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55:04

신동엽(시인)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white><tablebgcolor=#fff,#1f2023>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8-2005)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98년
1월
신윤복
2월
안향
3월
이상화
4월
석주명
5월
이익
6월
송흥록
7월
조철호
8월
윤봉춘
9월
한성준
10월
정태진
11월
최제우
12월
이순신
1999년
1월
이중섭
2월
혜초
3월
유형원
4월
최한기
5월
김창숙
6월
권율
7월
맹사성
8월
황현
9월
김시습
10월
최세진
11월
정부인 안동 장씨
12월
이승훈
2000년
1월
남궁억
2월
나혜석
3월
김육
4월
서경덕
5월
진감국사(혜소)
6월
하규일
7월
정인보
8월
김좌진
9월
김수영
10월
류희
11월
김창하
12월
장승업
2001년
1월
김부식
2월
최용신
3월
강항
4월
함석헌
5월
지눌
6월
이병기
7월
이현보
8월
오세창
9월
허균 · 허난설헌
10월
설총
11월
의천
12월
송만갑
2002년
1월
정약종
2월
김환기
3월
이상재
4월
박두성
5월
박수근
6월
조지훈
7월
성삼문
8월
박효관
9월
김병연
10월
신숙주
11월
김승호
12월
손진태
2003년
1월
안확
2월
양주동
3월
이동백
4월
양팽손
5월
정지용
6월
정몽주
7월
김장생
8월
박세당
9월
유정
10월
월명
11월
이인성
12월
유길준
2004년
1월
조희룡
2월
신흠
3월
이항로
4월
이경석
5월
의상
6월
백광홍
7월
이첨
8월
김창조
9월
조헌
10월
최항
11월
장욱진
12월
박두진
2005년
1월
정정열
2월
이예
3월
강경애
4월
신동엽
5월
임윤지당
6월
김종직
7월
강정일당
8월
이규보
9월
나철
10월
이승휴
11월
효명세자
12월
최북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파일:은관문화훈장 약장.png
은관문화훈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1974
박화성
소설가
1978
김환기
화가
1978
나운규
영화감독
1978
이중섭
화가
1978
현진건
소설가
1980
박수근
화가
1980
조치훈
바둑기사
1984
박두진
시인
1988
김광균
시인
1988
김중업
건축가
1988
이봉상†
화가
1989
조남철
바둑기사
1989
조훈현
바둑기사
1992
김영주†
화가
1992
김춘수
시인
1992
장리석†
화가
1992
전광용†
소설가
1992
한갑수
교수
1995
박노수
화가
1995
전왕영†
시인
1996
이창호
바둑기사
1998
김남조
시인
1999
박홍근†
아동문학가
2001
권영우†
화가
2001
박용철
시인
2001
박태현
작곡가
2001
신경림
시인
2001
유종호
문학평론가
2001
이지관
문화연구가
2001
최일남
소설가
2001
홍연택†
지휘자
2002
고은태[1]
시인
2002
김종하†
화가
2002
나춘호
출판가
2002
민경갑†
화가
2002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
2002
이수홍†
한국문화협회 이사장
2002
이오덕
아동문학가
2002
이형기
시인
2002
이호철†
소설가
2002
정수봉†
교육인
2003
박봉석
사서, 국립도서관학교 교장
2003
신동엽
시인
2003
이종상
화가
2003
천상병
시인
2003
황병기
국악인
2004
김동혁[2]
연극인
2004
김사엽†
국문학자
2004
김서봉†
화가
2004
김충현†
서예가
2004
김희조
지휘자
2004
박연희†
소설가
2004
엄대섭†
도서관연구회장
2004
임동권†
민속학자
2005
고우영
만화가
2005
김성구[3]
불교인
2005
김충실[4]
무용가
2005
전숙희†
수필가
2005
이문열
소설가
2006
이규태
언론인
2006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
2006
한명희
국립국악원장
2006
홍기삼
교육인
2007
김주영
소설가
2007
이강덕†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
2007
안병희†
국어학자
2008
박광진
예술인
2008
오세영
시인
2008
최종태
조각가
2008
한백유[5]
화가
2009
이미자
가수
2010
김희진
무형문화재 매듭장
2010
레프 콘체비치
러시아인 한국학자, 훈민정음 해례본 러시아어 번역 공로
2010
백건우
피아니스트
2010
백성희†
연극배우
2010
장민호
연극배우
2010
전혁림
화가
2011
신영균
영화배우
2011
이수만
가수, 연예기획사 사장
2011
하춘화
가수
2011
이근배
시인
2011
해의만
국악인
2012
최영필[6]
가수
2012
김기덕
영화감독
2012
김순옥[7]
드라마 작가
2012
손숙
연극배우
2012
윤일봉
배우
2013
구봉서
희극인
2013
안성기
영화배우
2013
조용필
가수
2013
최인호
소설가
2013
김혜자[8]
가수
2014
김승옥
소설가
2014
박정란
드라마 작가
2014
송해
희극인
2014
최영한[9]
배우
2015
이천백[10]
희극인
2015
이덕화
배우
2015
이성희
음반제작자
2016
김윤식
문학평론가
2016
백영수
화가
2016
홍경일[11]
배우
2016
김명자[12]
배우
2016
김덕용[13]
희극인
2017
김남진[14]
가수
2017
박근형
배우
2017
윤여정
배우
2018
이순재
배우
2018
김민기
가수
2018
조동진
가수
2019
김혜자
배우
2019
양희은
가수
2019
봉준호
영화감독
2020
변인철[15]
배우
2020
고두심
배우
2020
유영기(1936)
인간문화재 궁시장
2021
김병기
화가
2021
이장희
가수
2021
이춘연†
영화인
2021
안숙선
국악인
2021
한석홍†
사진 작가
2022
강수연
배우
2022
박찬욱
영화감독
2023
원종철
삼원인쇄 대표
2024
신순기[16]
배우
2024
강부자
배우

[1] 필명 고은[2] 예명 김동원[3] 법명 월운[4] 예명 김백봉[5] 예명 한묵[6] 예명 금사향[7] 필명 김수현[8] 예명 패티김[9] 예명 최불암[10] 예명 남성남[11] 예명 남궁원[12] 예명 김지미[13] 예명 남보원[14] 예명 남진[15] 예명 변희봉[16] 예명 신구
}}}}}}}}} ||

대한민국의 시인
신동엽
申東曄|Shin Dong-yup
파일:껍때기는가라.jpg
출생 1930년 8월 18일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사망 1969년 4월 7일 (향년 38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아호 석림(石林)
직업 시인
수훈 은관문화훈장(2003년 추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학력 <colbgcolor=#fff,#1f2023>부여부소공립학교 (졸업)
전주사범학교 (중퇴)
단국대학교 문리학부 (사학 /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 석사 수료)
본관 평산 신씨
배우자 인병선
가족 아버지 신연순, 어머니 김영희
장남 신좌섭, 차남 신우섭, 장녀 신정섭
등단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1959) }}}}}}}}}


1. 개요2. 일생3. 기타

[clearfix]

1. 개요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申東曄)은 대한민국시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석림(石林)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김수영(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는다.

2. 일생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태생이다. 1944년 부여국민학교 (현 부여초등학교) 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한다. 이후 단국대학교에 입학해 사학을 전공했으며, 1953년에 졸업했다.[1]

1950년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고, 1951년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픈 나머지 를 함부로 먹었다가 디스토마에 감염되었는데, 이는 그의 요절의 원인이 되었다.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의 자취방에 살다가 돈암동 네거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인병선[2]을 만났고 1957년 결혼했다. 결혼한 그 해인 1957년, 인병선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수학하는 대신 가난한 시인과의 삶을 택하고 학교를 중퇴한다. 그리고 신동엽의 고향인 부여로 내려갔다.

인병선은 부여에서 양장점을 열어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고, 신동엽은 충남 보령시의 주산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1958년부터 폐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교편에서 물러난 후 처와 자식들을 다시 서울 돈암동 처가로 돌려보냈다. 자신은 부여에서 요양하며, 이때 글에 집중한다.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조선일보 1959년 3월 24일자를 통해 두 번째 작품을 발표하는데, 그게 바로 6.25 전쟁 전후기의 빨치산을 애틋하게 노래한 <진달래 산천>이다.[3]

다행히 1960년부터 다시금 건강이 좋아졌고, 신동엽 역시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며, 이때 교육평론사에 입사한다. 이번엔 돈암동이 아니라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해 4월에 <<학생혁명시집>>(교육평론사)을 편찬하며 4.19 혁명의 정신을 기렸다. 이때의 기억을 되살려 신동엽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껍데기는 가라>를 창작했다.

1961년에 명성여고 야간 교사로 취직하여, 안정된 직장 덕에 비교적 시작(詩作)에 몰두할 수 있었고 1963년 시집 <<아사녀>>를, 1967년에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한다.

그러나 1969년에 지병인 간 디스토마간암이 악화되어, 아내와 2남 1녀의 자식을 남겨둔 채, 4월 7일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만 38세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4] 묘지는 처음엔 당시 파주군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안장했다가, 1993년에 고향인 부여군의 능산리 고분군 근처 산으로 이장했다. 사후 부여읍내에 있는 생가를 복원하고 신동엽문학관을 세웠다.

그의 부인 인병선의 덕으로 우리가 시인 신동엽을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병선은 신동엽이 죽고 나자, 혼자 2남 1녀를 키우기 위해 출판사에 다니며 생활하면서도, 신동엽의 육필 원고를 모아 유고집 발간에 힘을 썼다. 그 결과 1975년 6월에 <<신동엽전집>>(창작과비평사)이 출간되지만, 불과 한 달만에 긴급조치 9호 위반의 이유로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되었다.[5] 1979년 3월에는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창작과비평사)가 출간되었다.

1982년 12월에 신동엽 시인의 문학과 문학정신을 기리고 역량 있는 문인을 지원하기 위해 유족과 창작과비평사 공동 주관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이 제정되었다. 2004년부터는 '신동엽창작상'으로, 2012년부터는 '신동엽문학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3. 기타

  •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 <껍데기는 가라>가 유명하다. 수능 대비 모의고사 문제에도 자주 출제될 정도로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익숙한 작품. 최근에는 작품의 참여시적 성격과 더불어 서정시적인 면모도 높이 평가되어 재평가받고 있다. 짧은 시들 중에는 명시가 많다.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아니오', '원추리', '진달래 산천' 등등 하나 같이 간결한 언어 선택으로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조금 긴 시들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모습('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등등)도 보인다. 서사시인 '금강'은 동학 농민운동을 다룬다. 신하늬라는 독자와 시인 자신의 창작된 투사체가 역사 속 실제 인물인양 이야기에 등장하면서 몰입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문학적 장치였다는 찬사와, 역사성과 고증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엇갈린다.
  • 2013년 5월 3일, 생가 바로 옆에 신동엽문학관이 생겼다.
  • 인병선은 신동엽이 죽은 뒤에 고생해가며 세 자식(2남 1녀)을 키웠다고 한다. 남편과 결혼 때문에 대학 진학도 포기했는데 요절한 남편 때문에 출판사 일도 하고 짚풀 문화학자로 유명함에도 신동엽의 아내로만 알아주는 게 속상했다고. 생전 무명 시인이던 남편의 굴레가 너무나도 커서 유품은 모조리 문학관에 기증했다.
  • 큰아들 신좌섭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데 그도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경찰에게 쫓기는 통에 어머니 속을 긁었다고. 둘째아들 신우섭은 광운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업가로 일하고 있으며, 딸 신정섭은 서울대학교 미대와 독일 카셀대학을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다 결혼한 뒤에 캐나다이민갔다.


[1] 정확히는 194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곧 한국 전쟁이 터졌고, 전쟁 기간 동안 대전, 부산 등지에서 전시연합대학에 다니면서 역사학을 공부했다.[2] 1935~.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로 변절하였다가 해방후 다시 좌익으로 돌아와 월북을 한 인정식의 딸이다. 시인, 민속학자로서, 우리 조상들 짚풀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여 짚풀연구학자로도 이름이 높다. 현재 혜화역 인근 짚풀생활사 박물관 관장을 하고 있다.[3] 이때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밖에 안 됐고, 당국에 의해 빨치산의 완전 진압이 선언된 지도 불과 4년밖에 안 됐던 시기였다! 아마 사람들은 그냥 6.25 전쟁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읊은 시 정도로 여겼던 듯하다.[4] 동료 문인들이 임종을 지키기 전부터 이미 배에 물이 가득 차서 누워있을 수가 없었을 수준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다고 한다.[5] 물론 지금은 다시 출간되고 있다.[6] 2006년 7월 28일에 SBS예능 프로그램 있다! 없다?에 방송되었다.[7] (중략) 껍데기는 가라 동엽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