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의병장에 대한 내용은 이규태(의병장) 문서 참고하십시오.
주필 | ||||
신동호 | → | 이규태 | → | 김대중 |
은관문화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1974 박화성 소설가 | 1978 김환기† 화가 | 1978 나운규† 영화감독 | 1978 이중섭† 화가 | 1978 현진건† 소설가 | ||||
1980 박수근† 화가 | 1980 조치훈 바둑기사 | 1984 박두진 시인 | 1988 김광균 시인 | 1988 김중업 건축가 | |||||
1988 이봉상 화가 | 1989 조남철 바둑기사 | 1989 조훈현 바둑기사 | 1992 김영주 화가 | 1992 김춘수 시인 | |||||
1992 장리석 화가 | 1992 전광용 소설가 | 1992 한갑수 교수 | 1995 박노수 화가 | 1995 전왕영 시인 | |||||
1996 이창호 바둑기사 | 1998 김남조 시인 | 1999 박홍근 아동문학가 | 2001 권영우 화가 | 2001 박용철† 시인 | |||||
2001 박태현 작곡가 | 2001 신경림 시인 | 2001 유종호 문학평론가 | 2001 이지관 문화연구가 | 2001 최일남 소설가 | |||||
2001 홍연택 지휘자 | 2002 고은태[1] 시인 | 2002 김종하 화가 | 2002 나춘호 출판가 | 2002 민경갑 화가 | |||||
2002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 | 2002 이수홍 한국문화협회 이사장 | 2002 이오덕 아동문학가 | 2002 이형기 시인 | 2002 이호철 소설가 | |||||
2002 정수봉 교육인 | 2003 박봉석 사서, 국립도서관학교 교장 | 2003 신동엽 시인 | 2003 이종상 화가 | 2003 천상병 시인 | |||||
2003 황병기 국악인 | 2004 김동혁[2] 연극인 | 2004 김사엽 국문학자 | 2004 김서봉 화가 | 2004 김충현 서예가 | |||||
2004 김희조 지휘자 | 2004 박연희 소설가 | 2004 엄대섭 도서관연구회장 | 2004 임동권 민속학자 | 2005 고우영 만화가 | |||||
2005 김성구[3] 불교인 | 2005 김충실[4] 무용가 | 2005 전숙희 수필가 | 2005 이문열 소설가 | 2006 이규태† 언론인 | |||||
2006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 | 2006 한명희 국립국악원장 | 2006 홍기삼 교육인 | 2007 김주영 소설가 | 2007 이강덕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 | |||||
2007 안병희 국어학자 | 2008 박광진 예술인 | 2008 오세영 시인 | 2008 최종태 조각가 | 2008 한백유[5] 화가 | |||||
2009 이미자 가수 | 2010 김희진 무형문화재 매듭장 | 2010 레프 콘체비치 러시아인 한국학자, 훈민정음 해례본 러시아어 번역 공로 | 2010 백건우 피아니스트 | 2010 백성희 연극배우 | |||||
2010 장민호 연극배우 | 2010 전혁림 화가 | 2011 신영균 영화배우 | 2011 이수만 가수, 연예기획사 사장 | 2011 하춘화 가수 | |||||
2011 이근배 시인 | 2011 해의만 국악인 | 2012 최영필[6] 가수 | 2012 김기덕 영화감독 | 2012 김순옥[7] 드라마 작가 | |||||
2012 손숙 연극배우 | 2012 윤일봉 배우 | 2013 구봉서 희극인 | 2013 안성기 영화배우 | 2013 조용필 가수 | |||||
2013 최인호 소설가 | 2013 김혜자[8] 가수 | 2014 김승옥 소설가 | 2014 박정란 드라마 작가 | 2014 송해 희극인 | |||||
2014 최영한[9] 배우 | 2015 이천백[10] 희극인 | 2015 이덕화 배우 | 2015 이성희 음반제작자 | 2016 김윤식 문학평론가 | |||||
2016 백영수 화가 | 2016 홍경일[11] 배우 | 2016 김명자[12] 배우 | 2016 김덕용[13] 희극인 | 2017 김남진[14] 가수 | |||||
2017 박근형 배우 | 2017 윤여정 배우 | 2018 이순재 배우 | 2018 김민기 가수 | 2018 조동진† 가수 | |||||
2019 김혜자 배우 | 2019 양희은 가수 | 2019 봉준호 영화감독 | 2020 변인철[15] 배우 | 2020 고두심 배우 | |||||
2021 김병기 화가 | 2021 이장희 가수 | 2021 이춘연† 영화인 | 2021 안숙선 국악인 | 2021 한석홍† 사진 작가 | |||||
2022 강수연† 배우 | 2022 박찬욱 영화감독 | 2023 원종철 삼원인쇄 대표 | 2024 신순기[16] 배우 | 2024 강부자 배우 | |||||
<colbgcolor=#d7171f><colcolor=#fff> 이규태 李圭泰|Lee Gutae | |
출생 | <colbgcolor=#fff><colcolor=#2d2f34>1933년 9월 6일 |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 계정리[1] | |
사망 | 2006년 2월 25일 (향년 72세)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 |
본관 | 안성 이씨[2] |
학력 | 전주사범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화학공학 / 학사) 전북대학교 (문학 / 명예박사) |
가족 | 아버지 이전섭(1902 ~ 1967)[3] 어머니 전주 류씨(1901 ~ ?)[4] |
장남 이사부(1966년생)[5][6]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전진한 초대 사회부 장관의 사위이다.2. 생애
1933년 9월 6일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현 장수군 장수읍) 계정리에서 아버지 이전섭(李銓燮, 1902. 6. 22 ~ 1967. 7. 3)과 어머니 전주 류씨(1901. 12. 20 ~ )[7] 사이에서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진 시골이라 본인은 "어릴 때 종이를 처음 보고 너무 신기해 그걸 접어놓고 잠자다가도 펴보곤 했어"라고 회고 하기도...전주사범학교,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후 잠깐동안 군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이내 평생을 바칠 만한 직장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했다. 한때 취직할 곳이 없어 종로 음악다방에서 DJ를 하기도 하다가, 1959년 3월 1일 조선일보에 공채 2기로 입사하였다.# 이후 문화부, 사회부, 편집부 기자를 거쳐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1986~1988년은 논설위원실장, 1988~1989년 논설고문을 거쳐 1989년에 주필이 되었으나, 1990년에 김대중 논설주간에게 주필직을 인계하고 1999년 8월 정년퇴임까지 다시 이사대우 논설위원으로 재직했다.
1961년 사회부 기자로 소록도 나환자촌을 취재하고 '소록도 기행'이라는 연재를 썼다. 이청준은 이를 소재로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썼고 이규태도 작중 인물로 등장한다. 이청준은 "그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의 독자다."라고 하였다.
조선일보에 1983년 3월 1일부터 그가 사망하기 이틀 전인 2006년 2월 23일까지 〈이규태 코너〉를 연재하면서 23년 동안 6702회를 기고하며 대한민국 언론사상 최장기 칼럼 기록을 세웠다. 제1회는 3·1절을 맞아 3·1선언 현장인 명월관의 내력을 쓴 '이완용 집 고목'이고 제6701회는 '책찜질 이야기'이다. 마지막회는 병상에 누운 그의 구술을 옮겨 적은 것인데, 아, 이제는 그만 글을 마쳐야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고별사를 담았다.
1965년 조선일보의 첫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종군했으며, 귀국한 후에는 우리 역사와 한국인의 의식을 탐사하는 데 일생을 쏟았다. 1968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개화백경'을 시작으로 '6백년 서울'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획연재물을 썼으며, <한국인의 재발견>, <한국인의 의식구조>[8][9], <신바람의 한국학> 등의 저서가 있다.
지하서재에 책이 가득할 정도로 풍부한 독서량에 근거한 많은 식견과 깔끔한 문체로 쓴 이규태 코너는 한민족 우월주의를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후술하겠지만, 서양 문화의 좋은 점도 어떻게든 억까하려고 애를 쓴 부분이 많다.
2004년, 정년퇴임하고 5년간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고문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칼럼을 계속 기고하다가, 2006년 2월 25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72세.#
조선일보의 대표 논객이지만 정치 칼럼을 쓰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선우휘, 조갑제나 김대중 등처럼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큰 논란을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문화와 관련해서는 많은 논란을 만들었다. 특히 세대를 고려해도 심할 정도로 꼰대 성향을 보여서 당시 청년층, 청소년들에 대한 비뚤어진 관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이는 2000년대 들어서, 젊은 세대가 안티 조선 운동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사망 후인 2006년 10월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비판
씨받이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자신이 어렸을 때 동네에서 본 경우를 에세이에 옮겼다. 이규태는 소학교 때 해방을 맞이했다고 하니 조선시대를 경험한 세대는 아님에도 씨받이가 조선시대 전통이라고 왜곡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기록 어디에서도 씨받이에 대한 건 없다.게다가 이규태의 다른 에세이에서 '조선시대는 백정의 가족을 말처럼 타고 다니면서 운동회 때 놀려먹었다' 는 이야기가 버젓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보다는 사회가 바뀌면서 일부에서 벌어지는 추태를 마치 전통인 것처럼 옮겼다는 의혹이 있다. 해당 사건이 예천에서 벌어졌다는 식으로 언급이 있는데, 예천은 일제강점기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사가 크게 일어나면서, 백정과 일반 양인간의 대립이 극에 이르렀던 지역이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조선시대였다면 백정들은 양민들과 분리되어서 살았고, 양인들이 참여하는 마을 행사에 백정 가족이 참석한다는 일 자체가 벌어질 수가 없었을 일이었으므로, 해당 사건이 벌어졌다면 백정들의 신분해방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역으로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명 백정각시놀이가 실제로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풍습인 것처럼 인터넷에서 퍼진 것은 이규태의 잘못이 크다.
이런 것도 필요없이 위에 언급된 이규태의 첫번째 글 '이완용집 고목'부터 고증이 엉망이다.
3.1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의 명월관은 당시에도 이완용의 소유였다. 원래 명월관 자리는 조선시대 궁궐중 하나였던 순화궁으로 당시 민중들이 이완용의 집을 불질렀기 때문에, 일제에서 이완용에게 준 것이었다. 원래 궁궐이었던 곳에서 살기 뭐했던 이완용이
더불어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 당시 정부 여당인 신한국당을 옹호하며 '만화가 문제'라고 칼럼을 썼다. 게다가 로쿠데나시 블루스에서 일진이 나온다고 만화가 역사적 왜곡이 많다는 글을 기재하여 당시에도 만화 애호가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90년대에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근검절약에 대한 그의 칼럼이 실린 바 있다. 할머니가 남이 신다버린 낡은 짚신을 주워다가 펴서 개집 바닥에 깔아뒀다는 이야기를 하며 냉장고를 어떻게 버릴까 고민하는 현대인[11]을 이야기하며 낭비가 심하다 이런 내용이다. 단순히 낭비가 심하다가 아니라 낡은 짚신을 줍는 것과 냉장고를 버리는 간격 만큼 현대인은 병들고 있다는 말로 끝맺는다.[12]
심지어는 악폐습까지도 휴머니즘이라 미화했다. 농곡(弄穀)에 대한 글에 드러난 시각이 그러한데, 마을에서 못사는 집 아이를 노리개로 찍어 놓고 나무 껍질을 벗겨 알몸에 문지름으로써 옻을 올리는 등 가학적 행위를 하면, 피해자의 어머니가 가해자 집에 찾아가 보상을 요구하고, 이에 보상용으로 곡식을 주는 풍습을 농곡이라 했다. 요즈음 시각으로 보면 '맷값 폭행'인데, 이를 휴머니즘이라 미화한 것이다.
서구의 합리주의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드러낸 부분도 있다. 일례로 돌진하는 기차 앞에 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대처하는 서양 엄마와 한국 엄마를 비교한 글이 있는데, 서양 엄마는 아이를 바깥으로 밀쳐 내서 피하게 하는 반면, 한국 엄마는 무조건 아이를 껴안는다면서, 서양 엄마는 냉정하지만 한국 엄마는 인간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규태가 소개한 한국 엄마의 대처 방식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저 상황에서 올바른 위기 대처법을 홍보해야 맞는데, 아기도 살리고 자기도 산 서양 엄마가 비정하다면서, 둘 다 다치는 잘못된 방법을 선택한 한국 엄마를 올려치기한 것은 비뚤어진 열등감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규태가 비교한 사례가 실제로 일반화할 수 있는 사례인지도 확실치 않다. 서양인이라고 모두 안전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도 아닐 것이며, 한국인이라도 경험에 따른 지혜로 침착하게 올바른 대처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규태는 통계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서양은 이렇고 한국은 이렇다라며 일반화를 했다.
4. 여담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던 그의 서재는 사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단 팬택 EX 숙소로 쓰였다. #5. 관련 문서
[1] 안성 이씨 집성촌이다. #[2] 합문부사공파(閤門副使公派)-봉례공파(奉禮公派) 30세손 규○(圭○) 항렬.(족보)[3] 李銓燮, 1902.6.22. ~ 1967.7.3.(족보)[4] 1901.12.20. ~ ?[5] 李斯夫, 1966.10.20. ~[6] 할머니와 생일이 정확히 두 달 차이가 난다.[7] 류위(柳瑋)의 셋째 딸이다.[8] 이 책의 문구 일부가 1990년대 초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서 비판(?)당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 썼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모순된 내용이라던가.[9] 이 책을 낸 뒤에도 ~의 의식 구조라는 제목으로 책 여러 권을 썼다. 선비의 의식구조, 여성의 의식구조 등등[10] 정작 해당 기사는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 이규태가 글을 쓰기 전해인 1982년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제대로 언급된다. 위키백과 순화궁 페이지의 해당시기 근거자료가 바로 두 기사이다.[11] 바로 자기 아내이다![12] 애시당초 말도 안 되는 비교에다가 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하는 전형적인 꼰대 마인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