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6:18

이해원(1919)

<colbgcolor=#29176e><colcolor=#ffffff> 대한제국 장조의 6대손[1]
이해원 | 李海瑗
파일:external/blog.joins.com/3(1).jpg
출생 1919년 2월 24일
경기도 경성부 관훈정 사동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96)
사망 2020년 2월 8일[2][3] (향년 100세)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미사강변요양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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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f> 본관 전주 이씨[4]
진(珍) → 해원(海瑗)
부모 아버지 의친왕
생모 수덕당 이희춘
형제자매 12남 9녀 중 2녀
배우자 이승규
자녀 3남 1녀
학력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아명 길운(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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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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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녀이자 대한제국의 황위요구자였던 인물. 의친왕의 차녀이며, 생모[5]는 수덕당 이희춘(壽德堂 李希春)이다.[6]

황실명은 이진(李珍), 아명은 이길운(李吉雲)으로, 이해원(李海瑗)이란 이름은 당시 일제에게 의친왕의 정식 자녀로 인정받지 못해[7] 어쩔 수 없이 7촌 재당숙 이기용[8][9][10]의 호적으로 들어갈 때 지은 법적 이름이다.

2. 생애

1919년 2월 24일에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사동궁에서 의친왕의 차녀로 출생했다. 종로소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운현궁에서 살았다. 1936년 경기여자고등학교졸업하고, 그 해 충청도 온양 삼천석꾼 용인 이씨 가문의 장손이었던 이승규(李昇圭)와 결혼했다. 전통적으로 황녀들만 입을 수 있는 고급 옷을 입고 순종 황제 소유의 다임러 세단을 웨딩카로 이용할 정도로 화려한 결혼식을 치렀다고 한다. 결혼생활 중에는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거주하였으며, 해방 후 귀국하였다.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해방 후 경기도청과 인천세관에서 근무하였던 남편은 한국 전쟁납북당했다. 이후 창경원에서 표 파는 일 정도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며 그나마 남편 가문과 합의를 봐서 얻은 약간의 땅을 조금씩 팔아가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그 외에도 지인들에게 구호 밀가루를 받는 등 여러 도움을 받고 살았다.[11]

199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2002년 귀국하여 경기도 하남시 단칸방에서 차남 이진왕[12]과 살았다. 당시 서울 연희동의 땅 17만평을 되찾기 위해 소송 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토지를 되찾으려는 오랜 기간의 노력으로 인해 아들들이 오랫동안 제대로 경제 활동을 못 하는 결과가 생겼다. 일단 승소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바람에 넘어간[13] 아들들이 소송이나 민원에만 매달리며 세월을 보냈고, 딸이 가장 역할을 하며 어머니와 오빠들을 부양했다. 그런 딸이 사망하며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다. 장남 이진휴는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택시 기사를 하고 있으며, 차남 이진왕은 공사판을 전전했고, 3남 이진홍 역시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진주는 미혼으로 강릉시에서 살다 사망했다.

파일:이해원 참칭 대한제국 여황제.jpg

2006년 9월 29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정체 불명의 대한제국황족회[14]라는 단체가 제30대 대한제국 여제옹립했지만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 문서
번 문단을
이해원 옹립 사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012년과 2017년에 걸쳐 땅을 되찾기 위해 건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2012년은 양아버지 이기용경기도 하남시 땅 1만 2,700m²가 부당하게 정부로 넘어갔다며 소송을 건 것이고 2017년은 남편 소유였던 서울 연희동 임야 1만여 m², 개별 공시지가 30억 원에 이르는 땅이 1948년 위조된 계약서에 의해 전직 법조인 김모 씨에게 소유권이 불법으로 넘어가 이를 찾겠다는 소송이었다.

말년에는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도시에 있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차남과 거주했다. 101세 생일이 16일 앞이던 2020년 2월 8일, 자택 근처에 있던 노인요양병원에서 숨졌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인해 자녀들이 한국에 못오는 상태가 되는 바람에 친정조카이자 의친왕가의 종손인 이준이 상주로 장례를 치러줬다.

3. 관련 문서



[1] 실제로는 대한제국 의친왕의 차녀이다. 일제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재당숙 이기용의 양녀로 입적하였기에, 호적상으론 이기용 일가의 마지막 군주(추존 군주 포함)였던 장조(사도세자)의 후손이 된다.[2] 101세 생일을 16일 남기고 사망했다.[3] 태조 이성계의 직계 후손들중 가장 장수했다.[4] 연령군파 7대손, 시조 43세손 해○(海○) 항렬.[5] 의친왕의 정실 김덕수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의친왕은 여러 들에게서 많은 자녀를 낳았다.[6] 대한제국이 존속했다면, 친왕의 서녀이므로 '향주(鄕主)' 작위를 받았을 것이다.[7] 일제가 인정한 의친왕의 자녀는 이건이우 뿐이다. 그나마도 이우는 운현궁이준용 밑으로 입양갔기에 실질적으로 인정한 의친왕 자녀는 이건 1명뿐이었다.[8]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큰형 흥녕군 이창응의 손자로 남연군계의 종가(宗家) 계동궁 주인이었다.[9] 이해원 뿐 아닌, 호적 상 인정받지 못한 다른 의친왕의 자녀들도 이기용의 호적으로 들어갔다. 일단 호적이 있어야 학교를 가든 할 테니. 단, 의친왕비 김씨의 호적으로 들어간 5녀 이해경과 일제 말에 태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해방을 맞이했던 9남(이갑 : 황사손 이원의 생부), 10남(이석), 11남, 6녀, 7녀, 그리고 해방 이후에 태어난 12남, 8녀, 9녀는 이기용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았다.[10] 예외로 6남 이곤과 8남 이현은 일제 초기에 태어났음에도 이기용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았다. 6남 이곤의 경우, 비록 의친왕의 가계와 직위를 장남 이건이 이었다지만, 이건을 탐탁지 않게 여긴 의친왕이 차선으로 이곤을 생각했기에 양자로 보내지지 않았다. (이건은 결국 2차 대전 이후 일본에 귀화해서 남은 생애를 일본인으로 살다 죽었다.) 차남 이우부터 5남 이광까지는 전부 다른 왕족들의 양자로 갔기 때문. 8남 이현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96년 요양원에서 사망.[11] 이해원 말고도 의친왕의 다른 딸들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이들은 여학교를 졸업한 어린 나이에 집안에서 맺어준 부유층 자제들과 혼인해서 8.15 해방과 6.25 전쟁 이전까지는 생활고 걱정 없이 안온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왕족이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세상 물정에 어두워 해방과 전쟁으로 세상이 급변할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대부분 몰락하여 극빈층으로 전락하거나 외국으로 흩어졌다. 의친왕의 5녀이자 이해원의 이복여동생인 이해경은 혼인을 거부하고 본인 스스로 삶을 개척했는데, 이는 의친왕의 자녀 중 예외적인 경우였다.[12] 2019년 12월, 74세의 나이로 별세[13] 법무사이든 변호사이든 이씨 집안에게 허파에 바람 솔솔 불어넣으면서 소송을 부추긴 것이다. 사실 이들은 장기적으로 계속 이해원의 소송대리를 해주면서 수수료를 챙겨먹을 수 있지만, 당사자인 이해원이 어떻게 되든 간에 법적인 책임이 없다.[14] 사족으로, 이 단체의 총리대신을 자칭하던 사람이 바로 2012년에 폐교된 대학교인 선교청대학교의 이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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