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21:55:32

김포반도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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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김포반도 전투
파일:3149_16908_3652.jpg
<colbgcolor=#536349> 시기 1950년 6월 26일 ~ 7월 3일
장소 김포 일대
교전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계인주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대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우병옥†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중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임충식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중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최영희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대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임무열 독립기갑연대 제1장갑수색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강문헌† 제3도보수색대대장 대위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박태운 제8연대 3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한순화 제12연대 2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이재일 제15연대 1대대장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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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장춘권 제18연대 2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안민일 제3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손영을 제22연대 3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방원철 육군 보국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장영문 육군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광정 육군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장 소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최복수† 육군 남산학교장 대리 중령
파일:북한 국기.svg 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파일:북한 국기.svg 한일래 제14연대장 대좌
병력
피해규모
결과 북한군의 김포 점령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지연전
북한군의 서울 점령 지연

1. 개요2. 배경3. 작전 계획4. 전투
4.1. 6월 25일4.2. 6월 26일4.3. 6월 27일4.4. 6월 28일4.5. 6월 29일(김포 비행장 탈환 작전)4.6. 6월 30일(오류동 전투)4.7. 7월 1일4.8. 7월 2일4.9. 7월 3일
4.9.1. 철수
5. 평가

[clearfix]

1. 개요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한강 하류인 김포반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김포지구 전투’라고도 한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분전으로 개성을 점령하고 남하한 북한군 제6사단의 진격을 지연시켜 국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2. 배경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럽게 남침을 시작해 개성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은 곧바로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로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남하하였다. 한강 하구의 김포 지역을 장악해 국군의 한강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영등포·인천·수원 방면으로 곧바로 나아갈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포 지역에는 개성 지역의 38선 경계를 맡고 있다가 먼저 한강을 건너 퇴각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의 일부 병력과 김포 비행장에 주둔하던 육군정보학교와 보병학교의 병력만이 있을 뿐이었다. 육군본부는 기갑연대 제1장갑수색대대의 병력을 김포 지역으로 증파하는 한편, 6월 26일 그곳에 있는 각 부대들을 통합해서 3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해 북한군의 진격을 막게 했다. 김포지구사 전력은 다음과 같다.
  • 김포경비사령부(사령관 : 남산학교장 계인주 보병대령(6.25~28), 우병옥 보병중령(6.28), 29일 임충식 보병중령(6.29), 최영희 보병대령(6.30~ )[1])
    • 남산학교 기간병력 : 남산학교(국군정보학교)의 대대급 기간병력으로 이뤄져 25일 김포로 파견.
    • 호국대대 : 탈북한 인민군 육군 출신들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빨치산 토벌에 투입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 육본에 자청해서 김포반도로 출전. 김포반도와 강화도의 대안에서 에서 도하하던 적군과 싸우던 중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인민군 육군 6사단과 격돌하여 부대가 흩어질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 제12연대 2대대: 25일 개성 함락 직후 후퇴로가 차단된 연안의 2대대는 배천에서 배타고 강화와 김포에 상륙, 개성에서 뒤늦게 후퇴한 3대대 병력들과 재편성하여 김포반도 북단에서 적 도하를 막았다.
    • 제8연대 3대대(대대장 : 박태운 보병소령):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부대로서 25일 파견.
  • 독립기갑연대(연대장 : 유흥수 기갑대령)
    • 제1장갑수색대대 제1중대: 육본 작전명령에 따라 김포반도로 파견. 도하를 시도하던 북한 단정을 M8 장갑차의 37mm 포로 격파, 적 도하를 1일 이상 미룸.
    • 제3도보수색대대(대대장 : 강문헌 보병대위, 본 전투에서 전사)
  • 제1공병단 : 당시 부천에 위치하였으며, 25일 육본의 명령에 따라 김포지구에 투입.
  • 제22연대 2대대 : 대구에 주둔하던 부대로서 27일 밤 영등포에 도착해 김포비행장 탈환작전에 참가했다가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

당시 김포비행장을 중심으로 육군 정보학교인 남산학교와 공병학교, 공군의 항공기지사령부와 공군사관학교 및 보급창과 공군 병원 등의 부대가 그 주위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보급기지인 부평에는 윤태인 중령이 이끄는 육군의 제1공병단과 김창배 소령이 이끄는 1기병대대 그리고 심언봉 대령이 이끄는 병기학교와 원태섭 대령이 이끄는 경리학교 및 이달고 소령이 이끄는 제1육군병원 등이 위치하고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체경계 능력조차 없는 교육기관이거나 지원 부대이므로 이들 부대로써 조직적인 지역방어란 기대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는데, 이 때문에 비행장으로부터 서북쪽 30km, 위도 상으로 의정부 - 봉일천선에 연하는 김포반도 북단지역에는 단 한사람의 경계 병력도 배치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공백 상태에 있었다

3. 작전 계획

당시 서부 전선의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육군본부가 38도선 방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고 있지 않았던 만큼 개성 정면에 대하여서는 적의 전면 공방시는 해 지역을 철수하여 문산 부근에 집결한 다음, 임진강 남안에서 적을 격위한다.는 자체방어 개념을 가지고 임진강선의 강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1사단은 김포반도가 분명히 사단의 후방지역이기는 하였으나 거기에 대한 방어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도 확실히 인지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개전 직후 사단의 계획과는 달리 6월 25일 낮에 문산으로 갈 시간을 얻지 못한 제12연대 2대대는 김포반도로 철수하게 되고, 3대대는 강화만을 헤매게 되고 말았는데, 그 결과 병력 대부분을 수용하지 못한 문산 방어선에서는 방어에 커다란 차질을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포반도에 상륙한 병력 역시 사전에 명확한 행동지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이에 육군 본부는 비로소 김포반도가 적의 주공로로서 개방되어있음을 깨닫고 김포 비행장 부근에 위치한 남산 학교를 기간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편하여, 김포일원의 각급부대를 통합, 김포반도로 상륙하는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6월 26일 아침, 남산학교장 계인주 대령이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써 김포방어의 책임을 맡게 되었는 다. 그는 즉시 학교의 명 참모를 동 사령부의 참모로 기능을 전환토록 하고, 지휘소를 김포읍의 김포경찰서로 추진하여 김포의 모든 육군부대를 통합지휘하게 되었는데, 이날 저녁까지 동 사령부의 장악하에 들게 된 부대는 다음과 같다.
  • 제12연대 2대대 일부(김포)
  • 독립기갑연대 일부(한남동)
  • 보국대대 일부(문래동)
  • 보병학교 후보생(시흥)
  • 공병학교 학생 일부(김포)
  • 남산학교 및 김포지구전투사령부

4. 전투

4.1. 6월 25일

이날 정오에 북한군의 야크기가 김포 비행장을 공습하여 연료고가 화염에 쌓이기도 하였는데, 이때 비행장 부근에 위치한 공군 사관학교와 항공기지 사령부 및 보급창과 헌병대등은 사관학교장 최용덕 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김포 경비사령부를 독자로 편성하여 육군부대와의 적정수집에 대한 정보교환 및 협력을 목적으로 오후 6시에 사령부와 2개 중대를 김포읍으로 추진한 다음, 병력을 읍 북쪽의 김포-통진도로 길목인 44고지 일대에 배치하였으나, 적정을 탐지하지 못한 채 밤을 새우게 되었다.

한편 육군부대인 남산학교는 교장 계인주 대령이 보병학교에 교육 파견 중이었으므로 부교장 최복주 중령의 지휘아래 기간요원 40여명으로써 개화산(130고지: 비행장 북쪽 2km)을 점령하여 지역경계에 임하였다.

공병학교는 그 일부가 남산학교 기간요원과 행동을 같이 하는 가운데 주력은 15시를 전후하여 남산 장충단공원으로 이동하여 전선지원 태세에 들어갔다.

4.2. 6월 26일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해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김포반도 북단 지역은 유속이 빠르고 강폭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북한군은 6월 26일부터 김포반도 북단의 월곶면과 하성면 지역으로 강을 건너 진출하려고 시도했으며, 국군은 문수산 등의 하안 고지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쌓아 북한군의 진출을 막으려 했다.

6월 26일 새벽 북한군의 일부 부대가 강을 건너 김포반도에 상륙했다. 육군 본부는 계인주 대령을 이날 아침 남산학교장으로 복귀시킴과 동시에 김포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김포에 있는 모든 병력을 통합 지휘하여 적의 도하를 막도록 하였다.

전날 시암리 부근에서 일야를 보낸 제 12연대 2대대는 이날 김포 전투사의 장악 하에 들어가 통진 부근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막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3대대와의 혼성병력 600명을 4개중대로 재편하여, 대대본부를 통진으로 이전하는 동시에 가금리(조강리 동쪽 2km)에서 강녕포에 이르는 강안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1개 중대를 통진 북쪽고지(표고 170m 정도)에 예비로 확보하여 오후2시에 진지편성을 끝내고 경계태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같은시각 육군본부는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전력강화를 위하여 한국군 기갑연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해 김포반도에 투입하였다. 그렇게 장갑대대장 박무열 소령의 지휘아래 일부 기갑병력이 김포반도로 중파되었다. 장갑 제2중대와 기병대 7중대는 장갑대대장이 이끌고 오후 1시에 김포로 향하였고, 도보대대장 강문헌 대위는 본부중대의 화기소대를 9중대에 배속 조치하여 2중대와 함께 오후 4시에 김포반도로 출동하였다.

육군보국대대[2]는 귀순장병 174명으로 3개 중대를 편성하여 2개 중대를 제6, 7 양 사단의 정찰대로 파견하고 1개 중대만 본부에 두고 있던 중 전날 북한군의 남침급보를 접하고, 출동 준비로 대기하였으나 종일토록 그들에게 별다른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보국대대장 방원철 소령은 이날 아침에 육본에 자진 출두하여 남침저지를 자원한 결과 김포반도 방어선의 약점을 메우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대 전체가 100명도 채 안 되는 대원이었지만 99식 소총에 실탄 20발과 수류탄 1발씩을 나누어 가진채 오후 1시를 전후하여 영등포의 본부를 떠나 3시에 통진 남쪽의 180고지에 병력을 배치한 다음, 멀리 서북쪽으로 갑관 나루터를 굽어보면서 적을 막아보려 하였다.

민기식 대령이 이끄는 시흥의 보병학교는 전날 김병화 소령이 이끄는 교도대가 학생연대장 유해준 중령의 지휘아래 문산으로 제1사단을 보낸 것에 이어, 다시 육본 명령에 따라 학생연대의 후보생으로서 후보생 대대를 편성하여 김포에 출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26일, 통진을 중심으로 하는 김포반도 서북단에는 3개 대대의 병력이 들어서게 되었으나 이들 모두가 저마다 독립된 행동에 의하여 축차로 투입된 것이므로 사전에 부대 간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일관된 진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각 대대장의 독단에 따른 부대 배치여서 병사들은 저마다 자신들만이 그곳에서 대적하게 되는 것으로만 아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적진에 대한 정보의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신수단이 강구되지 못하여 그 정보가 김포의 지휘부에도 즉각 보고가 되지 않는 상태였으니 이러한 형편으로서는 적의 침공에 대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였다.



그날 오후 4시, 제12연대와 기갑연대의 혼성병력의 진지편성이 대충 끝나자 강녕포 등을 통한 북한군의 한강도하정찰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피난민을 가장하여 작은 어선 등으로 산발적인 도하를 꾀하다가 해가 질 무렵부터는 발동선이 예인하는 도하선정을 이용하여 소대규모씩 대안의 석류포로부터 조강리로 상륙을 기도하였다. 이에 조강리로 증원된 곽응철 소위가 이끄는 장갑소대가 장갑차의 37mm포로써 반도중인 적선을 격침하니 북한군은 서문의 조강리로의 상륙을 포기한 듯 더 이상의 도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4.3. 6월 27일

전날 밤 북한군의 일부가 갑관 남쪽에서 염하를 건너 180고지의 보국대대 진지를 기습하였기에 보국대대는 날이 밝기도 전에 궤산되고 말았다. 북쪽의 한강에서도 적이 야음을 틈타 강녕포 동남쪽의 강안일각에 상륙하여 강녕포 부근의 제12연대 2대대 1중대와 103고지의 3중대 사이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세웠다. 이후 날이 밝자 북한군은 북안의 영등포에 12mm 야포를 방열하여 조강리에 강녕포 일대를 강타하는 도하지원 사격을 시작하였다. 포병의 엄호 아래 북한군은 선박들에 병력과 중장비를 분승한채 강녕포로 도하를 강행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전날 밤에 상륙하여 강녕포 동남쪽의 강안을 확보한 북한군이 강녕포-통진 도로를 차단코자 하였기에 강안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막던 제12연대 2대대 제1중대와 장갑소대는 이같은 후방 위협에다 북한군 포화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통진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군의 주력이 강녕포에 상륙하게 됨으로써 103고지와 가금리의 제12연대 2대대 3,4중대가 철수하게 되었고 아침 8시, 통진의 12연대 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강녕포에서 철수한 장갑소대와 전날 밤 180고지에서 흩어진 보국대대의 일부를 재편성한 다음 예비대인 2중대를 지휘하여 상륙한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강녕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노폭이 좁아 선두의 장갑차의 뻗어버리면서(...) 진격이 멈추고, 북한군의 포격으로 장갑차 지원화력의 활용을 크게 기대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고막리(통진 북쪽 1.5km) 부근에 이르러 문주산으로 밀려드는 적과 부딪친 결과 다시 통진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통진에 집결한 제12연대와 기갑연대의 혼성병력은 장갑차의 엄호하에 통진에서 김포와 인천으로 갈라지는 도로의 삼거리인, 장림(통진 동남쪽 6km) 부근으로 철수하였지만 이미 새벽에 180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의 일부가 통진-장림 도로의 남쪽으로 우회하여 겉고개(통진 동남쪽 3.5km)를 차단하여 퇴로를 막고 있었다. 이에 장갑차를 선두에 내세워 이로 하여금 겉고개를 돌파케 함으로써 이들 혼성병력은 11:00에 장림에 이르러 그곳에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기갑연대의 기병과 보병은 김포읍으로 철수하는 가운데 후보생 대대와 12연대 2대대가 장갑중대의 지원 아래 장림선을 맡게 되었는데, 후보생대대는 장림 삼거리 북쪽 구릉지대에 진지를 점령하여 징림-김포읍의 도로를 제압하고, 제 12연대 2대대는 일부는 한강변에 분산되었으므로 2중대를 남쪽의 천마산(60고지) 일대에 급파하여 장림-양곡(장림 남쪽 4km)간의 도로를 차단하였다.

그런데 이때 후보생 대대원들이 가지고 있던 99식 소총은 그 조작과 사격방법이 M1소총과는 달랐으며 더욱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두었던 것이므로 손질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탓으로 격발에 장애가 잦아 전투불능상태나 다름없었다.

후보생대대와 12연대 2대대가 장림에서 북한군의 침투를 막고자 안간힘을 다하였으나 역부족으로 13:00를 전후하여 그 선에서 무너지게 되어, 후보생 대대는 김포읍쪽으로, 제12연대 제2대대는 양곡쪽으로 각각 철수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한군은 이날 낮 중으로 김포 평야에까지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한편 육본은 김포의 병력 증강을 위하여, 6월 27일 10:00부 육본작명 제 97호에 따라, 서울로 옮겨온 대구 제3사단의 22연대 병력 중 제3대대를 김포지구에 출동하게 하였다. 대구에서 열차로 함께 수송한 자대차량으로 저녁에 김포읍에서 집결한 대대는 곧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운유산 동쪽(장림-김포도로 동측 한강변)의 73고지(운유산 동쪽 3.5km)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여, 그 좌측의 후보생 대대 및 저녁에 다시 증원된 8연대 3대대와 더불어 김포읍에 대한 최후의 저지선을 맡게 되었다.

이날 부평의 잔류병력도 김포전선에 중원 되었는데, 윤태일 중령이 이끄는 제1공병단 산하의 일부는 부평-김포읍 사이의 계양산(395고지: 부평 북쪽 7km) 동녹의 방축리 부근으로 추진되고, 심언봉 대령이 이끄는 병기학교에서는 기간장교로써 장교특전대를 편성하여 한강변의 전호(김포 비행장 북쪽 4km)부근에 배치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계인주 대령은 사령관이라는 작자가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사라져버리는 아연실색할 사태가 발생했다.

4.4. 6월 28일

파일:600px-C-54_destroyed_by_North_Korean_fighters_1950.jpg
북한공군의 김포비행장 공습으로 파괴된 C-54


아침 6시, 어선으로 평도 동쪽의 한강을 도하하여 접근한 북한군이 선상에 82mm 박격포를 장치하고 사격을 가하면서 63고지의 동북쪽 강안에 상륙함으로써 이날의 첫 교전의 신호가 올랐다.

이에 강안을 노려보면서 밤을 지새운 김촌성 중위가 이끄는 기병 제7중대는 전 화력을 집중하여 이에 응수하였으나, 역부족인데다가 북한군의 박격포가 집중됨에 따라 기병대에서 훈련 중이었던 말들이 그 포성에 놀라 요동함으로써 하는 수 없이 북한군과 이탈하여 63고지를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08:00에, 전날밤 김포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12연대 2대대의 잔여병력을 운유산으로 다시 추진하여 전력의 강화를 도모하였으나, 밤새도록 비가 오는 가운데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마저 거르게 된 상태에였기에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오전 11시, 사령부의 철수명령에 따라 김포도로 서쪽지역 운유산 일대의 진지를 지탱중이던 후보생대대와 제12연대 2대대 및 기갑연대 도보중대는 김포읍에서 장릉산(146고지 김포읍 남쪽 1km)과 주양산의 동선을 따라 부평에 집결하고, 장갑차와 제8연대 3대대 및 제22연대 3대대의 일부는 사령부와 함께 김포 비행장을 향하여 김포가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빠졌는데, 장갑차는 비행장-영등포가도를 경계하면서 이동하였고, 보병 일부는 굴포천을 건너 개화산에 진지를 다시 마련하였다.

이 날 저녁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주민의 협력을 얻어 수용병력에 대한 결식을 서두르는 한편, 각대별로 밤을 세워 병력을 수습하였다. 그리고는 후보생대대와 기갑연대 도보대대 및 김억순 경감이 이끄는 부평경찰대로써 계양산 동쪽 능선에 배치하여 김포 - 부평 도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제22연대와 제12연대 병력으로써 비행장 남쪽 구릉지대의 107고지(비행장 남쪽 4km)일대에 배치하여 비행장쪽에서 소사로의 적 남진에 쐐기를 박도록 응급조치하였는데, 이 때 제8연대의 3대대는 비행장에서 영등포쪽으로 전진함으로써 새로운 활동무대를 얻게 되었다.

이날 밤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계인주 사령관이 실종되는[3] 가운데 소사로 집결하자, 결국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참모장이던 최복수 중령이 임시로 김포지구사를 지휘하게된다.

그러나 이미 전차중대도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은 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김포읍과 김포비행장까지 점령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변변한 저항도 없이 김포비행장을 내줬다고 질책하면서 최복수 중령을 직위해제하고 대신 3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을 사령관 대리로 임명했다. 국군은 장릉산·계양산·개화산 등에 진지를 쌓고 북한군이 부평과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다. 또한 시흥전투사령부는 '화급히 병력을 수습하여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라.' 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 같은 시흥사령부의 비행장 탈환명령은 비행장의 적이 반드시 거쳐야 할 침공로상의 요지라는 점도 있지만 행주에서 도하철수중인 제1사단의 철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인 것으로 풀이되었다.

4.5. 6월 29일(김포 비행장 탈환 작전)

6월 29일에는 김홍일 장군의 명령에 따라 반격에 나서 김포비행장 탈환 작전을 벌였다.

오전 6시에 최복수 중령의 진두지휘 아래 소사-김포 도로를 따라 북진하여 공격개시선에 부대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때 비행장 북쪽에서 교전의 총성이 들렸는데 그것은 새벽에 행주나루터부터 도하에 성공한 18연대가 비행장을 급습한 것이었다. 원래 18연대는 부평을 목포로 이동하였는데 옥녀봉(79고지, 개화산 서북쪽 4km)에서 북한군의 박격포가 막자 김포비행장 - 소사쪽으로 목표를 바꾸었던 것이다. 제18연대 2대대 5중대가 먼저 비행장 북단에서 철조망을 넘어 돌입한 뒤, 6, 7중대는 비행장 입구에서 돌격하게 되었는데 이때 B-29 편대가 비행장에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순식간에 그 일대가 폭염으로 휩싸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7중대는 외발산 동쪽으로, 6중대는 내언리 쪽으로 탐색한바 돌파구의 전개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무렵인 오전 10시 20분에 비행장에 돌입한 5중대가 북한군의 포로로 있던 국군들을 구출하여 본대와 합세하고 다시 대오를 가다듬어 기관총 2정을 중심으로 내언리 정면을 돌파하여 진로를 개척하였다.

비행장의 동북쪽에서 제 18연대의 혈전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18연대가 머지막 돌파구를 뚫을 때인 10시 30분을 전후하여 비행장의 서남쪽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공격에 앞서 공습이 있은 후의 적의 움직임을 살펴보고자 최복수 중령은 안영작 대위를 정찰차 내보낸 결과, 안 대위는 비행장 남쪽 1km의 안오쇠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전투부는 기갑연대의 도보(徒步)대대로 하여금 장갑차의 엄호하에 동남쪽으로 돌입하도록 하고 제 22연대 3대대로서 안오쇠 부근의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하고, 제12연대 2대대는 비행장의 서북쪽으로 우회케하여 적의 퇴로를 막게 하였다.

강문헌 대위가 통합 지휘하는 기갑연대 예하 부대들은 그때까지 타 부대보다 손실이 적었다. 이에 따라 강문헌 대위는 자신이 김포공항탈환전투를 주도하기로 했다. 기갑연대 제3도보수색대대가 장갑중대의 엄호를 받아 비행장 탈환에 나섰다. 보병학교 후보생대대, 제3사단 22연대 3대대, 제1사단 12연대 2대대 등도 비행장 탈환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력은 각각 1개 소대 또는 1개 중대 수준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강문헌 대위의 부대를 엄호 및 지원하는 수준이었다.

김도경 대위가 지휘하는 장갑2중대가 선두에 섰다. 그 뒤를 따라 대대장 강문헌 대위가 도보수색대대의 선두에 서서 비행장을 향해 진격했다. 비행장 주변에는 비행기의 이착륙을 고려해 은폐·엄폐물이 전혀 없었다. 공격부대는 적의 사격에 노출된 채 돌격을 강행해야 했다. 북한군은 비행장 동북쪽 도로의 배수로에 매복해 있었다. 강문헌 대위가 공격을 시작하자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대대장은 대동한 정보장교 박영수 소위, 작전장교 김수동 소위 등과 함께 적에게 응사하며 전진을 계속했다.

북한군의 사격이 계속되면서 대대장 강문헌 대위와 정보장교 박영수 소위가 쓰러졌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장갑중대 제2소대장 김정운 소위의 장갑차가 달려나갔다. 그때 적의 대전차포가 장갑차를 명중시키면서 김정운 소위가 장갑차와 함께 산화했다. 뒤따르던 장갑중대 제1소대장 곽응철 소위의 장갑차가 부착된 기관총으로 매복해 있던 1개 분대 규모의 적과 군관 1명을 사살했다. 체코식 기관총을 비롯한 다수의 무기도 노획했다. 이어 대대장을 대신해 제8중대장 김일록 중위가 분기탱천하여 공격에 나섰으나 전사하면서 김포비행장탈환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비행장 탈취작전은 무위로 끝나게 되었다.

이 전투 결과 참모장 최복수 중령을 비롯하여 제3전투대대장 강문헌 대위, 박영수 소위, 김수동 소위, 김일록 중위 등이 전사하였다. 또한 전투 패배의 책임을 통감한 사령관 우병옥 중령이 권총으로 자결함에 따라 김포전투사는 그 기반이 와해됨으로써 사실상 통합사령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인 김홍일 소장은 소사지역에 집결중인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으로 하여금 지역부대를 통합지휘토록 긴급조치하였다.

4.6. 6월 30일(오류동 전투)

사령관 대리와 참모장의 죽음으로 김포지구사가 통합지휘능력을 상실하자 김홍일 장군은 29일 아침 김포나루로 도하, 철수해온 18연대장 임충식 중령이 지휘권을 이어받게 한다. 김포지구사 잔여 병력은 6월 30일에도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다시 공격에 실패하고 비행장 남단에서 한걸음 더 밀려났다.

이제 전선은 소사 북쪽의 고지대에서 경인가도의 확보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경인가도는 인천항의 생명선이기도 하거니와, 영등포쪽에서 한강방어선을 펴고있는 시흥사령부 주전부대의 측방엄호를 위해서도 필요했으며, 또 이의 확보 여부는 소사 동북쪽의 138고지(오류동 서북쪽 2km) - 원미산의 공방전승패 여부도 달려있었다.

이 날은 날이 새기도 전에 북한군은 비행장 - 소사간 도로를 따라 전차 2대의 엄호를 받으며 107고지의 후보생대대와 도보대대의 진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차의 위세를 빌어, 138고지 - 시월리(원미산 북쪽 1.5km) 일대의 진지 일각을 수중에 넣게 되고, 소사 북쪽 2km까지 진출하게 되어, 이제 경인가도가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

이에 사령관 임충식 중령은 오전 9시에 중앙일선의 제 18연대 2대대로 하여금 138고지를 탈취케 하고, 좌일선 부대로 하여금 원미산 북쪽의 적을 공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공격은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공격선두에서 지휘하던 제7중대장 이규대 중위가 전사하고 소대장 3명이 모두 부상을 입는 등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날 늦게 오류동·소사 방향에서 위협을 느낀 김홍일 장군은 제5사단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김포지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철수중인 5사단 병력을 수습하여 경인가도를 고수하도록 명령했다. 7월 1일 최영희 대령은 미 공군의 참전으로 제공권을 확보했으니 김포비행장보다는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 박격포와 장갑차의 지원 하에 전날 피탈당한 138고지와 107고지를 공격하여 악조건에도 양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7월 2일에는 보다 북쪽의 126 고지에 대한 공격이 실시됐지만 성과는 없었으며, 김포지구사는 한강선이 무너져 경인가도를 고수할 이유가 없게 된 7월 3일 오전 10시까지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영등포 방면에서 퇴로가 끊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철수했다.

4.7. 7월 1일

밤 사이 증원부대를 오류동 - 소사간의 도로 남쪽에 전개한 최영희 대령은 이미 제공권이 미 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고 판단하여 시흥사령부가 목표로 하는 비행장은 확보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공격의 발판에 대한 요지 확보가 필요하다고 보아, 비행장 남쪽의 138고지 - 107고지를 확보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이에 공격부대의 유일한 중포화였던 81mm박격포는 138고지를, 장갑차의 37mm와 자동화력은 107고지를 각각 지원토록 화력을 안배하고 부평의 제1병기대대에서 보유중인 박격포탄을 오류동 일대의 경인가도 노상에 배치하게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오후 1시에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악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였는데 장갑차의 엄호를 받아 나아간 좌일선의 제1대대가 오후 5시에 공병대대의 협력으로 107고지를 점령한 것을 선두로 하여 의외의 가벼운 저할항을 물리치고 각 목표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날 77고지 - 138고지 - 107고지선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경인가도의 위협을 제거하는 호전을 보이게 되었다.

4.8. 7월 2일

최영희 대령은 전날 확보한 138고지 - 107고지선에서 여세를 몰아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군을 138고지 북쪽의 126고지 너머로 몰아냄으로써 북한군의 침략노선에 쇄기를 박아놓기로 결심하고 날이 밝자 제 15연대 2대대로 하여금 126고지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18연대의 2, 3 양 대대도 모두 전선에 투입되기에 이르렀으나 126고지 쪽에서 내민 적의 발길에 점차 138고지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듯 진전없는 공방전속에서 날이 접물고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4.9. 7월 3일

전날 밤부터 난지도쪽으로 한강을 도하한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오류동 정면으로 가세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공격에 앞서 비행장쪽에서 그들의 보병에 화력을 지원하던 전차 2대를 야음을 틈타 126 고지 남쪽으로 추진한 다음, 그로 하여금 고척동 서쪽 계곡을 따라 경인가도에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고, 또한 전차에 태극기를 달어 국군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전도 구사하였다.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강북 북쪽의 신촌 부근에 자리잡은 적 중포로써 고척동 북근과 오류동 일대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한편 비행장 부근에서 박격포로 138고지 일대에 화력을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적 포화에 전열이 분열되었고 적의 공격을 감당하기에 힘든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인 오전 10시에 시흥사령부에서는 새벽에 적의 전차가 한강철교를 건너게됨으로써 혼성 제 7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어 시흥사령부의 철수도 힘들게 되었다. 이에 김홍일 소장은 '한강선이 적의 전차에 무너진 지금, 경인가도의 확보는 더이상 필요치 않다. 따라서 이대로 시간만 끈다면 영등포 - 시흥도로에 적이 먼저 들어서게 되어 오류동쪽 김포사의 퇴로조차 잃을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참모장인 박병권 대령을 오류동으로 급파하여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날 낮 대대별로 적과의 접촉을 일체 끊고 다시 철수길에 오르게 됨으로써 6월 27일에 북한군이 김포 반도에 상륙한 뒤로 1주일간 벌어졌던 지연전도 오류동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4.9.1. 철수

7월 3일 아침에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의 전차와 오류동에서 들어온 북한군 보병이 합류하여 영등포를 점령하게 됨으로써 김포동에서의 퇴각이 강요되었거니와 이날 밤 자정 무렵에는 6대의 전차를 앞세운 1개 대대규모의 적이 경인가도를 따라 인천을 점령하게 됨으로써 경인가도의 이북지역은 이제 모두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강과 오류동의 방벽이 동시에 무너지자 북한군은 이날 중으로 선견대를 시흥으로 진출시켜 국군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가운데 주력은 영등포와 오류동 부근에서 전열을 다시금 가다듬는 듯 하였는데 그들이 경부국도를 따라 전차의 돌파전을 시도할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결국 7월 3일,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김포 일대에서 철수명령을 내리게 된다. 김포사는 오류동 전선에서 병력을 이탈하여 일부는 소사에서 소래를 거쳐 서해안을 따라 최종적으로 수원 혹은 오류동에서 양지산(오류동 남쪽 6km)기슭을 타고 안양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김포사의 철수명령은 일선참호속의 각계 병사에게까지 모두 전하여지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어떤 병사는 아직 그대로 진지일각을 지키고 있었고 또 어떤 병사는 명령을 듣고도 더는 물러설 수 없다하여 호속에 남아있기도 한 바 이 날 저녁 적의 전차가 경인가도를 횡횡하게 되자, 그제서야 그 전차의 틈 사이를 뚫고 남하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인천으로 가서 마지막 철도편을 이용하여 수원으로 가기도 하였는데, 제12연대 2대대장인 한순화 소령 같은 사람은 인천에서 배를 얻어 보름 동안이나 서해안을 표류한 끝에 군산에 오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 김포사의 주력이 안양부근에 집결되면서 김포사령부는 개편을 하게 되고, 15,18연대가 연대별로 시흥사령관 김홍일 소장 하에 들어가 덕안(안양 서북쪽 4km)부근의 안양 저지선의 서쪽지역을 맡아, 다시 일전일퇴의 지연전을 벌이게 되었다.

5. 평가

7월 3일 영등포와 인천이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한강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자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병력은 수원과 안양 방면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대가 재편되어 안양 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병력과 장비가 모두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포반도 전투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진격을 상당 기간 지연시킬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신속히 인천·수원 방면으로 진출해서 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겠다는 북한군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활약으로 서부전선을 지키던 국군은 안전하게 한강을 건너 철수해 한강 방어전을 벌일 수 있었다.

국군이 처절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했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실 이 전투는 한국전쟁 초기 제6보병사단이 벌인 춘천-홍천 전투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 2001년 공개된 소련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군은 김포반도를 통해 영등포를 점령하고 수원선으로 진출을 기도하는 제6사단과, 제12사단이 홍천을 돌파하면 이를 발판삼아 수원으로 돌진하도록 계획된 제603모터찌클 연대를 양익으로 하여 한국군 주력을 한강 북방에서 포위섬멸하겠다는 계산 하에 전쟁을 개시했다. 그러나 김포지구사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북한군 공세를 상당시간 지연시킴으로써 춘천-홍천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부전선에서도 북한군의 작전적 의도는 좌절되었다. 춘천-홍천 전투가 북한군 2군단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며 춘천을 통해 수원으로 들이닥칠 북한군의 작전적 양익 중 왼날개를 꺾어버렸다면 김포반도 전투는 북한군의 오른날개가 펼쳐지는 것을 틀어막은 전투다.

거기에 사령관 도주와 사령관 대리 자살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장병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여 유기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도 놀라운 평가를 받는다. 즉, 당시 한국군이 얼마나 처절하게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는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1] 전 15연대장, 훗날 국회의원까지 됨.[2] 2월 1일부터 제3사단에 배속되어 밀양에서는 공비 선무공작을 벌이다가 영등포로 복귀[3] 후일 이 인간은 그것도 모자라 6월 28일 야간열차 편으로 가족과 함께 대구로 도망쳤다는 게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