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의 후궁 귀인 장씨에 대한 내용은 귀인 장씨(인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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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 | 貴人 張氏 | |||
<colbgcolor=#403F95><colcolor=#ffd400> 조선 고종의 후궁 | |||
출생 | 1838년 10월 12일[1] | ||
사망 | 1887년 10월 14일[2] (향년 49세) | ||
능묘 | 귀인장씨묘(貴人張氏墓) | ||
재위기간 | 조선 궁인 | ||
1877년 이전 ~ 1887년 10월 1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403F95><colcolor=#ffd400> 본관 | 덕수 장씨 | |
부모 | 부친 장좌근 모친 전주 이씨 | ||
배우자 | 고종 태황제 | ||
자녀 | 슬하 1남 장남 - 의친왕(義親王, 1877 ~ 1955) | ||
봉작 | 궁인(宮人) → 숙원(淑媛) → 귀인(貴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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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대한제국 고종의 승은후궁. 본래 궁녀 출신이었으며, 천민 출신이라는 설도 있고,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덕수장씨족보(德水張氏族譜)》(1974년 발행, 549-550쪽)에는 덕수 장씨 유정공파(柳亭公派) 17세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계곡 장유의 5대손인 장석정(張錫鼎)과 밀양 박씨 박치덕(朴致德)의 딸 사이의 8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장석정의 생몰년대가 1736년(영조 12년)~1795년(정조 19년)이라 귀인 장씨의 활동연대와 전혀 맞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다.[3]고종보다 14살 연상으로, 만 38세의 나이에 의친왕을 낳았다. 황현 《매천야록》에 따르면 고종의 승은을 입어 의친왕을 낳은 뒤, 중전 명성황후의 질투를 받아 참혹하게 내쫓겼다고 한다.
다만, 현재 살아있는 고종의 후손은 모두 의친왕의 후손이므로 고종의 부인들 중 유일하게 후손이 남아있어서 지금 의친왕의 직계 후손은 전부 귀인 장씨의 후손들이다.
2. 생애
1900년(광무 4년)에야 비로소 숙원(淑媛)으로 추증되었다. 죽은 지 13년이 지나서야 겨우 말단인 종4품 숙원이 된 걸 생각하면 상당히 늦은 셈이라고 볼 수 있다.궁인 장씨에게 숙원 칭호를 주게 하다
궁인(宮人) 장씨(張氏)에게 숙원(淑媛) 칭호를 줄 것을 명하였다.
【의친왕(義親王)의 사친(私親)이다.】
-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9월 17일 (양력) 2번째기사
궁인(宮人) 장씨(張氏)에게 숙원(淑媛) 칭호를 줄 것을 명하였다.
【의친왕(義親王)의 사친(私親)이다.】
-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9월 17일 (양력) 2번째기사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서는 상궁 장씨가 의화군을 낳았는데, 명성황후가 화가 나서 문지방에 칼을 꽂으며 "칼을 받으라"고 하였다. 장씨가 힘이 세어 한 손으로는 칼을 잡고 한 손으로는 문을 열고 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해 목숨만은 건졌다고 한다. 그러나 질투가 엄청 심한 명성황후가 곱게 살려주지 않았고, 생식기 양쪽의 살을 도려낸 다음 궁 밖으로 쫓아냈기 때문에 10년을 고생하다가 죽었다고 썼다.
이 일화는 당시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는 확인할 수 없으며, 애초에 《매천야록》 자체가 야담 모음집이기 때문에 신뢰성에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왕직에서 작성한 공식 문서에도 장씨의 사망년도가 1887년(고종 24년)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장씨가 의친왕을 낳은 직후 쫓겨나 10년 뒤에 죽었다는 《매천야록》의 기록과도 서로 일치한다.
1906년(광무 10년)에 종1품 귀인(貴人)으로 추증되어 이후 귀인 장씨로 불렸다.[4]
소의 이씨, 숙원 이씨와 장씨를 귀인으로 봉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소의(昭儀) 이씨(李氏), 숙원(淑媛) 이씨(李氏),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귀인(貴人)에 봉작(封爵)하라."
하였다.
- 《고종실록》 47권, 고종 43년(1906년, 대한 광무(光武) 10년) 5월 27일 (양력) 1번째기사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소의(昭儀) 이씨(李氏), 숙원(淑媛) 이씨(李氏),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귀인(貴人)에 봉작(封爵)하라."
하였다.
- 《고종실록》 47권, 고종 43년(1906년, 대한 광무(光武) 10년) 5월 27일 (양력) 1번째기사
3. 가족 관계
3.1. 친가(덕수 장씨)
- 조부 : 장은(張溵)
- 아버지 : 장좌근(張左根)
- 어머니 : 부인 이씨(夫人 李氏)
3.2. 외가(전주 이씨)
- 외조부 : 이복응(李復應)[5]
- 외조모 : 이름 미상
3.3. 시집(전주 이씨)
3.3.1. 배우자 / 자녀
- 남편 : 고종 광무 태황제(高宗 光武 太皇帝) 이명복/이재황/이형/이희(李命福/李載晃/李㷗/李熙)
- 아들 : 의친왕(義親王) 이평길/이강(李平吉/李堈)
- 며느리 : 의친왕비 김씨(義親王妃 金氏)
- 서며느리 : 수관당 정씨(修觀堂 鄭氏)
- 1손 : 황손(皇孫) 이용길/이건(李勇吉/李鍵)
- 손자며느리 : 마쓰다이라 요시코(松平佳子)
- 증손자 : 이기/마에다 킨야(李基/前田欣也)
- 증손녀 : 이옥자/모모야마 아키코(李玉子/桃山明子)
- 손자며느리 : 마에다 요시코(前田美子)
- 증손자 : 모모야마 고야(桃山孝哉)
- 서며느리 : 수인당 김씨(修仁堂 金氏)
- 2손 : 황손(皇孫) 이성길/이우(李成吉/李鍝)[6]
- 5손 : 황손(皇孫) 이수길/이주(李壽吉/李鑄)
- 손자며느리 : 치에코(千枝子)
- 증손녀 : 이순주(李淳柱)
- 증손녀 : 이영주(李泠柱)
- 증손자 : 이한주(李漢柱)
- 고손자 : 이덕
- 증손자 : 이범주(李范柱)
- 손자며느리 : 김신덕(金信德)
- 증손자 : 이호(李鎬)
- 고손자 : 이광
- 고손녀 : 이환
- 6손 : 황손(皇孫) 이명길/이곤(李明吉/李錕)
- 손자며느리 : 황경생(黃慶生)
- 증손녀 : 이양
- 증손녀 : 이기
- 증손녀 : 이제
- 증손자 : 이수(李洙)
- 증손자 : 이준(李浚)
- 고손자 : 이범
- 고손자 : 이백
- 서며느리 : 수현당 정씨(修賢堂 鄭氏)
- 3손 : 황손(皇孫) 이흥길/이방(李興吉/李鎊)
- 서며느리 : 후실 조병숙(後室 曺秉淑)
- 4손 : 황손(皇孫) 이창길/이창(李昌吉/李鎗)
- 서며느리 : 수덕당 이씨(修德堂 李氏)
- 1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길순/이영(李吉順/李鈴)
- 2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길운/이진(李吉雲/李珍)
- 손녀사위 : 이승규(李昇圭)
- 외증손자 : 이진휴(李鎭烋)
- 외증손자 : 이진왕(李鎭旺)
- 외증손녀 : 이진주(李鎭珠)
- 외증손자 : 이진홍(李鎭弘)
- 서며느리 : 수완당 김씨(修完堂 金氏)
- 3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길연/이찬(李吉淵/李璨)
- 서며느리 : 수길당 박씨(修吉堂 朴氏)
- 4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길영/이숙(李吉英/李琡)
- 서며느리 : 후실 송씨(後室 宋氏)
- 7손 : 황손(皇孫) 이형길/이황(李亨吉/李鎤)
- 서며느리 : 수경당 김씨(修慶堂 金氏)
- 8손 : 황손(皇孫) 이경길/이현(李慶吉/李鉉)
- 서며느리 : 후실 김금덕(後室 金今德)
- 5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길상/이공(李吉相/李玜)
- 서며느리 : 후실 함씨(後室 咸氏), 함개봉(咸開鳳)
- 9손 : 황손(皇孫) 이충길/이갑(李忠吉/李鉀)
- 손자며느리 : 이경숙(李慶淑)
- 증손자 : 황사손(皇嗣孫) 이상협/이원(李相協/李源)
- 고손자 : 이영
- 고손자 : 이권
- 증손자 : 황손(皇孫) 이상우/이정(李相寓/李淨)
- 증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은영(李銀永)
- 서며느리 : 후실 김혜수(後室 金蕙洙)
- 6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희자/이장(李喜子/李璋)
- 11손 : 황손(皇孫) 이문길/이환(李文吉/李鐶)
- 증손자 : 이성준
- 9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창희/이민(李昌熙/李珉)
- 서며느리 : 후실 홍정순(後室 洪貞順)
- 10손 : 황손(皇孫) 이영길/이석(李永吉/李錫)
- 손자며느리 : 독고정희(獨孤正熙)
- 증손녀 : 이홍(李泓)
- 손자며느리 : 손희영(孫喜英)
- 증손녀 : 이진(李瑨)
- 증손자 : 이종훈(李種勳)
- 7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숙기/이용(李淑基/李瑢)
- 12손 : 황손(皇孫) 이정길/이정(李貞吉/李鉦)
- 8손녀 : 황손녀(皇孫女) 이숙향/이현(李淑香/李玹)
4. 대중 매체
- 이재은 - 2001년 ~ 2002년 KBS2 드라마 《명성황후》
《명성황후》의 귀인 장씨
작중에서 명성황후(이미연 분)에게 발탁되어 중궁전 궁녀가 되는 것으로 나온다. 사실 명성황후는 세자를 제외하고 계속해서 임신과 출산에 실패하자 고종(이진우 분)의 후사를 늘리기 위해 '장 나인'을 후궁으로 만들 생각이었다.[7]
원래 당돌한 성격이긴 했지만, 고종의 승은을 입고 상궁이 되자 180도 돌변한다. 명성황후 앞에서는 병약한 세자를 걱정하는 척 비웃고, 고종 앞에서는 여우처럼 내숭을 떠는 앙큼한 후궁 연기를 선보인다. 심지어 명성황후가 임신했을 때는 몰래 명성황후의 속옷을 훔쳐 저주를 걸었고, 유산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기껏 낳은 아들 의화군(김종호 분)을 명성황후에게 빼앗기고 임오군란 이후 작중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퇴장. 드라마 후반부에 성장한 의화군(강성민 분)과 함께 궁궐로 복귀하는데, 젊은 시절을 반성하고 명성황후(최명길 분)와 화해한다.명성황후는 흰머리도 없는데 장 상궁만 흰머리 가득한 늙은 모습으로 재등장한다고종(이진우 분)이 애틋하게 여겨 귀인 첩지를 내려주려고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옛날의 그 '장 상궁'이라며 아예 떠나버린다.
5. 참고 문서
[1] 출처[2] 출처[3] 오히려 장석정의 손자 장용근(張瑢根)·장재근(張宰根)·장필근(張泌根)·장좌근(張左根) 등 4명 중의 한 명의 딸로 기재되어야 생몰년대가 얼추 맞는다.[4] 다만 이 때 장씨에게 증직된 귀인 작위는 황제국 후궁으로서의 귀인으로, 제후국 조선의 종1품 귀인보다는 격이 낮다고 보아야 한다. 경빈 박씨도 원래는 왕의 후궁으로서 종1품 귀인에 추증되었다가, 장조 의황제가 황제로 다시 추숭되면서 황제의 후궁으로서 빈으로 재추증된 것이다.# 이 때의 실록 기사를 보면 기존의 제후국 조선의 귀인 작위와 대한제국의 귀인 작위를 다른 급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출신하고 생년월일은 미상이지만, 조선 왕족의 후손이다. 하지만, 그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다. 족보상으로, 이복응은 선조의 서9남 경창군의 적3남 평운군 이구의 8대손이다. 그러나 평운군의 적손이 없어서 양원군(성종의 서14남)의 5대손인 이유석의 3남인 함릉군 이직을 입양했다. 다만 함릉군은 실제로 성종의 서7남 경명군의 6대손이고, 양원군파로 입계한 것이다. 결론은, 이복응은 생물학적으로 경명군의 12대손이고, 그의 외손녀 귀인 장씨과 마찬가지로 경명군이 의친왕의 직계 후손들의 조상이다.[6]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으로부터 귀인 장씨의 실질적인 장손집안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왜 그런지는 모모야마 켄이치 참고.[7] 작중에서 명성황후는 몰래 서양 의사를 불러 진찰을 받았고, 세자가 건강하지 않은 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고종의 현존하는 후손들이 죄다 그녀의 후손들이기도 하다. 큰아들인 이상협을 영친왕계로 출계시킨 이해룡도 그녀의 친손자다. 참고로 그녀의 제사는 이곤의 외아들인 이준 일가가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