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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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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충숙공(忠肅公)
이예
李藝
파일:충숙공이예.jpg
출생 1373년(공민왕 22)
고려 경상도 울주군
사망 1445년 3월 31일 (향년 73세)
(음력 세종 27년 2월 23일)
조선 경상도 울산도호부
시호 충숙 (忠肅)
국적 고려, 조선
본관 학성 이씨
학파 (鶴坡)
직위 지중추원사, 동지중추원사[1], 대마주체찰사[2]
자녀 장남 - 이종근(李宗根, ? ~ ?)
차남 - 이종실(李宗實, ? ~ 1459년)

1. 개요2. 생애
2.1. 이예의 선대와 유년시절2.2. 청년시기의 활약과 입신양명2.3. 외교관으로서의 행적2.4. 사망
3. 업적4. 가족 및 후손5. 여담

[clearfix]

1. 개요



학성 이씨의 시조이자 조선 전기의 문신. 태종세종 시기에 일본류큐 왕국[3] 외교를 전담한 대표적인 통신사이고 조선 최초로 대마주체찰사를 맡았다.

2. 생애

2.1. 이예의 선대와 유년시절

이예의 선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나는 이예의 선대가 울산 지역 토착 성씨 9가문 중 하나로 고려시대 대대로 향리역을 맡은 중인 계급[4]이었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예의 선대는 고려 명문 귀족으로 중앙에 있던 이예의 조부가 고려 우왕이 폐위되자 불사이군[5]의 충절을 지켜 울산으로 낙향하였고 이 탓에 조선이 건국되자 고을 아전[6]으로 격하되었다는 설이다.[7][8]

확실한 것은 조선이 건국될 무렵의 이예는 중인계급의 아전으로서 울산관아에 배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예는 유년기 시절 대부분을 울산에서 보내었는데 이 시기는 여말시기였고 고려는 국운쇠퇴기를 걷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적인 배경과 왜구의 침탈로 인해 백성들은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었고 해안가와 맞닿아 있던 울산의 경우는 그 피해가 차마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예는 이시기의 왜구의 침탈로 인해 유년기 시절 어머니가 왜구들에게 납치되는 참극을 겪었고 어머니를 기필고 찾겠다는 그의 결심은 그가 훗날 대일 전문 통신사의 길을 걷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2.2. 청년시기의 활약과 입신양명

이예가 아전직에 있으며 지방관청의 실무를 맡을 무렵인 1397년 3000명의 왜구들이 울산에 침입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관아를 점령하여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납치되고 울주 군수 이은(李殷)까지 사로 잡았다. 이때 다른 관리들이 모두 도망가 숨기에 급급했으나 이예는 자진해 군수를 따라가 끝까지 보필하였다. 왜구들은 그가 진정한 조선의 관리이자 충신이라며 감탄하였고 특히 왜구 수괴 비구로고는 크게 감동하여 이예를 비롯한 울주 군수 이은과 일행들을 석방하였다.

이에 태종은 이예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이예를 비롯한 이예의 일가에게 아전의 역(役)을 면제하고 벼슬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이예는 중인 계층의 아전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사대부로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2.3. 외교관으로서의 행적

이예는 왜구에게 납치당한 포로 쇄환과 일본유구국과의 통교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예의 첫 통신사로서의 행적은 해적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조정에 청해 1400년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의 수행원으로 대마도에 간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끝내 어머니를 찾지 못하였다.

이예가 처음으로 사절의 책임을 맡은 것은 1401년(태종1년)으로 보빙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406년 일본 회례관(日本回禮官)으로 파견되어 납치되었던 남녀 7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고, 1416년 1월 27일 왜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가 유구국으로 팔려간 백성을 데려오기 위해 유구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유구국에서 44인을 데리고 같은 해 7월 23일 귀국하였다. 이예는 유구에 파견된 조선의 첫 통신사로서 조선과 유구국이 교류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 결과로 유구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418년(태종 18년)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사망하자 조의 사절로 대마도에 파견되어 쌀, 콩, 종이를 부의하여 그의 충성을 후사하였다. 종정무는 치세 기간 도적을 금제하여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특별히 이예를 파견한 것이다.

이후에도 일본과 유구국에 대한 외교활동을 하며 활약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1437년에 이예의 벼슬은 첨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정2품 동지중추원사에 이른다.

1443년(세종 25년) 왜적이 변방에 도적질하여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갔으므로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서 찾아오려 하니, 이예가 자청하여 대마도 체찰사(對馬島體察使)[9]로 파견되었다. 이것이 마지막 사행(使行)이었다. 28세인 1400년에서 71세인 1443년까지 44년간 40여회 일본에 임금의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 중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사행(使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13회에 달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44년간의 사행에서 이예가 쇄환해온 조선인 포로의 수가 667명이라고 기록되었다.

2.4. 사망

그는 마지막 사행 이후에도 세종의 계속된 부름으로 중앙정계에서 관직생활을 이어가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인 울산에 낙향하였고 1445년 음력 2월 23일 향년 73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그는 유언으로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서기보다 자연을 벗 삼아 공부하는 선비의 길을 갈 것을 남겼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특별히 그의 업적이 정리된 졸기를 수록하였다.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2월 23일 정묘 2번째 기사

3. 업적

이예는 일본인의 조선 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양국의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고 특히 계해약조의 성립 이후 조선은 중종시기까지 단 한차례의 왜구의 침입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외교적 성과는 매우 큰 의의를 가지는 것 이었다.

또한 세종의 명으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조선에 자전(自轉) 물레방아를 도입하였으며 일본식 상가제도의 시행을 건의하는 등 양국 문화 및 경제의 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 또한 민간에 의한 광물채취자유화와 이에 대한 과세,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 등을 건의한 바 있다.

그의 유고로는 《학파실기(鶴坡實紀)》가 있으며 그의 대일 경험기는 이후의 통신사들에게 일본을 이해하는데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신숙주의 저서 해동제국기의 저술에도 도움을 주었다

4. 가족 및 후손

장남 이종근 - 양근군수
차남 이종실 - 수군도안무처치사[10],대호군

이예의 후손들은 이예의 아들 이종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조선 초기부터 울산의 유력 사족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후손들은 주로 무관을 많이 배출해내었고 임진왜란때는 울산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한편 군공의 세운 무관들을 배출하며 다수의 임난 공신들을 배출해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예를 시조로 하는 학성 이씨는 울산의 유력 양반 가문이자 명문가로 자리 잡았으며 정조 시기에는 이근오와 같은 걸출한 문신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이예의 후손으로는 이후락이 있다.

5. 여담

여담으로 이예는 자신의 관직 선배인 조말생(趙末生, 1370~1447)과 사적으로 매우 친밀한 사이로 자주 술을 같이 마시며 시를 주고 받던 사이였다.
특히 조말생은 이예의 유상에 대한 찬시를 쓸 정도였는데 이는 이예와 조말생이 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였음을 반증한다.

아래는 조말생이 이예의 외모를 찬사하며 남긴 당대의 시로 현대까지 내려온다.

鶴坡先生遺像讚(학파선생 영정 찬미/ 撰者 : 趙末生(조말생 1370-1447) 世宗때 文臣,

領中樞院事 稟得山川 靈氣有盛 (품득산천 영기유성) 품성을 산천에서 얻었으니 신령스런 정기가 넘쳐있고
文武兼才 忠義定性 (문무겸재 충의정성) 문무를 겸전하고 충의의 성품을 품었도다.
功尊秩高 形端容正 (공존질고 형단용정) 귀한 공 높은 지위에 형체는 단정하고 용모도 바르구나.
遺像在世 觀者起敬 (유상재세 관자기경) 남긴 상이 세상에 있어 보는 이마다 공경심을 갖게 하네.

조말생이 이예의 외모를 시를 통하여 찬사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용모는 항상 단정하였고 또한 행동가짐이 매우 바른 사람이었다고 한다.[11]

또한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인 김수온(1410~1491)은 이예의 절개와 충절에 크게 감명 받아 자신이 지은 식우집(拭疣集)에 이예를 찬양하는 '학파선생께 올리는 시'를 수록하였다
主辱 臣當死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을 위기인데
州危 吏必行 고을이 위태로우니 그대가 나섰네
一朝 能抗節 한번 능히 절의를 지키매
千載 永垂名 천년세월 길이 이름 전해지네
絶域 艱難遍 이역에서 온갖 고난 두루 겪고
蒼波 頃刻生 검은파도에 목숨을 다투었으나
此心 終不變 그 마음은 늘 변하지 않았으니
利義 兩途明 이와 의 두길이 모두 밝았네

7번 국도의 일부인 이예로는 이예의 이름에서 따온 도로명이다.


[1] 정2품, 판서와 동급[2] 종1품[3] 현재의 오키나와로, 조선에서는 보통 유구국(琉球國)이라고 칭했다.[4] 다만 고려시대의 향리는 지방수령의 권한이 강해진 조선과는 달리 권한이 매우 강한 지방의 지배계층으로 조선 초기까지도 지방에서 양반들과 그 위치가 동등하였다. 주로 이 계층에서 신진사대부들이 등장하였고 이들이 훗날 지방의 사림으로 발전하였다.[5] 2명의 군주를 섬길수 없다는 의미[6] 조선시대에 각 고을의 실무를 담당하는 중인[7] 이는 임진왜란으로 이예 이전시기의 족보가 분실된 탓이 크다.[8] 1668년에 재정리된 학성이씨 족보에 언급[9] 종1품 대마도 전시 관리직[10] 현대의 함대사령관, 정3품[11] 단 본 문서 상단의 초상화는 후손들의 모습을 바탕으로 현대에 그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