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22:09:42

순화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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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궁
순화궁
順和宮
<colbgcolor=#bf1400><colcolor=#ffd700> 위치 한성부 중부 견평방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5길 26[1])
설립시기 1849년
해체시기 1911년 이후
파일:2017-10-08 16-14-10.jpg
<colbgcolor=#bf1400> 순화궁에 들어선 태화빌딩[2]
1. 개요2. 역사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별궁이다.

2. 역사

원래 이 곳은 세종의 적8남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 부부가 살았던 이었다. 조선 중종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주었기에 ‘순화궁’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중종에게 순화공주란 딸이 없었기에 사실이 아니다. 아마 중종과 문정왕후의 딸 효순공주와 구수영의 증손자 구사안이 혼인한 뒤, 중종이 집을 고쳐 지어준 것이 와전된 듯하다.

구사안의 동생 구사맹[3]선조의 서5남 정원군장인이었다. 정원군의 장남이자 구사맹의 외손자가 바로 인조이다. 그래서 인조가 어렸을 때 외가인 여기서 가끔씩 머물렀다고 한다. 그 때 장난치다가 경내에 있는 연못에 빠진 적이 많았다는데, 인조가 즉위한 후 그 연못을 용(왕)이 빠졌었다하여 ‘잠룡지(潛龍池)’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영조가 방문하여 여기에서 보관하던 효종의 어필을 본 뒤 구씨들을 불러 상을 주거나 등용하라고 명한 것을 볼 때, 영조 연간까지는 구씨 집안에서 소유 및 관리하였던 듯 하다.#

그러다 19세기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할 때 김조순의 조카 김흥근의 소유로 넘어갔다. 그리고 헌종후궁 경빈 김씨가 헌종 사후 김흥근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 때부터 경빈의 궁호인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렸다.# 경빈 김씨는 1907년(광무 11년) 6월에 사망할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융희 2년) 궁내부 대신이던 이윤용에게 넘어갔고 곧 이윤용의 동생 이완용이 차지했다. 이후 순화궁에 속했던 궁속들은 서소문 안에 있던 순헌황귀비의 동생 엄준원의 집으로 옮겨갔다. 넓은 궁에 살다 좁은 곳으로 옮긴 궁속들은 불평했고, 급기야 이런 불만이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곳마저도 1911년에 일제의 압력으로 남작 장석주의 소유로 넘어갔고 궁속들은 경복궁 동쪽 간동에 있는 전 호위대 영사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간동이 아닌 제동으로 옮겼다고 하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경성부사》에 따르면 동부의 인창면으로 옮겼다고 한다.

옛 순화궁의 주인이 된 이완용은 이곳을 전세로 내놓았다. 그리고 전 숙수 출신[4]이자 명월관 사장이던 안순환이 세들어와 음식점 태화관으로 개조해 운영했다. 그렇다, 바로 3.1 운동 때에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그 태화관이 맞다. 즉 친일매국노가 소유한 집에서 독립 선언을 발표한 것(...).

이에 당황한 이완용은 1921년에 건물을 감리교선교부에게 팔았다. 이후 태화여자관이라는 이름의 감리교 포교지 및 여성 복지 사회재단이 되었고, 나중에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바꾸었다. 1938년에 한국식 건축양식을 살린 건물을 새로 지어 사용하다가 일제 말에 징발당했다.

8.15 광복 후에는 경찰서 청사 등으로 쓰다가 다시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쓰였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은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헐렸고, 그와중에 그나마 남아있던 순화궁의 전각들도 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 자리에 태화빌딩이 들어서 오늘에 이른다.

3. 여담

  • 1856년(철종 7년) 순화궁의 궁감(宮監)[5]평안도황해도의 경계인 철도(鐵島) 지역에서 온갖 종류의 세금을 새로 만들어서 선박에 부과하였다. 또한 세금을 못낸 사람들을 불러다 곤장까지 치는 등 여러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자 보다못한 평안감사가 장계를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철종은 세금을 거두던 궁감의 자리를 없애고 엄하게 처벌받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각 궁과 기관에서 이와 같은 횡포를 저질렀는지를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했다.#
  • 이완용이 순화궁 터를 감리교 선교부에 팔 때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명월관 측은 쉽게 나가려하지 않은 채 영업을 계속했는데 감리교 선교부 측에서 술판이 벌어질 때마다 마당에 들어와 찬송가를 부르며 영업방해를 했다. 이에 지지않고 명월관 측에서는 영업이 다 끝난 새벽에 선교부 측 사람들 앞에서 장구꽹과리를 쳤다고. 또한 에는 감리교 깃발이, 에는 명월관 깃발이 번갈아 꽂히는 막장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 싸움의 승자는 감리교였다. 그 이유가 허무하다. 나중에 감리교 측에서 성조기를 꼽았는데 성조기를 함부로 뽑는 것이 외교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1] 구 지번주소 종로구 관훈동 194번지.[2]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3] 이 구사안, 구사맹 형제의 동생 구사민의 후손이 바로 현 LG 구씨 가문이다.[4] 대령숙수의 그 숙수. 대장금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궁중요리 하면 궁녀를 떠올리지만, 사실 대량 요리란 것 자체가 힘이 엄청나게 들어가서 예로부터 궁중요리는 체력 좋은 남성 요리사들이 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망하자 남성 숙수들은 다 출궁하고 민간에서 식당에 취업하거나 직접 식당을 개업하여 남은 이왕가의 식사는 한희순 상궁 같은 궁녀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자연히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궁중요리 문화를 전수한 것도 이 궁녀 출신들이었다보니 궁중요리 하면 여성 요리사 이미지가 굳어졌다.[5]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각 궁에서 보내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