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1:03:06

이해경

대한제국 고종의 손녀
이해경 | 李海瓊
파일:이해경.png
출생 <colbgcolor=#fff,#1f2023>1930년 5월 4일[1] ([age(1930-05-04)]세)
본관 전주(全州)
성명 이해경(李海瓊)
황실명 이공(李玜)[A]
아명 이길상(李吉相)
영어명 Hill Lee#
조부모 조부 고종 태황제, 조모 귀인 장씨
부모 아버지 의친왕, 어머니 김금덕
형제 이복남매: 이건, 이우, 이해진[3],
이해직[4], 이수길[5], 이곤, 이해청[6],
이경길[7], 이해룡, 이석,
이해선[8], 이해준[9]
이복자매: 이해완[10], 이해원[11], 이해춘[12],
이해숙[13], 이희자[14],
이해란[15], 이해련[16], 이창희[17]
학력 경기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음악학과
미국 텍사스 메리 하딘 베일러 여자대학교
음악학 석사#
경력 풍문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동양학도서관
한국학사서 및 도서관과장

1. 개요2. 생애3. 생모 김금덕4.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녀이자 의친왕의 5녀. 현재 살아있는 의친왕의 자녀 중 가장 연장자이다.[18]

황실 족보 상 이름은 이공(李玜)[A]이고, 아명은 이길상(李吉相)이다. 호적명 이해경(李海瓊)은 당시 일제에게 의친왕의 정식 자녀로 인정받지 못해[20] 어쩔 수 없이 7촌 재당숙 이기용[21]의 호적으로 들어갈 때 지은 법적 이름이다. 언니들도 이기용에게 입적했는데, 이해경만 1954년에 의친왕비의 호적에 정식으로 올라갔다.#
2022년 YTN의 이해경 인터뷰

2. 생애

3세 때 생모와 헤어져 사동궁에서 의친왕비의 양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36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계동궁 이기용의 양녀로 입적했다.

경기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49년에 이화여자대학교 음악과에 입학해 1953년에 졸업했다. 대학 시절 야간학반을 다니며#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약 보름간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6.25 전쟁 때에는 주한미8군사령부 도서관에서 일했다.# 휴전 후 1954년에 의친왕비의 호적에 정식으로 입적했다.

6.25 전쟁 중 서울이 수복된 뒤로 궁밖에서 생모와 살게 되었다. 이해경을 친딸처럼 여기던 의친왕비가 다시 같이 살자고 여러 번 권했고,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생모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바깥세상을 접한 뒤로 궁 생활을 갑갑하게 느끼게 되어 계속 궁 밖에서 살았다. 가끔 궁으로 문안인사를 가면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잘 안 보이는 증상을 겪기까지 했다고 하니, 자유로운 바깥 생활을 한 뒤로 궁 생활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느꼈는지 알 수 있다.

의친왕이 별세한 다음해인 195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때 미8군 사령부 도서관에서 일할 때 안면을 텄던 미군 병사 데이비드 스트리트 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텍사스 주에 있는 메리 하딘 베일러 여자 대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고 3년 뒤에 음악학 석사 학위를 취득, 졸업했다.# 이후 뉴욕으로 건너가 맨해튼 음악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등록금이 없어서 입학허가를 받았음에도 진학을 못했다. 그래서 백화점과 보육원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 무렵,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외국인이라도 미국 대학을 졸업하면 미국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법을 만들었고 이 때 영주권을 취득했다. 1969년에 컬럼비아 대학교 동양학 도서관에 새로 생긴 한국학 부서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서로 취직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1973년에 성악가로써 뉴욕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가졌고, 1985년에는 테너 이인선 추모음악회가 열리자 한국에 와서 공연했다.

1996년 6월에 도서관 과장으로 정년 퇴직했다.# 사서로 일하던 시절에 한국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아버지 의친왕의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많이 발굴했고 은퇴 이후 본격적으로 의친왕의 명예회복 운동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덕에 의친왕의 항일독립운동은 빛을 볼 수 있었다.
파일:나의 아버지 의친왕 출판기념회.png
<colbgcolor=#29176e> 1997년 6월 27일에 종묘에서 열린 《나의 아버지 의친왕》 출판기념회.
①이혜원 ②이일주 ③이석 ④이원 ⑤이해경 ⑥이구 ⑦이해원 ⑧이해춘 ⑨이석주 출처
퇴직한 그 해 11월에는 의친왕과 의친왕비의 묘를 홍유릉 근처에 합장해 모셨고, 이듬해 6월에는 사동궁의 역사를 담은 수기 《나의 아버지 의친왕》을 펴냈다.
<colbgcolor=#29176e>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환수한 2012년 8월 29일[22]에 공사관을 방문한 이해경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환수운동을 비롯해 혜문스님과 함께 도쿄국립박물관에 조선 왕실 투구와 갑옷을 환수하라는 서한을 보내는 등 잃어버린 문화유산 찾기 운동에 참여했고# 2017년 7월에는 자서전 겸 황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마지막 황실의 추억》을 펴냈다.[23] 같은 해 10월에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으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고종 즉위 재현 행사〉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서 개최한 황실복식전시 행사 〈대한제국, 복식에 깃든 위엄〉에 참석해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의친왕비가 물려준 황실 의복과 장식품을 경운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밖에도 언론인터뷰를 많이 하고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고문을 역임하는 등 황실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1년부터 지금까지 뉴욕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는 강연 및 한인노인합창지도 등 한인사회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2022년 YTN 인터뷰[24]

2022년 장조카이자 의친왕가의 종손 이준이 정년퇴직하자 사동궁 사손으로서 대한황실 후손들의 구심점이 되어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도록 제안했고, 대한황실 직계후손 (고종황제의 후손)들과 대한황실 종친 (운현궁, 계동궁, 맹현가, 대궁, 누동궁 출신 후손)들과 의친왕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함께 의친왕기념사업회를 설립하였다.
파일:의친왕기념사업회_창립총회.jpg
<colbgcolor=#29176e> 2022년 10월 21 의친왕기념사업회 창립총회. 대한제국 황실 직계후손들과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모여 설립한 대한제국 황실 종친단체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 창립총회 자리에서 이해경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사동궁 사손 이준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운현궁, 계동궁, 누동궁 후손들이 각각 사무총장, 추밀원장 등으로 추대되었다. 창립총히 자리에는 사동궁, 운현궁, 대궁, 계동궁, 맹현가 등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들과 김가진 대동단 총재의 손녀 김선현 회장, 우사 김규식 박사의 손녀 김수옥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등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 등 학계와 김영란 경운회 회장, 장경수 장욱진문화재단 이사장 등 문화예술계 등 다양한 인물들이 의친왕기념사업회 창립총회 및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전시 개막식에서 전시 개막을 선포하였다.
<colbgcolor=#29176e> 2022년 10월 21일~2023년 1월 20일까지 개최한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유물전시

2022년 10월 21일부터 2023년 1월 20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연세대학교 박물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숙명여대 박물관, 오륜대순교자박물관 등 11개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의친왕 관련 유물을 총망라하여 서울시 강남구 경운박물관에서 국내 최초 의친왕 전시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을 개최하였다.

3. 생모 김금덕

파일:이해경 김금덕.png
<colbgcolor=#29176e> 이해경(왼쪽)과 김금덕(오른쪽)
친어머니 김금덕(金今德)은 1909년 / 1910년 생으로#[25]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이며, 당시 보기 드문 신여성이자 여걸이었다.

경성보육학교를 나온 뒤 보험회사 직원으로 활동하던 중 의친왕을 알게 되었고, 이후 사동궁에서 보육교사로 일하다 이해경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의친왕과 마찰이 생겨 이해경이 3세 때 쫓겨났고[26] 이후 만주로 건너가 재혼해 자녀 2명을 낳았다고 한다.# 8.15 광복 이후에는 충청남도 대전시(現 대전광역시)에 정착했고 호텔 성남장과 〈동방신문사〉를 운영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무소속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김종열 후보 등에 밀려 전체 12명 중 11위로 낙선했다. 선거운동을 할 때 을 타면서 장터를 돌다가 동네 노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고. 그러나 "내가 지금 이렇게 해야 나중에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6.25 전쟁 초반에 있었던 성남장 사건의 주역이기도 하다. 전쟁 발발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에 서울특별시조선인민군에 함락당하자, 임시수도였던 대전시에 피난 온 정부 요인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중 300여 명이 김금덕이 운영하던 성남장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7월 1일에 경기도 평택군까지 조선인민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몇몇 고위 관료들이 몰래 전라북도 전주시까지 피난을 갔다가 이 소식이 오보임이 밝혀지자 다시 성남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부 관리들이 자기만 살자고 무책임하게 행동한 것에 김금덕이 분노해 투숙을 거부했고, 몇몇 자가용 타이어의 바람을 빼기도 했으며, 일본으로 피난가자는 사람에게는 욕을 해주었다. 이것이 성남장 사건이다. #

이후 300가마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고# 초대 여군부장 김현숙 대령과 대한민국 여군의 모태인 여자의용군을 창설했다.# 전후에는 삼화기업 사장을 지내는 등#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다가 1975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해경의 회고로는, 어머니를 13세 때 화신상회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3세 때 헤어졌으니 기억에 남아있는 만남은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김금덕이 "잘 있었냐"며 반갑게 손을 잡았는데 이해경은 "왜 나한테 반말을 하지?"란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의친왕비를 제외한 주변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존댓말을 했었고, 다른 의친왕의 자녀를 낳은 사람들도 친자식들에게 존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원래 왕실 법도상 왕ㆍ왕자들의 정실부인이 아닌 후궁측실들은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도 반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이 맞으나[27], 어차피 왕조도 망했겠다(…), 김금덕의 캐릭터도 워낙 신여성이었고, 왕실 건물 근처도 아닌 종로 시내에서 마주치는 거였으니 반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나중에는 생모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고 한다.#

4. 여담

  • 언론에서 자신을 '공주'나 '옹주'로 부르는 것을 매우 불편해한다. 저 호칭들은 군주의 딸을 일컫는 호칭이지만, 아버지 의친왕은 국왕이 아니었으므로 자신은 공주나 옹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호칭인 '선생'으로 불러주길 바란다고 한다.# 그리고 이해경은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황실에서 그 어떤 정식 작위를 받은 적도 없다. 더군다나 지금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시대이므로 이해경의 요청대로 그냥 '선생' 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설령 대한제국 황실이 존속했다고 하더라도, 친왕의 서녀이므로 '군주(郡主)'나 '현주(縣主)' 작위를 받았을 것이며 '공주'나 '옹주'로 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잘 모르는지, 아직도 '공주'라고 부르는 매체들이 많다.
  • 대한제국 황실 복원에 대해 비판적이다. 2012년에 3월에 글로벌웹진 〈뉴스로〉와의 인터뷰에서 "대한제국 황실 복원은 시대착오적이며,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되어야 한다" 라고 쓴소리를 했다.# 물론, 황실 역사와 문화 복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고 도리어 적극 지지한다. 하지만, 황실 복원이 목표가 아니라 한국 황실 관련 무형문화재 행사의 연장선일 뿐이다.
  • 2012년 3월에 언니 이해원을 비롯한 일족 16명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국가로 귀속된 양아버지 이기용의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낸 적이 있었다. 이기용은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 때문에 저 소송에 대해 이해경은 "조선총독부 기록을 근거로 재산권을 주장하면 안 된다. 이게 받아들여지면 진짜로 친일파 후손들이 다 재산을 찾겠다고 나설 것이다. 국민 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라며 비판했다. 참고로 위에 언급했듯, 이해경은 이기용의 양녀였다가 1954년에 의친왕비 호적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서류 정리가 잘 안된 모양인지 이기용의 후손들이 땅을 찾겠다며 이해경에게 포기 각서를 3번이나 받아갔다고 한다.”#
  • 할아버지 고종과 많이 닮았다. 유길준의 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처음 들은 말이 "어떻게 이렇게도 친탁을 했어요. 수염만 기르면 딱 광무황제(고종)이십니다"였다고 한다.#
  • 독신이다. 다만, 40대에 데이비드 사피로란 사람과 만나 그가 2009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40년 간 사귀었다고 한다.## 굳이 비혼을 고집한 건 아니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아버지로 인해 결혼에 회의적이었고, 데이비드 사피로 역시 아내의 외도로 이혼한 경험이 있어서 재혼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함께 하면서도 결혼하지는 않았다.
  • 정혼자가 있긴 했었다. 16세 때에 의친왕이 이해경 모르게 정혼자를 정했는데, 이를 알고서는 의친왕에게 직접 "부모님이 정한 이런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에는 생모 김금덕이 독립유공자 출신으로 시인이자 군인 출신인 이용상[28]을 이해경의 결혼 상대로 점찍었지만, 당사자들이 거부해서 성사되지 않았다.[29] 비록 이해경과 이용상은 부부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평생 친구로 지냈으며[30]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운현이 쓴 이 기사에 따르면 이용상은 이해경을 가리켜 '40여 년 전 99% 나와 결혼할 뻔 했다'라고 쓴 적이 있었다고 한다.
  • 6.25 전쟁 때 고생을 많이 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갔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이해경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대문시장에 가서 의친왕비가 자신의 혼수감으로 사모았던 비단을 팔았다. 그리고 얼마 후 시공관에서 열린 북한 음악인들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북한군에게 잡혔다. 북한군은 소위 인민공화국 경비대 협주단을 만든다며 관객들 중에 음악인을 골라 북한군복을 입히고 명동성당으로 끌고 갔는데, 거기에 이해경도 있었던 것.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후퇴할 때 협주단 단장이 "평양으로 갈 것이니 소지품을 챙겨 집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꼼짝없이 북으로 끌려갈 판에 마침 이해경의 얼굴에 큰 종기가 났고, 단장에게 "병원에 간다"는 이유를 대고 그 길로 도망쳤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후 부역자로 몰려 종로경찰서로 연행당했지만, '의친왕의 딸'이란 점 때문에 사흘 만에 풀려났다. 경찰서에서 나오면서 군복 차림에 지프차를 타고 있던 생모 김금덕을 만났고 "클래식 음악단을 조직해 (수복한) 평양에 가라"는 권유를 듣고 평양에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이 쳐들어와 음악회는 열리지 못했고, 음악단을 인솔해 간 대위가 "알아서 서울로 가라"(…)고 한 바람에 단원 1명과 함께 순안공항에서 겨우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 그러나 1.4 후퇴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만난 대학 친구들과 함께 마산 미 해병대로 위문공연을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부산에는 의친왕 일가가 좁은 방에 다같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머물 처지가 못 돼 이곳저곳을 돌며 생활하다가 생모가 그 사실을 알고 찾아와 대구에서 같이 생활했다. 대구에 있으면서 선배의 도움으로 미군PX에 취직했다가 곧 서울로 올라가 미8군 사령부 도서관에서 근무했고, 그곳에서 휴전을 맞았다.#
  • 사동궁 안에서는 호적명 '해경'보다 아명 '길상'으로 불린 듯 하다. 의친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의친왕은 이미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였다. 의친왕이 이해경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고, 옆에 있던 의친왕비가 다섯째 딸 해경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의친왕은 해경이가 누구냐고 화를 냈다. 이에 의친왕비가 길상이라고 이름을 바꿔 말하자 그제서야 의친왕은 부드럽게 "아, 길상이오"라 했다.# 그리고 그 대면이 아버지 의친왕과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형 김동한 가롤로 신부가 뉴욕에 방문했을 때, 모은 돈 50달러의친왕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의친왕비가 너무 좋아했고 그 돈으로 1963년 한국에 온 이방자를 만날 때 입을 한복을 지었다고 한다.#
  • 뉴욕한인교회에 다녔다. 1980년 어느 날에는 교회에 가다가 강도를 만난 위험한 일을 겪었고 한동안 교회 출석을 못했었다. 이를 안 장철우 목사가 2016년부터 교회에 모시고 같이 갔다고 한다.#

[1] 음력 4월 6일#[A] 순조와 같다.[3] 황실명 이방.[4] 황실명 이창.[5] 황실명 이주.[6] 황실명 이광.[7] 황실명 이현.[8] 황실명 이환.[9] 황실명 이정.[10] 황실명 이영.[11] 황실명 이진.[12] 황실명 이찬.[13] 황실명 이숙.[14] 황실명 이장.[15] 황실명 이용.[16] 황실명 이현.[17] 황실명 이민.[18] 아들 중에서는 10남 이석(1941 ~ )이 가장 연장자이다.[A] [20] 일제가 인정한 의친왕의 자녀는 이건이우 뿐이다. 그나마도 이우는 운현궁이준용 밑으로 입양갔기에 실질적으로 인정한 의친왕 자녀는 이건 1명뿐이었다.[21]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큰형 흥녕군 이창응의 손자로 남연군계의 종가(宗家) 계동궁 주인이었다. 참고로 친일반민족행위자(…)[22] 경술국치일이다.[23] 이해경 본인의 이야기가 많이 담기긴 했지만, 《나의 아버지 의친왕》과 겹치는 내용이 많다. 당시 87세였던 이해경이 얼마 안 남은 삶을 정리하고 싶기도 하고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 희귀본이 되는 등 의친왕에 대한 자료가 워낙 적은 탓에 다시 책을 낸 것이라고.[24] 92세의 나이에도 매우 정정한 모습으로 인터뷰하면서 네티즌들이 또다시 놀라는 반응이 대다수다.[25] 1950년 5월 13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당시 41세였다고 적혀있는데 연 나이인지, 세는 나이인지 확실하지 않다.[26] 의친왕이 일본으로 갔는데, 당시 시대상이나 궁궐법도로는 남자가 떠나있는 동안 여자는 조용히 집에서 기다려야 했다. 실제로 의친왕의 다른 후궁들은 각자 처소에서 기다렸는데, 당찬 성격의 김금덕은 직접 의친왕을 찾아나섰고 이 일로 의친왕에게 버림받게 되었다.[27] 안빈 이씨숙녕옹주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28] 이용상은 일제강점기 때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중국에서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에 입대하여 국방부 보도과장을 거쳐 육군대령으로 예편했다. 박정희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서 친분이 있었고, 박정희가 집권한 후 공보부 공보국장, 문공부 예술국장 등을 역임했다. 6.25 참전 및 독립운동 참가 경력으로 각각 충무무공훈장과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9] 이해경은 여성편력이 심한 아버지 의친왕에 대한 반감과, 자신을 길러준 의친왕비의 외로운 삶에 대한 연민 때문에, 결혼에 회의적이었다. 또한 이용상은 형과 형수가 결혼 2달 만에 연달아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에 당시는 결혼 생각이 없었다.(1954년에 다른 여성과 결혼했음.)[30] 궁에서 자라 바깥 세상을 잘 모르던 이해경을 시장으로, 맛집으로 데리고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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