스트 사건과 무관할 뿐더러 당시 문성근은 커리어 전성기로 한창 작품활동을 하던 시기였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당시에는 노무현을 지지하며 그것이 알고싶다 등 출연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개혁국민정당,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작품활동보자 정치활동에 집중했던 시기였다.
작품활동을 거의 안 하던 시기에 TV 출연작이 1편이었으나 블랙리스트 시기 2편으로 2배나 늘었으니 블랙리스트 피해자가 아니라는 식의 반박은 수사와 재판에서 확인된 구체적인 사례들이나, 주연급 작품이 없어져 단역급 조연으로만 출연하면서 생활고를 겪어 단순 개수로는 더 많이 출연하게 됐다는 문성근 본인의 주장을 전혀 반박하지 못한다.
3.2. 국정원 나체사진 유포의 피해자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성근과 김여진의 합성 나체사진을 2011년에 국정원에서 제작해 인터넷에 유포한 것으로 확인돼 충격을 안겼다. 이에 대해 과거 MB 정부 시절 정무수석을 지냈던 박형준 교수(현 부산광역시장)도 낯 뜨거운 짓이고 해서는 안 될 짓이고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개탄하였다. 박형준 교수 “국정원의 문성근·김여진 나체 사진 합성, 비판 받아야할 짓”결국 '문성근·김여진 사진 합성’을 지시한 국정원 심리전단 팀장이던 유 모씨가 전격 구속되었다. 다만 합성 사진을 직접 만든 직원은 구속이 기각되었는데 유 모씨는 지시자였고 직접 만든 해당 직원은 지시를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 12월 14일에 유 모씨는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유 모씨가 2020년에 국정원 공제회인 양우회에 취업해 비상근 자문위원으로 이름을 걸어 놓고 사무실에 거의 출근하지 않고 약 6개월 동안 수백만원의 급여를 받아 왔음이 밝혀졌다. #
4. 출연 작품
4.1. 영화
<rowcolor=#fff> 연도 | 제목 | 배역 | 활동 |
1990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 | 주연 | |
그들도 우리처럼 | 김기영(한태훈) | ||
1991 | 베를린 리포트 | 영철 | |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 최현준 | ||
경마장 가는 길 | R | ||
1992 | 결혼 이야기 | 나레이터 | 조연 |
1993 | 101번째 프로포즈 | 구영섭 | 주연 |
그 섬에 가고 싶다 | 문재구/문덕배 | ||
비상구가 없다 | |||
1994 | 세상 밖으로 | 성근 | |
너에게 나를 보낸다 | 나 | ||
1995 | 맨? | 아버지 | 조연(목소리 출연) |
남자는 괴로워 | 특별출연 | ||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 김규환 | 주연 |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김영수 | ||
1996 | 꽃잎 | 장 | |
1997 | 초록물고기 | 배태곤 | |
죽이는 이야기 | 구이도 | ||
1998 |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 추형도 | |
2000 | 오! 수정 | 권영수 | |
2003 | 질투는 나의 힘 | 한윤식 | |
2005 | 오로라 공주 | 오성호 | |
2006 | 한반도 | 국무총리 권용환 | |
해변의 여인 | 정 대표 | 목소리 출연 | |
두뇌유희 프로젝트, 퍼즐 | 환 | 조연 | |
2007 | 수 | 구양원 | |
2008 | 실종 | 판곤 | 주연 |
시선1318 | 교감 | 조연 | |
강철중: 공공의 적 1-1 | 태산 백 회장 | ||
2009 | 여행자 | 의사 | |
어떤 방문 | 영우 | ||
작은연못 | 문 씨 | 주연 | |
2010 | 옥희의 영화 | 송 교수/송 감독 | |
2012 | 부러진 화살 | 신재열 판사 | 조연 |
다른 나라에서 | 문수 | ||
남영동1985 | 윤 사장 | ||
2013 | 체 게바라: 뉴맨 | 내레이션 | |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 전 회장 | 조연 | |
2014 | 해무 | 완호 | 주연 |
2015 | 협녀, 칼의 기억 | 이의명 | 특별출연 |
2016 | 동주 | 정지용 | 조연 |
2017 | 밤의 해변에서 혼자 | 상원 | |
석조저택 살인사건 | 윤영환 | 주연 | |
기억의 밤 | 진석 부 | ||
1987 | 안기부장 | 조연 | |
2018 | 버닝 | 변호사 | |
2019 | 북간도의 십자가 | 내레이션 | |
블랙머니 | 강기춘 | 우정출연 | |
2022 |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 본인 | 다큐멘터리 |
2024 |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 정학[34] | 조연 |
4.2. 드라마
<rowcolor=#fff> 방영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배역 | 비고 |
1988년 | 베스트셀러극장 - 무적 | 주연 | ||
1989년 | 천사의 선택 | 이석범 | ||
베스트셀러극장 - 용비어천가 | ||||
테러리스트 | 조연 | |||
1990년 | 우리들의 천국 | |||
1991년 | 베스트극장 - 문밖에서 | 주연 | ||
1992년 | 매혹 | 김서환 | 조연 | |
베스트극장 - 따뜻한 이별 | 영섭 | 주연 | ||
춘원 이광수[35] | 이광수(중년 시절)[36] | |||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 | 조윤석 | |||
1994년 | 사랑을 그대 품안에 | 특별출연 | ||
미개인 | 최남수 교사 | 주연 | ||
1995년 | 까레이스키 | 조명희 | 조연 | |
호텔 | 특별출연 | |||
1997년 | 남자 셋 여자 셋 | 문화대학교 일어일문학과 문성근 교수 | ||
2008년 | 크라임 시즌 2 | 문성근 | 주연 | |
신의 저울 | 김혁재 | |||
2009년 | 자명고 | 대무신왕 무휼 | 조연 | |
2014년 | | |||
2017년 | 조작 | 구태원 | 주연 | |
2018년 | 라이프 | 김태상 | 조연 | |
2018년~2019년 | 남자친구 | 차종현 | ||
2019년 | 자백 | 추명근 | ||
배가본드 | 홍순조 | |||
2020년 | 아무도 모른다 | 황인범 | ||
화양연화 - 삶이 꽃이 되는 순간 | 장산 | |||
2021년 | 우수무당 가두심 | 박경필 | ||
Dr. 브레인 | 명태석 | 특별출연 | ||
2022년 | 인사이더 | 도원봉 | 조연 | |
멘탈코치 제갈길 | 박승태 | |||
2023년 | 무빙 | 민용준 | 주연 | |
연인 | 장철 | 조연 | ||
2024년 | 내 남편과 결혼해줘 | 유한일[38] | ||
커넥션 | 원창호 |
4.3. 연극
- 한씨연대기 (1985년)
- 칠수와 만수 (1986년)
4.4. MC
- 그것이 알고싶다 (1992~1993 / 1997~2002, SBS)
- 인물현대사 (2003~2004, KBS1)
4.5. 광고
- 1988년 하나카드 비자카드[39]
- 1991년 LG패션 타운젠트
- 1992년 롯데제과 롯데껌 깨끗한 거리가꾸기 캠페인
- 1993년 TG삼보컴퓨터 마라도 편
- 1993년 TG삼보컴퓨터 트라이젬 파퓰러
- 1993년 TG삼보컴퓨터 스타일러스
- 1993년 LG생활건강 맛그린 (with 배종옥)
- 1994년 국민카드
- 1994년 전국은행연합회 은행개인연금신탁
- 1995년 코웨이 물보험
- 1996년 코웨이 냉온정수기
- 1996년 금강제화 엘칸토상품권
- 1997년 인켈 인켈홈시어터
- 1997년 크라운제과 죠리퐁 (with 김정은, 유태웅)
- 1998년 센추리에어컨
- 1998년 한국문화진흥 문화상품권
- 1999년 노동부 고용보험 캠페인
- 2000년 제일투자신탁
- 2000년 더존디지털웨어
- 2000년 평화의 숲 운동캠페인
- 2000년 유니베라 미국, 멕시코 편
- 2000년 국정홍보처 우리는 하나
- 2000년 아모레퍼시픽 송염 치약
- 2001년 데이콤 국제전화 00388
- 2002년 대우 매그너스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 부산 북·강서 을 | [[민주통합당|]] | 44,972 (45.15%) | 낙선 (2위) |
역대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19대 총선 (부산 북구·강서구 을) | }}}}}}}}} |
6.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개혁국민정당|]] | 2002 - 2004 | 창당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4 | 탈당[40] |
[[열린우리당|]] | 2004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4 - 2011 | 탈당 |
[[시민통합당|]] | 2011 | 창당 |
[[민주통합당|]] | 2011 - 2013 | 합당[41]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3 - 2017 | 탈당[42] |
| 2017 - 2024 | 복당[43] |
() | 2024 - 현재 | 후원회장 직을 수행[44] |
7. 수상 내역
수상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1986년 | 제22회 한국 백상예술대상 | 연극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 한씨연대기 |
1990년 | 제1회 춘사대상영화제 | 신인남우상 | 그들도 우리처럼 |
1991년 | 제27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 |
1992년 | 제3회 춘사대상영화제 | 남우주연상 | 경마장 가는 길 |
제13회 청룡영화상 | |||
제1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
SBS 올해의 스타상[45] | 특별상 | 그것이 알고싶다 | |
1994년 | 제6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46] | 진행자상 | |
제15회 청룡영화상[47] | 남우주연상 | 너에게 나를 보낸다 | |
1996년 | 제41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 꽃잎 | |
제17회 청룡영화상 |
8. 여담
- 과거 결혼해서 1녀를 두고 있었으나, 1990년대 초반 이혼하고 현재는 싱글로 지낸다고 한다.[49] 하지만 더 심하게 탄압당한 친형님들[50]과 친누님은 이혼을 하지 않았기에, 정권탄압이 전부라고 보기는 어렵다.
-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서 아버지 문익환 목사 편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언급한 바에 의하면 어렸을 때 경찰들이 아버지를 잡아가기 위해 문 앞을 두드리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은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문 두드리는 소리를 싫어한다고 한다.[51] 그리고 바로 위의 문단에서도 밝혔듯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를 아들이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문 목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 가정의 아버지라기보다 민족 지도자로서의 기억이 많다보니 사람들의 호칭인 문 목사로 말하는 게 설명하기 편해 그 호칭을 쓴다고 밝히기도 했다.
- 부친 문익환이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기에, 부친이 옥중에 있을때 면회를 못 가는 시기에는 편지로 축구 같은 스포츠 경기 결과를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료 중에는 문성근이 1970년대 문익환에게 보낸 편지 중에 "우리나라가 호주와 축구를 해서 2대1로 졌습니다. 차범근이 한골 넣었는데, 후반에 두골 먹었습니다."라고 적힌 편지가 있다.
- 큰형은 피아니스트 겸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1946~2001)이다. 1997년부터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 감독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중 2001년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평소 건강했지만 갑자기 사망하여, 당시엔 돌연사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었다.
- 각종 영화에서 수많은 여성들(미성년자까지도)과 검열삭제를 찍었다. 게다가 꽃잎의 이정현이나 실종의 전세홍은 강간이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정선경은 당시 파격 노출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수위가 높은 건 별로 없다.[52]
- 문성근이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했던 시절에, 멘트를 하면서 카메라를 의식하기 위해 이 카메라에서 저 카메라로 몸 각도를 트는 등의 모션들로 인기가 높았고, 그 중 책상에 걸터 앉아 다리 꼬고 질문하는 모션도 있었는데, 초등학생들이 문성근의 모션을 흉내내어 책상에 앉아서 선생님한테 질문을 한다고 그 동작을 멈출수 없냐고 선생님들의 부탁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고 #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적이 있다.
- 오래 전부터 보수정권으로부터 '반체제 인사'로 찍혀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는 민주진보세력의 반대파인 보수정권 고위직이나 보수적 기득권층을 표상하는 배역을 자주 맡았다. '한반도'의 권 총리, '부러진 화살'의 판사, '남영동1985'의 사장[53], '1987'의 안기부장, '배가본드'의 홍순조 국무총리 등. 심지어 한반도에서 맡은 배역인 권 총리는 완전히 친일파로 묘사되는 인물이며,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어떤 역을 맡고 싶으냐는 질문에 노 전 대통령을 끊임없이 공격했던 보수언론사 회장 역을 맡고 싶다고 답하기도 했다. 다만 영화 동주에서는 당시 절필한 문인 정지용을 맡았는데, 이게 당시 그의 처지와 비슷하다.[54]
- 국정원 블랙리스트에도 올랐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디즈니 드라마 [무빙]에서 국정원 차장으로 나온다. 비정하고 무거운 모습과 찌질한 이중적인 연기를 하였다.
- 2017년 7월, SBS 월화 드라마 '조작'에서 보수 언론사 '대한일보'의 상무이자 편집권을 쥔 실권자인 구태원 역을 맡게 됐으며, 그 해 말 개봉된 영화 1987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안기부장으로 특별 출연했는데[55] 심지어 실제 배우 본인의 부친을 간첩으로 몰아가려는 음모를 꾸미는 장면까지 나온다! 실제 모습과 극중 모습이 그야말로 극과 극인 셈인데 아무래도 그의 마스크가 높으신 분들을 표현하는데 안성맞춤인 것도 있거니와, 실제로 문성근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자신의 성향과 반대되는 세력(특히 조선일보)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연기 또한 쉬워서 선호한다고 한다. 2019년 tvN 드라마 자백에서도 여지없이 악역이자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 커리어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보통 악역, 특히 권위주의적이거나 꼰대스러운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악역, 특히 높으신 분과 상성이 잘 맞는 편이다. 배우 본인도 인터뷰에서 조선일보 회장 역을 맡고 싶다 하는 걸 보면 악역 연기 자체를 굉장히 즐기고 선호하는 모양이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인상이 중후해져서 문성근이 선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된다는 평을 내리는 이도 있을 정도.[56]
- 참여정부 초기인 2003년 북한을 특사자격으로 비밀리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이 사실은 한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2011년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던 문재인이 집필한 <문재인의 운명>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 훌륭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로 평가받지만, 청룡영화상에서는 남우주연상을 3번 받은 데 비해 대종상 시상식에서는 몇 번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 모두 불발되었다. 대종상이 그동안 친보수 성향이 강했음을 감안하면 왜 문성근이 대종상에게 홀대를 받았는지 어느정도 짐작이 가능하다.[57] 직접 대종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을 칭찬하기도 했다.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의 153회에 다시 출연했을 때, 일제 강점기와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실패했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너무 무겁지 않게, 대중 친화적인 어조로 다룬 부분을 굉장히 높이 산다고 한다. 특히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조진웅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격찬했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서울구치소로 수감된, 구속되기 하루 전날인 2017년 1월 20일 트위터로 올린 신랄한 비판글이 주목받았다.
-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9년 방영/개봉한 다큐멘터리(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병상에 누워있던 작은아버지 문동환 목사 시점으로 남긴 내레이션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2022년 2월 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날 문성근을 포함한 영화인 253명은 '이재명 대통령 후보의 문화예술 공약을 지지하는 영화인 선언문'을 발표하고 "우리는 과거 보수 정권의 블랙리스트 암흑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한국 영화의 새로운 미래를 이 후보와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
-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닮아간다.
- 2024년 3월 SNS에 자랑스럽게 부친 문익환과 김일성이 1989년에 함께 찍은 사진을 게시하였다.#[58] 이후 조국과 조국혁신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조국혁신당 측은 문성근을 조국이 어려울 때마다 불의에 맞서 행동하는 삶을 살아온 영화배우 라고 평했다.
[1] 음력 1953년 4월 16일.[2] 출생지가 일본 도쿄인 이유는 당시 아버지 문익환 목사가 UN군의 통역장교(문성근은 문관이라고 발언했으나 착각으로 보임)로 종군하면서 미군들의 통역 및 한국어 교육학교의 교장으로 도쿄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 2001년 5월 17일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4] 관절의 부상, 파열 등으로 왼쪽 팔꿈치의 굽힘 각도에 이상이 있는 경우. 현재는 인대가 파열되거나 탈구가 있어도 큰 부상이 아니고서는 사회복무요원 등으로 복무를 하지만, 문성근이 병역판정을 받을 시기만 하더라도 병역기준이 상대적으로 덜 엄격했기 때문에 면제로 처리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기준이 아니라 2000년대만 하더라도 전시근로역으로 빠지곤 했다.[5] 現 서강대학교 경영대학. 당시 경상대학 소속의 경영학과, 무역학과, 회계학과가 경영학과로 통합되어 단일학과 체제가 되었다.[6] 의 후원회장 직을 맡고 있지만 입당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7] 1990년대에 방송한 MBC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목사인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신앙심은 거의 없고 교회도 나가지 않는다”라고 밝히면서 냉담자로 정식 확인됐다. 그래도 아주 간혹 진보 성향 교회의 예배나 거리 기도회 등에는 참석하는 듯.[8] 비유하자면 정파와 사파 중 사파쪽에 해당하는 셈이다. 당시 정파쪽의 대표주자로는 박중훈이 존재한다.[9]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의 손자이다.[10]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전 한나라당-새누리당 제18대 국회의원) 대학교 학과 2년 선배다.[11]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인 정인영이 1964년 독립해서 창업한 회사. 정인영은 현대양행을 기반으로 한라그룹을 세우지만, 정작 현대양행은 1981년 한라그룹의 손을 떠나서 이후 소유주가 대우그룹, 정부, 두산그룹으로 계속 바뀌면서 이름도 한국중공업을 거쳐서 현재는 두산중공업이 되었다.[12] 당시 문성근은 인사 평가도 좋게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 둘 시점에는 우수 사원 표창을 받은 직후였다고 한다. 회사 상사들은 "2년 내에 돌아오면 다시 받아주겠다."고 했다고 한다.[13] 당시 처음으로 안성기와의 친분이 생겼다고 한다. 안성기가 직접 극장에 찾아왔다고 한다. 연극이 하도 히트를 쳐서 소문이 충무로로 흘러들어가면서, 연극 공연기간이 안 끝난 상황에서 영화 제작이 결정되었고, 주인공 만수로 섭외된 안성기가 제작 전 원조 만수인 문성근의 연기를 직접 보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었다. 문성근은 당시 이미 충무로 최고스타였던 안성기를 알아보고, 기존에 관객에게 애드립이 있는 대사를 날리는 부분을 안성기에게 해볼까 고민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연예인인데 당황할까봐 안했고, 일반인 관객에게 하고 끝났다고 한다. 공연 후 안성기가 찾아와 조언을 구했고 문성근이 성심성의껏 답변해주며 친분이 생겨, 그때부터 평생 형동생으로 지낸다고 한다. 그렇다고 박중훈처럼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어도 중요한 일이 있을때마다 서로 도왔는데, 이후 둘다 50대가 된 이후에는 안성기가 영화계 행사때 문성근에게 오라고 하면, 가는건 당연하고 문성근이 같이 나서서 후배들을 열심히 섭외하기도 했다고 한다.[14] 저항영화의 경우 실제 노동자들이 배우로 나서 출연하기도 했었다.[15] 우연히도 문성근의 연극 대표작 칠수와 만수를 영화로 제작한 인물이다.[16] 우리들의 천국은 시즌 1과 시즌 2로 구분할 수 있다. 시즌 1은 가족 드라마와 캠퍼스 드라마가 같이 녹아든 포맷이었으며 홍학표가 주연을 맡았고, 시즌 2는 캠퍼스 드라마로 완전히 변경하여 장동건, 김찬우, 최진영 등 신예 배우들을 과감하게 기용하여 스타로 거듭나게 했다.[17] 참고로 작중 여관 장면은 한데 몰아서 찍었는데 제작진이 바닥에 깐 이불에 풀을 먹여서 가지고 오는 바람에 몇 시간에 걸쳐 촬영을 다 끝내고 나니 무릎이 다 까져 있더라고. 무릎팍도사에서 이 에피소드를 들은 강호동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연기에 몰입을 했다는 뜻이냐"고 되물었다.[18] 방영 당시 시사 프로그램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43.8%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바 있다.[19] 다만 2010년 이후 들어서부턴 인지도적 측면에서는 김상중에게 밀리는 추세다. '그런데 말입니다'와 같은 멘트의 등장과 유행도 존재하고, 2022년 이후로는 어느덧 김상중이 진행을 맡은 지 14년이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문성근이 그것이 알고싶다의 시초를 상징하는 진행자라면 김상중은 그 상징의 변화를 정착시킨 진행자라고 볼 수 있다.[20] 진행자 선정 과정부터 정치적인 논란이 있는데,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 측은 KBS가 역사스페셜을 폐지하고 인물현대사를 새로 편성하면서 노무현 지지자인 문성근을 진행자로 선정한 것에 대해 참여정부의 외압이라고 비난했으나, 장해랑 당시 인물현대사 PD의 증언에 의하면 "문성근이 인물현대사 출연에 대해 그는 <그것이 알고싶다>와의 관계 정리 등으로 인해 난색을 표했으나, 문씨의 정치적 성향보다는 진행능력을 높이 사서 캐스팅한 것."이라고 밝혔다.[21] 워낙 과감해서 외설 시비가 있기도 했다.[22] 이 영화에 출연한 이후 2년여 간 CF 제의가 끊겼다고 한다. 지인 중에 광고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너 미쳤냐? 왜 이런 걸 찍었냐!"며 나무랐다고 한다.[23] 2012년 19대 총선에 출마했을때 부산지역 케이블 TV에서 집중적으로 이 영화를 재방영해서 꽤 큰 이미지 타격을 입었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때처럼 의도를 가지고 한 이미지 실추효과의 사례로 들 수 있다.[24] 문성근이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근대 이전을 다룬 사극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게 그의 첫 사극 출연이다. 그리고 사극과 어울리지 않는 발성이나 대사 처리 때문에 당시 신인이던 정경호, 박민영 등과 묶여 발연기라는 비판을 받았으며(실제로 보면 이한위, 이원종 등 사극에 자주 출연한 다른 배우들과 연기 톤이 다소 따로 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로도 사극 출연은 지양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대급 명배우로 꼽히지만 이미지도 연기도 현대극에 최적화된 배우이다.[25] 이한열의 추모식에서 했던 명연설이 나온다.[26] 김대중 옆에 서 있는 노년의 사람들은 문익환과 그의 동생 문동환이며, 김대중이 손을 내미는 사람은 문익환의 아들이자 문성근의 친형 문호근이다. 오른쪽 끝에 서 있는 청년이 문성근이다.[27] 문익환과 대화하고 있는데, 옆의 백발 노인은 당시 80대 중반이었던 함석헌 선생이다. 1987년까지 문재린의 집안은 김대중만큼 김영삼과도 매우 가까웠다.[28] 두 사람은 문재린 목사 장례식에도 직접 찾아와 조문했고 사진도 남아있다. 김대중의 경우는 문익환의 서거 직후 장례식장에 와서 문성근의 손을 붙잡고 크게 오열하며 울었던 사진도 남아있다. 문재린 목사 서거때와 달리, 문익환 목사 서거 당시에 김영삼은 대통령이었기에 직접 조문은 못하고 화환만 보낼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통령이 되기 전, 이미 1980년대말 3당 합당 때문에 문성근 및 문익환의 가족들과는 사이가 많이 멀어져 있었다.[29] 형과 동생처럼 문화예술계 일에 종사하지 않아서인지 사진 같은 미디어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대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그가 1977년 옥중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 한통이 사진자료로 남아있는데, 거기에 문익환에게 시킨 일은 했지만 "그 일(아버지가 시킨 일)을 위해서 저는 적당치가 못함을 압니다."라며 그 이유로 "여태까지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이라고 육필로 적은 부분이 나온다. 부친에게까지 노골적으로 쓴 걸 보면, 형이나 동생처럼 교회를 다니다가 안 다니는 냉담자가 아니라 원래부터 종교를 거부했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대신 옥중에 있던 문익환의 심부름은 형과 동생만큼 해온 것으로 보인다. 1989년 문익환의 방북사건때 조력자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했는데 당시 서초구 방배동에 자택이 있다는 것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당시 형과 동생은 도봉구에 살고 있었다.[30] 문성근은 동교동 김대중 자택을, 어릴때부터 부친의 사회운동 탓에 심부름 등 여러 이유로 직접 가 봤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희호나 김홍걸과도 기본적인 친분이 있다. 당연히 김대중도 직접 문익환의 자택에 방문한 적이 많다. 문성근이 김대중의 대통령 퇴임 전까지 연예인만 했지 정치인이 아니었기에 동교동계라고 부르지 않을뿐, 정치만 했다면 동교동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유시민은 30대 초반에 정치계에 있었던 적도 있음에도 동교동계가 아니었다.[31] 2010년 제안한 운동으로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 야권을 단일 정당으로 통합하여 선거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의 단일 대결 구도를 만들어 승리해야 한다는 운동을 펼쳤었다.[32] 참고로 문성근을 꺾고 당선된 새누리당 후보는 강서구 토박이 출신인 김도읍이였는데 이사람은 20대~21대 총선에서도 내리 당선되었다. 매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출근할 정도로 지역구 관리에 공을 들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사람을 상대로 연고도 없는 문성근이 그것도 영남권에서 45%나 득표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였다.[33] '뉴스공장' 문성근 "8년간 방송 출연 無, 소득 신고 못한 해 많다" MB 국정원, 문성근·김여진 합성사진 제작 유포…이미지 실추 '심리전'[34] 오랜만에 높으신 분이나 악역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자 선역을 맡았다.[35] 1992년 8·15 광복절 특집 단막극.[36] 젊은 시절은 박형준이 배역을 맡았다.[37] 본래 윤처용 아버지의 친구 역할로 출연 예정이었으나 CJ 측의 외압으로 인해 하차하게 됐다. 자세한 것은 귀신 보는 형사, 처용 문서 참조.[38] 오랜만에 선역을 맡았다.[39] 목소리 대역은 이광세 성우가 녹음했다.[40] 열린우리당 입당을 위한 탈당.[41] 민주당과 신설 합당.[42] 당시 비주류계가 시민참여제도 폐지에 반발하면서 탈당.[43]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 하면서 복당.[44] 조국신당 후원회장을 맡았지만 입당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45] SBS 연기대상의 전신.[46] 현 한국PD대상[47] 게임의 법칙의 박중훈과 공동 수상.[48] 나이는 문성근이 조희연보다 3살 연상이다.[49] 아버지 문익환 목사에 대한 탄압의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기 반정부 인사로 지목된 문익환 목사에 대한 탄압은 가족에게도 이어졌다. 문성근은 결혼하여 분가한 이후에도 가택 감시, 통신 감청, 국외 여행 제한 등에 시달렸고, 이에 참다 못한 아내가 문성근과 이혼하고, 영주권을 취득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이지만 가족과 연락하면서 교류하고 있다고 한다.[50] 심지어 1989년 문익환 방북 사건때 친형 두명은 모두 별다른 근거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조력 혐의로 집안 물건을 검사들이 다 털어가는 압수수색의 수모를 겪었다. 당연히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알려지는데, 오히려 문성근 쪽은 당시 이미 유명 스타배우라서 눈치를 봐서인지 압수수색은 커녕 수사도 하지 않았다.[51] 심지어 전화 오는 소리도 싫어했다고 무릎팍도사에서 밝혔다. 전화를 걸어봐서 받으면 집에 누가 있는 것만 확인하고 끊어버린 뒤 대문을 나서는 순간 바로 연행해가는 식이었다고. 문성근 본인의 말로는 이런 공포를 문민정부 출범 때까지 겪었다. 문민정부는 김영삼 정부를 말하는데, 원래 김영삼과 문익환의 집안은 김대중 못지 않게 가까운 사이였지만, 1988년 3당합당의 분노로 김영삼과 멀어졌다. 게다가 1989년 문익환의 방북사건까지 있자, 이후 김영삼이 취임하고도 문익환 집안을 경계했던 것이다. 하지만, 취임 직후 문익환이 투병생활을 하다가 1년만에 타계하자 딱히 그런 일은 없게 되었다.[52] "경마장 가는 길"의 강수연은 원래부터 몸을 사리기 유명한 배우인데다가 당시 탑 배우였기 때문에 베드신에서 노출을 꺼렸다.[53] 경기고를 운운하며 비열한 행보의 극치를 보인 등장인물이다.[54] 이 영화엔 윤동주의 친구인 젊은 문익환이 등장했다.[55] 극중에서 실명 언급 없이 그냥 안기부장으로 나오지만 1987년 당시 실제 안기부장은 전두환이 총애했던 그 사람이다.[56] 그나마 최근 작품 내 남편과 결혼해줘(드라마)에선 중립적이지만 사실상 선역이라고 볼수있는 유한일 회장을 맡았다.[57] 특히 그들도 우리처럼, 경마장 가는 길, 101번째 프로포즈, 그 섬에 가고 싶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꽃잎, 초록물고기에 남우주연상 내지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물론 상술된 출연항목을 보면100% 거의 정치나 군사정권 비판 관련 영화를 찍은 건 아니지만, 대종상 측 입장으로 봤을때는 문성근이 친민주당 성향 내지 진보성향 영화감독과 영화작업을 해서 후보에는 올리면서 작품성을 보면 수상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입맛에 안 맞는다고 수상에 탈락시켰다.[58] 아버지 문익환 목사가 1989년 3월 무단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난 사진이다. 이후 그는 귀국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귀국하기 전까지 아들이자 문성근의 친형들인 문호근-문의근 형제가 조력 혐의로 갑자기 가택 물건을 상당수 가져가는 압수수색까지 당하며 공포의 압박수사를 당하다가 무혐의로 풀려나기도 했다. 막상 문성근은 당시 이미 스타배우의 입장이라서인지 압수수색을 당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