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4 17:54:17

독립기갑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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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식을 수행하는 독립기갑연대

1. 개요2. 창설3. 발전4. 구성
4.1. 연대본부4.2. 제1대대4.3. 제2대대4.4. 제3대대
5. 실전6. 전환7. 관련 인물

1. 개요

독립기갑연대 소개 동영상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기계화 부대로 육군본부 직할부대였다. 부대 번호는 316부대.

다만 '기갑' 이라는 명칭과 달리 기계화보병기병이 혼재된 부대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국이 전차를 공여해주지 않고 장갑차만 주었기 때문이었으며 장래에는 진정한 기갑부대로 전환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갑부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차가 1대도 없고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가 주력이고 이를 기병과 승차보병이 보조하는 부대였다.

2. 창설

독립기갑연대의 창설부터 확대까지의 역사 동영상

독립기갑연대의 시초는 1946년 1월 15일 창설된 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현: 제1기계화보병여단) 예하 수색대다. 해당 수색대는 1948년 1월 1일 경기도 수색 제1여단내에 수색대를 창설하고 장갑 제1중대, 기병 제2중대를 편성하였다. 1948년 7월 4일에는 수색에서 용산 서빙고로 부대 주둔지를 이동하여 1948년 7월 10일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잠정 특별부대 사령부 예하 수색대로 개편을 진행했다. 1948년 9월엔 서빙고에서 김포로 부대 주둔지를 이동하였으며, 1948년 11월 25일에는 김포에서 서빙고로 다시 부대 주둔지를 이동하면서 해당 일자로 수색단으로 승격함과 동시에 초대 수색단장으로 이용문 소령이 임명되었다.

이후 수색단으로 승격되면서 M8 그레이하운드 정찰 장갑차 27대를 수령하여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장갑차량을 보유한 부대가 되었다. 해당 장갑차는 천정이 개방된 형태지만 회전포탑에 M3 37mm 대전차포 계열의 전차포가 탑재된 형태였는데 미국이 이런 장갑차를 준 이유는 장기적으로는 한국군에 전차부대를 설립할 이유는 있지만 당시 한국 대통령인 이승만북한을 함부로 공격할 마음이 들지 않도록 외형과 탑승원 수, 좌석위치는 전차와 비슷하므로 전차 승무원을 양성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직접 적을 공격할 때는 방어력과 화력이 약해서 전차처럼 전선을 돌파한다거나 하는 일을 할 수 없도록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를 준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의 수뇌부나 정치권에서도 기갑부대를 창설할 의지가 충분했기에 1948년 12월 5일에는 수색단이 기갑단으로 승격되었다. 1948년 12월 10일에는 기갑단 기갑연대로 승격, 연대장에 이용문 소령이 유임되었다. 1949년 4월에는 기병부대를 창설(2개중대 편성, 군마 350두)하였다. 이렇게 증편을 거듭하던 독립기갑연대는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수·순천 10.19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기도 했고 6.25 전쟁 직전에는 한국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삼팔선 근방에 파견되어 순찰과 열병식을 하면서 지역 주민의 용기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신생국가에서 방금 전에 창립한 군대답게 부대 창설 초반에는 작전 투입시 실탄을 과다하게 난사하는 경향이 있었고 한국군의 자랑 취급을 받으며 열병식 같은 곳에 자주 나가다 보니까 병력들의 전투 능력 수준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었기에 독립기갑연대의 장교들과 미국 군사고문단은 독립기갑연대를 본격적으로 전투부대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3. 발전

기본적으로 독립기갑연대는 부사관은 운전과 자동차 정비가 모두 가능해야 했다. 창설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6.25 전쟁이 끝난 시기인 1950년대에도 자동차 운전이 가능해서 운전면허증이 있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고급 인재였으며 민간에서 취직하기도 상당히 쉬운 편이었다.

그리고 장교의 경우에는 일본군에서 전차 승무원이었거나 전차학교를 나오는 등 전차와 관련된 군복무를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선발한 후에 육군사관학교군사영어학교에 재교육 과정을 거치게 한 후에 독립기갑연대에 배치했다. 그래서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서 관동군이나 만주군 소속으로 소련군의 T-34-85 전차를 상대로 일본군 전차인 치하하고에 탑승한 채 실제로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는 사람도 많았으므로 전차장갑차의 구별 및 전차전이 뭔지를 파악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런 식으로 장교 106명과 병과 부사관을 합쳐서 2천여명의 병력을 모은 후에 부대 훈련을 체계적으로 수행시키면서 연대급 종합훈련까지 여러번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성공해서 대한민국 육군의 최정예 부대가 되었다. 당시 한국군의 상황은 매우 열악해서 간신히 소대급 훈련을 마친 병력이 주력이었으며 대대급 훈련까지 마친 부대는 고작 16개 대대로 정예병력으로 취급받았을 정도였다.예시

그리고 과천시에서 수행한 독립기갑연대의 훈련은 일반적인 전투라기보다는 기동전 수행에 중점을 둔 훈련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중기관총을 장착한 윌리스 MB로 정찰을 한 후에 적군 진지의 약점을 M8 그레이하운드 정찰 장갑차가 돌격해서 주포를 쏘면서 뚫은 다음에 M3 하프트랙에 탑승한 승차보병이 전과 확대를 하고 ¼톤 트럭이나 1¼톤 트럭에 탑승한 보병이 후속하며 기병은 정찰, 우회로 탐색, 전과확대등에 고르게 보조를 해주는 형태였다. 따라서 기갑부대에 걸맞는 전선 돌파 훈련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미군도 장차 독립기갑연대를 진정한 기갑부대로 만들 생각을 했으므로 부대에 배치한 미국 군사고문단도 기갑병종의 장교들을 뽑아서 기갑부대의 노하우를 전수했으며 무전기도 119대를 지급하여 충분히 배치해서 독립기갑연대의 모든 차량에 배치했으므로 무전기를 통한 전황보고 및 명령전달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독립기갑연대의 무전기 숫자는 대한민국 육군 보병사단 전체의 무전기 숫자와 맞먹을 정도로 양이 많은데다가 M8 그레이하운드에 설치된 무전기처럼 성능이 좋은 무전기는 대한민국 육군 보병사단이 보유하지 못했으므로 실질적인 무전 능력은 독립기갑연대가 압도적으로 더 높다.

이런 식으로 병력을 충원하고 장비를 확보하며 훈련을 진행한 결과 6.25 전쟁 직전의 독립기갑연대는 훈련을 1일 안에 모든 과정을 진행하고 마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부대였으며 대한민국 국군의 유일한 기동타격전력이 되었다.

4. 구성

독립기갑연대의 부대 구성은 연대본부 아래에 3개 대대로 구성되며 장교 106명과 병과 부사관을 합쳐서 2천여명으로 구성되므로 당시의 일반적인 육군 보병사단 휘하의 보병연대보다는 크기가 약간 작지만 신속한 기동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 포병도 육군본부 직할 연대 1개뿐이었지만, 포병연대는 포병화력 지원을 위해 각 지역에 주둔한 보병사단이나 보병연대에 작전 목적에 따라서 1개 포병대대로 나누어져서 파견되어 흩어져 운용된 반면, 독립기갑연대는 전투시에는 1개 연대가 하나로 뭉쳐서 기동타격부대로 집중투입될 예정이었다.

4.1. 연대본부

서울 서빙고에 위치했으며 지휘, 인사, 보급, 정비, 통신등 연대본부가 해야 할 일을 수행했다. 연대본부 주둔지에 장갑차를 비롯한 차량 정비 시설이 독자적으로 있어서 수시로 정비가 가능하므로 독립기갑연대 소속 장갑차와 차량의 상태는 양호했다.

그리고 무전기가 많은 부대 특성상 연대본부에 설치된 통신탑과 M8 그레이하운드가 장비한 고성능 무전기간의 통신이 상당히 원거리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장제스가 전쟁 전에 한국을 방한했을 때 M8 그레이하운드를 통한 무선중계를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도 대관령에서 서울까지 직접 무선통신이 가능했는데 당대 한반도의 상황을 생각하면 엄청난 성능이었다.

4.2. 제1대대

장갑대대로 부르며 M8 그레이하운드 정찰 장갑차 27대로 구성된 2개 중대 및 M3 하프트랙 1대와 각종 트럭으로 구성된 지원부대로 구성된다. M8 그레이하운드는 원래 34대를 미국에게 공여받을 예정이었으나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27대밖에 도착하지 않아서 2개 중대만 편성했다.

실질적인 차량 정비 능력이 있기 때문에 독립기갑연대의 다른 부대 소속 차량도 실질적으로는 장갑대대가 관리하고 작전시에 분배하는 형식으로 투입한다. 주로 제3대대인 도보부대의 하프트랙과 트럭을 함께 관리했다.

독립기갑연대의 핵심이자 장기적으로는 전차를 지급받아서 진정한 기갑부대가 될 예정이었으므로 장갑차 운용 인원은 전차 승무원으로의 교육도 충실하게 받았다. 그리고 열병식이나 무력 시위 및 순찰용으로 M8 그레이하운드가 자주 투입되었기에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잘 알려진 부대였다.

4.3. 제2대대

기병대대로 부르며 기병 600여명과 군마로 구성된 부대다. 기병부대가 창설될 당시 옛날 일본군 소속의 군마등 다양한 경로로 군마 350마리를 입수했으나 부족해서 유사시에는 뚝섬에 있는 서울 경마장 소속의 경주마도 전시 징발할 예정이었다.

아직 한국의 도로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였고 산악지대로 들어서기만 하면 오솔길 수준의 길만 있었기에 기병을 활용해서 순찰, 연락, 추격등이 의외로 수월한 편이었기에 여러 방면에 자주 활용되었으며 그 외에도 기마경찰의 임무시 임시증원을 해주기도 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독립기갑연대가 전차를 보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갑차 전력이 강력한 것도 아니기에 기병이 있다는 특성상 기병연대(Cavalry Regiment)란 별칭을 붙여서 작전지도에 표기했다.

4.4. 제3대대

도보대대로 부르며 1개 대대 수준의 기계화보병을 보유하며 휘하부대로 군견중대를 보유했다.

작전투입시에는 제1대대에서 하프트랙을 공급받아서 M3 하프트랙 24대와 각종 트럭을 운용하며 기계화보병으로 변신하여 고속으로 이동하며 장갑차와 기병을 뒤따르게 된다. 일단 전장에 도착하면 하차해서 일반 보병으로 장갑차를 호위하게 되지만 작전에 따라서는 탑승하고 온 하프트랙을 이용해서 돌파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5. 실전

독립기갑연대의 실전부터 전환까지의 역사 동영상

6.25 전쟁이 터지자 전황이 너무 다급한 것과 함께 당시 육군총참모장인 채병덕의 지휘실책까지 더해지면서 수도권에 유일하게 기동타격전력으로 있던 독립기갑연대를 분산해서 전선에 투입하는 치명적인 사태가 터졌다.

물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개전 당시의 혼란 및 북한군이 민간인 복장을 입은 편의공작대(便衣工作隊)를 전선 후방에 투입해서 현지 게릴라와 합세함으로서 전화선을 통한 유선망이 절단되었으며 치열한 전투로 인해 한국군 부대가 보유한 무전기도 다수 파손되거나 잃어버렸기에 육군본부와 일선 부대간의 연락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장제스가 방한할 때 M8 그레이하운드의 무전기와 독립기갑연대의 연대본부에 설치된 통신탑과의 장거리 무전 교신을 활용했던 것을 생각해서 장갑대대의 M8 그레이하운드를 각 전선의 사단에 분산해서 연락용으로 투입한 것이다.

하지만 일선의 보병사단들은 워낙 전선상황이 위태로운지라 파견된 소수의 M8 그레이하운드 정찰 장갑차를 북한군의 T-34-85 전차를 정면에서 상대하라고 투입하는 막장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상황은 한국군이 보유한 모든 대전차화기가 무력한 상황이라 기존의 60mm 기본형 바주카나 57mm M18 무반동포는 기본적인 관통력 부족 및 도탄현상이 심했고 M1 57mm 대전차포도 기본적인 성능이 열악한데다가 관통력 좋은 분리철갑탄을 미국이 명중률 낮다고 라이선스 하지 않아서 경사장갑에 명중시 포탄이 깨지면서 관통불가현상이 발생하는 일반철갑탄만 사용가능하므로 답이 없었다. 그래서 보병이 수류탄을 가방이나 주머니에 가득 넣은 급조형 가방 폭탄을 들거나 아예 전차에 수류탄만 들고 육박공격을 가하는 상황까지 몰렸기 때문에 M8 그레이하운드의 승무원들도 일단 병력들의 사기를 올려야 한다는 것에 납득하고 북한군의 전차와 정면승부를 했지만 결과는 M8 그레이하운드의 37mm 포탄이 튕긴 후에 북한군의 T-34-85 전차의 85mm 전차포탄을 맞고 M8 그레이하운드가 인수분해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외에도 김포반도 전투에 투입된 소수의 M8 그레이하운드가 압도적인 북한군 숫자에 밀리거나 우회로가 없는 좁은 길로 인해 후퇴하기도 힘든 상황에 몰렸다던지 고갯길을 넘다가 북한군의 SU-76M 자주포와 갑자기 정면에서 마주하는 바람에 76mm 자주포탄을 맞고 격파당한다던지 하는 불운도 발생했다.

한강 방어선 전투에선 기동력과 화력이 부족한 국군 부대와 도로 차단에 파견되어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북한군의 45mm M-42같은 소구경 대전차포나 PTRD-41 대전차 소총같은 2선급 대전차화기에도 M8 그레이하운드의 최대 19mm 수준의 얇은 장갑이 관통당하면서 11대가 격파당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 후에도 M8 그레이하운드는 정찰 장갑차인 특성상 장비의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무리하게 전투를 해야했고 연이은 소모전과 대전차전에 휘말리면서 그 수가 점차 줄어 1950년 8월 청송 전투에선 장갑차 3대만 겨우 빼낼 수 있었다.

기병대대는 퇴계원 근방의 전선을 담당했다가 후퇴 및 전환배치를 반복하며 1950년 7월 대평리-공주 전투에서 포위된 미군 포병대 구출 등 많으 활약을 펼쳤으나 청송 전투에서 대타격을 받은 후 1951년 1.4 후퇴 이후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군마의 숫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개전 초반에 기동전력이라는 명분으로 인해 전선을 왔다갔다하며 장거리 기동을 반복하다보니 군마가 피로에 지치거나 말굽이 상하거나 부상을 입는 등의 이유로 인해 군마 소모가 심했으며 더 이상은 군마를 보충할 길이 없다보니 점점 기병대대가 소모되면서 군마 없이 승마 경험도 없다시피 하는 보충병만 받게 되면서 사실상 보병부대로 전환되던 상황이기도 했다.

도보대대는 가장 끔찍한 손실을 당하며 붕괴된다. 그 이유는 정부 기관의 피난용 차량으로 보유한 M3 하프트랙과 트럭이 징발당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개전과 평소 피난준비가 없었던 정부 기관들이 근처에 있던 도보대대용 차량을 강제로 징발해서 중요 문서와 한국은행에 보관된 금괴등 중요 물자를 후방으로 이동시키는 데 쓴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 도보대대가 된 상태에서 김포반도 전투에 참여했는데 비행장이라 개활지 투성이인 김포비행장 탈환에 긴급투입되는 바람에 비행장 시설물에 설치된 북한군의 중기관총 세례를 맞고 말 그대로 부대 지휘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원이 죽거나 치명상을 입는다. M3 하프트랙만 있었어도 활주로를 돌파한 후에 시설물 내부로 들어가서 전투를 진행해서 북한군을 몰아낼 수 있지만 도보부대로 전락한 상황에서는 활주로를 돌파할 방법이 없던 것이다. 임시방편으로 드럼통을 굴려서 은엄폐 도구로 써봤지만 실패했고 사상자만 더 늘어서 사실상 여기서 도보대대는 괴멸한다. 이후의 도보대대는 기계화보병이 아니라 그냥 보병부대로 전환되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전황이 다급해서 당황한 나머지 1개 연대 전력을 보유한 기동타격부대를 분해해서 전선에 뿌리는 축차투입이 발생했으며 사실상 개전 초반에 독립기갑연대는 실질적으로 붕괴한다. 그래서 1950년 7월의 지연전 시기에 이미 독립기갑연대를 일반 보병연대로 전환하는 명령이 내려지게 된다. 다만 기존의 장비 보유는 인정받았기에 소수의 장갑차와 하프트랙을 추가적으로 보유한 보병연대가 된다.

그 뒤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진행될 때 제7보병사단을 재창설하면서 수도사단 8연대가 차출되어 떠났고, 8연대의 대타로 독립기갑연대가 수도사단에 예속되면서 육군본부 직속의 독립기갑연대 편제가 사라진다. 이미 기계화부대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기에 '기갑' 명칭의 보병연대(통칭 기갑연대)로 확실하게 재편되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독립기갑연대의 장갑차들은 그대로 보유하며 북진작전에 참여해서 최초로 삼팔선 돌파에 성공했으며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직전인 1950년 11월 30일에 부령역까지 진격해서 당시 UN군과 한국군을 모두 합하여 최북단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으며 두만강 및 소련과의 국경선까지 130km 정도 남았으며 이 시기까지 최후까지 생존한 M8 그레이하운드가 최전선에 서서 진격했다. 그러나 이렇게 남은 마지막 M8 그레이하운드도 흥남에서 남쪽으로 철수하는 와중에 피난민을 더 싣기 위해 부둣가에서 부대원들이 모인 가운데 장갑차를 버린 후 불태우며 참석자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독립기갑연대의 마지막 장갑차가 사라진다.

물론 독립기갑연대 직속의 M8 그레이하운드가 사라진 것이지 개전 초반에 각지의 보병사단에 통신용으로 분배된 장갑차는 살아남았으나 이미 해당 부대 소속으로 전환되고 승무원도 교체된 지 오래며 해당 차량들도 후방의 게릴라 토벌에 투입할 지에 대한 논의를 끝으로 이들에 대한 기록이 사라지면서 독립기갑연대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진다.

6. 전환

독립기갑연대가 기계화부대에서 완전한 보병연대가 된 후에도 전쟁은 이어졌고 전선투입도 지속된다.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때에는 알보병처럼 고지를 기어올라야 했다. 그 후 휴전 이후인 1953년 9월 18일 기갑연대 3대대 11중대장 안도현 대위와 일행 장교가 2개 중대를 이끌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으로 이동했는데, 이후 이 중대들은 훗날 제27보병사단모체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해체됐다

비록 보병연대가 되었지만 독립기갑연대의 역사는 엄연히 존재했으므로 같은 사단 내에 제1보병연대가 있음에도 제1기갑보병연대라는 해괴한 부대명칭으로 바뀌기도 했다. 약칭을 "1기갑여단"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히는 "1기갑기보여단"이다. 게다가 5군단 예하 독립기갑여단 제1기갑여단과도 다른 부대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수도사단과 예하 연대들이 기계화보병부대로 개편될 때에도 대한민국 육군 최초의 기갑연대라는 자부심으로 "기갑"이라는 명칭을 고수했다. 물론 현역 시절에도 기계화부대였고 나중에는 보병부대가 되었지만 전쟁이 터지지만 않았어도 기갑부대가 될 예정이었기에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이 장갑차나 전차 비중이 기병을 뛰어넘어 사실상 기계화나 기갑 부대가 됐음에도 '기병'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처럼 기갑이라는 명칭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으로 승격됐다. 이런 현상은 부대마크에도 반영되었기에 적혀있는 공식 영어 명칭은 1st Armor Mechanized Brigade 이다.

하지만 위키백과 영어판을 비롯한 영어 자료에는 이 부대의 이름이 기병여단(Cavalry Brigade)로 적혀 있다. 연대였던 시절엔 기병연대(Cavalry Regiment). 아무래도 정식으로는 기갑부대가 되지 못한 것을 반영하고 기갑 명칭을 고집하는 것이 자신들의 기병과 비슷한 논리의 이야기임을 생각하고 휘하에 기병부대도 있었고 당시 미군의 입장에서도 인상깊은 공적을 남겼으므로 기병으로 취급해서 명칭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행적은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을, 한국군의 기갑 역사 전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국군 전차부대(한국전쟁) 문서 참고.

7.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