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18:32:13

대전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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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
大田戰鬪
Battle of Taejon
한국 전쟁의 일부
기간
1950년 7월 16일 ~ 20일
장소
충청남도 대전시 (現 대전광역시)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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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북한의 전술적 승리
영향
유엔군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한 지연전 성공
병력 한미 연합군 병사 총 11,4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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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규모 전사: 465명
실종 및 포로: 295
미상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시가전3.2. 보급품 후송 작전3.3. 철수
4. 결과 및 의의5. 딘 소장 구출 작전은 보급품 후송 작전의 오해 및 와전

[clearfix]

1. 개요

대전 전투는 1950년 7월 16일 야간에 미 제24보병사단 제34연대가 갑천 일대에 배치되면서부터 7월 20일까지(본격적인 전투는 19일에 시작되어 대전 시가전은 20일) 대전 일대에서 미 제24보병사단이 조선인민군 제3, 4사단 및 105 전차사단에 대응해 펼친 지연전이다.

일부 미국 전사에서는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공주-대평리 전투(금강 방어선 전투)를 대전 전투에 포함시켜 광의의 대전 전투 (7월 13일~7월 20일)로 설명하며 덧붙여 대전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 465명, 실종 및 포로 295명의 인적 손실을 보았는데 공주-대평리 전투(금강 방어선 전투) 전투의 인적 손실(전사: 317명, 실종 및 포로: 185명)를 포함시켜 전사자를 819명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2. 배경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Walton Harris Walker) 중장은 7월 18일 오전 포항에 상륙한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일대에 전개하는데 최소한 2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고 이에따라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윌리엄 F. 딘(William Frishe Dean) 소장은 원래 계획했던 철수 시점을 7월 19일 야간에서 하루 더 연장하여 7월 20일 야간으로 변경하고 대전 방어를 담당한 제34연대에 제19연대 제2대대를 배속시키는 등 전투력을 증강시키며 지연전을 준비하였다.

7월 19일 아침 북한 공군 야크 전투기의 대전 후방 보급로 공습과 함께 대전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전투 경과

7월 19일 북한군이 대전 외곽까지 진출하였다. 일단 북한군 제3사단은 유성구까지 진출해 대전~옥천 일대를 장악해 나갔고, 4사단도 유성을 공격하는 한편, 1개 연대를 금산 방향으로 우회시켰다.

3.1. 시가전

7월 20일 새벽 3시, 공격준비사격 후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갑천에 방어선을 구축한 미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대대가 허겁지겁 보문산으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시가전으로 야기될 피해를 우려해서인지 주력을 대전 시내로 들이지 않고 오전 6시경 포격 지원 속에 전차 몇대만 시내로 보냈다.[1]

한편 갑천의 부대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한 미 34연대장과 윌리엄 F. 딘 미 제24보병사단장은 일부 병력과 전차만이 대전 시내에 들어온 것으로 판단하고 반격을 진두지휘해 수색중대와 공병중대의 3.5인치 로켓포로 8대, 야포로 2대를 파괴시켰다.
파일:General_Dean's_Kill.jpg

이 무렵 북한군은 금산과 옥천으로의 퇴로를 차단하고서야 주력을 시내로 진입시켰고, 이제서야 북한군의 진의를 파악한 딘 사단장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3.2. 보급품 후송 작전

대전의 미 제24보병사단 잔류 병력이 철수를 준비하면서 대전역 안에 있던 대부분 탄약으로 구성된 보급품 적재 화차의 후방 이송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이에따라 '보급품 후송 작전'이 여러차례 시도되었는데 가장 잘 알려진 '보급품 후송 작전'은 다음과 같다.

7월 20일 16시경 딘 소장은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 전화를 걸어 기관차를 대전역으로 보내 화차 10량을 영동으로 이송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해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가 미 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6명의 병사들과 함께 16시 20분경 이원역을 출발하여 대전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전역 도착 전 북한군에 공격을 받아 손상된 탄수차로 인해 화차 10량을 견인할 추진력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복귀하는 도중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하고 현재영 부기관사가 부상을 당하였다.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에는 이후 딘 소장이 한번 더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 보급품 후송을 위한 기관차를 대전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17시에 기관차가 대전역을 향해 출발했다는 보고까지는 딘 소장이 받았지만 대전역에 도착은 하지 못 하였고 이 기관차를 대전역에서 기다리던 수송장교 레이몬드 D. 햇필드(Raymond Davidson Hatfield) 대위가 북한군에게 공격을 당해 전사하였다고만 기록되어있다.

한편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에는 나오지 않지만 7월 20일에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과 별개로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미군 호송병 6명이 탑승하여 또다른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 작전에서도 기관차 운행 도중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한 미국 신문 기사가 존재한다.

부연하자면, International News Service 통신사 소속 필립 딘(Philippe Deane Gigantès) 종군기자가 1950년 7월 21일 단독으로 보도하고 'Miami Daily News', 'South Bend Tribun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전재(轉載) 및 재배포되었는데, 이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한국인 철도공무원 중 'switchman'이 등장한다는 것으로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에서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과 별개의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장시경 신호원으로 확실시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위와같은 한국인 철도공무원 및 미군들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후송에 실패하여 7월 21일 오전 8시 미 공군보급품이 적재된 화차들을 폭격으로 파괴하여 북한군에 의한 노획을 방지하였다.

덧붙여 이 대전역 화차 폭격은 AP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어 'The Evening Star', 'The Daily Alaska Empir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1950년 7월 21일자로 보도되었으며, 화차 폭격에 참여한 머스탱 전투기 조종사는 엄청난 탄약이 적재된 화차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염을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행사의 상징인 화려한 불꽃놀이 광경에 비유하였다.
  • 'The Evening Star' 1950년 7월 21일자 기사 원문 발췌
Capt. H. Moreland of Mobile, Ala., leader of the mission, said
"The train blew sky high, It was like the Fourth of July."
He said Taejon looked very still and deserted.

한편 수송장교 레이몬드 D. 햇필드(Raymond Davidson Hatfield) 대위에게는 이 '보급품 후송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전사한 공적이 높게 평가되어 1954년 은성훈장이 수여되었으며#, 한국인 철도공무원들 역시 늦었지만 그래도 미국 국방부로부터 공적이 인정되어 김재현 기관사에게는 2012년, 황남호와 현재영 부기관사에게는 2015년 미국 국방부 특별민간공로훈장(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 Medal for Exceptional Public Service)이 수여되었다.

3.3. 철수

17시 55분에 딘 소장은 부관 클라크 중위를 대동하고 호위차량 1대를 앞세워 17시 55분에 연대 지휘소를 출발하였으며, 뒤이어 본대가 18시에 출발하면서 철수가 시작되었다.

이후 충북 옥천으로 철수하던 미 제24보병사단은 세천터널에서 매복중인 북한군의 기습으로 차와 장비를 버리고 산기슭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딘 사단장도 부상병에게 줄 물을 뜨러 가다 길을 잘못들어 실종되고 만다.[2]

4. 결과 및 의의

미 제24보병사단 입장에선 전력의 30%(3,933명 중 1,150명 사상)를 손실하고 사단장까지 실종된 것에 비해 득보다는 실이 많은 전투였다.

그러나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부여한 7월 18일 오전 포항에 상륙한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일대에 전개할 수 있도록 7월 20일까지 대전에서 최소 2일의 시간을 확보하라는 지연 작전 임무를 완수하여 원래 7월 19일 철수 계획을 변경하여 7월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했기 때문에 지연 작전 측면에서는 성공한 전투로 헛된 희생만은 아니었다.

이후 미 제24보병사단은 22일 옥천에서 수습 후 충북 영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교대를 했으나, 딘 사단장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해 존 H. 처치(John H. Church) 장군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5. 딘 소장 구출 작전은 보급품 후송 작전의 오해 및 와전

자세한 내용은 딘 소장 구출 작전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김재현 기관사 문서의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문단을 참고하십시오.

그 동안 국내에서는 1950년 7월 19일 김재현 기관사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30여명으로 구성된 미군 결사대가 탑승하여 대전 전투에서 실종된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일명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러한 '딘 소장 구출 작전' 수행 중 김재현 기관사와 미군 결사대원 29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와 1983년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자필 경위서에서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를 '미군 결사대'로 명명하고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이라고 기록하였지만, 후대에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특수 작전처럼 과장하기 위해 '미군 특공대', '미군 특전단'#, '미 해병 특수부대'#[3] 등으로 확대ㆍ 재생산 되었고 병력과 전사자 기록도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와전되었다.)

한국철도공사철도청 시절부터 호국철도의 상징으로 주도적으로 홍보하여 널리 알려진 이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흡사 전쟁 영화시나리오 같은 화제성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보훈부와 같은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에 의해 '구출 작전'이 허위임을 단번에 판명할 수 있는 기관차의 대전 진입 시점, 미 제24보병사단의 대전 철수 시점, 딘 소장의 실종 시점 등 공식 전사(戰史)에 기록된 대전 전투의 사건 발생별 시간 순서 비교와 미군 결사대원들의 소속과 신원 파악 등 기본적인 팩트체크교차검증이 생략된 채 그대로 인용되고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구출 작전'# 등으로 무분별하게 확대·재생산되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절대 팩트가 아니며, 역사적 사실은 대전역 안의 화차 10량에 적재되어 있던 탄약 등 보급품의 후방 이송 작전이었는데 그 동안 이 작전이 국내에서만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와전되어 한국철도공사를 통해 광범위하게 잘못 알려진 것으로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 등의 과거 자료부터 현재 기밀해제되어 발굴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 (G2) 보고서 등 최신 자료까지 모든 미군 측 대전 전투 공식 전사(戰史) 및 기록에서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덧붙여 이 '보급품 후송 작전'은 도쿄 미 극동사령부의 7월 21일자(일본 시각) 전황 브리핑에서도 언급되었으며, AP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어 'Journal-Every Evening', 'Spokane Daily Chronicl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7월 20일자(미국 시각)로 보도되었다.
  • 'Journal-Every Evening' 1950년 7월 20일자 기사 원문 발췌
"A locomotive crew trying to take a late haul of supplies from Taejon was ambushed en route to the station."

또한 대한민국 국군 측 역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536)의 대전 전투 연구 항목에서 국내와 미국 측 자료를 통해 작전 목적을 비교 분석한 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모두 이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의 구출에 있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와전이라고 못 박았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61–162, 주석 p. 217)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단락으로 기술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특히 국방부 소속 전쟁기념관에서는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pp. 118–123)에서 기밀해제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 보고서를 국내 최초로 입수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이론의 여지없이 입증하여 기술하였고, 작전 목적의 오해에 대해 각주를 통해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4]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각주 발췌
"당시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부여된 임무를 두고 거듭되는 오해를 별기한다. 당시 승무원인 현재영·황남호의 수기 증언을 비롯해 국내의 각종 문헌과 현양 행사에서는 당시의 철도 수송 임무를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대전 철수작전 당시 작성된 미 제24사단 정보처 보고서와 미 육군,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에서 각각 발행된 공간사, 딘 소장의 회고록 등에 따르면 이들의 임무는 대전역에 적재된 보급품을 영동역으로 철수시키는 것으로 딘 소장의 구조와는 무관한 임무였다.[24th Infantry Division G-2 Journal, Vol. 8, For the Period 191700K July to 221550K July 50 ; Appleman, Roy E.,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 ,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1992), 169쪽; Dean,William F. and Worden, William L., General Dean’s Story , the Viking Press(1954), 3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4: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2008, 161∼162쪽]"

부연하자면 딘 소장이 7월 20일 16시경에 대전역에 있던 탄약 등 보급품이 적재된 화차 10량의 후방 이송 명령을 영동에 위치한 사단 지휘소에 하달하였고 이 명령에 따라 김재현 기관사와 부기관사에 해당하는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운전을 맡고 30명의 미군 특공대원이 아닌 6명의 미 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소속 미군 6명이 호송병으로 탑승한 채 7월 20일 16시 20~30분경에 기관차가 이원역을 출발하여 대전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전역 도착 전 북한군에 공격을 받아 손상된 탄수차로 인해 화차 10량을 견인할 수 있는 동력이 부족하여 '보급품 후송 작전'에 실패하고 복귀하는 도중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하고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부상을 당하였다. 결국 후송에 실패한 대전역보급품 적재 화차들은 7월 21일 08시에 미 공군이 폭격으로 파괴하여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았다.

그 후 딘 소장은 7월 20일 18시부터 대전에 잔류하던 미 제24보병사단 34연대 병력들과 함께 차량 대열로 부대 건제를 유지한 채 대전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철수 대열이 옥천가도에 들어선 이후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당해 차단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도보로 후퇴하던 중 낙오하여 홀로 본대를 찾아 대구로 남하하다 약 한 달 후인 8월 25일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다.


[1] 이후 이 전차들은 대전시청의 34연대 지휘소를 공격하기도 했다.[2] 이후 딘 사단장은 역시 낙오된 19연대 2대대 소속스탠리 E. 테이버(Stanley E. Tabor) 중위를 만나 본대를 찾아가는 도중 북한군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헤어졌고 홀로 본대를 찾아가다 결국 무주, 진안 부근에서 한두규의 밀고로 붙잡혀 휴전 때까지 포로 생활을 했다.[3] 6.25 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한국 전개는 제1임시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4]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과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에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이 아닌 '보급품 후송' 그리고 기관차에 탑승한 미군을 '결사대원'이 아닌 '호송병'으로 정확히 기술하였지만,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작전 목적과 호송병을 '결사대원'으로 오해한 점 이외에는 진실로 추정하여 호송병 30명이 탑승하여 29명이 전사했다고 기술한 부분은 향후 개정판에서 총원 6명에 전사자 없음으로 정정해야 할 팩트 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