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0:13:20

재가승


1. 본래 의미2. 함경북도의 특정 주민 집단
2.1. 생활상2.2. 재가승 여진족
2.2.1. 여진족이다2.2.2. 여진족이 아니다2.2.3. 추가
2.3. 재가승이 나오는 작품

1. 본래 의미

在家僧

출가하지 않고 에 머물며 를 닦는 승려.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고도 한다.

대처승(帯妻僧)과도 개념이 겹치지만 완전히 똑같지 않다. 당연히 정통 불교 교리상 인정되지 않으며 과거 한반도 북부나 현대 일본처럼 특정 지역의 관습적ㆍ문화적 이유로 생겨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역사적인 맥락으로 함경북도 북부 지역에서 아내를 얻어 살던 승려들을 가리키던 말로도 쓰인다.

일본에서는 종단에서 발급하는 승려 자격증을 취득했으나 에 소속되지 않고 평소에는 회사원 등 다른 직업을 하며, 부업으로만 승려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정토진종에 많고, 간혹 선종이나 밀교 종파, 심지어 슈겐도 야마부시들 중에도 재가승이 있다.

2. 함경북도의 특정 주민 집단

어떤 통시적 변천 과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말은 조선 내에서 살던 특정 불교인 집단을 가리킨다. 불교에 능통한 사람을 촌장으로 삼았으며, 옆 마을로 다니면서 경을 읽어주는 것을 생계수단의 하나로 삼았다.

이들은 주로 함경북도 두만강 연안 지역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는 마을들을 재가승 마을 혹은 중골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2.1. 생활상

이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193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의 《집단촌 답사기: 재가승부락, 회령군》 제하 기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1]

사실 제대로 된 민속학적 분석을 보고 싶다면 북한 학자 황철산의 《황철산 민속학》이나 이강렬의 《한국 민속의 이해》를 보는 것이 낫다. 둘 다 재가승 풍속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935년 경의 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약 4천명 가량이었는데, 가장 많이 분포했던 곳으로 함경북도 회령군 창두면 종암동(咸鏡北道 會寧郡 昌斗面 鐘岩洞) 그리고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월파동(穩城郡 美浦面 月波洞)을 들었다. 이들이 사는 마을은 '재가승 마을' 혹은 '중골'이라 불렀다. 이들은 모두 하천인으로 대우되었고, 이곳 사람과 결혼하려는 외지인은 반드시 이곳에 거주해야만 했다. 이들은 세금이 면제되는 대신 황지(黃紙)와 초신을 나라에 바쳤는데, 이는 말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을 지나가는 군인이 있으면 부녀자들은 이들에게 을 먹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미인이 대부분인 이 곳의 부녀자들은 유방큰 편이라 한다.

이들이 말하는 언어는 분명 우리말이기는 하나, 이들의 말은 외지인은 물론이고 관할 면사무소 직원들도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나물을 '나마리', 떡고물을 '영에', '지각없다'[2]는 말을 '덕새(양소래)없다'고 하는 것 등이다. 이들의 유일한 욕설은 '이야 범이야'라고 하는데, 호환 때문에 생긴 말로 추정된다.

외지인과는 달리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제사를 할 때는 밤 8시에 지낸다. 이들은 1900년대까지는 성(姓)이 없이 그저 승(僧) 아무개라고 부르다가, 이후부터 성을 사용하였다.[3] 성 풍속은 당시 외지인의 눈으로 볼 때는 유달리 음란하게 보였는데[4], 이것은 외부의 학대와 맹수의 피해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동족의 수를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이들은 4백여 년간 공동생활을 해 왔지만 이렇다 할 공동시설이나 규칙은 없고, 다른 마을과 통혼하지 않은 채 농경은 화전을 일구고, 부업으로 여성은 삼포(麻) 방직, 남성은 목재 운반을 하는데, 단결력이 강하였다고 한다. 우환이 있는 이웃 마을로 가서 불경을 읽어 주는 부업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한민족과는 다른 독특한 풍습을 유지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대산귀(大山鬼)라는 풍습이다.

마을에 병자가 생겨 무당에게 점을 쳤을 때, 귀신의 탈이 났다고 하면,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대대적인 대산귀를 차린다. 비용을 많이 들여 돼지, 송아지를 마련하고, 1년에 한두 번 정도 대산귀를 거행했다. 제사를 지낼 때, 하천 가까운 곳에 깨끗한 빈 터를 선택하여 높은 다락을 세 계단으로 만든다. 그 중앙에 장대를 세워 귀신 이름(神名)을 쓴 크고 기다란 천을 매달고, 20~30그릇을 차린 다음 무당 2~3명을 데려다가 밤을 새워 굿을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의무적으로 동원되어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늦게 돼지를 잡아 고기를 올리고 다시 굿을 하면 저녁이 되어야 끝났다. 굿을 하는 중간에 몇 번 점을 쳐 보고 굿이 잘 되지 않으면, 돼지 대신 를 잡기도 한다. 대산귀가 끝난 다음에는 우선 복술의 집에 떡과 고기를 보내고, 가가호호 떡과 고기를 분배한다.

1년에 2번 산치성(부군치성)에서 제사를 올리고, 연중 4번 올리는 산제가 있었다. 대체로 마을 사람들끼리 결혼했으며, 외지인들이 그들과 혼인할 때에는 그들 마을에 와서 살아야 했다. 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성인 남자는 참여하지 않고 여자와 아이들이 지냈으며, 지낼 때에는 붉은 옷을 입었다.[5]

1980년 2월 3일에 방송된 동아방송의 풍물삼천리라는 프로그램은 이들이 불렀던 궐기타령을 소개하고 있다. 재가승의 일부가 6.25 전쟁 당시 월남하였으나 신분을 감춘다는 언급이 있다. #

2.2. 재가승 여진족

2.2.1. 여진족이다

최종적으로 4군 6진의 개척으로 많은 여진족들은 만주로 밀려났지만,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에 동화되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후금이 세워지면서 만주 지방의 여진족은 요동과 가까운 건주여진 내몽골에 가까운 해서여진 그리고 두만강 하류의 야인여진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여진과 그가 정복한 해서여진은 후금과 후의 청나라의 지배계층인 만주족에 편입되었지만, 두만강 하류지역 야인여진은 누르하치와 적대하여 일부만이 만주족에 편입되었다. 조선에 잔류한 여진족들은 지역상 두만강 쪽 여진족이기 때문에 청나라 지배 계층인 만주족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일단 만주족, 여진족 문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퉁구스 계통의 족속들이 한민족의 조상이 되는 백성들과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알려진 퉁두란[6]여진족으로 알려졌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의 《임하필기》, 《신증동국여지승람: 原文图片편》, 박원길의 《북방민족의 장례습속에 대하여》를 종합해보면 이들의 연원을 어느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참고 블로그) 그래서인지 함경도평안도(특히 북부) 주민들은 이들을 여진족 스파이나 자손으로 의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재가승들을 말이 통하지 않는 여진족 후손들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재가승이 조선 사회와 적극적으로 얽히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였는데, 함경북도 회령군, 종성군, 경원군, 경흥군의 여러 재가승들은 일반 한국인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로 인식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들의 인구는 대략 3~4천 명 정도 있었으며, 이들의 말은 현지 면사무소 직원들도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달랐다고 한다.[7] 그 외 일제 치하의 두만강변을 배경으로 하는 국경의 밤에는, 인근의 여진족이 타 민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풍속을 유지한 것이 나온다. 1935년 동아일보의 르포기사인 재가승만고(在家僧漫考)는 최초로 재가승을 자세히 다루었으며, 이후 동아일보 특파원 김찬승의 1936년 1월의 후속 르포기사를 통해 재가승의 유래에 대해 세 가지 설을 들고 있다.
  • 노예설(승군설): 윤관의 정벌 이후 남은 여진 유족들을 모여 살게 한 것. 혹은 청나라병자호란 항복 조건으로 3천 명의 군사와 삼천 필의 군마를 요구함에 따라 여진족으로 이 요구를 충당할 계획을 수립한 후 여진족들을 한 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라는 설.
  • 승려설: 항복한 여진족들을 단발시켜서 변경에 있는 각 사찰에 분속시켰다는 설
  • 번호설: 위의 두 설을 합친 설. 여진족들을 변경에 모여 살게 하여 외침에 대한 일종의 경계진지를 만든 것이라는 설
"..이 재가승의 유래에 대한 제설의 대다수가 그 종족 문제에 대하여서는 그 견해가 여진족에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요컨데 현금북변에 군거하는 재가승은 그 종족문제에 있어서는 적어도 여진유족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으며 또 그들이 재가승이라는 지칭을 받으면서 일종특수부락을 형성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서는 속단을 불허하나.." -][동아일보]] 1935.11.30일자 기사.
이렇듯 초기에는 재가승에 대해 여진족의 후예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서사시인 국경의 밤의 전문을 보면,
"몇 百年(백년)이 지났는지 모른다. / 고구려 관원들도 갈리고 / 그 一族(일족)도 이리저리 흩어져 / 어떻게 두루 複雜(복잡)하여질 때, / 그네는 或 둘도, 모여서 / 一定(일정)한 部落(부락)을 짓고 살았다. / 머리를 깎고 동무를 표하느라고 남들은 / 집중이라 부르든 말던 / 在家僧(재가승)이란 그 女眞(여진)의 遺族(유족)"
이라고 해서 재가승의 유래가 여진족이라는것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1910년대 일본인 학자의 조사 역시 여진족의 후예라고 판단하고 있다.[8][9] 1960년, 북한의 학자 황철산은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을 데리고 재가승들의 언어를 조사한 결과, 이들을 여진족으로 판단하였다. 1985년, 이강렬 역시 재가승들의 어휘를 근거로 재가승을 여진족의 후예로 판단하였다. 이런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현재에는 여러 매체에서 재가승을 한민족과는 다른 여진족 계통의 소수민족이라고 일컫는 경우들이 꽤 많다. 머리를 거의 삭발하고 뒷꽁지만 변발을 한 것이나, 긴 염주를 목에 거는 여진족의 풍습이, 불교 승려의 복식과 혼동되어 '승'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재가승이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17세기를 전후하여 청태조 누르하치가 만주의 여진족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 번호에 대해서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어 이로 인한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민(民)이 아닌 승(僧)으로 구별하여 호적에 올리고 승역을 부과했다.[10]

2.2.2. 여진족이 아니다

재가승이 여진족이란 주장에 대한 반박은 의외로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는데, 신채호는 조선일보를 통해 "재가승은 한민족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지라 신채호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부족했다. 어쨌거나 재가승이 적어도 당대에 진지한 고찰이 아니라 흥미위주의 접근일지언정 여진족의 후예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었고, 뭣보다도 북한에 주로 살다보니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질 기회도 없다보니 이들의 민족적 기원에 대한 탐구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러던 중 2015년, 곽충구가 연구를 통해서 '재가승은 여진족의 후예'라는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지했다. 곽충구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썼던 언어는 여진어만주어 같은 퉁구스어족의 언어가 아니라 한국어의 하위 방언인 동북 방언이나 육진 방언[11]이다.#
한편, 함경북도 북부의 산간오지에는 在家僧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격리되어 살았는데, 그들의 신분과 생활양식은 일반인들과 달랐다. 이들이 여진족의 후예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일반인들과는 주거 지역과 문화가 달랐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가 어떠했는지가 자못 궁금하다.(...) '在家僧'에 대해서는 민속학이나 불교사에서 주목해 왔다.(...) 재가승이 일반인들과 어울려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일제강점기부터이므로 만약 그들의 언어가 일반인들의 언어와 달랐다면, 함북방언과 다른 특이점이 나타났을 것이나 그러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郭忠求, 육진 방언 어휘의 잔재적 성격, 진단학보 125, 진단학회, 2015년 12월 [KCI등재]

실제로 재가승들이 구사했던 방언들을 조사해보니 동북 방언 혹은 육진 방언과 큰 차이가 없다. 북한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함경북도 두만강 연안의 마을들을 조사해봤더니, 기존의 함경북도 방언과 유사했다고 한다. 재가승 여진족설의 주 논거인 이강렬, 황철산 등의 논거는 "재가승은 여진어를 썼으니 여진족의 후예"라는 주장인데, 알고 보니 여진족 어휘랍시고 제시된 어휘들이 육진방언이었으니 기본 논거부터가 붕괴된 것이다. 황철산 역시 "여진족의 후예일 수도 있지만, 여진족과 관련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정도의 의견 역시 제시한 바가 있다.

소설가 황석영문익환과 함께 허가 없이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김일성과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던 중 "재가승 부락 사람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창씨개명하게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썼다. 물론 재가승 사람들을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북한 정권 국가무신론 영향이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일성한테 성씨를 손수 하사(?)받는 것이 북한에서는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대접은 아닌만큼(...)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최소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들이 대부분 여진족으로 구성된 집단이었으나 한민족과의 제한된 통혼과, 관리들이나 한민족 마을과의 교류를 통해 언어 전이(language shift)가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고, 처음부터 여진족 잔류파와 한민족이 합쳐져 형성된 집단일 가능성도 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다른 지방에서 육진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 승려들이 여진족과 결합하고 통혼하여 상호 동화되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로그인 필요 1980년 북한지에서도 '노역과 세금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승려를 자처하면서 산으로 올라가 형성한 부락' 설을 게재하고 있다.

하여간 일종의 단일민족론의 반발 때문인지 함경북도의 재가승을 여진족 후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상당한데, 정작 레퍼런스 중 하나인 동아일보 원 기사를 보면 승군의 후예라는 설도 소개하고 있고, 동아일보 자체도 여진족의 후예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정작 1934년 1월 3일 기사에서는 이들을 '축첩육식하는 특수부락 사람'들로 소개하며, 1935년의 재가승만고에서도 '금후학자들의 검토연핵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도저히 속단은 못할 것이다', '그 정체를 구명단정할 하등의 근거가 없는 고로 그 단안은 보류'라고 하고 있다. 까놓고 조선시대 한성 내의 특수집단이었던 성균관 반촌을 무슨 이민족이라고 소개하지는 않지 않은가? 재가승의 풍습도, 변경 지역민들의 독특한 풍습이라고 봐도 사실 딱히 무리는 없을 듯하다.

재가승 여진족 부정설을 나무위키의 독자연구로 비난하는 근거 없는 주장도 있지만, 당장 위에 인용된 곽충구의 논문이 있으며, 이수창의 논문[12]에서는 재가승을 여진족의 후예로 볼 근거가 없고, 이는 재가승이 다른 풍습을 가진 것을 보고 조선시대 지식인들로부터 오히려 오랑캐오해를 받은 것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애당초 "재가승"이라는 단어는 고려시대나 그 이전 시대의 승려 및 승려처럼 머리를 깎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2.2.3. 추가

1945년 이후 더 이상 이들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해졌으며, 의무교육 도입, 6.25 전쟁으로 인한 국군포로 수용[13], 이촌향도, 고난의 행군 등 격변을 겪는 과정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한민족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언어도 여진어가 아닌 한국어의 방언을 쓰고 있기에 설령 가지고 있다 해도 그저 자기 조상이 재가승이라고 인지하는 수준이 클 가능성이 높다. 남한만 해도 집성촌들이 전쟁과 이촌향도로 급속히 쇠락하면서 상당수의 전통풍습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거쳤는데, 북한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다.

1960년에 북한에서 <함경북도 북부 산간부락의 문화와 풍습>이라는 논문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어 북한에서 연구하기는 한 것으로 보이나, 이 연구의 목적이 그들을 동화시켜 북한 체제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를 한 황철산은 북한에서만 활동했고 함경도 지역 민속의 권위자였으나, 1965년 이후 활동이 없어서 숙청된 듯하다. 남한에서도 저서가 출판되었다.

현재로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더 이상 세대교체가 진행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해당 지역을 답사하고 현지인들 대상으로 자료를 모으는 것이다. 위 기록을 보면 "적어도 일제강점기 후기까지는 재가승 집단이 주변 마을과 약간 다른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으므로, 80여 년이 지난 2020년 기준으로도 일부 장수한 8~90대 이상의 노인들은 재가승 집단을 봤던 기억이 있거나, 혹은 재가승 집단 구성원 본인이 동화되었더라도 살아있을 수도 있으며, 꼭 생존자가 아니라도 구전되는 자료는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분단으로 인하여 북한에 대한 접근이 어려우므로 자유로운 연구가 불가능한 상태이며, 2~30여 년만 더 지나버리면 일단 당사자 세대는 거의 사라지게 되므로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늦었다고 본다. 이들이 살던 동네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가장 타격을 많이 입었던 지역으로, 이때 행여 이들의 전통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있었을지라도 다 죽거나 살아남기도 바빠 이들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여러 탈북자들의 증언에서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들이 탈북했을 1990년대 말에는 재가승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졌을 것이라 보는 게 옳다.

2.3. 재가승이 나오는 작품

  • 김동환국경의 밤: 이 작품의 주인공 순이가 재가승 집안의 딸이다. 시 35장에 정확히 언급된다.
  • 강경애수필 두만강 예찬: 재가승들의 억압받는 삶을 묘사하였다. 단, 강경애는 작가지 역사가가 아닌 만큼 전해들은 말을 글로 옮긴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애초에 조선왕조가 강제로 불교를 믿게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신빙성 없는 창작이다.
    ...모린위(毛嶙衛)라는 군대주둔소를 두게 되었으며, 여전히 이 지방에는 부여족에서 내려온 여진족이 살고 있었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성하자 그때 조선에는 이조 세종 3년이었다. 세종왕은 신하인 김종서를 이 지방에 보내어 여진족을 토벌한 후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정하였다. 그 전에는 회령에서 청진까지 일직선을 그어 이남이 조선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두만강이 국경이 되었다. 당시에 여진족은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 압박을 받으며 죽지 못하여 살았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권력자 앞에 그들의 생명은 풍전등화였다. 불교를 강제로 믿게 하는데 "너희들은 가족을 데리고 집에서 믿어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산에서 믿는 불교를 집에서 믿게 되었다. 이른바 재가승(在家僧)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1] 원문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참조.(모바일 열람 불가) 한글본의 일부는 딴지일보 참조.(모바일에서 열람 가능)[2] 知覺없다. 철이나 분별력이 없다.[3] 승(僧)이라는 글자를 성씨로 삼았던 게 아니라, 스님 아무개라고만 불렀다는 말이다.[4]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외부인에게 돈을 받거나 혹은 호의로 동침을 시켰다고 한다.[5] 출처: 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53[6] 나중에는 이지란(李之蘭)이란 조선식 이름을 썼으며 개국공신이 됐다. 하지만 그는 건주여진 출신이다.[7] 출처: 1936.1.1. 동아일보 보도[8] Scholars agree that the villagers were descendants of the Jurchen, a federation of Tungusic-speaking tribes inhabiting Manchuria and northern Korea, later joined by Koreans, some of whom intermarried with the Jurchen. 학자들은 재가승촌 주민들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살던 통구스어계통의 여진족과 나중에 여진족과의 혼인을 통해 합류한 일부 조선인의 후예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9] “The Mystery of the Century:” Lay Buddhist Monk Villages (Chaegasu˘ ngch’on) Near Korea’s Northernmost Border, 1600s–1960s[10] <함경도의 소수 집단, 재가승(在家僧) 연구 -재가승에 대한 기록과 정책을 중심으로> 이동규[11] 육진 방언은 결국 동북 방언의 하위 방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동북 방언에 비해 보수성이 더 강하고 동북 방언과 다른 어휘들이 있기 때문에 분리한 것이다.[12] 이수창(2022), "함경북도의 재가승에 관한 연구", 대각사상 38[13] 탈출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남한 포로들은 대부분 휴전선에서 제일 먼 두만강 부근으로 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