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3 16:17:15

국민방위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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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집된 국민 방위군. 사진 출처

1. 개요2. 편성3. 첫 부대 소집4. 죽음의 행렬5. 예산 유용6. 사망자 수7. 사건에 대한 책임처벌과 정치적 영향8. 해산9. 이야깃거리10. 대중매체11. 다른 나라의 경우12. 관련 문서

1. 개요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과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영희의 증언[1]

6·25 전쟁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강제징집한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국회, 정부 및 군 고위층의 예산 횡령뇌물 범죄로 인해 보급을 받지 못하여 그대로 희생된 사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최악의 방산비리 사건이다.

병력 수송 비용과 식비 등을 횡령하여, 신정동지회 김종회 등 20여명의 국회의원들에게 공작비와 여비 등의 명목으로 제공되었다. 덕분에 징집된 방위군이 혹한기 속에 굶주리면서 행군하여 기아와 동상으로 전투 한번 없이 희생된 대한민국 육군 최악의 흑역사이다.

즉, 적군도 아니고 조국인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 경시로 100여 일 사이에 전투에 참여는커녕, 한 번 못 만져본 장병 수만 명이 후방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으며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 유영익[2] 교수도 "9만 명 가량의 장정들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점은 적군이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아니라, 적을 맞아 싸울 전투병력이 전선에 투입 한 번도 되지 못하고 사실상 아군의 손에 대량학살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그리고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 규명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무지막지한 회의감으로 사표를 제출하여, 스스로 행정부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을 지경이었다.

6.25 초기 북한이 남한지역에서 동원한 인력은 무려 60여만명 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최전선의 총알 받이로 투입되었고, 나머지는 탄약 및 식량 운반, 교량과 도로 보수 등에 동원 되다가, 전방에 병력 손실을 입으면 병력 보충용으로 투입 되었다.(장비에 한계가 있으니 60여만명 전부를 한번에 투입 못한다) 전쟁 시작 당시 북한군은 약 20만명이었지만, 최초 3개월간 사상자만 22만 1천명이었다. 이 엄청난 사상자를 카바해주는게 남한에서 동원한 의용군이었다. 이에 북한으로 후퇴 당시 북한군은 약 5만명에 의용군 5만명이었다.(후퇴 못하고 낙오되어 빨치산화 된 2만5천명 제외)

이에 1.4 후퇴로 인해 또 다시 남한의 청장년을 북한의 점령지역에 나두고 갈 수 없는 정부 입장에서 청장년 국민 총동원은 이해 될만한 요소가 있다. 또한 국민방위군 모집은 공무원들이 작성한 소집 영장에 의해 이루어 졌지만(손이 아파서 하루에 200장씩 밖에 작성 못했다), 당시 서울/경기 일대의 청장년들의 공포는 엄청난 것이라 소집 영장 없이도 엄청난 숫자가 소집 장소로 몰려 들었다.

즉, 남아 있으면 북한의 의용군에 끌려갈 가능성 100%이고 소집 되면 안전하게 대피 시켜 주고 최소한 밥은 주는지 알았던 상황이라 서울/경기 일대 청장년들이 몰려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뜻 있는 사람들은 이미 군이나 경찰에 입대하였고 국민방위군의 설립 목적 자체가 남한 청년들의 후방 소개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북한 점령지역의 남한 청장년 소개라는 목적 자체는 성공하였다. 다만 또 하나의 목적인 국군의 징병 자원 확보는 대실패였는데, 온갖 고생으로 이들의 체력이 소진되어 말 그대로 기진맥진한 상태인지라 도저히 군인으로 쓸 수 없는 상태였고, 대부분 귀향 조치 되었다.

2. 편성

대한민국 정부는 중공군 개입즈음 하여 기존의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을 해체 하고, 적의 손에 넘어갈 수 있는 지역의 청장년을 보호하여 소개할 목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창설한다. 대한청년단장이자 청년방위단 사령관 김윤근이 그대로 국민방위군사령관이 된 것에 알 수 있듯이 앞서 두 조직의 지휘부가 그대로 국민방위군 지휘부가 된다. 또 한명의 천하의 개쌍놈인 국민방위군 윤익헌은 대한청년단 총무국장이자 청년방위대 경리국장이었다.(해방직후 김윤근과 윤익헌은 지청천 장군이 만든 대동청년단 소속이었다.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직후 보직은 이승만 총재, 신성모 단장, 윤익헌 사무국장, 김윤근 감찰국장이었다.)

국민방위군을 지원하기 위해 육군본부 산하에 국민방위을 설치하였는데 초대 국장은 준장 이한림(10일 근무), 2대 준장 장창국, 3대 준장 김종갑이 있었다. 문제는 당시 상황이 긴박히 돌아가 군민방위국의 현역 장병들이 제대로 인사 배치가 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국민방위군을 감독하지 못했다.

국민방위군 사령부 지휘부는 사령관 김윤근(사형), 부사령관 윤익헌(사형), 참모장 박경구였고, 일반참모부로 인사/정보/작전/군수처를 두었고, 특별참모부로 휼병실, 재무실(장 강석한 사형), 후생실, 조달과(장 박창원 사형), 보급과(장 박기환 사형), 정훈실이 있었다. 중간 제대 역할로 5/10/13/19/20단과 단대번호 불상의 4개 단등 총 9개의 '단'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청년방위대 시절 부여 받은 준장이니 대령이니 하는 계급이 있었는데 실제로 군생활 경험은 전무하다. 국군이 북진하여 북한 대부분을 접수 하였을 때 함께 올라가 치안유지 하기 위해 이러한 계급을 부여 받은 걸로 추정 된다.

1950년 11월 15일 기준으로 전국 장정 대 등록자는 2,389,730명이고 이중에서 경찰/형무관/군 소집 예정자등을 제외한 680,350명이 제2국민병이 되어 국민방위군으로 소집 되었다. 이중에서 당시 군이 발표한 사망자수는 1,234명이고 그외 상세불명의 행려 사망자가 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 소집인원중 교육대 수용 인원은 298,142명이었다. 교육대는 경상도일대에 51개 제주도에 1개 하여 총 52개가 있었다.(국민방위군 자료 자체가 개발살 나서 당시 국민방위군 소집자의 육성 증언에 의해 00교육대로 갔다는 식의 정보 뿐이다.)

북한에게 초모되기 전에 청장년을 소개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월남한 청장년과 서울, 경기 지역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다만 충청, 전라도의 경우 소집되어 이동하는 중 국민방위군이 해산되어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실제로 국민방위군 68만명중 월남자/서울/경기/강원/인천 지역에서만 42만명이 소집 되었다.

소집된 제2국민병은 각 구청별로 소집된 장정을 담당 경찰관이 지정된 장소(서울은 창덕궁 비원 후정)로 인솔하고, 이를 인원점검 후 국민방위군 장교들이 200~300명의 중대단위로 편성하여 도보로 교육대가 있는 경상도로 인솔하는 방식이다.

최초 기획된 북한 점령지역의 남한 청년 소개라는 목적 외에도 훈련 및 신병훈련소/전선으로 병력 보충 임무가 가장 주된 업무이다. 국민방위군 주력은 이동중 굶어죽고 얼어 죽으며 공준 분해 되기는 했지만, 일부는 전투부대로 편성되어 후방지역 정규군 산하에서 공비토벌, 보급로 경계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고, 연대 규모로 정규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일단 장부상으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국민방위군 1, 2, 3, 5, 6, 7, 8, 9, 10, 11사단등 10개 사단이 편성 되었다. 여기는 군사영어학교나 육사 출신 정규군 대령들이 사단장으로 보직 되었다. 연대급으로는 국민방위군 1, 2, 3연대까지는 확인 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장부상으로만 존재 했다. 그 장부도 최근에 발견된지라...

M1 소총칼빈, 소련식 장총, 일제 99식 소총, 북한 다발총 등으로 무장한 국제화된 군대였다. M1은 군인, 99식 소총은 경찰 줘야 하니 국민방위군에게 돌아갈 무장은 북한군이 버리고 간 소련식 장총(모신나강?)등이 주 병기가 되었다.

그나마 국민방위군 1연대는 장비 전무, 2연대는 2개 중대분 보유이고 3연대만 저정도의 장비를 갖추었다. 당시는 전투경찰대도 빨치산과 전투로 얻은 북한식 장비로 무장하는 시절이라는 것을 참고 해야 한다.(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문서 참조) 다만 빨치산들도 내무서원들이 장비를 죄다 들고 북한으로 튀어 버리는 바람에 맨손으로 국군과 경찰을 공격해 탈취한 무기로 무장 하였다. 결국 무기는 돌고 돈다.

국민방위군중 유일하게 제대로 싸운 부대는 국민방위군 제3연대로 국군 2사단에 배속되어 경상도 일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전개 하였다. 3연대는 소속이 육군 3군단과 육본 직할로 바뀌다가 최종적으로 51년 4월 29일 태백산지구 사령부로 배속 된다. 3연대는 1,2 대대만 있었는데 총병력 1,509명이었다.(장교 55명)

3. 첫 부대 소집

1950년,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중공군의 무단 월경[3]을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중공군[4]과 전쟁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한동안 북한 치하에 있었던 남한의 장정들, 즉 곧바로 군인으로 징병할 수 있는 인적자원들이 다시금 공산군에 의해 징병 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이미 북한 점령지역의 남한 청년들 다수가 허울 좋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강제징병되어, 조선인민군 육군에 징집되버린 전례가 있었다.[5] 따라서 정부는 같은 해 12월 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하여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을 대한민국 국회에 제출하면서, 예산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통과시켰을 정도로 준비가 매우 허술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12월 21일에 첫 부대 1만여 명이 창덕궁에서 소집돼 행군에 나섰다. 사실 중공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 그로부터 겨우 2주 뒤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서두른 게 이해는 간다. 그러나 아직 행정체계고 뭐고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낙동강 이북 지역을 수복했다가 다시 상실하는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인원이송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재앙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음모론을 펼치면,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바탕 쇼를 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면 굳이 정치자금을 먹으려면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문서로만 존재하는 유령부대를 편성하는 게 뒷말도 없고, 목격자도 없어서 은폐하기 아주 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대를 편성하는 것보다 수고도 적고, 빼먹은 것 들키기도 어려우며, 보는 눈도 적어 공금유용에 최적화된 방법이다. 앞서 링크된 것처럼 시대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애용되는 수법이다. 즉 국민방위방군의 예산유용은, 대규모 편성 인원에게 산정된 예산을 탐욕스럽게 빼돌렸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앞뒤가 바뀐 음모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음모론 여부를 떠나서 당시에 유령부대를 만드는 것은 써먹기 어려웠다는 주장도 있다. 위 링크에서처럼 유령부대는 비전시에나 써먹을 수 있는 것으로, 국방예산을 전시에 유령부대에 집어넣고 있으면 몰락의 히틀러 재탕 찍을 가능성이 아주 커진다. 더구나 6.25 전쟁 시기에 전시작전통제권은 전쟁 발발 1달 만에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부에 이양하여 유엔군 사령관이 행사했는데, 그 상황에서 유령부대 따위를 만들었다가는 금방 들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부분으로, 작전권통수권은 엄연히 다르다. 노태우 정부 시절 평시 작전권을 우리 쪽에서 단독행사하기 전까지, 작전권은 전/평시를 막론하고 모두 유엔군사령부에서 행사하였다. 작전권이 군령권이라면, 인사/행정/교육은 모두 군정권에 속한다. 따라서 평시는 물론이고, 전시인 6.25 전쟁 당시에도 장교 및 사병의 배치 및 진급/전역, 신병의 훈련과 간부의 교육 등은 모두 우리측 관할에 속하는 권한이었다. 국민방위군 역시 징집하여 바로 전투에 투입할 목적이 아닌, 후술되는 것처럼 후방으로 이송한 뒤 각 교육대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을 예정이었다. 벌어지는 참극은 모두 후방 교육대로 이송하는 동안 벌어진 것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즉, 국민방위군 자체는 유엔군사령부가 아닌 우리 쪽 육군본부에서 지휘 및 통솔 권한이 있었다.[6] 앞선 주석의 막장 이라크군에서 보듯, 허위로 교육대를 만들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인원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실제 편성인원보다 적은 수로 징집하고 나머지는 유령인원으로 할당하면 뒷소문 없이 깔끔하게 해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징집했을 뿐, 별도의 사단이나 여단으로 미리 편제를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대에서의 훈련 수료 후, 각 부대에 뿌려지기 마련이므로 인원 조작도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이다. 아무리 멍청하다 한들 수 만에 달하는 인원이 이동하여 소문이 안날 수가 없는데, 단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술책을 부렸다기엔 어폐가 있다. 인원이 편성되며 배당된 예산에 군침을 흘린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예산을 빼먹으며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았다고 보는 것이 선후관계에 타당하다 하겠다.]

4. 죽음의 행렬

당시 작전처장의 증언에 따르면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 군복 하나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만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 그리고 행군 중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 군수에게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방부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느라 양곡권 지급이 제대로 안 되었고, 내무부는 지방 행정기관에 양곡 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는 국방부와 내무부의 알력에 따른 것이다. 왜냐면 당시 국군과 경찰은 앙금이 깊은 사이였는데,[7] 경찰은 내무부 소속이었으므로 내무부가 국방부에게 곧이곧대로 협조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 끼니는 제대로 해결될 리 없었으며, 심지어 인민군 치하에 의용군 대접만도 못할 정도였다.[8] 북한에 의해 의용군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했던 서태원[9]의 증언에 따르면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 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라고 회고할 정도. 거지 중의 상거지란 표현은 다른 국민방위군 경험자 및 목격자 증언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관용구다.

게다가 때가 12월이고, 그것도 당시 유례없는 혹한이었는데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가 군인으로 소집했으니 알아서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값도 배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차량 같은건 있지도 않았다. 무조건 도보 행군. 이뭐병. 또한 국도는 UN군이 작전 도로로 통제하고 있고, 제2국민병 들을 샛길이나 산길을 통해 이동하여 피로가 더욱 극심하였다. 따라서 장정들은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 교실 하나에 수백명이 수용돼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면역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질병이 창궐하여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말 그대로 죽음의 행군이었는데, 문제는 이 행군이 끝난 것으로 국민방위군의 고난이 다 끝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제주도 교육대의 경우 육지에서 배를 타고 간신히 교육대까지 도착한 장정 중 3천명이 체력 부족이라고 돌려 보냈는데, 그냥 인근 마을에 눌러 앉아 거지가 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당시 헌병 사령관 최경록은 1951년 1월 대구로 가는 길에 가마니를 뒤집어 쓴 군인들이 거지처럼 서성거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군기가 이 꼴이 되다니'하는 생각에 혼내주러 갔다가 오히려 그들의 안내로 통해 굶어죽고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직접 보게 된다. 헌병 사령관의 전시 주업무가 후방에서 군사적으로 치안유지 하는 것인데 이때서야 국민방위군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고, 보통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조사하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2차 수사의 주역이 되어 책임자들 총살형에 큰 역할을 한다.

5. 예산 유용

법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방위대가 약 50만 병력임을 가정, 후방에 50여 개의 육군 교육대를 설치해 1개 교육대 당 1만여 명을 수용할 것을 명시했다고 한다.[10] 하지만 교육대의 육군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게다가 병력 운용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육군 장병들의 월급마저 계산해두지 않고 군복조차도 지급하지 않은 채 알아서 해 처먹으라는 식으로 던져주었다. 거기에 교육대 장병들은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의 백색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이들은 정규군으로서 훈련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11] 특히 사령관인 김윤근은 육군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 중국군(국부군)이나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경력자가 아니었다.[12]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 즉, 계급만 준장이지 정규군 장교가 가져야 할 군사적 자질은 아예 없었다. 참고로 대한청년단 간부들은 국민방위군의 전신에 해당하는 청년방위대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여기서도 예산을 횡령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군인으로서의 자질도 없고, 군 행정에 대한 지식이나 책임감, 직업 윤리 의식도 당연히 부족하며 당장 자기 보전과 부의 축적부터가 우선일 수밖에 없는 민간단체 인력을 군 간부로 충원한 것. 평시라도 이러한 군인 양성 및 예비대 조직의 운영은 퇴역한 예비역 장교들이나 부상 등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전선에 나갈 수 없는 상이 현역 장교들이 간부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창군 2년 만에 벌어진 전쟁이니 만큼 국군 출신 예비역 장교는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 만주군 혹은 중국군(국부군) 출신자로서 고령 등의 이유로 현역에서 물러난 이들은 존재했다. 그런데도 이들을 활용할 생각조차 안 했다. 무엇보다 상이 군인도 존재했는데 그들 역시 활용할 생각을 안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말도 안되는 행정은 육군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교육대의 장병들은 병력이 죽음의 행군에 필적하는 고생 끝에 도착하면, 자기들에겐 수용 능력이 없으니 다른 교육대를 알아보라는 식으로 계속 뺑뺑이를 돌리면서 이들을 수용한 것처럼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 당국의 발표로는 24억 원, 국회 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 원 내지 60억 원에 달했다.[13]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육군 대령 윤익헌 [14]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윤익헌 대령이 100여 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은 무려 3억 원이었다. 그 당시 국가 기관이었던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 원 가량 될 때였다. 그를 수사한 검찰관이었던 김태청은 훗날 "윤익헌 대령이 돈을 쓰듯이 물을 써봤으면 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게 당시 부산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실제로 물이 무척 귀했다.

1951년 3월 29일 정파별 3명씩 15명으로 구성된 '국회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1. 인원수 허위 보고에 의한 현금 횡령액 23억 5,126만원
2. 인원수 허위 보고에 따른 양곡 횡령액 20억 4,710만원
3. 공제액이란 명목으로 예하의 공금을 횡령한 액수가 28억 8,328만원
으로 위의 부정액만 72억 8,164만원이었다.(휴대용 제리, 자동차 구입, 명태등 현품 횡령 제외)

이는 50만명 기준으로 책정된 1951년 1~3월 3개월분 예산 209억 830만원중 약 1/3에 달한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는 김윤근과 윤익헌등 사령부에서만 해먹은 것이고, 예하 52개 교육대에서 얼마나 먹은지는 추산이 불가능 하다.

국민방위군은 1인당 1일 양곡 4홉, 취사연료비 40원, 잡비로 10원이 책정되었고, 50만명 기준으로 3개월분 예산 209억 830만원이 국회로 신청 되었다. 실제로 68만명이 모집 되었으니 턱없이 부족 한 것은 둘 째 치고, 한겨울인데 난방비, 의료비, 피복비는 아예 책정되지 않았고, 군사 훈련을 시킨다고 모집했으면서 훈련비와 부대 운영비 역시 없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국민방위군 장교 및 하사관의 봉급이 일체 없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부정은 필수적인 것이었다.[15]

이에 육본에서 돈과 양곡이 지급 되면 방위군사령군에서 일부 해먹고, 각 교육대의 장교 및 하사관도 먹고 살아야 하니 일부 해먹는다.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위해서 다 해처먹고 나면 국민방위군 장정들에게 돌아갈 몫은 턱 없이 적었다. 그나마 난방비나 피복비는 방위군사령부로 돌아갈 몫 조차도 없었다.

국민방위군에 할당된 예산에 따라 식량이 지급된다 하더라도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 받게 되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하루 5홉 5작을 지급받는 전쟁 포로만도 못한 것이었고, 빠듯한 예산에서 사령관부터 병들까지 다 떼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사령부는 예산 횡령을 위한 한 방편으로 장부 상으로 젤리()공장을 짓는다고 써 놓았다. 이런 어이 털리는 비리의 천태만상 속에, 굶주린 장정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습격하는 등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빈 속에 급하게 먹어서 토사곽란으로 죽은 장정들까지 발생하였다.

젤리(엿)공장의 경우 일단 만들어는 두었으나, 생산 능력에 비해 소비한 것으로 기록된 의 양이 6배가 넘었고, 자동차 250대를 구입했다더니 20대밖에 안 산 거였고, 명태 3,860,000짝을 산다더니 장부 상 기록의 1% 정도인 4000짝만 구입, 담요등 기타는 장부와 현품 차이가 많이 나는 등 예산 횡령 목록이 쏟아져 나왔다.

국회 조사를 통해 밝혀진 횡령 액수는 국민방위군사령부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유용한 것으로, 전국 각지의 교육대[16]에서 얼마나 빼돌려졌을지는 불명이다. 또한 횡령한 금액 중 상당액이 당시 국회에서 여당 노릇을 하던 신정동지회에 유입되었다고 한다.

당시 헌병사령부에선 부정액 계산방식이 틀려 현금 24억2,111만원에 군량미 1,887가마를 횡령했다고 했는데(2차 수사기인 6월 11일 발표) 헌병사령관 최경록 준장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많은 돈이 어떻게 유용되었는지를 조사했더니, 횡령액 중 1/3은 국회의 신정동지회에 정치자금으로, 1/3은 관계 요로에 무마비조로, 1/3은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유흥비로 소비 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국회 내에 자기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만들려고 70명의 신정동지회에 정치자금을 지원한 데서 일어난 사건이다.

참고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민간 업자와 일부 군인들의 연계로 벌어진 거대한 군납비리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러나 군납(軍納: 명사. 인가를 받은 민간 업자가 군에 필요한 물자를 납품함)이라는 말은 군에서 소요제기, 예산심사, 입찰 등등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업자의 납품이 이뤄지고 대금을 받는 과정까지가 군납이다. 이 과정에서 비리가 벌어졌다면 그것을 군납비리라고 하는데, 국민방위군 사건 전반에서 군납비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대부분 민간업자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자기들이 부대내의 장부조작과 횡령으로 예산과 물자 다 해쳐먹었으며, 정부에서는 아예 국민방위군이 살아남기 위해 최소 한도로 필요한 쌀과 동계피복을 보급 해줄 개념조차 상실한 상태였다. 군의 물품과 예산을 어떻게 분배하고 사용할 것인가 등은 군 내부의 군수(軍需: 군사물자) 문제이며, 군 예산과 군수물자를 횡령하여 마음대로 유용한 국민방위군 사건은 민간이 개입한 군납비리가 아닌 내부 군수비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책임소재가 파악되어 처벌받은 사람들도 전부 국민방위군 간부들이지, 민간 업자의 존재는 아예 없다.

6. 사망자 수

이승만 정부의 공식기록에는 1,000~2,000명 사망으로 되어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0,000~100,000명 가량이 죽었다고 하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50만 명의 대원 중 20%가 병사 혹은 아사했다고 되어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0,000여 명으로 되어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승만을 열렬히 찬양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9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죽은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말했다.

당시 서민호 의원은 국회에서 "수천 명이 굶어 죽어 갔고, 귀환 장병들도 20%는 생명 유지가 불가능하며, 80%는 노동이 불가능"이라고 발표하여 대내외 기관에서 인용하는 공식자료화가 되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조직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5만~ 8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계측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당시 국회조사에 의하면 상당수의 사망자가 행려병자로 처리되었다고 하며 약 100일 동안 각종 질병, 동상,아사, 도주등의 이유로 전체의 40%에 해당하는 약 27만여 명이 사라졌다고 한다.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그 동안 다수의 매장지가 개발되면서 유해가 발굴되었는데 전부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미국 통계에 따르면 6.25 전쟁 내내 한국군 사망자는 14만 명 정도이다.[17]

다만 남정옥이 지은 <6.25 전쟁시 예비전력과 국민방위군>을 보면 당시 육군 보도과 발표 내용인 사망자 1,234가 맞다고 한다. 나머지 실종자들은 중간에 집에 돌아 간 것이라고 한다.[18]

사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수를 정확히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행진 도중에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준 게 아니라 대충 파묻어버렸고, 이 사건을 다룬 재판조차 워낙 빨리 끝나버리는 바람에 사건의 진상도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채 묻혀버리는 바람에 오늘날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19]

7. 사건에 대한 책임처벌과 정치적 영향

국민방위군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가 되었으나,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1951년 1월 20일 기자회견에서 "백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유감이다."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또한 국회에 출석한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실에 대해 묻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제 5열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기 바란다."라고 사건을 왜곡했다. 여기서 신성모가 언급한 제 5열이란 첩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국전쟁 당시에는 곧 북한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며, 다시 말해 신성모는 국민방위군이 굶주리고 죽어간다는 이야기가 모두 북한이 퍼뜨린 유언비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20]

김윤근과 신성모가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숨기려 했던 데에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바로 둘 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김윤근은 씨름꾼 출신으로 일제 때 일본군 사병으로 복무하다가 해방이 되자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6.25를 전후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신성모는 이승만의 말이 끝나면 눈물을 흘려 낙루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이승만에게 아부를 다하여 역시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국회가 국민방위군 사건을 문제삼아 신성모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강을 건너다가 말을 바꾸어 탈 수 없다!"라고 거부하며 신성모를 감싸려 했다.[21]

하지만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굶어죽고 병들어죽고 얼어죽거나 도망쳐서 사태의 진상을 말하는 경우가 워낙 많다 보니, 아무리 김윤근과 신성모가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국민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건 수사가 진행되었고,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1951년 5월 6일 1심 재판에서 선고된 형량이 너무 낮았다. 연루자 16명중 실형 4명, 파면 10명, 무죄 2명이었다. 사령관 김윤근에게는 무죄가, 부사령관 윤익헌에게는 고작 징역 3년 6월을 선고하였을 뿐이었고 나머지는 고작 징역 1년 6월만 선고하였다. 당시 재판장은 국방부 정훈국장인 이선근이었는데, 김윤근, 윤익헌과 이미 잘 아는 사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도 김윤근, 윤익헌은 반성은커녕 잘못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 판결을 본 국민들은 격렬하게 재판을 규탄하였으며 정부에 대한 불신이 점차 커져갔다. 특히 신성모와 김윤근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이 극에 달했다. 이승만은 이미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1951년 5월 5일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경질시켰고, 후임으로 서둘러 5월 7일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했다. 또한 5월 14일에는 부통령 이시영이 작금의 사태에 대해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고 사직서를 쓰고 물러났을 정도였다. 6월 23일에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하였다.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 김윤근은 1951년 5월 17일에 구속 수감되었고, 합동수사단은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원, 보급과장 박기환, 군수처장 김희, 회계과장 장의두, 회계과장 보좌관 노용식, 10단장 송필수, 15교육대장 박철, 27교육대장 임병언 등 11명이 고등군사법원으로 송치 되었다. 이어 7월 5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군사재판은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를 하였다. 몰려든 인파를 위해 교정에 스피커까지 설치했고, 국방부장관 이기붕, 최경록 헌병사령관, 김석원 장군, 그리고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까지 방청을 나왔을 정도였다.

고등군사법원에 송치된 11명중 군수처장 김희와 회계과장은 빤스런하여 실종 상태였고, 회계과장 보좌관 노용식은 파면되었다고 그냥 넘어가 결국 2차 재판에 회부된 인원은 8명 뿐이었다. 재판부는 재판장에 병기감 심언봉 준장, 재판관에는 작전국장 이용문 준장, 감찰감 안춘생 준장, 군수국장 김형일 준장, 법무사 계철순 소령으로 구성되었다.

1951년 7월 15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왔을 때 한 답변이 걸작인데, 위에도 언급한 김태청이 전 육군총장 정일권 소장에게 "(국민방위군사령관)김윤근일등병의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느냐?"하고 묻자 정일권은 "이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검열관으로 참석했던 김석원 장군은 이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이봐! 오늘 답변 그게 뭐야! 당장에 계급장을 떼어버려!"라고 하였다. 당시 정일권의 계급은 육군 소장, 김석원은 육군 준장이었다. 어찌보면 하극상이라 한때 징계설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 정일권은 겨우 만주군 육군대위, 김석원은 일본 육군 대좌 출신으로 사실 국군 이전의 군경력[22]은 김석원이 한참 대선배였다. 사실 김석원이 미 군사고문단과 불화를 겪지 않았다면 커리어가 가장 좋던 그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그냥저냥 무마되었다.

고등군사재판은 논란이 상당히 많았는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재심하는 것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나는 게 아니냐는 법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신임 이종찬 총장은 고심 끝에 적용법이 바뀔 경우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국방경비법이 아닌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으로 적용법을 바꾸도록 지시하고 재심을 명하여 7월 19일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당시 사령관 김윤근장인인 신성모가 빼돌릴거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이들은 대구 근교 야산에서 8월 12일공개처형된다. 이렇게 이례적인 조치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유당 정권에서조차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승만 다음 세력자였던 신성모가 세력을 잃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여 인기가 급상승한 이기붕은 후계자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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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외 5명에게 총살형 집행 순간이다.

처형된 자는 사령관과 보급라인으로 사령관 육군준장 김윤근, 부사령관 육군대령 윤익헌, 재무실장 육군중령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환, 보급과장 박기환이다. 그리고, 대구 소재 제 10단장 송필수는 징역 5년을 받았지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된지 모르겠는데 재판 받은 8명중에서 15교육대장 박철, 27교육대장 임병언은 선고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서 선고는 무죄 송필수 포함 6명만 나왔다.

윤익헌 등이 횡령한 막대한 액수의 자금이, 단순히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더 높은 쪽'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의혹이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나오고 있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횡령한 자금 중 적지 않은 액수가 신정동지회 등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외에도 다른 '높으신 분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심증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자들이 신속히 총살형을 당해 버리는 바람에 이 돈이 얼마나 누구에게, 어떤 용도로 흘러들어 갔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의 추적은 거의 불가능한 편이다.

이 사건을 처음으로 수사했던 101헌병대장 송효순(宋孝淳, 당시 중령)은 "횡령한 수십억 원의 행방이나 용도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의 관련자들이 대부분 현존하고 있어 밝히기가 곤란하군요. 다만 돈이 흘러간 곳이 아주 광범해서 각계의 요로에 거의 다 미쳤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지요. 결과적으로 그 죄상은 천인공노할 만했습니다. 조사 결과 사령관 김윤근 준장이 그 돈을 횡령해서 개인적으로 축재한 것은 별로 없었어요"라고 밝혔다.[23] 지금은 관련자들이 대부분 사망했지만, 송효순이 이 증언을 한 1970년대 초반(1972년 중앙일보 연재)만 해도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시퍼렇게 두 눈 뜨고 살아 있던 상황이었다.

8. 해산

개요 부분에서 밝힌데로 북한 점령 예상 지역에 남아 있는 청장년들은 북한군에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갈 상황이였다. 이에 이들을 강제로 후방의 안전한 장소로 이동 시킬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이시기에 중국 인민지원군 최고 사령관 팽덕회중국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에 "북한의 징병 문제가 아주 이상하다. 16~45세의 남성들을 모두 징병하고 있다. 대부분은 밥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있다."라는 전문을 보냈다. 즉 서울/경기 일대의 청장년들을 국민방위군을 강제로 다 끌고 가지 않았다면 북한에 끌려갈 상황. 결국 북한 점령 예상 지역의 청장년들의 소개라는 목적은 대 성공이였다.

하지만 또 하나의 목적인 국군의 병력자원 확보 측면에서는 대 실패 했는데, 국민방위군 사태를 겪은 제2국민역 68만명은 하도 고생하는 바람에 체력등이 저질이 되어 버려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라 대부분이 귀향 조치 되었다.

근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군대에 가기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17세~40세의 남성들 중에서 학생, 공무원과 함께 징병예정자들은 제외하고 국민방위군에 소집한 것이라 처음부터 국군의 병력자원은 아니었다. 예비 병력자원이라면 모를까. 당시 남한내 징병 가능한 대상은 200만명이였는데 문제를 이들을 무장시킬 장비가 없었다. 현재 국군의 소모분 만큼만 징병하면 되기 때문에 젊고 쌩쌩한 청년들만 징병하면 되지, 굳이 국민방위군에 소집될 나이의 고령자들 까지 징병 할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징병되어 총을 잡을께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 낫과 삽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소집되어 남쪽으로 내려 가자 농촌과 산업계에 일할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또한 이들 68만명을 후방으로 소개한 이후에도 전방의 국군들은 징병을 통해 병력 보충하는데 문제 없었다.

이에 1951년 1월 15일 국회에서 최초로 문제가 제기된 이래, 2월 17일 36세 이상 장정들을 귀향 시켰다.(어차피 이 연세의 분들은 군대 가시면 짐이다.) 3월 15일에 서울을 재 탈환 하자 동월 25일에는 26세 이상 장정들을 귀향 조치 하였다. 이후 국민 방위군 사건이 심각해지자 동월 30일에는 전 교육대를 해산해 버렸다.

동년 4월 30일 국회에서는 국민방위군 폐지법안이 통과 되고, 5월 12일 국민방위군 폐지법을 정식으로 공포 함으로, 국민방위군은 법적으로 완전히 해체 되었다.

한편 국민방위군을 관리하는 국방부 국민방위국은 5월 5일자로 해체 되는데, 동시에 예비 제 5군단이라는 것을 창설한다.(1950년 7월 청천강 전투의 패전으로 2군단(장 유재흥)이 해산되고, 1951년 5월 26일에는 현리 전투의 적전도주로 3군단(장 유재흥)이 해산 되어 주문진의 1군단(장 백선엽)만 남은 상태)

초대 군단장은 군번 1번 외길인생 이형근 소장이였고, 당시 국민방위국 국장이었던 김종갑 준장을 부군단장에 임명 하였다. 예하 부대로 제101사단(마산), 제102사단(통영), 제103사단(울산), 제105사단(창녕), 제106사단(여수)이 있었으며 예하 101연대~117연대까지 각 3개 연대씩 배정 되었다.(중간에 4가 들어가는 연대는 공석) 이때는 향토방위, 치안확보, 잔비 소탕, 신병 수송업무를 수행 하였다.

101근무 사단은 미1군단 지원, 103근무사단은 미10군단 지원, 105근무사단은 미9군단을 지원 하였다. 그리고 100근무여단은 동부전선의 한국군 1군단, 200근무여단은 서부전선의 한국군 2군단을 지원 하였다.

이들은 군번앞에 영문자 R이 붙은 군번을 받아 일명 'RO'군번으로 불린다. 제5군단은 동년 11월 1일 예산 문제로 해산 되고 지원받는 부대에 배속되어 노무 부대 체계로 전환 되었다. 한국군에서는 이들을 '지게 부대[24]'로 불렀고, UN군은 지게가 알파벳 'A'자 처럼 생겼다고 해서 'A Frame Army' 라고 불렀다.

전쟁 기간동안 9만명의 노무자들이 RO군번으로 동원되어 지게를 들고 군수품과 부상자들을 나르며 헌신 하였다.(근무부대 소속이 아니었던 노무자까지 합치면 약 30만명)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 군수품을 같고 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막상 도착 하니 병사들이 다 죽어버려 대신 수류탄을 던지며 싸우는 등 준 군인으로 역활을 하였다.

이들 지게부대중 7,909명(장교 3,288명)은 국민방위군 출신이었다. 1953년 7월 1일에는 새로운 군번을 부여 받으며 현역에 편입 되었는데 R자가 떨어져 나간 제대로된 군번이었다. 이때 방위장교 3,395명과 방위 사병 5,486명이 현역 군번을 받았다.(이로 인해 R군번/현역군번을 둘 다 받은 사람은 3,101명)

문제는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간 68만명중 RO군번이든 현역이든 합쳐서 7,909명만 군번이 있어 쥐꼬리만한 참전자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었고, 나머지는 군번이 부여 되지 않아 병적기록표가 없어 복무 사실을 확인 할 수 없었다.

9. 이야깃거리

6.25 전쟁 기간에 우리쪽 군인들이 후방에서 추위에 굶주리다 처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거의 여기 끌려갔다고 보면된다. 당시 국군의 병참이 형편없긴 했어도, 국민방위군 사건처럼 형편없지는 않았다. 심지어 북한 의용군에 끌려가도 밥은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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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이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자 이승만 정권에 크게 실망한 이시영은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며 국민에게 전하는 글을 남기고 부통령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 나는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배치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데다가 탐관오리는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하되 고칠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

시인 신동엽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또한 이 때 차출되었다. 신동엽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민물를 잡아 생으로 먹었다가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었고, 끝내 간암으로 악화되어 1969년에 요절하게 되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여기서 살아남아, 다니던 서울대학교 공대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한 의원이 실상 파악을 하러 갈 때 어느 방위군 병사가 거지꼴로 가마니를 뒤집어쓴 채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보고 어디로 가냐고 묻자 이 병사는 악에 받쳐 "김일성한테 간다, 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북한으로 튀면 더 잘 먹을거라고 생각한 정도니 당시 상황이 나온다.

학자에 따라서는 국민방위군 자체가 북한의 공격을 막는다는 1차 목표 이외에도 서북청년단과 이승만 친위세력이 군과 별도 조직으로서의 무장을 하는 단체를 가진다는 목적으로 보기도 하나, 친위대를 만들겠다는 목적에 이렇게 예산배정과 보급을 개판으로 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별 설득력은 없다. 기아에 굶주리는 친위대가 있을리가 없다.[25]

당시 육군 통역장교였던 리영희 소령은 이때 참상을 목전에서 봤다. 리영희의 주장에 따르면, 군사고문단인 미 육군 장교와 함께 무리하게 보급품을 빼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리영희는 ''6·25전쟁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고 회고하였다.# 사건을 목격하고 겪은 리영희는 이후 그의 사상 체계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최종 책임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정일권인데, 정일권의 한국전 회고록이나 이후 최종판 회고록이 대단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수록한 반면에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

훗날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된 홍사중의 회고에 의하면, 운이 좋아서 당시 진주의 국민방위군 교육대에서 군수처 경리담당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 감사가 와도, 서류는 절대 들춰보지 않고 교육대장 및 군수처장의 접대만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군수처장이 수사가 시작되었으니 같이 도망가야 한다면서 직인까지 찍혀있는 귀향증[26]을 들고 왔다고 한다. 더 기막힌 건 홍사중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경리담당에서 군수처장 보좌관으로 승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6.25 전쟁에서 있었던 병크 중의 병크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한마디로 이건 일본군이나 독일 국방군미군 또는 소련군 포로에게 했던 짓거리를 자국의 예비병력 대상으로 저지른 꼴이다. 예를 들자면 독일군이 독소전쟁에서 사로잡은 소련군 포로들을 식량도 지급하지 않고 혹한에 수백킬로미터를 걷게 하여 포로 사망율이 30%에 달하게 한 일이나[27], 일본군의 유명한 죽음의 행진이 있다. 하지만 전자는 애초부터 소련군 포로를 절멸시키려는 의도로 실시된 것이고, 여기에 책임이 있는 독일군인들은 후에 전쟁이 끝난후 전범 재판에 넘겨져 사형과 같은 엄벌을 받았으며, 후자는 이걸 군대는 커녕 도저히 인간이라고 불러줄 수 없는 놈들이 정신나간 상태로 저지른 일인데[28], 이 국민방위군 사건의 관련자들은 적군도 아니라 자국군에 이런 짓을 하고도 종전 후에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이들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놈들인지 알 수 있다.

보도연맹 사건이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되는 특정 계층의 국민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실행한 사건이라면, 이건 자국의 예비병력에 대한 관리 의무를 방기한 끝에 제노사이드에 필적하는 참사가 벌어진 셈인 것이다. 도현신의 <국가의 배신>에서는 "중공군이나 북한군이 아군을 병사나 노역부로 쓰지 못하도록, 그들이 점령할 것으로 예측되는 지역들에서 미리 청장년들을 포섭하는 것"이 국민방위군의 진정한 목적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미 북한 점령 시기 의용군으로 강제징집한 전례가 있었고, 국민방위군의 창설 목적 역시 자국의 예비병력을 후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국민을 자국의 예비병력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적의 예비병력으로 봤다는 확대해석은 편파적인 것이다. 물론 국회에서는 예산까지 배정했고, 이것은 군수비리때문에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지만, 결과만 보면 그렇게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혀 관리나 신경이 없었다.

그외에도 울릉도에서는 국민방위군 간부가 월권행위를 해서 민폐를 끼쳤다. 여기서 기자와 담화하는 국민방위군의 박경구백의사의 간부이자, 독립유공자이다.#, #

1955년에 정부가 한번 신문광고를 내서 국민방위군 사망자 신고를 받아 331명을 인정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전사통지서나 그밖의 서류가 있어야만 신고를 접수해주었는데 과연 국민방위군 소집자들중 몇이나 제대로 된 서류를 받았을는지...[29]

파일:attachment/국민방위군 사건/국민방위군_희생자들을_위한_추모비.jpg

2002년에서야 경북 영천[30]에 국민방위군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2010년 활동을 종료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내면서 정부의 실태조사와 보상 및 사과, 위령제, 유해발굴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0. 대중매체

야인시대 88화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분노하면서 일갈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신성모는 필사적으로 발뺌하려 했지만 정황이 너무 드러난 게 명확한지라.... 그리고 이 이전(87화)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김두한에게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나 김두한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김두한은 당시 고려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으니 이 사건과 김두한을 엮은 것은 그냥 주인공이라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다못해 내무부장관직을 제안 받았다는 것은 김두한 스스로의 주장이라도 있는데, 국민방위군 사령관 드립은 어디서 나왔는지 불명이다.

태백산맥(조정래)에서도 자세히 다뤄진다. 간략하게 서술된 이 문서보다 그 참상이 백 배는 더 자세하다. 아예 챕터명 하나가 '죽음의 대열, 해골의 대열'인데, 실제 당시에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민가에 끼치는 엄청난 민폐, 그 처우에 분노하는 몇 안 되는 올바른 군인과 뒤늦게 해산이 발표되자 징집된 이들은 이동수단도 없고 돌아갈 기력도 없이 그냥 그대로 수천수만 단위의 거지떼가 되어버리는 안습한 결말까지. ...그냥 직접 보자.

태백산맥 9권에서는 이 국민방위군 사건을 은근히 빗대어 국회의원과 군 장교가 서로 "전쟁물자만 뒷대주면 우리나라 젊은 놈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소. 죽어도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천한 것들이 아직 얼마든지 득시글득시글 한데..."라고 주고받는 대사가 실려 있다. 물론 저자의 창작이지만, 사실 저런 대사를 고위층들이 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전쟁 당시 권력층들의 인명경시 풍조는 매우 강했다.[31]. 이들이 대부분 일본에 빌붙어 다른 이들을 착취해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며 살던 작자들임을 추가하면 더욱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11. 다른 나라의 경우

나치 독일에선 전쟁 후반에 이르러 소련군과 연합군에게 탈탈 털리자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으로 민간인들에게 일부를 제외하곤 엉성한 무기와, 보기에만 그럴싸한 완장을 달아주어 전선으로 내몰았다. 바다 건너의 막장군대가 있던 나라에선 미군의 본토 상륙작전에 대비해 국민의용대를 창설하여 1억 전국민 옥쇄전법을 실행하려고 했다. 또한 영국에서도 1차대전 당시 키치너 육군(Kitchener's Army)이, 2차대전 초반에는 홈가드, 여성 본토방위대 등의 의용대가 조직된 바도 있다(당연히 국민방위군처럼 형편없이 대우하진 않았다).

그나마 국민돌격대는 어차피 좌우에서 소련군과 연합군이 밀려드는 망하기 직전의 제3제국인지라 무기버리고 완장 떼고 튄다면 헌병대에 걸리거나, 혹은 소련군의 학살 등을 당하지 않는 이상 살아남기 쉽고, 1억 국민 총옥쇄는 마찬가지로 망해가는 나라인데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관동군 관광여행 이후 무조건 항복을 해서 실현되진 않았다. 그리고 이런 국민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키는 행동을, 그것도 다 망해가는 막장국가에서 최후의 발악으로나 시도했던 것을 망해가는 막장국가도 아닌 국가에서 자국민에게 선사한 일이 바로 이 국민방위군 사건인 셈이다.

게다가 이들에게 부족한건 무기였다. 최소한 모아놓고 의식주는 줬다. 한마디로 '국민돌격대'나 '1억 총옥쇄'는 남은 국민들을 박박 긁어 모았지만 무기가 부족했고, 설령 의식주가 없어도 주는거지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은 재입대 시켜놓고 의식주도 안 주는 행위를 자국민 상대로 한 것이다.

12. 관련 문서



[1]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편 1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2] 이 사람은 이승만을 가리켜 세종대왕과 맞먹는 인물이라고 찬양할 만큼, 열렬한 이승만빠다. 링크 그 이승만빠조차도 저 사건만은 절대로 옹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막장이었다는 것.[3] 당시 중공군의 한만국경 월경[4]인민해방군이 아닌,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의 의용군인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탓에 중공정권은 꽤 오랫동안 UN에서 침략자로 규정되었다.[5] 남한 출신자에 대한 강제징집인데다,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자원입대하지 않은 이상 북한 정권을 진심으로 따를 리는 없었다. 따라서 강제징집된 청년들이 탈영하여, 다시 국군에 입대하는 일도 빈번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때 투입된 인민군 육군 병력 다수가 남한 징집자들이어서 탈영 비율이 매우 높았다.[6] 유엔군사령부에서 군정, 군령권을 모두 행사했다면 유엔군사령부를 욕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후술되듯 관련자들은 모두 우리 쪽 육군 인원들이었으며, 이들의 처단 역시 우리 쪽 군사재판을 통해 이뤄졌지 유엔군사령부에서 주관한 것이 아니다.[7] 앙금은 해방 직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중을 가까이에서 억압한 것은 일본 경찰이었다. 당연히 높으신 분들보다 일선 순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와 증오는 굉장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순사온다는 말이면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는 소리까지 있었으니... 문제는 미군정이 들어서며, 내부 실정을 아는 경력자인 순사들이 그대로 미군정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된 것이다. 즉, 왕년의 친일파가 경찰이 되버린 셈이다. 일본 순사들이 대한민국 경찰 제복을 입고 거들먹대는 꼴에 분통이 치민 이들은 모조리 국군 특히 육군으로 입대했고, 이후 경찰과 육군은 총격전(!!!)을 주고받을 만큼 험악한 사이로 발전한다. 물론 국군에도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들이 즐비했고 지금 시선에서야 둘다 친일파라고 하겠지만 일본 육군, 만주군의 하급장교나 하사관에 불과한 이들이 대민마찰을 일으킬 일은 적었다. 따라서 당시 관점에선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는 친일파로 안봤다. 당장 경찰놈들이 부대로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으로 부대원을 선동하며 벌어졌던 여수·순천 10.19 사건의 주역, 남로당 김지회조차 왕년의 일본 육군소위였다.[8] 내무부의 비협조 말고도, 전시 상황인 탓에 진짜로 양곡이 없어서 아예 면장, 읍장들이 텅 빈 양곡창고를 구경시켜주는 일도 즐비했다.[9] 4.19 혁명 이후 민의원 역임[10] "실제 소집된 인원은 적게는 80만에서 많으면 100만여 명까지 보고 있기도 하다." 《밀리터리 실패열전》 2권 P25[11] 일부는 단기 교육을 받고 장교 계급을 받긴 했다. 서북청년단 일원으로, 전쟁 전 북한 지역에서 반공 게릴라전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진작에 사관학교나 정규군으로 빠졌다.[12] 김윤근이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군 사병을 한 적은 있다.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4년 7월 9일 발행/ 205쪽[13] 플래툰의 기사와 밀리터리 실패열전 2권에 따르면, 이는 화폐 가치의 변화를 감안할 때 현재의 수천억 ~ 수조 원에 달하는 액수라고 한다.[14] 지청천 휘하의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일단은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청년단 등지에서 경리나 회계를 맡아본 경력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돈을 구해오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15] 현대 멕시코 경찰이 왜이리 부패 했냐면 월급이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아전들이 부패한 것은 이들의 월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6.25 이후 초기의 한국군이 부패한 이유는 울급이 턱없이 적었기 때문이다. 국민방위군은 월급이 아예 없었다.[16] 50여 개 교육대, 주로 학교나 창고 등의 건물을 이용하였다고 함.[17] http://www.voakorea.com/a/article--625--124496254/1348359.html[18] 다만 이 사람은 다수의 6.25 서적을 제작하긴 하였지만, '우남이승만연구회 이사'로 이승만 대통령의 군사 외교, 국가수호노력 등의 책을 제작하는 이승만 숭앙주의자다. 이 문서만 해도 김윤근 방위사령관이 신성모 장관의 사위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책에서는 그런 내용은 일절 없고 김윤근 사령관과 윤익헌 부사령관은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출신이라며 지청천과 국민방위군의 관계에 더 주목 한다.[19] 이런 사항은 국민방위군만큼이나 참혹했던 보도연맹 학살사건도 마찬가지인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국방부에 보관되어 있던 보도연맹 학살에 관련된 자료들을 모두 없애버리는 바람에 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20]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4쪽[21]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5쪽[22] 김석원 장군은 중일전쟁에도 참전하였다.[23] 출처: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4/ 111쪽[24] 불행히도 이들은 정식 군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서, 징집 영장이 나와 또 다시 군대로 끌려가는 일을 겪기도 했다. 군대 두 번 가는 일을 몸소 겪었던 셈이다.[25] 에티오피아 제국의 메할 세파리(황실 근위대), 제3제국슈츠슈타펠, 중화민국 국민정부장제스 휘하 중앙군이나 일본 제국의 황실 근위사단 전부 좋은 복지 해택과 고액의 봉급을 받으며 최선급 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이였다.(단, 무장친위대는 최고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중간에 농간을 부려 좋은 장비를 친위대에게 먼저 보급한 것으로, 국방군에 비하면 정예군은 아니였다)[26] 당연하지만 이런건 전시상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게 아니다![27] 최근에 수정됨. 포로는 필요없다 참조.[28] 여기에 책임이 있는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직접 포로학대 명령을 내리진 않았지만, 전후에 관리부실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29]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한 국민방위군 소집자는 분명히 교육대에서 군번을 부여받았는데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30]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일으킨 제11기계화보병사단이 창설된 곳이다.[31] 대표적인 예로 이승만 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의 경우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맥아더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 청년 200만 명을 동원하여 훈련시키면 간단히 이길 수 있다."라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했다가, 맥아더로부터 무능력자로 낙인이 찍혀 결국 해임되었다. 채병덕의 발언이 왜 문제인가 하면, 단순히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병력들한테 알맞은 양의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지 못하면 국민방위군 꼴이 나기 때문이다. 113만 대군을 동원했던 수나라가 왜 훨씬 적은 병력을 가진 고구려한테 패배했는지, 1차 세계 대전에서 왜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했던 러시아가 그보다 적은 수의 군대를 가진 독일한테 참패했는지를 떠올리면 채병덕의 발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