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8-18 19:44:17

동경

1. 憧憬2. 東京
2.1. 일본의 수도2.2. 한국 역대 왕조의 동경
2.2.1. 신라 왕조2.2.2. 고려 왕조2.2.3. 발해 왕조
2.3. 필리핀의 왕조2.4. 베트남 하노이의 옛 이름 동낑2.5. 기타2.6. 관련 문서
3. 銅鏡4. 東經5. 動徑

1. 憧憬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 또는 마음이 스스로 들떠서 안정되지 아니함. 이것에 두려움이 더해지면 외경이 된다.

2. 東京

'나라 동쪽의 또 다른 수도'라는 뜻이다. 동아시아 역사상 여러 곳에 있어 왔다. 종종 '동도(東都)'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2.1. 일본의 수도

도쿄를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읽은 것.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2.2. 한국 역대 왕조의 동경

2.2.1. 신라 왕조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수도였던 서라벌의 별칭이기도 했다. 보통 고려시대에 사용된 경주의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대 기록인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탑비문에서 신라의 수도 경주를 동경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고대가요처용가에서도 당시 한반도의 수도였던 서라벌을 ‘동경’으로 칭한 표현이 존재한다.

수도 서라벌을 '동쪽 수도'란 의미인 동경으로 칭한 것은 '서쪽 수도'로 간주한 곳도 존재했다는 의미인데, 이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당시 신라에서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해 설치된 행정 구역이었던 5소경에 대응된 호칭이라는 설이 있다. 이들 5개 소경은 '작은 수도'라는 의미답게 수도의 사람과 기능을 일부 옮겨 조성했고 위치도 모두 경주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다.

다른 하나는 서쪽 당나라장안을 서경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대응해 신라를 중국과 대등한 문명국가로 간주해서 동경으로 칭했다는 설이 있다. 주보돈 교수는 2015년 신라의 동경과 그 의미라는 논문에서 8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이 고양된 문화의식과 자존의식 아래 그렇게 부르는 용법이 생겼으리라 추정했다. 이런 신라인의 자존의식의 예시로 황룡사 9층목탑의 의미, 태종 무열왕묘호 분쟁, 김헌창의 난 때 장안국을 칭한 것을 예로 들었다.

물론 이 시기 경주는 수도였기 때문에 굳이 동쪽 수도라는 의미의 동경보다는 경(京), 왕경(王京) 등 수도 그 자체로 더 많이 불렀다.

2.2.2. 고려 왕조

고려 왕조의 역대 3경
경(京) 남경 중경 개경 상경 동경 서경
주(州) / 부(府) 양주 개성부 경주 평양부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고려 초중기의 3경(京)[1] 중 하나였을 때 이름. 비록 신라는 멸망했지만 그 과정에서 왕건은 신라의 구 세력을 그대로 포용했고, 옛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동경으로 개칭되어 고려 초중기 동안에는 계속 중요한 도시로 남아있었다. 사실 수도 개경에도 황룡사 9층 목탑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을 정도니[2] 신라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고려시대에도 개경 사람들이 놀러와도 우와 할 정도는 될 만큼 크고 화려한 도시였다.

그러다 이후 신라부흥운동의 성격이 있었던 동경민란의 진압 이후 경주로 격하되어[3] 3경에서도 빠지고 남경(서울)이 추가되었고, 몽골 제국군의 침략으로 황룡사 목탑이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곧 동경으로 복권되어 원간섭기 이후의 외왕내제 체제가 붕괴되기 전까지 여전히 고려의 주요 대표도시로 기능했다. 조선 시대에는 최상급 행정기관인 5개 부(府) 중 하나였을 정도로 위상은 상당했고, 경상도 여러 대도시와 더불어[4] 경상도 내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경상도 자체가 인구가 많다 보니 전국으로 치더라도 손꼽히는 대도시였다.[5] 일제 강점기 초반에도 전국 도시들 중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할 정도로 위상은 여전하였으나 부산, 대구광역시가 경주를 역전하여 전국 대도시의 위상을 뺏겼다. 나아가 대한민국 시대부터는 오히려 옛날에 경주 주변의 외항으로 경주에 장 보고 문화생활하러 오던 옆동네 포항, 울산한테도 밀리는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래도 영남 지방을 일컫는 경상도(경주시+상주시)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도시다

개의 품종 중 하나인 동경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조선 헌종 때인 1845년에 나온 경주지역 지리지 이름도 동경잡기(東京雜記)다.

2.2.3. 발해 왕조

발해 5경
경(京) 남경 중경 상경 동경 서경
부(府) 남해부 현덕부 용천부 용원부 압록부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발해 5경(京) 중 하나. 3대 문왕의 시대에[6] 상경에서 동경으로 옮겼고, 성왕이 즉위해 다시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책성부(柵城府)라고도 불렸고, 삼국사기태조왕이 동쪽으로 책성을 순시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당서에는 예맥의 땅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조선 국학자들은 동경용원부의 위치를 찾기 위해 당의 가탐이라는 사람이 쓴 <고금군국현도사이술>이라는 기록에서 "발해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 4부는 모두 고구려 옛 땅인데,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까지는 무릇 39역이다"[7]라고 했던 기록에 주목했다. 정약용이나 류득공은 이 기록에 따라 신라의 천정군 즉 함경도 덕원군[8] 기준으로 39역(1,170리) 되는 거리에 위치한 육진종성군 또는 회령군이 발해의 동경용원부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현재는 지금의 중국 지린성 훈춘시(琿春市)의 반라성(半拉城) 혹은 팔련성(八連城)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 학자들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의 토성을 발굴한 후 여기를 발해 동경용원부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북한정권 특성상 외부 학계와 교류가 적다보니[9] 신뢰성이 얼마나 있는지도 알기 힘들다.

2.3. 필리핀의 왕조

필리핀의 톤도 왕조 (900s–1589). 명나라 시절때부터 '톤도' (東都)라고 일컬어졋다.

2.4. 베트남 하노이의 옛 이름 동낑

동낑은 東京을 베트남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베트남 후 레 왕조 시기에 하노이를 부르던 옛 지명이었으며 지금의 베트남 북부지방을 가리는 의미로 확장됐다.

서양인들이 동낑을 통킹(Tonkin)이라고 부르며 통킹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통킹만 사건 같은 경우.

2.5. 기타

  • 개성시: 《명사(明史)》 열전 제208#에 조선의 옛 역사를 기술하면서 고려 시대에 현 개성시에 해당하는 송악(즉 개경)이 동경이라고 잘못 기재돼 있다. 청나라[10]의 편집자들은 고려의 제2수도 평양이 서경이니 제1수도인 개경이 곧 동경이겠거니 하고 억측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 ~경(京) 소리를 듣는 지역이 네 곳이나 있었다는 걸 모르고 동서 양경을 둔 것으로 오해한 듯. 거 좀 조선에 물어서 확인해 봤으면 안 틀렸을텐데
  • 뤄양: 시안(서안, 西安)이 장안(長安)으로 불리던 시절에 낙양과 더불어 동서 양경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랬던 시대에 낙양은 동경 또는 동도, 장안은 서경 또는 서도라고도 불렸다.
  • 동경 개봉부: 북송수도. 지금의 카이펑이다. 흔히 동경개봉부라고 칭한다. 수호지라든가.
  • 동경 요양부: 요나라금나라의 5경 중 하나. 현 랴오양 시. 금나라는 요나라와 다른 5경을 두었지만 일부는 그대로였다.

2.6. 관련 문서

3. 銅鏡

청동으로 만든 거울.

4. 東經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본초자오선의 동쪽 부분의 경도.

5. 動徑

의 위치를 나타내는 데에 있어, 기준되는 점으로부터 그 점에 그은 직선을 벡터로 한 선분. 경선벡터

[1] 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2] 개경에도 흥왕사처럼, 황룡사보다 옆으로 더 넓은 사찰은 있었다. 흥왕사는 조선의 경복궁과 맞먹는 면적을 자랑했다.[3] 고려,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반란이 일어나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4] 대표적으로 상주시, 진주시, 안동, 성주.[5] 18세기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5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6] 신당서에는 당덕종 정원(貞元) 연간이라고 했는데, 이는 785년 정월부터 805년 8월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7] 渤海國南海ㆍ鴨綠ㆍ扶餘ㆍ柵城四府,幷是高句麗舊地也。自新羅泉井郡至柵城府,凡三十九驛[8] 지금은 함경남도 원산시에 합쳐졌다.[9] 의외로 중국 고고학계와도 그다지 교류가 없다고 한다.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북한 고고학자는 애초에 중국 입국비자를 안 내줘서, 만주지역 답사는 오히려 남한 학자가 더 자유롭다고 한다. 물론 남한 학자가 발해유적지를 둘러보러 오는 것은 방해한다고도 하지만, 남한 사람들은 특별케이스가 아니면 중국 비자가 거의 그냥 나온다.[10] 한 왕조의 정사(正史)는 대개 그 왕조가 망한 뒤 후계 왕조에서 편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