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蛇足
고사성어 | |
蛇 | 足 |
긴 뱀 사 | 발 족 |
1.1. 개요
"뱀의 발"이라는 뜻으로, 쓸데없는 것을 덧붙여 도리어 그것을 망치는 짓을 의미한다.1.2. 유래
昭陽為楚伐魏,覆軍殺將得八城,移兵而攻齊。陳軫為齊王使,見昭陽,再拜賀戰勝,起而問:「楚之法,覆軍殺將,其官爵何也?」昭陽曰:「官為上柱國,爵為上執珪。」陳軫曰:「異貴於此者何也?」曰:「唯令尹耳。」陳軫曰:「令尹貴矣!王非置兩令尹也,臣竊為公譬可也。楚有祠者,賜其舍人卮酒。舍人相謂曰:『數人飲之不足,一人飲之有餘。請畫地為蛇,先成者飲酒。』一人蛇先成,引酒且飲之,乃左手持卮,右手畫蛇,曰:『吾能為之足。』未成,一人之蛇成,奪其卮曰:『蛇固無足,子安能為之足。』遂飲其酒。為蛇足者,終亡其酒。今君相楚而攻魏,破軍殺將得八城,不弱兵,欲攻齊,齊畏公甚,公以是為名居足矣,官之上非可重也。戰無不勝而不知止者,身且死,爵且後歸,猶為蛇足也。」昭陽以為然,解軍而去。
소양(昭陽)이 초나라를 위해 위나라를 정벌할 적에 군대를 엎어버리고 장수를 죽여 8개의 성을 얻더니, 군대를 옮겨 제나라를 공격했다. 진진(陳軫)이 제나라 왕의 사신이 되어 소양을 보니, 두 번 절하고는 전쟁 승리를 축하하면서 일어나 물었다. “초나라 법에 군대를 엎어버리고 장군을 죽인 사람의 관직은 무엇입니까?” 소양이 “관직은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작위는 상집규(上執珪)가 됩니다.” 진진이 “이보다 달리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소양이 “오직 영윤(令尹)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진진이 말했다. “영윤이 귀할 것이나, 왕은 두 명의 영윤을 두지 않습니다. 신(臣)이 살짝 공을 위해 비유하겠으니 괜찮겠습니까?
초나라에 제사를 지낸 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인[1]들에게 한잔의 술을 줬습니다. 사인들이 서로에게 말하길, "여러 사람이 마시기엔 부족하고 한 사람이 마시기엔 남음이 있으니, 청컨대 땅에 뱀을 그려서 먼저 완성한 사람이 술을 마십시다." 한 사람이 뱀을 먼저 완성하고 술을 끌어다 마시려고 하다가, 곧 왼손으론 술잔을 쥐고 오른손으론 뱀을 그리며 "나는 발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는데, 아직 완성하지 못함에, 한 사람이 뱀을 완성하고는 그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습니다. "뱀은 본래 발이 없는데 자네는 어째서 발을 그릴 수 있는가?" 결국 (두 번째 사람이) 그 술을 마셨습니다. 뱀의 발을 그린 사람은 끝내 그 술을 잃었지요.
지금 그대는 초나라를 도와서 위나라를 공격하여 군대를 깨뜨리고 장군을 죽여 8개의 성을 얻었는데, 병사들이 약해지지 않아서 제나라를 공격하고자 합니다. 제나라는 공을 두려워함이 심하오니 공께서는 이것을 명예로 삼아 만족함에 머물 것이오, (어차피) 관직의 높음은 거듭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은 적이 없음에도 멈출 줄 모르는 자는 자신을 죽이게 되고 작위는 뒷사람에게 돌아가리니, 뱀의 발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소양은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해산하고는 떠났다.
《전국책 戰國策》〈제이 齊二〉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된 단어다. 소양(昭陽)이 초나라를 위해 위나라를 공격하여 공을 세운 뒤, 제나라까지 공격하려고 하자, 진진(陳軫)이 그를 만나, 초나라가 소양에게 더 높은 지위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그 공적을 무서워하거나 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고, 전쟁에서 패하기라도 한다면 그동안의 공적을 깍아버리는 것임을 깨우쳐 주었다. 그때 든 비유가 '사족'이다.소양(昭陽)이 초나라를 위해 위나라를 정벌할 적에 군대를 엎어버리고 장수를 죽여 8개의 성을 얻더니, 군대를 옮겨 제나라를 공격했다. 진진(陳軫)이 제나라 왕의 사신이 되어 소양을 보니, 두 번 절하고는 전쟁 승리를 축하하면서 일어나 물었다. “초나라 법에 군대를 엎어버리고 장군을 죽인 사람의 관직은 무엇입니까?” 소양이 “관직은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작위는 상집규(上執珪)가 됩니다.” 진진이 “이보다 달리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소양이 “오직 영윤(令尹)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진진이 말했다. “영윤이 귀할 것이나, 왕은 두 명의 영윤을 두지 않습니다. 신(臣)이 살짝 공을 위해 비유하겠으니 괜찮겠습니까?
초나라에 제사를 지낸 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인[1]들에게 한잔의 술을 줬습니다. 사인들이 서로에게 말하길, "여러 사람이 마시기엔 부족하고 한 사람이 마시기엔 남음이 있으니, 청컨대 땅에 뱀을 그려서 먼저 완성한 사람이 술을 마십시다." 한 사람이 뱀을 먼저 완성하고 술을 끌어다 마시려고 하다가, 곧 왼손으론 술잔을 쥐고 오른손으론 뱀을 그리며 "나는 발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는데, 아직 완성하지 못함에, 한 사람이 뱀을 완성하고는 그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습니다. "뱀은 본래 발이 없는데 자네는 어째서 발을 그릴 수 있는가?" 결국 (두 번째 사람이) 그 술을 마셨습니다. 뱀의 발을 그린 사람은 끝내 그 술을 잃었지요.
지금 그대는 초나라를 도와서 위나라를 공격하여 군대를 깨뜨리고 장군을 죽여 8개의 성을 얻었는데, 병사들이 약해지지 않아서 제나라를 공격하고자 합니다. 제나라는 공을 두려워함이 심하오니 공께서는 이것을 명예로 삼아 만족함에 머물 것이오, (어차피) 관직의 높음은 거듭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은 적이 없음에도 멈출 줄 모르는 자는 자신을 죽이게 되고 작위는 뒷사람에게 돌아가리니, 뱀의 발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소양은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해산하고는 떠났다.
《전국책 戰國策》〈제이 齊二〉
즉, 이미 충분한 것에 쓸데없는 것을 덧붙여 오히려 가진 것도 잃어버린다는 것이 '사족'의 본 뜻.
1.3. 여담
- 현대중국어에서는 '화사첨족(畵蛇添足)'이라고 쓴다. #
- 생물학적으로는 뱀이 오히려 사족이 달린 도마뱀의 한 분류로 나누어져 있다. 즉 진화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있던 발이 퇴화되어 사라진 셈이다.
2. 四足
짐승의 네 개의 발이나 네발 가진 짐승, 또는 사지(四肢)를 속되게 이르는 말. '무슨 일에 반하거나 혹하여 꼼짝 못하다'를 의미하는 '사족을 못 쓰다'의 사족이 이 사족이다.4개의 발로 보행하는 것을 사족보행이라고 하며, 대부분의 사지동물이 사족보행을 한다.
3. 士族
3.1. 한국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관료집단을 구성하는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반과 문반을 포괄하며, 대를 이어 그 지위를 점유했다는 점에서 선비, 사대부, 양반 등과는 그 뜻이 조금씩 달라서 완전히 상통하는 말은 아니다. 사족 중에서도 뛰어난 사족을 명사(名士)라고 불렀으며 크게 존경했다.조선에서는 조선 후기에 향촌 사회에서 농민을 지배했던 계층이다. 주로 조선 중기 이후에 효율적인 토지경영을 위해 거주지 중심으로 모여 살며 대를 이어오던 양반들을 가리키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3.2. 중국
중국에서도 이들이 발생한 고대에는 아직 과거 제도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일종의 귀족 계급으로서 성격이 조금 더 강했다. 이들은 선진시대까지는 중세 유럽의 귀족들처럼 전사귀족으로서 탄생하여 성장하였다가[2] 춘추전국시대 관료제의 발달과 함께 점차 문관화가 이루어졌는데, 문관으로서 사족은 주로 한나라 이래로 시행된 천거 제도의 대상자로서 인물평을 받은 뒤 천거를 받아 관직에 진출하는 사람들이었다.[3] 삼국지를 예로 들면 당대에 허소와 허정이 인물을 평가해주는 일로 유명했는데 한달에 한번씩 자신들이 평가해준 인물들과 평가한 내용을 써서 저자거리에 벽보처럼 붙였으므로 이를 월단평이라고 불렀다. 이 월단평 최고의 대박이 바로 다름 아닌 조조로 그 내용은 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었다.3.3. 일본
신분제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유럽 | 한국 | 일본 | 인도 | 북한 | 태국 | |||||
왕족 | 성골 | 왕족 | 황족 | 브라만 | 백두혈통 | 왕족 | |||||
귀족 | 성직자 | 진골 | 호족 | 양반 | 공가 | 다이묘 | 화족 | 크샤트리아 | 기본 군중 | 하이쏘, 승려 | |
기사 | 부르주아 | 6두품 | 중인 | 사무라이 | #s-2.2 | 타나 람 루어이 (신흥 부유층) | |||||
평민 | 양인 | 쵸닌 | 바이샤 | 복잡한 군중 | 로쏘 | ||||||
농노 | 천민노비 | 부라쿠민 | 수드라 | 적대계급잔여분자 | |||||||
노예 | 찬달라 | }}}}}}}}} |
에도 시대까지 봉건시대 일본의 신분제도에서 가장 상위에 위치한 계급이다. 같은 사(士)를 쓰지만 조선의 선비와 달리 무사(武士)를 의미한다.[4] 가마쿠라 시대부터 일본 내 율령제를 유명무실화시키고, 천황과 귀족(공가)들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정계를 주름잡았다. 참고로 사족 내에서도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 사이 격차가 존재했다.[5]
사족들의 패권은 대정봉환으로 막부가 무너지면서 몰락하게 되었고, 결국 세이난 전쟁을 끝으로 지배계급으로서의 사족은 종말을 고했다.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신분제가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사족이라는 신분 자체는 남아 있었으나 화족과는 달리 신분 상의 특전이 없는 명예직[6]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지배층에 편입되지 못한 사족들은 이름만 남은 신세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신분제의 잔재가 아직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사족 출신이라는 성분이 평민과 구별되는 보이지 않는 이점은 여전히 존재했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에 인구의 5.5%에 불과한 사족이 구제고등학교 학생의 30%를 차지했으며, 메이지 시대 초기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자의 30% 가량이 사족 출신이었다.
사족의 최말단에 위치하고 있던 아시가루 등의 최하급 무사나 하급 가신, 즉 병사들은 1870년 졸족(卒族)이라 하여 사족과 평민 사이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분이 세분화되고 실질적으로 구별의 의미가 거의 없었으므로 2년 뒤인 1872년에 폐지되었다. 졸족에 속했던 자들 중 무사 신분을 세습해 오던 사람들은 사족, 이외의 사람들은 평민으로 분류되었다. 졸족은 대략 인구의 2.5%, 사족은 3.5%를 차지하였으며 졸족 폐지 이후 사족은 5%대를 유지했다.
4. 畲族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사족(민족)#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사족(민족)#|]] 부분을
참고하십시오.5. 우타이테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사족(우타이테)#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사족(우타이테)#|]]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 사인(舍人): 중국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초기에 귀족의 측근이나 시종을 일컫는 말.[2] 士라는 글자 자체가 원래 전투용 도끼를 든 병사를 가리키던 갑골문에서 비롯하였다.[3] 정확하게는 처음에는 족벌주의적 인사 제도인 임자제가 시행되다가 연고주의와 능력주의가 절충된 천거 제도로 이행하였다. 전근대 기준으로 상당히 능력주의적이었고 현대 인사 제도에도 영향을 준 과거 제도가 정착한 것은 보통 중국 중세사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송나라 시대의 일이다.[4] 사실 士는 원래 중국에서도 원래는 하층 무사귀족계급을 의미했다. 그것이 춘추전국시대~진한시대에 이루어진 국가체제의 고도화와 문치주의로 말미암아 관료계급으로 변모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까지 오랜 기간 분권적 정치질서와 군사문화가 짙게 남아 이런 인식이 유지되었다.[5] 가령 쇼군을 직접 알현할 수 있었던 하타모토에 비해 하급 무사로 분류되던 어가인이나 반농민 취급을 당하던 향사 등은 같은 무사계급이라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6] 묘비에 사족임을 쓰거나, 학교 졸업 시 사족이라 표기되는 정도였다고 한다. 사족도 화족처럼 공작, 자작 등과 같이 사작이라는 작위를 내리는 것을 검토하기도 하였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