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13 13:28:17

영응대군

영응대군 이염 李琰(1434년 5월 23일/음력 4월 15일 ~ 1467년 2월 2일)

세종소헌왕후의 8남 2녀 중 막내로,[1] 1441년 영흥대군(永興大君)으로 봉해졌으며, 1443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1447년에 다시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영응대군은 세종대왕이 37세, 소헌왕후가 38세 때 낳은 늦둥이였는데, 세종은 막내 아들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실록에도 대놓고 세종이 영응대군을 편애했다는 기록이나# # 영응대군의 집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비판하는 기록# 등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영응대군의 묘지문에 따르면 다른 왕자들과 달리 영응대군만 세종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2] 영응대군은 대마도 정벌 때 공을 세운 이순몽의 집으로 피접(避接, 아픈 사람이 다른 곳으로 옮겨서 요양함)을 자주 나갔는데 이순몽 역시 영응대군을 지극히 사랑했다고 한다. 세종의 사랑은 이순몽에게까지 미쳐 주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순몽을 고관대작으로 삼기도 했다. 세종이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한 뒤 뒤를 이은 문종세조도 막내동생을 지극히 사랑해 내탕고의 진귀한 보물을 영응대군에게 내려주었다.# 하지만 영응대군은 천성이 검소해 재산을 잘 쓰지 않고 사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응대군의 혼인 과정은 조금 특이한데, 세종은 송복원(宋復元)의 딸[3]과 영응대군을 혼인시켰다. 그러나 송씨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송씨와 이혼시키고 정충경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문제는 정씨가 아버지 정충경을 이미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여읜 자식을 혼인대상에서 배제하는 당시 왕실 관행으로서는[4] 왕자의 아내가 될 수는 없는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종은 영응대군을 강제로 이혼시키면서까지 정씨와의 혼인을 강요하였다. 결국 세종은 영응대군을 재혼시킨 후 말년에 영응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나갔다가 그곳에서 승하한다.

그러나 영응대군은 첫 부인인 송씨를 사랑하였는지, 세종이 승하하자 다시 송씨와 만나기 시작했다. 이 때 도움을 준 인물이 영응대군의 둘째 형인 수양대군이었는데, 수양대군은 동생을 딱하게 여겼는지 아니면 영응대군이 부인 정씨와의 관계상 단종의 지지세력이 될까봐 염려하였는지[5] 영응대군이 송씨와 만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결국 영응대군은 송씨와의 사이에서 아이(딸)가 태어나면서 정씨와 이혼하고 송씨와 다시 재결합할 수 있었다.[6]

영응대군은 이후로는 크게 정치에 관여하는 일 없이 세조의 비호를 받으며 무탈하게 살다가 33살 때 자택에서 사망한다. 경기도 시흥시에 묘가 있다.

영응대군의 맏사위가 된 구수영은 연산군의 장녀 휘신공주를 며느리로 맞는 등 연산군 치하에서 아부하며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구수영은 사돈 연산군을 배신하고 반정에 가담했으며, 며느리 휘신공주도 쫓아낸다. 훗날 휘신공주는 작은아버지 중종의 도움으로 남편 구문경과 재결합하지만, 공주 신분을 되찾지는 못하고 '구문경의 처'로만 불린다.


[1] 세종에게는 15남(19째), 소헌왕후에게는 8남(10째)[2] 본래 왕의 자식들은 왕인 아버지나 왕비인 어머니한테 아바(어마)마마, 전하, 폐하라는 호칭을 써야 했다.[3] 오빠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의 아버지 송현수다. 즉, 정순왕후의 고모인 것.[4] 이 관행은 조선 중기 이후로는 거의 잊혀지는데,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음에도 왕비로 간택된 명성황후가 대표적인 예다.[5] 정씨는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시누이였다.[6] 이 때문인지 몰라도 수양대군이 장조카 단종을 핍박할 때에는 눈감고 모른 체 하였다. 심지어 자기 사랑해서 다시 결합한 아내 송씨의 조카가 장조카며느리가 되었음에도 외면했다.