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경기도 이담면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북한군은 서울을 조기 점령하기 위해 동두천·포천에서 의정부로 이어지는 경로에 병력을 집중시켰는데, 북한군 제1군단 제3사단이 운천-포천 방면을, 제4사단이 연천-동두천 방면을 맡았다.한편 이 당시 일대의 38선 경비는 (구)수도사단, 지금의 제7보병사단이 맡고 있었는데, 서쪽 동두천은 제1연대가, 동쪽의 포천 방면은 제9연대가 담당하고 3연대는 예비대로 이들의 후방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단예비인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대신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중인 제2사단 제25연대가 배속되어 6월 15일까지 의정부로 이동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제25연대는 병영 문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도 오지 못한 채 경상도 빨치산이나 소탕하고 있었고, 그렇게 제7사단은 예비연대가 없는 상태와 주말 외출·외박으로 인해 4,500여 명만이 부대에 잔류한 채 6·25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2. 배경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추가령 구조곡은 고대로부터 경기지역과 함경지역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는 31번 국도가 통과하는 철령이 지금의 함경도 방면으로 가는 중요 통로였고 철령관(鐵嶺關)이라는 요새가 설치될 정도였으며 그 흔적으로 남은 것이 서울에서 평강까지는 3번 국도로 연결되다가 평강부터 원산까지는 5번 국도로 연결되는 것이다.추가령 구조곡이 중요한 통로로 부상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경원선을 건설한 후부터다. 철도를 놓기 위해서는 평탄한 지형이 필요한데 기존의 철령을 통과하는 통로는 반드시 높은 고개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부터 금강산선이 분기되는 지역인 철원읍은 중요한 교통 거점으로 급성장하였다.
일본 제국이 패망히고 삼팔선이 만들어지자 미군정 시절에 주한미군이 경비 및 보급과 수송을 위해서 3번 국도와 경원선을 보수했기 때문에 해당 방면의 통로가 넓고 크며 오고 가는 것이 편리하게 변경되었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서울을 북쪽에서 침공하는 주요 경로는 개성과 문산을 경유하는 경의선 방면이었고 동두천이나 포천을 거쳐서 의정부 방면을 통해 침공하는 경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대한민국 정부가 해당 지역의 위험성을 알아챈 것은 제7보병사단을 해당 지역에 배치하는 1949년 6월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3. 지형
제7보병사단 담당지역 전투개관 |
삼팔선중에서 제7보병사단이 담당한 구역은 적성에서 초성리를 거쳐서 사직리에 이르는 47km의 구간이었다. 삼팔선을 담당한 다른 사단에 비해서는 담당구역이 짧지만 방어에 유리한 것은 딱 그거 하나뿐이고 나머지가 모두 불리해서 종합적으로 본다면 방어하기에는 답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우선 방어해야 할 통로가 너무 많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동두천에서 의정부로 가는 3번 국도와 포천에서 의정부로 가는 43번 국도지만 그 외에도 포천 동쪽으로 돌아가는 루트인 일동에서 서파를 거쳐서 퇴계원을 지나서 서울로 가는 47번 국도가 존재하여 7사단이 담당해서 막아야 할 통로가 3개다. 그리고 전투지경선과 관련하여 서쪽으로는 한국군 제1사단이 담당하는 고랑포 방면으로 돌파하는 식으로 우회한 후 375번 지방도같은 샛길로 동두천과 후방으로 가는 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화천 방면에서 5번 국도를 타고 남하하다가 춘천으로 가지 않고 지암계곡 방면으로 우회하여 산을 타고 391번 지방도에 진입하여 가평을 함락시킨 후 46번 국도를 타고 서울 동쪽으로 진격하는 길이 존재하므로 사실상 중요 통로만 5개를 막아야 한다.
지형도 방어면에서 불리했다. 담당구역에 있는 산맥인 천보산맥과 광주산맥은 모두 북에서 남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북쪽에서 침공하는 적을 막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동두천 방면과 포천 방면간의 수평적 연결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그래서 동두천 방면과 포천 방면이 서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각자 방어하는 사태에 빠지게 된다.
하천을 이용하는 방어도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특히 동서방향으로 흐르는 하천이 거의 없다시피하고 가장 방어선으로 쓸만한 한탄강은 삼팔선 이북에 있으므로 북한군은 전투 시작부터 이미 강을 건넌 상태에서 전투를 시작할 수 있으므로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여기서 양쪽에 산맥이 있는 계곡에 있는 통로로 진격하는 북한군을 근처 고지에서 협격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추가령 구조곡이나 근처의 계곡이 동두천이나 포천쯤 가면 폭이 넓어지므로 쉽게 차단하기 힘든데다가 북한군이 대량의 전차를 투입했으므로 통로를 막는게 불가능했다. 잘 해봐야 통로에 있는 실개천을 건너는 교량을 파괴해서 일시적으로 전진을 멈추게 하는 것 뿐인데 이런 장애는 순식간에 극복이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통로 양쪽 고지에 배치된 병력은 오히려 고립당하게 되고 제대로 후퇴할 통로가 없으므로 분산철수라고 읽고 실제로는 병력이 흩어지게 된다. 고지를 거점으로 해서 적에게 견제사격을 날리면서 방어하려고 해도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무기중에 장거리를 커버 가능한 화기가 없다시피했고 그나마 있는 M3 105mm 경곡사포는 유효사정거리가 6,525m로 짧으며 개전 당시 한국군에 고작 91문만 존재해서 육군본부 직속의 별도의 포병대대가 운용했고 다른 전선에서의 요구도 빗발치므로 이런 임무에 사용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의 한반도 삼림은 극심한 추위를 막기 위해 온돌을 사용하는 난방을 하느라고 나무를 남벌하여 민둥산이 된 곳이 많기 때문에 동두천이나 포천 근방의 야산같은 곳에서 버티다가는 순식간에 잘 관측당한 후 북한군의 포격이나 뒤집어쓰고 병력손실만 크게 입게 된다.
교통 측면에서도 철도와 도로의 요충지인 철원과 연천이 모두 북한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은 동두천 방면과 포천 방면에 모두 충분한 보급을 진행하면서 주력을 배치해서 동시에 밀어붙일 수 있었으나 한국의 경우에는 동두천과 포천간 연락이 빈약하고 모든 연락과 보급은 의정부를 통과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의정부는 의정부회랑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폭이 넓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북한군의 전차나 장갑차가 도로를 벗어나서 좌우로 넓게 퍼진 상태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여기까지 북한군이 침공하면 방어가 불가능해진다. 여기에 더해서 앞서 언급했듯이 전투지경선을 넘어서 우회하여 동두천과 포천의 후방을 습격하거나 서울로 진격하는 루트도 열려있기 때문에 진짜 답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쟁이 터지기 전의 계획대로 3개 방어선을 만들어놓고 방어전에 임하게 되었으나 개전 첫날에 2개 방어선이 돌파당하게 된다.
4. 준비
북한군과 한국군 모두 준비를 진행했으나 수준은 북한군이 압도적이었다.4.1. 북한군
폭풍 작전을 구상하는 단계부터 큰 강을 도하할 필요가 없고 기갑전력을 쉽게 통과시킬 통로와 약간이라도 분산해서 넓게 퍼져서 진격 가능한 의정부 회랑이 있으며 경원선과 국도등 교통상황도 편리한 동두천 - 포천 방면에 북한군의 주공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다.그 결과 북한군이 동두천과 포천 방면에 집결시킨 전력은 2개 보병사단과 2개의 강화된 전차연대 및 2개의 군단 포병대대였다. 2개 보병사단은 북한군 제3사단과 북한군 제4사단으로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1만 2천명의 정예부대로 구성되었으며 북한군 제3사단은 포천 방면을 담닫하고 북한군 제4사단은 동두천 방면을 담당했다.
기갑전력의 경우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의 주력을 투입했다. 동두천 방면에는 제203전차연대 제3대대를 투입하고 포천 방면에는 제107전차연대와 제109전차연대를 투입했다. 투입한 병력은 4천명이고 전차는 주로 T-34-85이며 수량은 93대로 개전 당시 북한군이 침공한 전선중 가장 많은 수량의 전차를 일시에 투입하였다.
포병의 경우에는 4개 보병사단에 속한 포병연대 4개와 제105전차여단 직속부대 및 2개 군단 포병대대를 합쳐서 각종 화포 658문을 투입했다.포병의 경우에는 후방의 제2제대에 속한 북한군 제13사단과 북한군 제15사단의 포병까지 끌어와서 개전 당시에 모조리 투입하였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북한군 제3사단과 북한군 제4사단은 정예사단으로 122mm 곡사포 12문, 76mm 자주포 16문, 76mm 곡사포 36문, 45mm 대전차포 48문, 120mm 박격포 18문, 82mm 박격포 81문으로 구성된 총 211문의 화포를 동원하여 2개 사단 합계 422문을 동원했고 제2제대인 북한군 제13사단과 북한군 제15사단은 전력이 약했지만 그래도 122mm 곡사포 12문, 76mm 자주포 16문, 76mm 곡사포 36문, 45mm 대전차포 12문, 120mm 박격포 18문으로 구성된 총 94문의 화포를 동원해서 2개 사단 합계 188문을 동원했다. 그 외에 군단포병인 북한군 제17포병연대는 122mm 평사포 16문과 122mm 곡사포 8문으로 구성된 총 24문의 화포를 동원하였고 제105전차여단은 76mm 곡사포 12문, 45mm 대전차포 12문으로 구성된 총 24문의 화포를 동원했다. 이는 당시 북한군이 동원가능한 화력의 33%를 집결시킨 것이다.
이렇게 화력과 기갑전력을 끌어모은 이유는 동두천과 포천방면에 동시에 강력한 타격을 가해서 돌파를 한 후 개전 2일차에 서울을 직접 공격하기 위함이었으며 1950년 6월 19일부터 북한군 제3사단이 서서히 배치되기 시작해서 북한군 제4사단이 1950년 6월 21일에 배치를 시작하여 1950년 6월 22일에 북한군 총참모부의 명령에 따라 모든 부대가 1950년 6월 23일에 전투배치를 완료하고 침공준비를 완료했다. 집결한 병력은 총 2만 8천명이었다.
4.2. 한국군
동두천과 포천 방면을 방어하는 부대는 제7보병사단이었다. 제7보병사단은 제1연대를 적성에서 초성리까지의 동두천 방면을 방어하게 했고 추동리부터 사직리까지의 포천 방면 및 우회도로는 제9연대가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병력부족으로 인해 초성리와 추동리 사이의 광주산맥 중심부와 양문리에서 사직리 사이의 천보산맥 중심부에는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지 못했으며 특히 일동과 사직리 방면에는 경계병력 수준의 병력만 존재했고 전투지경선인 적성일대에도 병력이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딱 동두천 방면과 포천 방면만 방어선이 존재한 것이다.1950년 5월에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로 확정한 제7사단의 방어계획은 육군본부의 방어계획에 바탕을 둔 지역고수 개념이었다. 제1방어선은 삼팔선 근방의 전술적 요충지를 연결한 선으로 해당 지역에 소대단위의 거점을 설치하고 북한군의 접근을 조기에 경고하며 지연전투를 벌이고 북한군이 깊숙히 침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북한군의 상황을 몰래 파악하거나 주민들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것도 담당한다.
제2방어선은 주저항선으로 감악산 - 마차산 - 소요산 - 가랑산 - 천주산을 연결하는 방어선이다. 여기에는 대대단위 거점을 설치하며 모든 교량을 파괴하고 도로대화구를 파놓으며 각종 장애물을 설치해서 방어할 계획을 세웠으며 주저항선이 돌파당할 것 같으면 역습을 해서라도 탈환하기로 했다. 하지만 교량 파괴 및 도로대화구 폭파나 장애물 설치는 실제 교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제3방어선은 최후저항선으로 불국산에서 158고지를 거쳐서 축석령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이다. 반드시 방어해야 하는 마지막 방어선으로 해당 선을 방어하는 동안 후방에서 증원부대를 투입해서 대역습을 할 때 교두보로 삼는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준비가 불충분했다. 1950년 봄부터 대한청년단원이나 학생까지 동원해서 방어진지 건설에 나서서 일반적인 참호는 주진지와 경계진지에는 유개호와 교통호까지 마련했으나 자금과 자재 부족으로 인해 철조망이나 지뢰를 설치하지는 못했으며 특히 도로상의 방어물로는 만세교(萬歲橋) 남쪽 4km 지점에 철근 콘크리트제 토치카 1개를 대전차 방어용으로 만들어놓는게 고작이었다.
병력 배치상황의 경우에는 동두천 방면의 제1연대는 함준호 대령의 지휘하에 연대본부와 제1대대, 제3대대는 의정부에 위치하고 제2대대는 동두천에 위치했다. 포천방면의 제9연대는 윤춘근 중령의 지휘하에 연대본부와 제1대대, 제3대대는 의정부 동북쪽 4km 지점인 금오리에 집결했고 제2대대는 포천에 위치했다. 제7보병사단 사령부는 의정부에 있었다. 개전 당시에 제1연대는 직동에서 교육훈련중이었고 제9연대는 금호리에서 교육훈련중이었으며 유사시에는 두 연대 모두 연대의 주력은 주진지를 점령한 후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사단포병으로 배속된 제5포병대대는 상황을 보다가 지원이 필요한 곳으로 신속배치해서 지원한다는 계획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개전 당시 주요 지휘관과 병력의 이탈이 많았다. 일단 유재흥 준장이 사단장으로 1950년 6월 7일에 부임하여 아직 2주도 지나지 않아서 사단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1연대 제1대대장인 한태원 중령, 고급부관 최세인 소령, 정보참모 이세호 소령이 보병학교 고급군사훈련반에 입교해서 훈련중이었고 제1연대 제3대대장인 안민일 소령은 참모학교 입교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서 1950년 6월 11일 오후 4시 30분에 하달된 비상경계령이 6월 24일 새벽 0시부로 해제됨에 인해 농번기 휴가와 외출, 외박이 허용되어 다수의 병력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원래는 사단예비병력을 담당했던 제3연대가 1950년 6월 1일부로 육군본부 일반명령 제43호에 따라 수도경비사령부로 편입되면서 졸지에 제7보병사단은 완편병력이 9,698명이었으나 병력이 3개연대에서 2개연대로 축소되었으며 배속부대인 포병대대, 공병대대등을 합쳐도 병력이 6,788명으로 축소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0년 6월 15일에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79호로 제2사단에 소속된 제25연대를 제7보병사단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제25연대는 온양온천 근방에 원래 주둔지가 있었고 새로 배속된 주둔지인 의정부로 이동하려고 하니까 주둔예정지인 호원동 일대가 민간인이 소유한 사유지라서 토지 징발문제와 주거 문제와 식수 문제등 여러가지 걸림돌이 발생했다. 그래서 1950년 7월 15일로 연대 이동이 미루어졌으며 전쟁이 터진 이후 제25연대는 그냥 원래 소속인 제2사단에 머무르게 됨으로서 제7보병사단은 개전 직전까지 제대로 된 병력충원을 못받고 앞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사유로 근무지를 잠깐 벗어난 장병까지 있어서 개전당시 병력은 편제상 7,211명, 실제 병력은 4,500여명에 불과하였다.
장비면에서도 개전 직전에 제7보병사단이 보유한 중고차량이 모두 정비창이 있는 부평으로 입고되는 바람에 편제상에 비해 보유차량이 40%밖에 안남아서 유사시 주진지같은 곳에 병력을 빠르게 보내기가 곤란했다. 여기에 더해서 각종 중화기의 25%도 수리를 위해 정비창에 입고되었으므로 화력도 감소되었다. 안그래도 M3 105mm 경곡사포나 57mm M1 대전차포나 60mm M9A1 바주카의 위력이 별로 안좋은 판국에 수량까지 모자라니 화력면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결국 2개연대와 배속부대를 합친 병력으로 북한군의 2개 보병사단과 2개의 강화된 전차연대 및 2개의 군단 포병대대를 상대해야 했으며 북한군이 해당 지역에 곧 제2제대로 분류한 2개 보병사단을 추가 투입할 것까지 고려하면 4,500여명으로 북한군 선봉의 26,000명에다가 제2제대의 22,000명을 합친 48,000명을 상대해야 하므로 병력 차이만 1대 10.8에 이르렀고 화력과 기동력까지 합하면 답이 없을 정도로 전력차가 기울어졌다.
한국군에게 그나마 나은 점은 제7보병사단 소속의 제1연대와 제9연대가 정예병력이었다는 점이다. 개전 직전에 대대급 훈련을 완수한 16개 대대중 6개를 7사단 소속의 1연대와 9연대가 보유하고 있었고 1연대와 9연대는 전쟁 직전 기동훈련 및 연대 CPX, 대전차 훈련까지 어느 정도 마친 상태라서 삼팔선을 지키는 부대중에 가장 훈련도가 높고 정예화된 사단이었기 때문이다.예시
그리고 1950년 6월 24일 새벽 0시로 비상경계령이 해제되면서 삼팔선 경비의 2개 대대만 빼고 나머지 병력은 외출하거나 휴가를 갔고 영내에 남은 인원은 휴식상태에 돌입하고 당직근무자만 정상적으로 근무하였으나 비상대기중대는 정상적으로 가동하였다. 또한 제7보병사단 사단사령부 당직사령인 작전참모 이영규 중령은 제1선의 경계근무상태를 전화로 확인하는 등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첩보를 입수한 결과 북한군이 집결하고 있으며 특히 1950년 6월 23일 오후 9시에 제9연대장이 유정리 북쪽의 43번 국도상에서 30여대의 전차를 목격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제5포병대대는 야포를 견인할 M3 견인차를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대기시켜놓았으며 비상용 저장연료인 200드럼 분량의 연료도 즉시 사용가능하게 조치했고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임시배속중인 보국대대 제2줃대를 박창암 중위의 지휘하에 운천 지역으로 파견하여 북한군의 동향을 탐색하는 등의 행동을 실시했다.
5. 전개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 제4사단은 전곡에서 동두천에 이르는 국도 방면으로 제16연대를 투입하고, 파주 적성면 적암리(積岩里)에서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鳳岩里)에 이르는 도로에는 제18연대를 투입했다. 전차를 앞세워 두 갈래로 남하한 북한군은 공격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국군의 1차 방어선을 돌파했다.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제7사단은 감악산(675m)-마차산(588m)-소요산(587m)-천주산(424m)으로 이어지는 고지에 주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38선 경비를 담당하던 제1연대 제2대대 대대장 이의명은 북한군의 진격을 관측하고 연대장 함준호를 찾아가 적의 진격을 보고하였다. 제2대대는 소요산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제1대대는 마차산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제3대대는 봉암리 일대의 고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제1대대가 마차산의 방어진지에 투입되었을 때 북한군은 이미 이곳을 지나 봉암리 방면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요산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던 제2대대도 탄약 보급이 지연되면서 동두천으로 철수했다. 북한군은 전쟁을 일으킨 25일 밤에 곧바로 동두천에 진입했고, 국군 제1연대 제2대대는 시가전을 펼치다가 양주 덕정리로 철수했고, 이 무렵 동쪽 포천에서도 북한 3사단과 국군 9연대간의 포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포천에서도 북한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게 됨으로서 (동두천과 포천 밑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한 의정부 전투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