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6 11:07:09

영응대군

영응대군 이염 李琰(1434년 5월 23일/음력 4월 15일 ~ 1467년 2월 2일)

세종소헌왕후의 8남 2녀 중 막내로,[1] 1441년 영흥대군(永興大君)으로 봉해졌으며, 1443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1447년에 다시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영응대군은 세종대왕이 37세, 소헌왕후가 38세 때 낳은 늦둥이였는데, 세종은 막내 아들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실록에도 대놓고 세종이 영응대군을 편애했다는 기록이나# # 영응대군의 집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비판하는 기록# 등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영응대군의 묘지문에 따르면 다른 왕자들과 달리 영응대군만 세종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응대군은 대마도 정벌 때 공을 세운 이순몽의 집으로 피접(避接)을 자주 나갔는데 이순몽 역시 영응대군을 지극히 사랑했다고 한다. 세종의 사랑은 이순몽에게까지 미쳐 주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순몽을 고관대작으로 삼기도 했다. 세종이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한 뒤 뒤를 이은 문종세조도 막내동생을 지극히 사랑해 내탕고의 진귀한 보물을 영응대군에게 내려주었다.# 하지만 영응대군은 천성이 검소해 재산을 잘 쓰지 않고 사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응대군의 혼인 과정은 조금 특이한데, 세종은 송복원(宋復元)의 딸[2]과 영응대군을 혼인시켰다. 그러나 송씨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송씨와 이혼시키고 정충경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문제는 정씨가 아버지 정충경을 이미 잃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홀어머니 슬하의 자식을 혼인대상으로 고려하지 않는 당시 왕실 관행으로서는 왕자의 정실부인이 될 수는 없는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종은 영응대군을 강제로 이혼시키면서까지 정씨와의 혼인을 강요하였다. 결국 세종은 영응대군을 재혼시킨 후 말년에 영응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나갔다가 그곳에서 승하한다.

그러나 영응대군은 첫 부인인 송씨를 사랑하였는지, 세종이 승하하자 다시 송씨와 만나기 시작했다. 이 때 도움을 준 인물이 영응대군의 둘째 형인 수양대군이었는데, 수양대군은 동생을 딱하게 여겼는지 아니면 영응대군이 부인 정씨와의 관계상 단종의 지지세력이 될까봐 염려하였는지[3] 영응대군이 송씨와 만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결국 영응대군은 송씨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아 정씨와 이혼하고 송씨와 다시 재결합할 수 있었다.

영응대군은 이후로는 크게 정치에 관여하는 일 없이 세조의 비호를 받으며 무탈하게 살다가 자택에서 33세로 사망한다. 경기도 시흥에 묘가 있다.


[1] 세종에게는 15남(19째), 소헌왕후에게는 8남(10째)[2] 오빠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다. 즉, 정순왕후의 고모인 것.[3] 정씨는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시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