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bataille de Crèvecœur
De slag om Heartbreak Ridge
Battle of Heartbreak Ridge
1. 개요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미 2사단과 배속된 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대대가 강원도 양구군 피의 능선 북쪽에 있는 단장의 능선(894-931-851 고지군)을 점령하기 위해 북한군 6사단을 상대로 펼친 고지전.2. 전투 전 상황
1951년 8월, 유엔군은 장마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던 공격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공산군은 펀치볼(해안분지) 남쪽을 제외한 모든 곳을 점령한 상태에서 감제된 국군과 UN군, 8월 14일, 미 8군 사령관은 국군 1군단 및 미 10군단의 합동 작전인 포복 작전(Operation Creeper)[1]을 하달했고, 이에 미 10군단장은 16일 국군 5사단에게 가칠봉 일대를, 미 2사단은 단장의 능선을, 그리고 국군 7사단에겐 883고지-901고지[2]를 공격하도록 명령한다.9월 5일, 격전 끝에 유엔군이 단장의 능선의 남쪽 능선인 피의 능선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고[3], 피의 능선 북쪽에 위치한 단장의 능선이 다음 목표로 지정되었다. 피의 능선에서 철수한 공산군은 단장의 능선으로 후퇴, 그곳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는데, 단장의 능선의 방어진지는 피의 능선의 그것보다 더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피의 능선이 끝난 직후 유엔군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공산군은 단장의 능선 일대의 방어를 대폭 강화했다.
3. 전투 경과
파일:허트브레이커리~찡4o4.png이미지 및 자료 출처
9월 5일 피의 능선 전투가 끝나자 그 북쪽의 단장의 능선이 다음 목표로 지정되었다.
9월 13일 미군의 항공기, 전차, 포병들이 단장의 능선을 수시간동안 두들겼고, 이후 미 2사단 장병들이 능선 위로 기어올라간다. 하지만 그곳을 사수중인 북한군 6사단이 곳곳에 방공호 갱도를 구축해놓고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서 고지 주인이 2주간 서너번이나 바뀔 정도로 점령이 쉽지 않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저항하는 북한군을 몰살하려 했지만 이미 곳곳에 갱도들을 구축해 놓고 버티고 있는 상태라 미군은 1,67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쩔쩔맸고, 이에 종군기자들은 심장이 부숴지는 것 같다는 의미로 이 능선에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9월 18일 미 10군단장 클로비스 E. 바이어스 소장은 적들의 저항이 거세자 서쪽 백석산 전선에서 (전투 가능 인원이 70% 이하로 떨어져 기준상) 전투불능(Combat Ineffective) 상태인 국군 7사단에게 교대준비를 미루고 우선 백석산(1142 고지) 공격을 명령해 적 전력의 분산을 꾀했다.
9월 27일 새로 부임한 로버트 N. 영 사단장은 북한군의 보급을 계속 허용하면 능선 점령이 힘들어질 것이라 판단, 그 주변부터 점령해 고립시킨다는 터치다운 계획을 세우고 M4 셔먼 전차들로 구성된 미 72전차대대를 능선 서쪽 문등리로 투입하기로 한다. 하지만 문등리로 나 있는 작은 길은 셔먼 전차가 통과하기엔 협소했고, 대전차 지뢰들과 2미터가 넘는 바위들로 이루어진 대전차 장애물까지 굴러내려와 있어 통행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청천강 전투 때에도 전차들을 좁은 길목에 몰아넣었다가 잃은 사례도 있었기에 공병대를 투입해 길을 신중하게 개척하기로 했다.
이에 공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삽과 폭발물로 지뢰와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폭이 좁은 곳들은 전차가 지나갈 수 있게 넓혔다. 한편 인근 사태리도 전차, 수색, 공병대로 이루어진 스토맨 기동부대가 점령해 단장의 능선 점령을 위한 밑작업을 끝마친다.
이윽고 10월 10일 미 72전차대대 셔면 68대가 문등리로 들이닥치는걸 시작으로 사단의 총 공세가 시작되었다. 한편 문등리로 들이닥친 전차 대대 일부는 그 북쪽 하심포 들판까지 정찰을 나갔고, 이 과정에서 북한 13사단과 임무교대하기 위해 남하중인 중공 68군 204사단 병력들을 발견하고 전차포와 기관총으로 상당수를 살상한다. 한편 나머지 전차들은 문등리 후방에서 능선 경사면마다 조성된 진지나 보급소 등을 보이는 족족 파괴하며 보병들을 도왔고, 이후 10월 13일 프랑스 대대원들이 능선의 마지막 진지를 점령함으로서 끝났다.
4. 전투서열
4.1. 유엔군
4.2. 공산군
- 제3군단(북)
- 제6사단
- 제12사단
- 제13사단
- 제68군(중)
- 제204사단
5. 여담
- 터치다운 작전 동안 전차들이 쏜 포탄은 6만여발에 달했으며, 단일작전 중 이 정도로 많이 쏜 전례는 없었다고 한다.
- 또한 이 작은 능선 하나 점령하겠다고 3,7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미군은 앞으로는 이런 피로스의 승리 같은 전투는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휴전 때까지 사단급 이상 공세는 하지 않기로 한다.
- 전투가 끝난 이후 10월 21일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1기가 사태리와 문등리 일대를 맡게 되었으며, 이 와중에 적들의 소대급 이하 정찰대들과 수차례 교전을 벌이며 51년 12월 말까지 일대를 사수했으나, 교전 및 한국의 혹독한 기후로 생겨난 손실이 다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