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05:08:21

장선우

장선우 감독의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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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화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1994년
이름 장선우
분야 영화감독
화관문화훈장(5등급)

{{{#white 역대}}} 파일:bluedragonfilmawards_logo.png
파일:bluedragonawards3.png
감독상
제14회
(1993년)
제15회
(1994년)
제16회
(1995년)
김유진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
장선우
(너에게 나를 보낸다)
박광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감독상
제31회
(1993년)
제32회
(1994년)
제33회
(1995년)
임권택
(서편제)
장선우
(화엄경)
박종원
(영원한 제국)
각색상
제31회
(1993년)
제32회
(1994년)
제33회
(1995년)
정지영
공수영
조영철
심승보
(하얀전쟁)
장선우
(화엄경)
장선우
구성주
(너에게 나를 보낸다)
제32회
(1994년)
제33회
(1995년)
제34회
(1996년)
장선우
(화엄경)
장선우
구성주
(너에게 나를 보낸다)
이경식
(나에게 오라)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영화부문 시나리오상
제24회
(1988년)
제25회
(1989년)
제26회
(1990년)
권현숙
(접시꽃 당신)
장선우
(성공시대)
김성홍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
장선우
張善宇 | Jang Sun-Woo
파일:attachment/jang_sun_wo.jpg
본명 장만철
출생 1952년 3월 20일 ([age(1952-03-20)]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울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인류학과 / 학사)
신체 174cm, 65kg
배우자 이혜영
종교 불교
데뷔 1986년 영화 '서울 예수'
1. 개요2. 활동
2.1. 감독 데뷔까지2.2. 황금기2.3. 새로운 시도와 논란2.4. 재앙과 몰락2.5. 몰락 이후
3. 평가4.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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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영화 감독, 각본가. 장선우는 예명이며 본명은 장만철이다.

2. 활동

장선우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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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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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시대 우묵배미의 사랑 경마장 가는 길
화엄경 너에게 나를 보낸다 꽃잎
나쁜 영화 거짓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

2.1. 감독 데뷔까지

평안도 피난민 출신의 가정에서 자랐다. 서울고등학교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현재 고고미술사학과와 인류학과로 분리)를 졸업한 엘리트기도 하다. 당시 서울고는 경기고와 더불어 명문고로 손꼽혔다. 웬만한 대학보다 더 가기 어려운 고등학교. 대학 시절부터 10년 가량 민중문화운동에 종사했다. 이 시절에 김상진 열사 추모집회를 주도했다가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강제로 군대로 끌려가기도 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구속을 당하며 옥살이를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처음에는 마당극에 심취했다가[1] 마당극의 영향력에 대해 회의를 가지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기로 결심했고 그 뒤 '선우[2]'라는 필명으로 영화평론을 쓰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였으며,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와 바보선언 제작에 참여하고 창작 시나리오와 MBC-베스트극장의 대본을 몇편 쓰고는 선우완 감독과의 공동 연출로 1986년 <서울예수>[3]라는 영화를 만들며 영화 감독으로 데뷔. 이 영화로 일본 동경 아시안 페스티벌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호평을 받는다.

2.2. 황금기

1988년에는 조미료 전쟁을 풍자한 <성공시대>의 감독, 각본을 맡아서 작품성/흥행 양쪽으로 성공했다. 서울관객 수치 10만 7천명으로 집계되었는데 당시 국내에서 영화로는 꽤 성공한 흥행이었으며 평도 좋았다. 다음해인 1989년에는 대한민국 영화 대박작이던 <남부군>의 각본을 맡기도 했고, 1990년박중훈, 최명길 주연으로 도시와 농촌 접경지역의 삶과 사랑을 <우묵배미의 사랑>[4] 역시 흥행에 성공하며 호평을 받았으며, 1991년 하일지 원작의 포스트모더니즘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이란 영화에서 각본과 감독을 맡아 서울 관객 18만을 동원하며 상당히 성공했다. 주연(R역) 문성근은 이 영화로 첫번째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1993년작이자 원미경, 오태경이 출연한 <화엄경>[5]은 해외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받으며 1994년 베를린 영화제 알프레트 바우어상을 수상했다. 사실 이 상은 명예상같은 것이라 본상보단 좀 미흡한 평을 받지만, 예술창안 효과상이라는 또다른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영화 <이 생명 다하도록>(신상옥 감독)이 심사위원 특별 은곰상을 수상한 지 32년만에 이 영화제에서 3번째(1961년 한국영화 마부가 심사위원 특별 은곰상을 받은 게 첫번째)로 수상했다. 고은의 소설이 원작이었는데, 내용이 난해해서 흥행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서울관객 8만여명 동원으로 아주 망한 수준이 아닌 어느 정도 평타를 거둔 편이다.이때만 해도 서울관객 10만을 흥행 성공 기준으로 봤기에 좀 부진해도 망한 수준이 아니고 오히려 난해함 정도를 생각하면 선전했다는 분석이었다.

그리고 1994년작이자 정선경이 출연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서울관객 38만이 넘는 엄청난 대박을 거두며 그해 대한민국 흥행영화 2위를 기록했다(1위는 1993년강우석 감독의 <투캅스>였다). 당시에 이 관객 수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나 도달하는 수치였기에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96년<꽃잎>은 장선우로서는 일종의 완성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정현의 데뷔작으로 촬영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그가 전신을 노출한 신이 충격과 화제가 되었다.[6] 이 영화는 아시아-태평양 영화제방콕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고 서울관객 21만을 동원하며 흥행도 꽤 성공했다. 5.18 민주화운동을 조명한 이 영화를 두고 당시 태국에선 1992년에 시위대를 사격한 태국 군부 문제를 연계하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우묵배미의 사랑>, <경마장 가는 길>, <화엄경>, <너에게 나를 보낸다>, <꽃잎> 등은 1990년대 국산 영화들 중에선 흥행과 예술성을 양쪽 모두를 잡은 상당한 비중의 작품들이다. 1988년 감독 데뷔 이후 거의 해마다 하나씩 홈런을 날렸다는 점에서 장선우는 당시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대단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2.3. 새로운 시도와 논란

1997년에는 국산 영화 중 사상 최고의 문제작이었던 <나쁜 영화>를 감독, 각본을 맡아 만들었는데, 말 그대로 길거리 양아치들의 끝없이 비참하고 우울한 삶을 고어하게 그려내고 있어 화제였다. 당시 양아치역 배우들 중 몇몇은 진짜로 길거리에서 실제 양아치들을 데려다 썼으며,[7] 행려자 에피소드 장면들 중 몇개는 정말 실제 상황이었다. 조연이나 단역들은 전문배우가 맡았는데 확인할 수 있는 배우들은 안내상, 송강호, 이문식, 박준형, 명계남, 오승욱, 문성근 등이다. 폭주족들은 실제 폭주족을 데려다 썼다고 한다(크레딧에도 80여명의 폭주족이라고 나온다).

관람한 관객들은 호평 반, 험담 반이지만 서울관객 13만으로 그럭저럭 흥행도 된 편이다. 송능한 감독의 <넘버 3>가 대박을 맞은 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해는 그야말로 "양아치"와 "조폭" 영화의 해였다.

1999년 <거짓말>이라는, 사회적 이슈[8]로까지 번진 작품을 각본, 감독을 맡아 발표(개봉은 2000년 1월 8일)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원작자인 작가 장정일의 소설인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것. 신인 여배우와 실제로 화가이자 모 대학강사라 알려진 남주인공이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찍은 영화로써 줄거리, 기승전결, 대사도 거의 없다. 그저 여관에서 몰카찍은 듯한 성행위장면의 연속이다. 관객들은 주류감독이 내놓은 작품인지라 왠지 이해를 하는 척해야 뭐가 있어보일 것 같아서 대놓고 돌을 던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해를 하자니 도대체 알맹이는 없고 이 와중에 이 괴작이 어느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니 더욱 알쏭달쏭했다. 현재 이 작품은 예술영화로 언급되거나 하는 일도 없이 걍 흑역사에 가깝게 묻혀버린 상태이긴 하지만 이런 논란 속에 당시 서울관객 31만이 관람하며 역시 흥행에선 성공했다.[9]

그래도 <거짓말>까지는 봐줄만했다라는 의견이 의외로 많다. 그 이유는 <거짓말> 자체가 60년대 프랑스의 상황주의 영화 기법을 따르고 있었고, 관객에게 지속적인 쇼크를 주면서 중간중간 정치적/사회적 구호를 삽입한다는 그 나름의 기법에 충실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결국 해외에서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것이었지만 당시 여러모로 경직되어있던 사회였던 한국에서는 쇼킹한 영화였고, 그러한 위치가 영화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다는 것. 참고로 유럽 등지에서 상을 받거나 호평을 받은 이유도 상황주의 시대 영화의 한국적 재현이라는 평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는 하나의 키치로 인식되었던 것.[10]

다시 말하지만, 장선우는 당시까지는 말 그대로 한국의 예술영화를 선도할 젊은 감독, 좋은 의미의 문제작을 만들 능력을 갖춘 감독이면서 찍는 영화마다 최소 평타는 치는 준수한 흥행성적을 올리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감독으로 평가되었고, 그렇기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제작비를 왕창 끌여올릴 수 있었다.

2001년 영국 영화 평론가이자 감독이던 토니 레인즈가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만든 바 있다. 장선우 변주곡 토니 레인즈는 아시아 영화평론의 거장으로 현재도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때만 해도 <거짓말>이 호불호가 갈리긴 했어도 장선우는 괜찮은 감독이었다.

2.4. 재앙과 몰락

그리고 2002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개봉했는데 이 작품은 한국 영화 역사상 희대의 졸작이라는 평을 들었고 충무로 대표 흥행감독이라는 그간의 명성을 한방에 날리며 다시는 영화감독직을 맡을 수 없게 될 만큼의 타격을 입게 된다.

장선우의 아방가르드 스타일은 사실 삐딱하게 말하면 일단 뚜렷한 게 없이 혼란이 어쨌니 카오스가 저쨌니 하고 보는 식이다. 아마 자기 자신도 정확히 모를 것이다. 스토리보드콘티나 그런건 어디다 쓰는건지도 잘 모르고 닥치는대로 카메라를 들이대다가 좋은 장면이 있으면 그 장면들 위주로 영화를 이어가는 스타일.[11] 모험이 용인되는 예술영화나 저예산 영화에서라면 나름대로 의미가 인정되고, 그간 찍었던 영화들도 그런 식으로 찍어서 괜찮은 작품들을 내놓기도 했으며, 활동 후반기에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지속적으로 흥행을 거두면서 수익을 내왔다.

씨네21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어떻게든 옹호하려고 했다가 딴지일보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더 웃기는 건 정작 영화 개봉 뒤 실패가 가시화되자, "그냥 100억 원 보시[12]했다고 치자. 적어도 금강경은 세상에 알리지 않았느냐?"라는, 그야말로 투자자들의 어이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발언을 했다. 그 외에도 당시 영화 쪽에서 일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밥벌이를 끊기게 만들기도 하였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촬영 당시 현장 스탭들과 투자자들에게 말 한 마디 없이 몽골로 잠수를 타버려 일주일 넘게 촬영이 진행되지 못한 적도 있었는데, 이후 장선우의 후임 감독이 들어와서 작업에 착수하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겨놓은 스토리보드, 콘티를 비롯한 촬영 계획 등이 아무 것도 없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후임 감독은 손을 놓아버리고 장선우가 다시 복귀해서 영화를 작업하게 되었다. 사실 장선우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실패 이후로 영화 감독을 다시 맡지 못하게 된 데에는 해당 영화의 흥행 실패보다도 해당 영화의 제작 과정과 개봉 후에 보여준 장선우 감독의 무책임한 모습과 부적절한 처신이 더 컸다.

단순히 영화 하나를 엉망으로 찍은 수준이었으면 그동안 여러 흥행 영화들을 내놓은 장선우가 저지른 어쩌다 한 번 정도 있을 수 있는 실수라는 식으로 넘어가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실패 이후로 본인이 잘 하는 저예산 아방가르드 영화를 찍어서 만회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경우, 실패의 정도가 너무도 심해 회사 여러 개가 박살이 날 정도로 돈이 심하게 많이 들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저예산 아방가르드 영화들을 여러 번 흥행시켜서 자아도취에 빠져 무책임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여준 탓에 현재까지도 장선우가 제대로 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당초 제작비 30억원을[13] 3배 이상 불려 93억, 홍보비까지 합해서 110억원[14]씩이나 꼴깍 날려버린 바람에 제작사 기획시대는 완전 쫄딱 망했고 배급사 튜브 엔터테인먼트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2006년에 미디어 코프에게 인수되어 사명이 스튜디오 2.0으로 바뀌었지만 역시 흥행작이 별로 없다가 총 제작비 23억원 들여서 제작한 장훈 감독 소지섭 주연의 <영화는 영화다>가 흥행 대박을 기록하면서 다시 살아남나 싶었으나, 스튜디오 2.0 대표가 수익금을 모두 챙기고 잠수를 타면서 스튜디오 2.0이 완전히 폐업해버렸고 튜브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한 미디어 코프도 2009년에 폐업 후 상장폐지되었다. 튜브 엔터테인먼트의 계열사인 튜브 픽쳐스는 영화 <예의없는 것들>을 끝으로 영화사업을 그만두고 자원개발사업으로 업종을 변경하여 회사명도 페트로 홀딩스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주)코스모스피엘씨로 변경하더니 2009년에 상장폐지되었고, 역시 튜브 엔터테인먼트의 계열사였던 튜브 인베스트먼트는 <다세포 소녀>를 끝으로 영화 투자사업에서 철수하였으며 회사명을 HB인베스트먼트로 변경했다.

장선우 자신은 2004년~2005년 연간 그 도피처 몽골에서 해외 투자를 꽤나 받아 영화 <천개의 고원>을 찍으려 했으나 결국 영화가 엎어지면서[15] 제주도에서 '카페 물고기'라는 카페를 차리고 살아가는 것만 나중에야 알려지게 된다.[16] 2021년까지만 해도 카페를 방문한 리뷰가 있었으나 그해 후반부터는 숙박업으로 바뀌어서 숙박업 방문 리뷰들이 확인된다.

2.5. 몰락 이후

2004년에 본인의 제자가 감독한 <귀여워>[17][18]라는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이게 장선우의 마지막 영화 참여 작품이 되었다.

2011년 씨네21 제797호에서 장선우를 재평가하며 특별 취재했다. 장장 15페이지가 넘는 코너로 유달리 씨네 21의 장선우 사랑이 돋보였는데 아직도 차기작 계획을 하는 그에게 국내 영화계 투자가 어렵다면 그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해외 영화계의 적절한 도움이 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라는 기사를 썼다. 그러나 기사에도 나왔듯이 해외에서 장선우에게 제작비를 대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다만 성소재림을 말아먹어서 끼친 악영향이 너무 커서 그렇지 사실 성소재림 이전에는 나름대로 거장 취급할만한 인물이기는 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너무 거금을 들인건 그렇다쳐도 그 제작과정에서 보여준 개인적 행동이 확실히 문제이기는 했다.

한때 박재동과 함께 바리데기 애니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하고[19] 몽골 초원을 배경으로한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를 구상하기도 했다지만 영화판에서 완전히 쫓겨난지라 구상이 현실화되기는 그른듯 하다. 짬밥으로 보면, 임권택, 이창동 등 장편 상업영화 작품 활동을 이어오는 일부를 제외하고 현재 주목받는 감독이 그리 많지 않은 2000년대 이전의 감독들과 박찬욱, 봉준호 등으로 대표되는 21세기 신예들의 세대 사이에 끼어서 더 위치가 엉성한 측면도 있다.[20] 90년대 서울을 중심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영화 감독들이 2000년대를 전후해 날라간 것은 (홍상수, 이명세 정도를 제외하면) <타이타닉>과 <쉬리> 이후 한국 영화 관객이 대폭 늘었던 탓도 있다. 영화 산업 자체가 변하고 있던 과도기였던 것이다.

결국 2012년, 활동을 중단한 감독들을 다룬 영화 "영화판"시사회에 참가해 자신이 오만했다고 인정했다.

2019년, 한국 영화 100주년 기념 단편 영화 모음 100X100에서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2019를 공개했다.

3. 평가

데뷔작인 <서울 예수> 개봉 당시부터 기존의 충무로식 도제 시스템을 깨고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휩쓰는 등 주목받던 감독이었고 1996년 한국영상자료원의 (20세기 기준) 한국 영화 100선에 무려 4개의 영화를 걸어놓았을 정도로 한국에서는 몇 안 되는 아방가르드 영화를 만들던 감독이었다. 또한 작품들이 단순히 작품성에만 치중된 것도 아니라서, 흥행도 최소한 평타는 치는 괜찮은 흥행 감독이기도 하였다. 즉, 데뷔한 이래로 작품성과 상업성 양쪽에서 모두 호평을 받고 잘나가던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자타공인 흥행감독이었다.[21] 참고로 장선우가 감독으로 활약하던 1980년대 말~1990년대의 한국영화 시장은 점유율이 10~20%대 안팍의 수준을 기록하던 침체기에 있었던 시절인지라 상업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내던 장선우는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22]

하지만 연이은 흥행성공에 자만하다가 2002년에 감독한 제작비 엄청 들어간 망작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찍어버리는 바람에 충무로에 초대형 쓰나미를 가져오며 경력이 작살나버린 감독이다.

당시에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정성일 평론가가 당시에 썼던 평론에 따르면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셋을 높게 쳐주었다. 그런데 이중에서 그나마 제일 최근 활동했다는 사람이 2007년에 영화 M을 내놓은 이명세...[23] 박광수 감독도 2006년 박신양, 예지원 주연의 눈부신 날에를 찍고 영화활동을 쉬고 있다. 다만 영화 자체를 자주 안 만드는 편이라, 다시 나올 수도 있다.

정성일 평론가 본인도 김기덕, 임권택, 홍상수로 갈아타서 장선우 감독은 완전히 잊혀졌다. 물론 정성일도 이 영화를 여러번 비판했다. 요지는 '실상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영화인데 금강경이 갑자기 튀어나오니 이해 못하는 티는 못내고, 뭐라도 본 양 무게잡지 말라'는 소리였다. 이 정도면 거의 맹비난에 가깝다. 그래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하나만으로 흑역사 취급하기에는 당대기준으로 괜찮거나 참신한 시도를 한 작품들을 찍어놓았기 때문에 아쉬운 점도 있다.[24]

장선우는 한국에선 몇 안 되는 아방가르드 감독[25]이었고 이쪽으론 분명 능력이 있었다. 적어도 성소재림 이전까지만 해도 고정팬도 있었고 흥행도 적자는 안 낼 정도로 뽑던 감독이었다. 그래서 성소재림도 많은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자본을 끌어들여서 작품을 하려고 했고 그 작품이 그의 인생 최대의 망작인 것이 문제가 됐다. 너무나도 처참한 결과 때문에 영화사들은 더이상 아방가르드 영화에 투자하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저예산이었다면 대한민국 아방가르드 영화 시장의 붕괴나 감독 자신의 몰락으로는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장선우로 인해 한국에선 아방가르드 상업 영화는 투자를 받지 못해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불교 신자이며 작품에 불교적 메세지를 담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데뷔작은 기독교를 소재로 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4. 수상

연도 영화 시상식 부문
1998 제1회 방콕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부문 최우수 극영화상
1997 제10회 도쿄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상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
제26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KNF 특별 언급상
1996 제45회 만하임-하이델베르그 국제영화제 가톨릭 문화상
제41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1995 제33회 대종상영화제 각색상
1994 제1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제32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제32회 대종상영화제 각색상
제44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
제1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1992 제1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1990 제2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감독상
1989 제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
제2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시나리오상


[1] 아버지가 영화 관련 일을 한 적이 있긴 했지만 영화광은 아니었다고 한다.[2] 후술할 선우완 감독의 성을 빌려와 필명을 지었다.[3] 참고로 본 작품은 대한민국 영화사 최초의 독립단편영화다! 이전에는 영화 도제 시스템식의 영화사에서 제작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정작 개봉할 땐 <서울황제>란 제목으로 개봉해야 했는데 개신교계에서 반대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목을 바꾸고 잠깐 개봉하여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영화의 주연은 김명곤 배우로 이전에 그의 대표커리어였던 <바보선언>(이철용 원작/이장호 감독)에서도 주연이었으며, <바보선언> 역시 비교적 사회파적인 영화라는 점과 주인공이 정신질환자나 동네 바보같은 마이너리티라는 점, 감독들이 주화입마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명곤은 이후 <서편제> 출연으로 리즈 시절을 누리다가 영화계 일선에서 물러난 후, 참여정부 시절에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바가 있다.[4] 은하해방전선윤성호 감독이 이 영화를 보자마자 자기의 추천작을 바꿨을 정도였다.[5] 이 영화가 원미경이 가장 최근에 찍은 영화다. 신인 시절 신현준이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이기도 하다. 배역은 장돌뱅이.[6] 이것은 춘향뎐의 여주인공 이효정의 노출과 더불어 미성년자 노출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예술적인 표현으로 유야무야 넘어갔고 당시 이효정도 고등학생이었다. 하지만 3년 후 가수로 확 떠버린 이정현과 달리 이효정은 영화계를 떠났다.[7] 때문에 대부분 잘해봐야 2000년대 극초반에서 필모그래피가 뚝 끊겨있다. 에피소드 몇개는 이 배우들이 실제로 겪은 일들을 각색한 것이다.[8] 거짓말과 함께 비슷한 시기 노랑머리, 즐거운 사라, 서갑숙 논란이 90년대 당시 보수적이었던 한국에 욕망과 성이라는 사회적 금기에 대한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9] 언론에서 논란을 부추겨 득을 본 점도 있다. 당시 KBS 뉴스 9에서 상영관 앞 모습을 생방송으로 중계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10] 이러쿵 저러쿵 여러 말로 치장한들 결국 서양에서 아시아를 보는 시선은 오리엔탈 판타지, 즉 자신들에겐 없는 무언가를 찾는 것에 좁혀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도 어느정도 그런 면이 크지만 이 당시엔 특히 더 했다. 이런 점은 서양권에서도 크게 알아줬던 일본 영화만 봐도 알수 있는게, 일본 전통극으로 영화를 자주 만들었던 구로사와 아키라에 비해 현대극에 치중했던 오즈 야스지로가 늦게서야 주목을 받고, 심지어 지금도 구로사와에 대한 지지에 비해 오즈에 대한 지지는 그리 크지 않은 것도 이 때문. 결국 서양권의 평가라고 그렇게 순수히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11] 홍상수 감독과 유사하다.[12] 布施. 불교에서 자비심으로 타인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 한 마디로 100억 원 기부했다고 치자는 소리.[13] 참고로 영화가 막 기획되었을 때에 개봉한 쉬리의 제작비는 31억원이었다. 당시 쉬리의 제작비가 한국 영화판에서 사상 초유의 제작비라고 표현될 만큼 엄청난 거금으로 평가받았는데 그걸 훨씬 뛰어넘은 것이다. 아무리 한국 영화의 점유율 상승과 멀티플렉스 극장의 보급으로 영화판이 커지고 영화 제작비도 많아지는 추세였지만 그럼에도 영화 제작비로 100억은 너무 무리한 금액이었다.[14] 참고로 해외 리뷰에서는 이 100억 든 작품을 저예산 영화라고 부른다. 수억달러에 달하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비에 비교하면 저예산으로 보일 수 밖에 없겠지만, 그건 할리우드 영화계가 전세계에 배급망이 깔려있어서 그렇고, 이 영화 제작하기 5년 전에 대한민국은 초유의 IMF 사태로 경제위기를 겪었다. 지금도 100억은 영화 제작비로 상당히 큰 돈인데 아무리 쉬리 이후로 한국 영화가 판이 커지고 제작비가 급속히 높아진다 해도 2002년 기준으로 100억은 영화 제작비로 초월적으로 큰 돈이었다.[15] 신인 여배우에게 '어린아이 울리면 행복할 수 없다.'는 욕까지 들었다고 한다.[16] 이 카페는 그럭저럭 명물화되었는지 관광 잡지 등에 가끔씩 소개되고 있다. 구글로 찾아보면 관련 글들이 있다. 다만 호불호가 심히 갈리는 분위기인데, 공통적으로 주변 경관은 매우 훌륭하고, 카페도 일반가옥을 개조해서 분위기 있다는 게 공통적인 평이지만, 사장 내외(장선우와 장선우 아내)가 불친절하다는 평이 많은 편이다. 그외에도 커피는 맛없다는 평이 있다. 티라미슈는 냉동 티라미슈를 대충 겉만 녹여 판다는 둥.[17] 그래서인지 일부 엑스트라는 나쁜 영화의 주인공들이 출연했다. 그리고 이 영화도 흥행은 말아먹었다.[18]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첨언하자면 귀여워는 저질 영화가 아니다.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2004년 한국영화계 최고의 데뷔작이라는 찬사까지 한 바 있고,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까지 받았다. 단, 대중들의 취향과는 심히 어긋난 작품이었으며, 덕분에 네이버 평점 4점대를 찍었다. 평론가의 시각과 대중의 시각이 어긋난 예 중 하나로 들 수 있을듯. 참고로 이후 감독한 영화 <창피해>, <우리손자베스트> 또한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19] 뉴타입 한글판에서 소개된바 있다. 박재동 화백과 함께 중앙아시아에 스케치 여행을 가기도 했다고.[20] 게다가 영화 하나를 완전히 말아먹었다. 비슷한 케이스가 바로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인데 이분도 <세기말>이란 영화로 소포모어 징크스의 한 사례를 남기며 영화계에서 은퇴해야 했다.[21] 물론 서편제나 쉬리같이 최고의 흥행성적을 낸 영화를 만든 것까지는 아니지만 꾸준히 흥행작을 냈다는 점은 무시할수 없는 요소이다.[22] 그러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전에 제작한 그의 흥행작들 가운데 후기작인 너에게 나를 보낸다와 꽃잎, 나쁜 영화, 거짓말의 경우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노출, 노이즈 마케팅에 힘입은 바가 컸기 때문에 작품성과는 별개라는 평도 있다.[23] 그나마 이명세 감독은 드라마 쪽 연출은 좀 맡았다.[24] 이재용 감독도 비슷한 경우다. <정사>,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들로 흥행과 비평 모두 크게 성공했다가 <다세포 소녀>로 아주 작살나버렸다. 그런데 <다세포 소녀>는 평론가들의 평은 나쁘지 않았다. 딴지일보에서도 호평했다. 물론 극장에서 보고온 관객들은 약이 제대로 올라 악플이 홍수를 이뤘다. 그 뒤 평하기에 따라 <여배우들>이란 영화로 이재용이 되살아났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되려 흥행에선 <다세포 소녀>보다 더 최악이었다. 2013년 <뒷담화>라는 영화를 찍었다. 다시 본론으로 궤도를 돌려놓자면 <성소재림>은 평론가 평가조차 좋지 못했으니 이재용의 <다세포 소녀>에도 비할 바가 못된다.[25] 이명세와 장선우 두 사람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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