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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Kapyong
La bataille de Kapyong
加平戰鬪(정자)
1. 개요
가평 전투는 6.25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4월 영연방군 제27보병여단이 경기도 가평군에서 중공군 5차 공세의 조공 임무를 맡은 중국 인민지원군 제40군 예하 제118사단의 공격을 저지한 전투다.참고로 1951년 5월에도 가평에서 미군이 중공군과 격전을 치렀는데 이 전투는 기적의 가평 전투라고 불리운다.
2. 배경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저지한 후 주도권을 되찾은 유엔군은 곧장 반격을 실시하여 전선을 철원 - 김화 -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 코 앞까지 밀어올렸다. 전황이 중공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와중에 미군 2개 사단의 일본 전개 첩보까지 들어오자 펑더화이를 비롯한 중공군 수뇌부는 유엔군이 평안남도 진남포에 상륙하여 인천 상륙 작전과 유사한 결정적인 역공세를 벌일 의도라고 판단하고 대응 방책을 모색했다.[1] 펑더화이가 내린 결론은 "상륙 전에 먼저 강력한 공세를 실시, 서부전선의 유엔군 주력을 섬멸하여 상륙작전을 예방하고 주도권을 탈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것이 바로 1951년 중공군 춘계공세(중공군 5차 전역)다. 특히 중국측 1차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근의 한국전쟁사 연구 저작들에 따르면, 중공군 5차 전역 1단계, 즉 "4월 공세"는 중국군 공간사의 서술과 달리 단순히 상륙작전 예방과 주도권 탈취만이 목표가 아니라 서부전선의 미 1군단을 포위섬멸하고 서울을 점령하여 전쟁을 공산군의 군사적 승리로 종결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이를 위해 증원부대 투입 스케줄을 급하게 당겨서까지 6개 군을 추가로 확보한 중공군은 4월 22일 야간부터 전면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중공군 제19병단 및 북한군 제1군단, 도합 4개 군단 규모로 구성된 주공부대가 투입된 방향은 전선 서쪽 끝 파주의 한국군 제1보병사단과 영국군 제29보병여단 정면이었다. 이들은 조기에 의정부를 탈취하여 제3병단이 정면공격하는 미 육군 제1군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분할섬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동시에 화천 사창리 일대의 한국 육군 제6보병사단 역시 전면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곳을 맡은 중공군 제13병단은 미 1군단과 미 9군단 사이의 간격을 파고들어 무동리 - 가평 일대까지 진출한 다음 서쪽으로 선회, 미 24사단과 미 25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는 조공 임무를 맡은 부대였다.
수적으로 1:8 이상 열세한 상황에서도 맹렬하게 저항하며 중공군 주공을 저지한 파평산 전투와 설마리 전투의 1사단/영 29여단과 달리 사창리 전투의 6사단은 고작 2개 사단[2]에게 공격받았음에도 몇 시간만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6사단의 급격한 붕괴로 미 1군단과 미 9군단의 사이에는 가평천 계곡으로 향하는 수 킬로미터의 간격이 뻥 뚫려버렸다. 완전히 통제를 상실하고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6사단에게는 더이상 전투력 발휘를 기대할 수 없었다. [3]미 2개 군단의 측방이 노출되고 퇴로 차단 위협이 가시화되는 등 중서부전선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 9군단장 윌리엄 M. 호그(William Morris Hoge) 소장은 4월 23일 아침 군단 예비 영연방군 제27보병여단을 가평읍 북방의 고지군에 투입하여 중공군의 돌파를 막아내기로 결심했다.
영연방군 제27보병여단은 호주 육군의 왕립호주연대 3대대(3rd Battalion, Royal Austrailian Regiment; 이하 호주 대대), 캐나다 육군의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 연대 2대대(2nd Battalion, 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이하 캐나다 대대)[4], 영국 육군의 미들섹스 연대 1대대(1st Battalion, Middlesex Regiment; 이하 미들섹스 대대)의 3개 보병대대와 25파운더 야포 1개 대대 규모의 왕립 뉴질랜드 육군의 제16야전포병연대(16 Field Regiment, Royal New Zealand Artillery)로 구성된 부대로, 각 보병대대는 약 700명 전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단에는 여기 더해 미 육군 제72전차대대 A중대의 M4A3E8 셔먼 전차가 배속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뉴질랜드 포병연대는 6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전방으로 진출했다 패주에 휘말린 상태였고, 미들섹스 대대 역시 뉴질랜드 포병연대의 철수 엄호차 연대와 동행중이었기 때문에 명령 수령 시점에서 여단에 가용한 대대는 호주 대대와 캐나다 대대 둘에 불과했다.
23일 오후 가평군 북면에 도착한 호주 대대와 캐나다 대대는 가평천을 사이에 둔 504고지와 677고지를 점령하고 방어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겨우 몇 시간 사이에 어렵사리 중대 단위의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한 양 대대는 저녁 20시경 계곡을 따라 밀려내려오는 6사단의 대규모 패주 행렬을 목격했다. 캐나다 대대의 한 참전용사는 이 패주 행렬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후일 "자기 땅에서 적을 보고 도망치다니, 완전히 오합지졸들이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27여단에는 제대로 화를 낼 틈조차 없었다. 중공군 118사단이 달아나는 6사단을 바짝 뒤쫓아 남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전투 경과
3.1. 호주 대대의 504고지 방어
23일 밤 21시 30분 경 드디어 27여단을 향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여단 북동쪽 화악계곡을 타고 내려온 중공군 제354연대가 처음으로 노린 목표는 504고지 일대의 호주 대대 방어진지 북단 도로변에 전초로 배치된 미 전차소대였다. 소대는 가볍게 첫 공격을 격퇴했지만 한 시간 뒤 이어진 두 번째 공격에서 소대장을 포함해 전차장 두 명을 잃었고, 호주 대대 B중대 방어진지 남쪽에 위치한 중대본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긴박한 순간 희소식이 도착했다. 2300시부터 뉴질랜드 포병연대와 미들섹스 대대가 여단에 합류해 화력지원과 예비대 임무 수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27여단은 전 전투력을 동원해 싸울 수 있었다.
거의 동시에 전차소대를 밀어낸 중공군이 기세를 타고 호주 대대의 전방 2개 중대, 즉 A, B중대로 밀어닥쳤다. 중대별 방어진지 간격으로 침투한 중공군은 타 중대와 떨어져 홀로 화악천 옆의 야트막한 고지를 방어하던 B중대를 포위한 뒤 23-24일 야간 동안 4차례의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모조리 실패했다. 유일하게 위기라고 할 만한 상황은 24일 새벽 03시 30분 경 두 번째 돌격에서 일시적으로 6소대의 진지가 돌파당했을 때 뿐이었지만, 호주 대대의 4개 중대 중 유일하게 전차소대를 배속받은 B중대는 즉각 전차의 지원 아래 단호한 역습을 실시하여 원 진지를 회복했다. B중대의 손실은 극히 경미했다.
반면 504고지 북쪽 사면에 위치한 A중대는 혈투를 치렀다. 3면에서 집중공격을 받는 와중에 가장 낮은 지점에 배치된 1소대가 소대원의 절반을 잃고 중대본부로 후퇴했고, 방어진지 사이의 간격으로 침투한 중공군이 잘 엄폐된 위치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사격을 퍼부어대면서 1소대와 3소대에 사상자가 속출했다. 설상가상으로 가평천 바로 건너편 호주 대대 본부와 뉴질랜드 포병연대의 진지로 침투하는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포착되자 24일 03 시경 뉴질랜드 포병연대가 6km 가량 남쪽 가평읍에 자리잡은 27여단 사령부 근처로 물러나면서 일시적으로 화력지원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A중대는 악전고투 끝에 0430시에 벌어진 중공군의 마지막 돌격을 저지해낸 뒤 날이 밝은 0700시에는 역습을 가해 1소대의 진지를 되찾았다. 중공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A중대의 희생도 컸다. 중대원 가운데 절반 가까운 50여명이 사상자 명단에 올랐다.
철수하는 6사단 병력을 통제하기 위해 예하 중대와 떨어져 가평천 건너편에 배치된 호주 대대 대대본부와 본부중대 역시 24일 새벽 한국군 사이에 섞여 침투한 중공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대대본부를 방어하던 기관총반과 전투공병소대가 상당한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대로 밀려나자 대대장 브루스 퍼거슨(Bruce Ferguson) 중령은 여단에 증원을 요청했으나 명령을 받고 출동한 미들섹스 대대의 1개 중대는 중간에 멋대로 대대로 돌아가 버렸고, 결국 퍼거슨 중령은 대대본부의 철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통 부재로 인한 약간의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대본부는 05시경 미들섹스 대대 진지로 이동을 시작해 0600시경 철수를 완료했지만 방어선을 고수하는 데 성공한 본부중대는 어느새 증발해버린 대대본부를 찾아 헤메다가 본부에서 달려온 지프 전령에게서 소식을 듣고서야 남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가평천 동쪽의 예하 중대들에는 아예 철수 사실이 전파가 되지 않아 A중대장 벤 오다우드(Ben O'Dowd) 소령은 날이 밝은 후 대대본부와 본부중대가 갑자기 사라진 걸 깨닫고 깜짝 놀라는 촌극이 벌어졌다.
24일 아침 날이 밝아오는 것과 함께 진지변환을 완료한 뉴질랜드 포병연대의 화력지원이 재개되고, 전차와 박격포, 중기관총 등 대대에 예배속된 화력 역시 훨씬 효율적인 운용이 가능해지면서 상황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07시 15분 경 화악천변에 따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어서 고립될 우려가 있던 B중대가 포병 및 전차의 엄호 아래 504고지로 이동, 호주 대대는 대대 일선 병력 모두가 집중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단과 대대가 손발이 안 맞는 장면이 연출된다.
오후 도착하기로 예정된 미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 병력을 활용한 역습에 화악천변의 도로를 감제하는 B중대의 이전 진지가 요긴하다고 생각한 27여단장 브라이언 아서 버크(Brian Arthur Burke) 준장이 이를 재탈취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기껏 504고지로 이동하자마자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삽질을 직접 벌여야 했던 B중대는 욕설을 삼키면서 명령을 이행했지만 이미 B중대의 진지는 대규모의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배속된 전차의 지원 아래서도 중대의 공격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상황을 재평가한 버크 준장이 5기병연대의 역습을 취소하자 B중대도 다시 504고지로 복귀한다.
B중대가 무의미하게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동안 중공군은 호주 대대 우측방의 D중대로 공격 목표를 변경했다. 0730시부터 계속된 공격은 뉴질랜드 포병연대의 화력지원으로 격퇴됐지만 12소대에 집중된 중공군의 반복 돌격에 부상자가 증가하고 탄약 부족이 심각해지자 D중대장 놈 그레이브너(Norm Gravener) 대위는 1330시경 12소대를 철수시켜 중대 진지를 좀 더 조밀하게 조정했다. 5기병연대 예하 2개 대대도 예정대로 오후 즈음 가평 일대에 도달하여 1개 대대는 677고지의 캐나대 대대 남서쪽에서 여단의 좌측방에 배치됐고, 다른 한 개 대대는 미들섹스 대대 오른편 가평천 건너편에서 여단 사령부의 측면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전체적인 상황을 검토한 여단은 호주 대대의 철수를 결정했다. 대대는 504고지를 잘 사수하고 있었지만 504고지와 677고지 사이의 배치 간격으로 인해 재보급과 부상자 후송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다가, 홀로 가평천 동쪽에 위치한 탓에 포위당할 위험이 큰 것이 문제였다. 명령을 받은 오다우드 소령은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1600시부터 전차와 포병의 엄호 아래 남서쪽 능선을 따라 B중대, C중대, A중대, D중대 순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후위의 D중대가 재차 중공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긴 했으나 격전 끝에 격퇴한 후 접적을 단절, 2330시경 미들섹스 대대 진지를 통과함으로써 대대의 철수작전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3.2. 캐나다 대대의 677고지 방어
한편 제임스 R. 스톤 중령이 이끄는 캐나다 대대는 677고지를 점령하고 중화기를 실은 M3 하프트랙이 올라올 수 있도록 고지 뒷편 경사로를 확장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뒤 23일 밤을 보냈다. 그러나 24일 아침 호주 대대의 504고지 상황이 악화되고 667고지 인근에서 중공군의 활동이 증가하자 빈스 릴리 소령이 이끄는 B중대를 가평 계곡길을 감제할 수 있는 대대본부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계곡길을 따라 내려온 중공군이 대대 후방으로 우회, 677고지를 포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24일 저녁 504고지의 호주 대대의 철수가 시작되자 캐나다 대대 B중대는 호주군을 중기관총 사격으로 엄호하여 무사 철수를 도왔다. 그러나 504고지 포기로 677고지에 홀로 돌출된 캐나다 대대는 이날 밤 중공군 118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가장 먼저 표적이 된 것은 대대 우측방의 B중대였다. 504고지에서 죽둔리를 통해 가평천을 도섭한 중공군 118사단 354연대는 2200시부터 B중대, 특히 6소대 방어진지에 연이어 돌격을 가해왔다. 중대는 빅커스 기관총과 60mm 박격포를 효과적으로 운용해 돌격을 저지했지만 6소대는 격전 끝에 탄약이 떨어지자 착검한 소총으로 백병전을 불사하여 중공군을 격퇴하고 중대본부 근처의 2차 방어진지로 물러났다.
대대본부 역시 B중대 진지를 남쪽으로 조용히 우회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미리 B중대의 경고를 받은 대대본부는 M2 브라우닝 중기관총과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을 탑재한 하프트랙을 중공군 접근 방향에 배치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은 상태였다. 지근거리에서 기관총 10정 이상의 기습적인 집중사격에 이어 박격포탄을 뒤집어쓴 적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가평 계곡길 일대에서 확인되는 중공군 활동으로 인해 보급로가 차단된 것을 제외하면 B중대와 대대본부는 큰 피해 없이 25일 아침까지 진지를 고수해냈다.
하지만 이날 밤 가장 격전을 치른 것은 대대 좌일선, 677고지 정상의 D중대였다. D중대는 25일 0200시부터 677고지 정북쪽에서 남하해 중대 좌측방 865고지로 우회한 중공군 대부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방어 포화를 뚫고 중대 진지 사이로 난입해 각 소대를 고립시켰다. 특히 중공군의 주공 방향에 위치한 10소대는 진지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10소대장 마이클 레비(Michael G. Levy) 중위는 최후의 수단으로 진내사격을 요청했다. 10소대원들이 개인호에 바짝 엎드린 사이 뉴질랜드 포병연대가 쏟아부은 25파운더 포탄이 10소대 진지 수 미터 위에서 연속 폭발하면서 밀집 상태로 고지에 노출된 중공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불의의 일격에 혼비백산한 중공군은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다시 10소대 진지를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진내사격을 뒤집어쓰고 격퇴됐다. 놀랍게도 세 차례에 걸쳐 진내사격을 요청하면서까지 진지를 사수해낸 10소대에는 진내사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없었고, 발생한 부상자도 중상자는 아니었다. 677고지는 사수됐다.
▲ 가평 전투 참전용사 에드워드 펜윅 주버(Edward Fenwick Zuber)의 Holding at Kapyong (1989). 25일 아침 677고지 정상에 투하되는 공중보급을 묘사한 기록화다.
여명과 함께 상황은 빠르게 호전됐다. 미들섹스 대대 진지에서 북상한 미 72전차대대 A중대의 2개 전차소대가 사격을 퍼부으며 접근하자 중공군의 공격은 사실상 중단됐고, 0400시경 급격한 탄약 소모를 확인한 대대장 스톤 중령이 긴급 요청한 공중보급 역시 1000시경 677고지 정상에 성공적으로 투하됐다. 1400시 즈음에는 미들섹스 대대 순찰대와 캐나다 대대 B중대의 순찰대가 가평 계곡길 일대 중공군의 철수를 확인하여 677고지로의 물자 공급이 재개된 데 이어 미 5기병연대가 504고지를 탈환하면서 서울 서측방의 위기는 끝났다. 영연방 27여단은 성공리에 임무를 완수했다.
4. 결과
영연방군 27여단은 국군 6사단의 패주로 발생한 돌파구를 봉쇄하고 중공군 118사단의 남진을 막아세움으로써 중공군 4월 공세 저지에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중공군 118사단이 북한강을 따라 전진을 계속했다면 서울 서측방이 그대로 노출되었을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에서 27여단의 사흘에 걸친 분투 덕분에 중공군 40군의 조공은 전선 분할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립호주연대 3대대와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2대대, 그리고 미 72전차대대 A중대는 미합중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했다. 여단의 방어전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뉴질랜드 제16왕립포병연대 역시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왕립호주연대 3대대는 지금도 매년 5월 24일이 되면 가평 전투를 기념하며, "가평로"로 명명된 대대 앞 길을 비롯해 호주에 존재하는 약 10여곳의 가평로 혹은 가평길은 바로 가평 전투에서 이름을 따와 명명된 것이다.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2대대 역시 부대 주둔지를 "가평 병영(Kapyong Barrack)"으로 이름지어 부대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