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철수 平壤撤收 Evacuation of Pyongyang | ||
6.25 전쟁의 일부 | ||
[1] | ||
날짜 | ||
1950년 12월 3일[2] ~ 12월 4일[3] | ||
장소 | ||
평양시 | ||
이유 | ||
유엔군의 청천강 전투 패배, 중공군의 한반도 진공 | ||
교전국 | 대한민국 유엔군사령부 | 중국 |
지휘관 | 백선엽 유재흥 더글러스 맥아더 월튼 워커 | 마오쩌둥 펑더화이 한시안추 |
결과 | ||
중공군의 평양 진입과 북한의 평양 탈환 | ||
영향 | ||
한국군과 유엔군의 대동강 이북 지역 통제권 완전 상실 | ||
병력 및 피해규모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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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했던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잇따른 패전으로 전세가 불리해 짐에 따라 평양을 다시 내주면서 38선까지 대대적으로 후퇴한 사건이다.2. 10월 19일, 한국군과 유엔군의 탈환
2.1. 10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방문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5만 명의 평양 주민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단군의 후예요,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2.2. 평양 점령 중 통치
평양 탈환작전 이후 평양시는 역사적 정통성과 대한민국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이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유엔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 평양을 실효지배를 한 적이 없고 한국군 역시 유엔군 소속이므로 대한민국이 단독으로 통치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에 한국군과 유엔군 사이에 평양의 통치권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 결국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통치권은 38선 이북인 평양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유엔이 10월 21일 평양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유엔군이 평양을 통치하였다.유엔군 점령하의 평양의 광경을 묘사한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
3. 중국의 개입
동부전선에서는 11월 27일 미 해병대가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어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이어 대동강 이북의 한국군 제1사단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다.
3.1. 12월 4일, 철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유엔군 |
평양에서 철수하는 한국군 |
3.2. 12월 6일, 중공군 진입
△평양에 들어온 중공군 |
4. 평가
기사[1] 평양 철수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한강에서 찍혔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평양 철수일인 1950년 12월 4일에 대동강에서 찍힌 사진이다. AP통신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Max Desfor)는 이 사진으로 1951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2] 유엔군이 평양을 철수하기 시작한 날짜[3] 국군이 맨 마지막으로 평양을 철수한 날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