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3 16:14:45

안동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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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궁
안동별궁
安洞別宮
<colbgcolor=#c00d45><colcolor=#ffd700> 위치 한성부 북부 안국방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3길 4)
설립시기 1881년
해체시기 1936년
<colbgcolor=#c00d45> 충청남도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경내로
옮겨 복원한 안동별궁의 현광루와 경연당
1. 개요2. 역사3. 건물들의 수난

[clearfix]

1. 개요

조선시대별궁. 구 풍문여자고등학교 자리[1]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안국동별궁(安國洞別宮)'이었으며, '동별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름 발음이 같은 안동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2. 역사

원래 이곳은 명당으로 유명한 자리로,[2] 조선 초기부터 왕실에서 사용한 땅이었다. 세종 때는 왕자 영응대군대저택이 있었으며, 세종은 1450년(세종 32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1471년(성종 2년)부터는 '연경궁(延慶宮)'이라 불렸으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거주했다. 월산대군은 집 안에 정자를 세웠으며, 성종이 직접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인조 때에는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그 남편 영안위 홍주원[3]의 집이 되어 크게 넓어졌는데, 당시 헐린 인경궁의 남은 자재 약 170칸 분을 옮겨 규모를 키웠다. 이후, 홍주원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더욱 명당으로 여겨졌다. 숙종 때에는 이를 사들여 막내 아들 연령군의 집으로 삼았고,[4] 철종 즉위 후에는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신주를 모시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인 1869년(고종 6년), 신주는 누동궁으로 옮겨졌다.

19세기 이후, 헌종철종후사가 없었던 반면, 적장자를 얻은 고종은 이를 기뻐하며, 원자왕세자 책봉 및 가례를 위한 별궁을 조성하고자 했다. 이에, 1879년(고종 16년) 11월, 이곳을 왕실 직속 별궁으로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다. 고종은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왕실 의례를 행할 계획이었기에 별궁을 크게 지었다. 1881년(고종 18년), 공사가 완공되었으며, 안국방 소안동에 있어 '안국동 별궁'이라 불렸다. 일상적으로는 줄여서 '안동별궁'이라 했다.

1882년(고종 19년) 2월, 왕세자 이척(순종)세자빈 민씨(순명효황후)가례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순명효황후는 1904년(광무 8년), 사망했으며, 1906년(광무 10년), 황태자 이척은 새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와 두 번째 가례를 올렸다. 그때도 가례도감이 설치된 곳은 안동별궁이었다.
파일:475e36fed1027.jpg
<colbgcolor=#c00d45> 일제강점기 안동별궁 전경을 찍은 사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잠시 상궁들이 모여 살다가 1936년, 큰길에 면한 768평이 최창학[5]에게 15만원에 낙찰되었다.

1937년, 명성황후의 먼 친척이자 휘문의숙 설립자인 민영휘의 아내 안유풍이 당시 30만 환에 부지 4천여 평과 부속 건물을 매입했으며, 이곳에 경성휘문소학교를 세웠다. 7년 뒤, 증손자 민덕기가 폐교된 여학교의 학생들을 모아, 증조모의 이름 ‘풍’과 휘문의 ‘문’을 따서 풍문여학교로 개편했고, 8.15 광복 이후, 풍문여자중학교와 풍문여자고등학교로 분리했다. 1992년, 풍문여중은 폐교되었고#, 풍문여고는 그대로 유지되다가 2017년, 강남구 자곡로로 이전하면서 풍문고등학교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후, 서울시에서 부지를 매입해 공예박물관을 조성했다.

안동별궁의 일부 건물은 남아 있었으며, 1940년대, 사동궁을 매각한 의친왕 가족이 잠시 이곳에서 머물렀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은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풍문여중고는 원래 별궁 땅에다가 지은 학교여서, 그 학교와 내가 살고 있던 별궁 사이에는 담이 하나 막혀 있었을 뿐이었다.
이해경, 《나의 아버지 의친왕》, 도서출판 진, 1997.#
파일:근대 안동별궁건물.jpg
<colbgcolor=#c00d45> 일제강점기 학교 건물로 쓰일 당시의 안동별궁 현광루[6]

3. 건물들의 수난

파일:안국동별궁(풍문여고)copy.jpg
<colbgcolor=#c00d45> 풍문여고 내에 있던 안동별궁 건물
상술했듯, 몇몇 건물들은 풍문여고가 들어선 뒤에도, 한동안 대부분 제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학교의 부지 확보와 건물 신축을 위해 1965년 남아있던 정화당과 경연당, 그리고 현광루를 해체해 다른 곳으로 매각했다.
파일:정화당.jpg
<colbgcolor=#c00d45> 정화당
정화당은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으로 옮겨갔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요정 '선운각'으로 변했고,[7] 김성곤 쌍용그룹 회장이 별장으로 쓰기도 했다. 1975년 김성곤 사후 '쌍용중앙연수원'이 되었다가 1997년 동양화재로 매각돼 현재 메리츠화재 연수원으로 존속 중이다.
파일:11908-1-6831.gif
<colbgcolor=#c00d45> 한양컨트리클럽에 있을 당시 현광루와 경연당
현광루와 경연당은 풍문학원 이사장 민병도[8]의 개인 별장과 자신이 회장으로 있었던 골프장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한양컨트리클럽 신코스 18번 홀로 옮겨져 수영장 관련 건물로 사용되다가 2006년 무렵 존재가 확인되었고, 이후, 문화재청에서 매입 후 복원하여 현재는 충청남도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경내에 있다.
파일:정관루.jpg
<colbgcolor=#c00d45> 정관루
그리고 민병도가 설립한 또 다른 관광지 남이섬 유원지 동쪽 끝에 있는 '정관루'라는 목조 건물이 안동별궁의 건물 일부라는 설이 있다. 남이섬 유원지 측은 이 건물이 1965년 남이섬을 구매 할 무렵 서울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2006년 당시 강우현 남이섬 사장은 풍문여고에서 옮겨왔다는 얘기를 들었다했지만, 당시 공사에 참여한 한 목수포도청 건물을 옮겨와 지었다고 주장해 아직 확실하게 결론짓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나마 앞서 말한 건물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고종실록》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정상루(定祥樓)'의 경우 어디 있는지 모른다. 만약 남이섬 정관루가 만약 안동별궁 건물이 맞다면, 정상루가 옮겨와 정관루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 2017년 3월에 강남구 자곡로 152로 이전[2] 운현궁의 북서쪽, 경복궁창덕궁 사이에 위치.[3] 혜경궁 홍씨의 6대조.[4] 원래 연잉군이 원했으나, 숙종이 무시하고 연령군에게 주었다고 한다.(...)[5] 일제강점기 광산업으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된 친일부호. 김구 선생에게 경교장을 마련한 그 인물 맞다.[6] 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7]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의 애인 장정이가 마담으로 있었다는 곳.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그곳 맞다.[8] 민영휘손자. 민덕기의 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